5년 전과 후의 현재, 장소의 기억들

<슈퍼 해피 포에버>(2024, 이라가시 코헤이)

by 않인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사노는 친구 미야타와 바닷가 호텔에 묵고 있다. 아내 나기와 처음 만난 5년 전, 나기가 썼던 방에서. 사노는 그때 나기가 잃어버린 빨간 모자를 찾아 헤맨다. 잡지 담당자가 전화로 아내의 사진 작업물에 관해 묻자 답은 않고 휴대전화를 바다에 던진다. 이쯤에서 사노가 통과하고 있는 상실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가 ‘나기가 죽었다’는 정보의 전달을 지연하는 까닭은 쇼크를 위해서는 아니다. 모자를 찾던 중, 미야타의 것과 같은 반지를 낀 두 사람이 다가온다. 카페에서 대화하는 이들을 촬영한 원 숏에서, 제목의 출처와 나기의 죽음이 거리를 두고 차례로 언급된다. “슈퍼 해피 포에버”는 사노를 제외한 세 사람이 참여하는 세미나 이름으로 밝혀진다. 사노는 그것을 듣고 웃는다. 그러니까 <슈퍼 해피 포에버>는, 문자그대로의 ‘슈퍼 해피 포에버’가 넌센스임을 일찌감치 드러낸다. 그렇다고 삶의 수행적 태도에 가까운 이 워딩을 조롱하기 위해 전시하지도 않는다. 이를테면 영화는 미야타를 존중한다. 응급실 간호사로 일하는 그는 아내를 잃은 친구에게 그다지 섬세하지 못한 통찰을 늘어놓는 것처럼 -“꼭 사이비처럼”(사노)- 보이기도 하지만, 5년 전 사노로부터 전사를 들은 후에는 그가 조금 달리 보일 수도 있다. 미야타에게 있어 반지는 타인이 짐작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 물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인물들에 관해 알려지는 바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 호텔에 머물 때에만, 누군가 입을 열어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에만 이들의 일부가 발견된다.

<슈퍼 해피 포에버>는 아내를 잃은 남자에게서 출발하지만 아내를 잃은 남자에 관한 영화인 것만은 아니다. 미야타가 떠나고 사노는 복도에서 안이 방을 청소하며 흥얼거리는 노래를 듣는다. 담뱃갑을 문틈에 끼워두고, 좁은 틈으로 흘러들어오는 멜로디에 귀기울인다. 영화가 예상 경로를 벗어나는 첫 번째 순간은 이때다. 패닝과 함께 5년 전으로 이동해서가 아니라, 5년 전의 장면들이 사노를 중심으로 흐르지 않아서다. 영화는 당시를 다루며 이 방, 819호에 묵었던 나기를 따라간다. 이 시점의 이야기는 회상이라기보단 계속해서 축적되고 있는 2018년 현재의 기억이다. 나기의 시간을 다루지만 딱히 나기의 관점을 취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나기가 보고 있는 것을 보기보단, 카메라로 찰나를 포착하는 나기 자체를 바라본다. 풍경에 점처럼 찍혀 있는 나기를, 점이 움직이는 궤적을 응시한다. 사노로부터 선물받은 빨간 모자는 어느새 보이지 않고, 나기는 모자가 머리에서 떠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사노의 기억도 나기의 기억도 아닌 이 장면들은 누구의 기억보단 ‘어디’의 기억에 가깝다. 영화는 특정한 곡을 매개로 스민 기억들을 반복해 재생하는 레코드판과도 같은, 시간을 이탈한 공간의 마법을 긍정하고자 하는 것일까.

허나 <슈퍼 해피 포에버>는 그런 영화는 아니다. 2023년, 호텔의 운영은 곧 종료될 것이다. 2018년도 안전한 시공간은 아니다. 카메라가 잠든 나기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는 숏에서 나는 ‘나기가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날’에 관해 말하며 미야타에게 ‘등을 돌리지 말라’고 부탁하던 5년 후의 만취한 사노를 겹쳐 떠올리며 문득 섬짓함을 느꼈다. 사노와 나기가 잃어버린 모자를 찾고 있을 무렵 영화는 다시 2023년으로 회전 이동해 문에 끼워둔 담뱃갑을 조명한다. 그러나 사노가 있는 방 안에서가 아닌 방 밖에서다. 영화가 예상 경로를 벗어나는 두 번째 순간이다. 이는 과거 나기의 시간에서 현재 사노의 시간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2018년 현재에서 2023년의 현재로 이동하는 제스처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노래하는 목소리의 주인, 호텔 직원 안의 마지막 근무를 따라간다. 안은 방 정리를 마친 후 직원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 아마도 폐기할 침구를 정리해 두고 휴게실로 향한다. 그와 이주노동자 동료들은 근무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 일하는 어떤 친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안은 사물함에서 모자를 꺼내 쓴다. 나기가 찾으면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던, 그리고 써도 된다고 허락했던 빨간 모자다. 모자의 주인은 죽었고, 주인이 없는 모자는 안이 가지고 있다. 안은 홀로 자전거를 타고 도로를 달린다. 해변으로 향해 파도를 바라보고는 자리를 뜬다. 영화는 여기서도 역시 안의 시점숏을 택하는 대신 풍경에 얹힌 안의 뒷모습을 본다. 장소가 세상을 떠난 이의 장면들을 담고 있다면, 곧 떠나게 될 장소의 장면은 거기 포함되었다가 이내 분리되는 인간의 뒷모습이 담는다. 실은 그 구제 옷가게의 상품이었는지조차 불분명한, 보이지 않지만 사라진 것도 아닌 채로 쭉 그곳에 있던 빨간 모자는, 다시 행방이 묘연해지리라.



keyword
않인 영화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136
매거진의 이전글<드림스>에 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