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vetown, <Running with Scissors>(2026)
케이브타운의 음악은 청자에게 무해한 장소를 제공한다. 그 장소는 ‘순수’를 동경하며 표백된 멸균실은 아니다. 죽음을 비롯한 온갖 주제의 대화와 고백이 소란스럽고 부드럽게 오가는 세이프스페이스에 가깝다. 그의 음악은 흙으로 이루어진 아지트를 짓고, 침실 안에서 땅 밑의 존재들과 공명한다. 남들보다 이르게 미성년을 종료한,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계속해서 미성년을 연장하는 누군가들에게 닿는다. ‘으레 그러한 성년의 상’에 의문을 갖는, 이들이 보다 민감하게 발견하는 유예의 틈새는 미성숙의 영역이 아니다. 이곳과 저곳의 사이, 이것 또는 저것으로 단정할 수 없는 은유적 공간을 로빈 스키너는 안다. 논바이너리 아이콘인 그(he/they)의 정체성이 창작물에 담겨 있다는 점을 물론 언급해야겠지만, 이 느낌은 어떤 인과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섬세하게 넓혀 온 음악 세계를 부유하다 보면 경계들이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 든다.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은 무의미해지고, 거의 투명했던 것들은 선명해진다. 원하면 언제든 다시 땅 밑으로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다.
1998년생인 로빈 스키너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케이브타운이라는 이름으로 음악을 만들고 공연해 왔다. 올해 초 공개된 <Running with Scissors>는 그의 여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데, 이 다작하는 송라이터의 디스코그래피를 살피면 믹스테잎, EP, 콜라보 앨범이 여럿 보이므로 ‘n번째 앨범’이라고 적는 편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드리미-포크-베드룸 팝을 기반에 두고 지속적으로 음악적 영토를 확장한 케이브타운, <Running with Scissors>는 그의 전작들과 뿌리를 공유하며 가지를 달리 뻗는다.
먼저 근 몇 년 사이 레코드에 종종 비쳤던 로맨스가 앨범의 ‘다른’ 결을 따라 보다 선명하게 그리고 전면에서 전해진다. 친밀하고 특별한 관계가 ‘다름’에 영향을 미쳤으리란 짐작도 든다. ‘NPC’의 “you’re the prism that I’m passing through”나 ‘Tarmac’의 “I’ll lay down with my girl till I crash from the sugar”와 같이, 러브송으로 분류되지 않을 곡들에도 그 흔적이 있다. 물론 앨범 오프너를 비롯해 대놓고 러브송인 곡들도 있다. 나직하게 속삭이며 시작되는 ‘Skip’은 곡이 반쯤 흘렀을 무렵 피어날 조짐을 보이고는 곧 만개한다. 다채로운 디테일과 변주들로 가득한 2분 30초. ‘Rainbow Gal’에서 오토튠은 ‘너’라는 변수에 따른 화자의 상태 차이를 직관적으로 묘사하는 장치다. “8-bit, crushed, digital, monotone”에서 두드러졌다가, 뒤따르는 구절(‘네 얼굴이 내 폰에 떠오르자마자’)부터 걷힌다. 반복되는 후렴구는 엔딩에서 거의 샤우팅으로 변한다. 넘치는 생기를 체화한 듯도 하다. 그에 비하면 ‘Baby Spoon’은 은근하고 내밀하다. 역시 속삭이며 출발해 후렴에 이르자 템포를 올려 낭만적으로 리듬을 탄다. 점차 세심하게 디테일이 추가되고 고조된다. 후반부의 기타 연주도 귀를 사로잡는데, 표면은 날카롭지만 품은 정서는 포근하고 약간 애달프다. 로맨스의 상대방은 화자와 이심전심이거나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는, 생의 에너지를 선사하는 이, 그는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 ‘부서진 나의 글루’다. ‘흑백’이었던 화자는 ‘너와 함께 있으면 무지개가 된’다. ‘Baby Spoon’ 뮤직비디오는 이 색감과 질감으로 어지럽게 충만하다.
https://youtu.be/9DiJJVfZXUk?si=u2f7p8Gp1-yGhvoY
대개 3분을 넘어가지 않는 트랙들로 이루어진 <Running With Scissors> 곳곳에는 일종의 ‘플롯 트위스트’가 있다. ‘Skip’에서 ‘Cryptid’로, 거기서 다시 ‘Rainbow Gal’로, ‘Tarmac’에서 ‘No Bark, No Bite’으로, 한 트랙에서 다음 트랙으로 무난하게 건너가는 듯하다가도 예상을 뒤집고 방향을 꺾는 배치다. 드라마틱한 전개를 따른다기보단 차라리 드라마를 거부함에 가깝다. 두 번째 트랙 ‘Cryptid’는 도입부부터 심상찮다. 케이브타운&힙합: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다. 그러나 어울린다! 너무 무겁지 않게 눌러 뱉는 훅이 깔리고, 미세한 오토튠을 입힌 보컬이 얹힌다. 스키너는 여러 톤의 목소리들을 악기처럼 조율하며 “Do I look funny, do I scare ya?”, “I’m not your business” 등의 경고와 선언을 무심하고도 분명하게 전한다. 곡의 서사는 분노를 유쾌하게 터트리는 뮤직비디오와 만나 한층 풍부해진다. ‘Baby Spoon’ 비디오에서 그랬듯 스키너는 화면 안에 있되 주인공으로 분하진 않는다. 곡을 ‘내 이야기이자 너의 이야기’로 열어두는 태도라고 읽어 본다. 겹겹이 쌓인 보컬은 스키너의 더블링일 테지만, 서로의 팔을 끼고 행진하는 “별종” 무리의 합창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곡이 ‘툭 튀어나오는 트랙’이 아니라는 것이다. 앨범 전반에서 과감한 표현과 시도가 드물지 않게 들린다. 짧은 소견으로 거칠게 예를 들어보자면 ‘Rainbow Gal’과 ‘Baby Spoon’은 발라드와 하이퍼팝의 블렌딩이며 ‘Reaper’와 ‘Straight Through My Head’는 힙합, 모던 R&B, 그런지, 인더스트리얼에 걸쳐 있다. 음악적 실험이자 트랙/앨범의 테마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선택으로 들린다. 힙합과 그런지의 요소를 지니되 장르에 흡수되지 않는 ‘Cryptid’가 그렇듯, 생소한 트랙들은 케이브타운다운 바탕에 장르를 접목한 결과물에 가깝다. 스키너 본인의 말을 빌리면 “음악 사이 틈에 다리를 놓는”[them] 작업이다.
그런가하면 ‘NPC’는 ‘귀에 익은 케이브타운’에서 출발해 서프라이즈를 선사한다. 묵직하고 감성적이며 중독성이 있다. 차츰차츰 쌓여 폭발하는 짜임이 탄탄하고, 게임 배경음악을 닮은 간주 멜로디가 재치 있다. 분석할 새 없이 감겨든다. 타인들이 -집이든 아니든-속할 만한 장소에 정착해 있을 때 그 ‘사이 공간’, ‘언캐니 밸리’를 떠도는, ‘NPC처럼 행동하는 주인공’이 된, 비가시화된 동시에 별종이 된 기분. 로빈 스키너는 그 ‘보이드된 몸’의 감각을 섬세하게 내려놓다가, (‘나는 안락을 거부한다’고 덧붙이기도 하고) 끝에 ‘여기 내가 있다’고 외친다. 이 맥을 건조하고 서늘하되 강렬한 두 곡이 잇는다. 신비로운 멜로디와 나직한 보컬로 열린 ‘Reaper’는 일렉트로-힙합으로 방향을 트는가 싶더니, 하드하게 꺾이고 터지고 두드리며 맺힌다. 음성이 겹치고 변조되며 화자 또한 바뀌는데, 두 번째 ‘나’는 ‘방/터널에 묶여 있는’ 첫 번째 ‘나’를 호명하는 “reaper in your phone”, 유해한 메커니즘의 의인화로 들린다. ‘Straight Through My Head’는 이 테마와 분위기를 이으며 좀더 세밀하게 파고든다. 신중하게 호흡하는 가성, 이어 발맞춰 진동하는 보컬과 연주가 관능적이다. 틈틈이 치고 들어오는 기타가 후반부 폭발의 복선처럼 작용한다. 반복되는 외침과 환호성을 닮은 추임새, 스키너의 곡에서 샤우팅 자체는 새롭지 않으나 이런 류의 시원스러움은 새롭다. 막을 찢고 밖으로 나오려는 듯하다.
https://youtu.be/SaYMu0-QaeY?si=8q73kDd16ME1toYe
‘Tarmac’은 베드룸 어쿠스틱에서 센슈얼하고 리드미컬한 팝으로 흐른다. 연약하고 탁하게 시작해 힘을 주었다가 다시 뒤로 빠지는, 보컬링 조절도 노련하다. 뚝뚝 끊기던 샤우팅은 후반부에 터진 후 가라앉는다. ‘저 아래로 내려가서’ 문을 닫은(그러나 걸어 잠그지는 않은) 상태의 중독성을 ‘타르막처럼 달콤하다’고 비유하는 걸까. 그 유해한 폐쇄성에는 불안과 편안이 공존한다. 이 이야기는 ‘극복’이나 ‘치유’라는 매끈한 완결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케이브타운의 세계에는 줄곧, (화자의 일부인)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감각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렇게 ‘Tarmac’이 <worm food>가 파고든 영역에 닿는다면, 관조적이면서도 어딘가 초조한 포크 ‘No Bark No Bite’은 <Lemon Boy> 즈음의 흔적을 지닌다. 일종의 우화로 들리는 가사를 뜯어보며 이런저런 짐작을 해보았으나(씁쓸하게도 단 하나의 이슈로 수렴하지 않았고), 이 의미심장함을 분석하지 않고 남겨두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섬세한 선율에 디테일이 재미를 더하는 ‘Micah’는 스키너가 어린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다. 이번 앨범에서 가장 -어쩌면 케이브타운의 디스코그래피 전체 중에서도 손꼽히게- 부드럽고 따스한 곡으로 다가온다. 연약한 보컬을 힘있는 그룹사운드가 받쳐준다. “Micah don’t you push me away”, 스키너는 부정어를 사용해 애정을 표현한다. 소중한 존재를 맞이하는 일은 ‘다시금 처음으로 살아보듯’ 벅차고, 한편 두렵기도 하다. 그 복합적인 심정을 조심스럽게 내보이기에 더욱 아름다운 곡이다. ‘Sailboat’는 노스텔지아가 풍기는 리프로 출발해 조급하게 느껴질 정도로 경쾌하게 흐른다. 너무 행복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감상이 끼어들 틈조차 없다는 듯, 사적인 일화와 고백들이 나열된다. 앨범의 유일한 보컬 피처링인 클로이 모리온도의 상쾌한 음색이 조화롭다. <worm food>에서 이들이 협업한 ‘grey space’보단 ‘fall in love with a girl’ 속 스키너와 비바두비의 주고받기를 연상시키는 역학인데, 한층 ‘업되어’ 있다. 두 목소리가 나란히 유쾌한 경주를 하는 듯한 인상이다. ‘First Time’은 앞 곡을 잇는 톤과 템포로 완전히 다른 서사와 정서를 전한다. 오토튠으로 범벅된 목소리는 끝에 뱉는다, “I don’t get the fucking joke”. 이 앨범에서 오토튠은 괴리/소외감과 무관하지 않다. ‘설명할 필요 없는, 당연한 농담’을 이해하거나 양해할 수 없음을 발화하는 행위, 웃지 못할 조크의 무게를 저쪽에 돌려주는 행위(“Joke’s on you / Idon’t belong anywhere, I am worm food” -‘worm food’)의 전복성, 이 감각은 라스트 트랙의 통찰로 이어진다.
앨범과 제목을 공유하는 ‘Running With Scissors’는 <Running With Scissors>의 얼굴보단 영혼에 가깝다. 풍성하되 과하지 않고, 개성 강한 트랙들을 한데 모아주는 여백을 지닌다. 서정적인 멜로디가 천천히 치솟았다 가라앉는가 싶더니 굴절되고 변주된다. 기타의 헛구역질이라고 적고픈 도입부의 슬라이딩이 복선이었을까, 그룹사운드는 어긋남을 곁들인 기타 연주를 앞세워 ‘차분하게’ 소용돌이치다 깔끔하게 맺힌다. 가사에 비치는 통찰은 얼핏 허무주의나 환원주의를 바라보는 듯도 하다. 그러나 이 문장들이 내포하는 건 주장이나 결론보단 물음표 없는 물음과 괄호, ‘그럼에도’와 모호함이다. 삶의 순환을 무심하게 노래함으로써 거기 드리워진 신비의 필터를 걷어내고, 뒤섞인 유산을 언급함으로써 ‘원본’과 표준이라는 환상을 걷어낸다. 그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이토록 뻔하고 보잘것없는 너와 나의, 예측을 벗어나는 조우와 교차가 아닌가. “Everybody’s a copy, everybody’s in drag”이라면, ‘너도 나도 다만 가위를 들고 달리는’ 것이 삶이라면, 인간이 세운 벽은 생각보다 별볼일없는 것이 아닐까. ‘잊고 싶다’는 말에 담긴 것은 피로와 공허일 수도, (그럼에도)내일을 맞으려는 의지일 수도, 둘 다일 수도 있다.
https://youtu.be/eAecjdKoCd8?si=hw24JDVvK0aFQJGV
온갖 것들이 피부에 침투해 진동하며 생겨나는 괴리, 좌절, 분노, 무력감… 등이 뒤얽힌 복합적인 상태/감정들. <Running With Scissors>는 그것을 내려놓다가도 내지르고, 공감하는 청자를 어루만지다가도 마구 흔든다. 그 울림은 전작들과 닿아 있으면서 색다르다. 무례하게 자신을 촬영한 ‘노말 맨’의 테이블 위에 버티고 서서 휴대폰을 박살내는 ‘Cryptid’ 비디오 속 주인공을 보라. -혹자가 계속 균열을 보수하는-보이지 않는 벽을 밟고 올라서거나 망치로 내리치는 종류의 바운더리-브레이킹. 거칠게 적으면 올해의 케이브타운은 대놓고 위험하고 뾰족하다. 울부짖고, 인상을 찌푸리고, 활기차게 화내고 사랑한다. 다채로운 사랑의 힘과 날카로운 대항confrontation의 힘은 공존하고 상호 연결된다. 아티스트의 음악적 세계에 두드러지는 변화가 생길 때, 나는 ‘성장’이나 ‘발전’보다는 ‘확장’이나 ‘실험’이라는 단어를 곁들여 감탄하길 선호한다. 그의 음악이 형성해 온 장소는 규격이 있고 언젠가 허물어질 건축물이 아닌 살아있는 땅earth, <Running With Scissors>와 함께 이곳은 더욱 방대해졌다. 거기 뿌리내렸거나 기어다니는 무형의 존재들은 앞으로도 꿈틀거리며 때로 모양을 바꿀 것이다.
* 참고 인터뷰
https://www.them.us/story/cavetown-robin-skinner-new-album-transmasc-stereotyp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