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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Oct 13. 2019

그 배우의 선택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Gael Garcia Bernal)




<네루다(Neruda)>(2016, 감독: 파블로 라라인)
<에마(Ema)>(2019, 감독: 파블로 라라인)

<나의 작은 시인에게(The Kindergarten Teacher)>(2018, 감독: 사라 콜란겔로)
<발칙한 판타지 팩토리(Zoom)>(2015, 감독: 페드로 모렐리)

* 위 작품들의 구체적인 장면과 <네루다>, <에마>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Feat.
<수면의 과학(The Science of Sleep)>(2005, 감독: 미셸 공드리)
<모터사이클 다이어리(The Motercycle Diaries)>(2004, 감독: 월터 살레스)
<리미츠 오브 컨트롤(Limits of Control)>(2009, 감독: 짐 자무쉬)
<와스프 네트워크(Wasp Network)>(2019,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2008,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수면의 과학>(2005) 스틸컷.


<수면의 과학>(2005) 오래오래 사랑받고 있는 영화다. 미셸 공드리 특유의 독특하고 아기자기한 연출과 스토리 덕이다. 허나  하나의 핵심적인 이유는, 꿈과 현실을 헷갈리는 스테판의 찌질하면서도 귀여운 매력, 그를 연기한 배우의 우습고 정신없으면서도 슬픈 기분이 들게 하는 연기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2004)  까닭은 주연 배우의  때문이었다. 저렇게 맑은 눈을 빛내는 배우는 누구인가,  사람이 연기하는 위대한 혁명가의 모습은 어떨까 심히 궁금했었다. 그가 보여  것은 혁명가  게바라 이전의, 청년 에르네스토였다. 분출하기보단 관찰하고, 스스로를 주위에 각인시키기보단 주변의 것들을 눈에 담았다. 에르네스토가 느낀 것들을, 내가 함께 느낄  있게  줬다.


짐 자무쉬 스타일 범죄 누아르 <리미츠 오브 컨트롤>(2009), 나를 화면으로 잡아끈 것은, 이삭 드 번콜의 그레이 수트도, 틸다 스윈튼의 백금발도 아닌, 긴 곱슬머리 위에 챙이 넓은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쿨하게 스쳐 지나가는, ‘멕시칸’(캐릭터 이름이 그렇다)이었다.


<리미츠 오브 컨트롤>(2009)


이렇게 너무도 다른 세 작품과 인물에 대해 띄엄띄엄 묘사한 까닭은, 스테판, 에르네스토, 멕시칸을 연기한 것이 모두 한 배우, 가엘 가르시에 베르날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세 작품을 본 후, 섬세하거나 정신없거나 스타일리시한, 혹은 셋 모두인 그의 연기에 빠져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아모레스 페로스>(2000)로 인상적인 데뷔를 마친 후, 알폰소 쿠아론의 <이투마마>(2001), 페드로 알마바도르의 <나쁜 교육>(2004) 등 연출력을 인정받은 감독들의 작품에 잇달아 출연하며,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이미 이것저것 상을 받아버린 배우였다.


하지만, 여기서 다루려는 것은, 그로부터 십 년 십오 년 이십 년이 지난 후, 비교적 최근에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선택한 작품들이다. 독특하거나 새로운, 때로는 실험적이기까지 한 작품들 속에서, 가엘은 다양한 모습으로 이야기에 녹아든다.  


<No>(2012) 포스터. 파블로 라라인과의 첫 작업.


돋보이는 ‘선택’ 중 하나는 파블로 라라인과의 작업이다. 그와 두 번째로 함께한 작품 <네루다>(2016)는, 단순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전기 영화가 아니다. 일생을 지루하게 늘어놓는 전형적인 형식을 거부한다. 네루다를 미화하지도 깎아내리지도 않고, 하나의 시선을 택해 입체적으로 담는다.


<네루다>(2016)


작품의 시작과 함께, 한 목소리가 네루다에 대해 묘사하기 시작한다. 내레이션인데, 그냥 해설은 아니다. 평가하고 비웃는다. 시니컬하고 차분한 어조로 속삭이듯 말한다. 적당히 풍부하고 자연스러워서 관객을 지루하지 않게 해 주며, 지나치게 드라마틱하지도 않아 말 자체가 아니라 화면에 집중하게 한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스카, 네루다를 감시하는 비밀경찰이다. 작품은 그를 관찰자로 등장시키는가 싶더니, 오스카가 관찰하는 네루다로부터 다시 오스카의 이야기를 끌어낸다. 내레이션은 단순히 속내를 드러내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한다. 작품의 흐름을 이끌며, 주제를 드러낸다.


오스카는 혼자 가만히 있을 때가 많다. 멀리서 지켜보거나, 혼자 담배를 피우거나, 천천히 걷는다. 표정 변화도 적으나, 표현하는 감정은 결코 단순하거나 평면적이지 않다. 가엘은 얼굴 근육을 크게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풍부하게 오스카의 심리를 드러낸다. 복종하는 듯하면서 비웃음을 숨기고, 네루다가 남긴 시집을 보고 눈썹을 찡긋 올린다. 취조할 때는 절대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실눈을 뜨고 마치 뱀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답을 스르륵 이끌어낸다. 이후 차 등받이에 기대어 자신의 능력에 취한 듯한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얼굴이 드러나도, 내레이션은 계속된다. 오스카가 비웃는 대상은 네루다뿐이 아니다. 칠레 정부, 후반부로 가면 스스로도 포함된다. 초반의 오스카는 자신이 속한 계층을 외면하고 경찰청장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억지로 입는다. 존경하는 ‘아버지’의 동상을 보며 하는 내레이션은 빠르고 정신없다. 압도당한 듯 흠칫하는 얼굴은 단순히 존경심에서 비롯된 흥분을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지만, 위화감이 든다.


<네루다>(2016)


“난 훌륭한 경찰이다. 동시에 예술가도 될 수 있다. /아름다운 집이군, 정말 아름다운 집이야. /나처럼 더러운 경찰이군. /나처럼 슬픈 청년이군.”

오스카가 본격적으로 네루다를 따라다니기 시작하면서, 내레이션에는 점점 자신의 배경이나 상황, 감정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말투도 조금씩 달라진다. 여전히 차분하지만, 시니컬함이 줄고 때때로 말 끝에 공간이 생긴다. 꼭 그늘진 감정이 들어간 것 같은, 텅 빈 공간이다. 감상이 들어간 대사들을 자꾸 읊으니, 자의식 과잉으로 느껴지며 질릴 법도 한데, 가엘의 담백하고 편한, 한데 적당한 풍부함이 섞여 재미없지는 않은, 목소리와 말투는, 불편함 대신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오스카의 전 부인에게 반한 듯 행동할 때까지만 해도 그 흥미는 가벼운 코미디 같은 느낌에 가까웠는데, 점점 진지하게 동화된다.


<네루다>(2016)


공산당원을 색출하며 폭력적으로 거리를 들쑤시는 경찰들 사이에서, 오스카의 실루엣은 이질적이다. 네루다를 찾고 있지만, 정처 없이 헤매는 것 같다. 서서히 변하던 오스카의 태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네루다의 아내 델리아와의 대화다. 감시하고 평가했던 네루다가 역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것을 느끼며, 한쪽이 찌그러진 채 굳은 얼굴로 델리아에게 집중한다.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 듯한 연출이 가엘의 모호하고 독특한 표정과 만나 하나의 시 같은 장면을 만들어낸다.


더 이상 우아하게 차 뒷좌석에 앉지 않고, 오토바이를 타고 필사적으로 네루다를, 쫓는다는 핑계로 좇는, 오스카는 헛간에서 잠을 청하며 속삭인다. “지금은 나를 안아달란 말이다.” 여전히 차분하지만, 목소리도 얼굴도 애처롭다. 아, 이것은 사랑이다. 그러고 보니 오스카의 모호한 것 같았던 표정들은, 사랑에 빠진 것을 부정하는 이의 것이었다.


<네루다>(2016)


마지막 장면으로 넘어가, 머리를 맞고 멍청하게 얼빠진 얼굴로 눈밭을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며 파블로를 불러대는 오스카는, 도망자를 잡으려는 경찰이 아니라, 짝사랑 상대를 부르는 남자 같다. 지쳐 눈밭에 쓰려졌다 일어났다 하는 모습은, 우스운데 슬프고 안쓰러운데 또 없어 보인다. 이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연기는 가엘만의 것이다. 오스카는 네루다와 사랑에 빠졌는데, 나는 오스카, 아니 가엘과 사랑에 빠졌다.



가엘의 연기는 최소한의 제스처로 작품의 흐름을 이끌면서도, 캐릭터의 미묘하고 세세한 심리, 그리고 매력을 드러낸다. 보편적이고 넓으면서도, 개인적이고 깊다. 뒤엎고 압도하기보단, 녹아든다.


<네루다>(2016)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가엘의 폭발적으로 분출하는 에너지보단, 차분하고 섬세하게 감추며 내보내는 에너지에 주목하는 듯하다. 두 사람이 함께한 다음 작품 <에마>(2019)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화염과 레게톤, 격렬한 춤 등을 사용해 이미지와 사운드에서 모두 강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고, 주인공 에마도 그렇지만, 가스톤은 그렇지 않다. 가스톤과 오스카는 다른 시대에서 다른 일을 하지만, 작품에서의 위치나 연기 방식을 보면 통하는 데가 있다. 자존심이 세고 연약하며 섬세하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오스카는 숨기고, 가스톤은 딱히 숨기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에마>(2019)

 
가스톤은 에마를 완전히 가지지도, 밀어내지도 못하는 남자다. 차분하고, 힘없고,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이 연약하다. 모두를 통제하는 안무가의 위치에 있지만 팀 인원의 마음도 잘 얻지 못하고, 입양도 파양도 에마의 감정적인 말을 듣고 휘둘려 결정해놓고는 에마 탓을 한다. 한데 결국 에마의 말에 이기지는 못한다. 에마가 자기 친구를 ‘주니’ 받고, 에마가 그 친구의 머리채를 잡고 침대에서 끌어낸 후 자기를 덮치자 또 받아들인다. 차분하게 주장을 하거나, 큰 소리로 격하게 말을 이을 때도, 딱히 강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흔들리고 휘둘리는 것 같다. 폴로가 떠나며 했던 말을 따라 하며 너의 탓이라고 떠넘기기를 되풀이할수록 그는, 약하고 쪼잔하고 없어 보인다.

가스톤은 에마가 자신을 떠나고 팀마저 떠나자 쓸데없이 레게톤에 대한 비난만 잔뜩 퍼붓는다. 에마와 친구들을 앞에 두고 쉴 새 없이 말한다. 레게톤 박자를 비꼬는 투로 뱉는다. 목소리는 크고, 몸짓은 격하지만, 호흡이 모자라 제풀에 지친다. 감정에 못 이겨 쏟아내는 말들은 허공에 부딪힌다. 상대의 기를 누르기는커녕 스스로를 우습게 만들 뿐이다. 그는 효과적으로 싸울 줄 모르는 남자다.


가스톤 또한 ‘이상한 으로 화자 되는, 보편적이지 않은 시도를 하는 예술가다. 하지만 에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정상’, 그러므로  이야기 속에선 그냥 '찌질'하고 힘없는 놈이다. 그래도 버릴  없는 , 그의 눈이다. 내내 거의 웃지 못하고 그늘이 잔뜩 드리워진 얼굴, 천천히 깜박이는 눈물 맺힌 . 얼굴 정면 클로즈업이 유독 많은 작품이라서일까. 가엘의  속눈썹과 촉촉한 눈이 자꾸 눈에 밟힌다.


에마를 보는 그의 눈은 복잡하다. 욕망, 사랑, 폴로와 연결된 죄책감, 때로 묻어나는 혐오와 경악, 그리고 지침. 에마가 원하는 것을 얻은 후, 태연하게 짰던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목소리가 페이드 아웃되며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가스톤의 눈은 끝까지 지쳐 있는데, 그 속에 남은 감정이 보인다. 끝까지 에마를 놓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에마>(2019)



보편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여성 주인공을 관찰하면서 기꺼이 보통의 찌질한 남자가 되어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 이렇게 설명하니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사이먼이 떠오른다. 가스톤은 <에마> 화자  하나이고, 입체적이고 복잡한 감정을 보여 주는 인물이지만, 사이먼은 다르다. 풍부하지만, 평면적이고 기능적이다.


처음 등장할 때, 가엘은 지적이고 부드럽지만 평범하고 일상적인 톤으로, 튀지 않게 사이먼을 표현한다. 하지만 리사가 가져온 지미의 시에 반응을 보이면서부터, 조금 다른 느낌으로 화면을 채우기 시작한다. 책상에 엎드려 있기도 하고, 손을 휘저으며 입을 비롯한 얼굴 근육을 풍부하게 움직이는데, 눈은 내내 감탄으로 취한 듯 멍하다. 리사가 두 번째로 지미의 시를 가져왔을 때의 눈은 또 다르다. 감동으로 젖어 있다. 낭독이 끝나자 그 눈은 리사를 향한다. 강사가 아니라 청중의 입장에서, 진심으로 칭찬을 늘어놓는다. 학생들의 태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허나 리사로부터 관객의 시선을 빼앗을 정도는 아니다. 스페니시 억양과 서 있는 위치가, 학생들보다는 그에게 집중하게 만들지만, 딱 거기까지다. 리사의 클로즈업된 얼굴에 말소리는 배경으로 작용할 뿐이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사이먼은 강사인 동시에 시인이고, 성욕 앞에 단순한 남성이다. 학생의 재능에 대한 감탄을 성욕과 뒤섞어버린다. 강사 대 학생으로 얘기를 시작하는 듯하면서 슬쩍 옆에 앉고, 개인적인 얘기를 묻는다. 순간적으로 키스하고는 어쩔 줄 모르며 사과하고 사과하는데, 경솔하고 뻔한 행동이지만, 단순한 수작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면서,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라는 배우의 매력도 드러난다. 감정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몸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실감 나게 표현해낸다. 찢어지는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리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말하는 도중 점점 긴장하며 몸을 굽히다가, 키스 직후 일어났다가 앉았다 하며 얼굴을 붉히고 손을 뻗고 휘젓고, 무릎을 꿇는다. 정신없고 솔직하다. 리사가 시를 읽어 주는 도중에도 시보다는 리사의 얼굴에 집중한다. 무릎을 꿇고 앉아 애나는 당신의 연인이냐, 여자를 좋아하냐, 고 묻는 간절한 얼굴은, 애처로울 지경이다. 지금 사이먼은 리사의, 사실은 지미의 재능에 대한 사랑을 주체하지 못해야 한다. 나중의 장면과 대조를 이루도록.  


자신이 사랑에 빠진 시가 리사의 것이 아니라 지미의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난 그는 기분 나빠한다. 불같이 화를 내지는 않는다. 논리적인 언어로 차분하게 분노를 표현하는데, 오히려 우습다. 경솔하게 다가갔던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수치심까지 리사에게 덮어 씌워 일종의 자기 합리화를 하려는 것 같다. 표정은 놀라움과 공포, 거부감 등이 섞여 복잡한데, 훌륭하다. 풍부하고 복합적이지만 딱히 캐릭터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관객의 시선이 사이먼이 아니라 자꾸 무너져 내리는 리사의 얼굴을 향할 수 있도록.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사이먼은 이후 등장하지 않아도 안 궁금한 캐릭터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는 리사의 이야기다. 리사는 복잡하고, 사이먼은 단순해야 한다. 사이먼에 대한 리사의 감정이 아니라, 그의 변화하는 태도와 그것이 리사에게 미치는 영향이 중요하다. 가엘은 사이먼의 속내를 훤히 드러내면서도, 과장된 연기로 이질감을 주거나 화면의 중심을 이동시켜버리지 않는다. 전형적이고 기능적인 캐릭터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본인이 돋보이는 대신 리사의 감정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렇게 여성 중심의 영화에 때로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조하며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를 보면, 그 배우가 다시 보인다. 여성 주연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기꺼이 보이지 않기를 감수하는, 새로운 영화의 흐름에 함께하는 배우.


<나의 작은 시인에게>(2018)



비슷한 맥락에서, <Zoom>(2015)의 에디를 살펴보면 또 다르게 흥미롭다. 에디는 엠마가 만든, 만화 캐릭터다. 허구 속 허구인 셈이다. 에디를 설명하는 언어는 처음엔 오로지 대상화의 말들 뿐이다. 키가 크지 않고, 페니스는 크고, 매너 좋고, 스페니시 억양이 섹시한 완벽한 예술가. 다들 가슴 큰 여자만 좋아하는 현실에 화난 엠마가 그린 이상형이기 때문이다. 가엘의 얼굴을 딴 형태이기는 하나, 애니메이션이고, 워낙 ‘완벽한 남자’로 설정된 탓에 말투도 전형적인 편이라, 딱히 어떻다고 말하기 힘든 캐릭터다. 그런데 이 작품을 언급하는 까닭이 뭐냐면- 여성에게 특정 외모의 이미지를 주입하는 미디어, 그 이미지와 일치하든 그렇지 않든 외모로 평가받는 여성들의 상황, 엠마의 애인을 비롯한 이들이 재생산하는 여성의 성 상품화를 적나라하게 풍자하는 이 영화에, 미러링의 일환으로 만든 대상화된 이미지 자체로, 본인의 얼굴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데 출연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Zoom>(2015)


라고 썼지만, 스토리가 한 번 꺾이면서 에디는 그 풍자의 초점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로 변한다. 이 맥락에서 매력적이라는 말은, 입체적이라는 말이다. 그의 캐릭터성이 변하는 건, 엠마가 에디의 페니스에 화풀이를 하고 나서부터다. 완벽함이 망가지기 시작하며 자신의 서사를 지니게 된다. 갑자기 작아진 페니스를 보고 비명을 지르고, 의사에게 말이 안 된다며 겨우겨우 설명하는 목소리, 그걸 들으니 비로소 진짜 가엘이 눈앞에 보이는 느낌이다. 에디가 찌질해지고 쪼그라들수록, 그것을 표현하는 연기의 매력은 더해지고, 가엘을 캐스팅한 것이 단순히 스페니시 억양과 부드러운 목소리 때문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 (당연하게도) 드러난다. “데일이 미셸을 납치하고 있잖아요!”라고 소리치는 부분을 비롯해, 할리우드 상업 영화판의 ‘잘 팔리는’ 스토리의 허무맹랑함과 미소지니를 신나게 까대는 부분도 볼만하다.


다행히도 가엘이 출연한 작품들은, ‘개연성 없이 폭탄이 터지고 자동차 추격씬이 있으며 헬기가 뜨고 남자가 여자를 구하고 반지를 들이미는’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배우가 출연할 영화를 정하는 것은, 가치관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물론 그렇지 않거나 못한 경우도 많다.) 가엘이 배우로서 오른 위치와, 그 위치에서 선택하는 작품들을 보면, 배우, 영화인, 더 나아가 한 사람으로서의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네루다>(2016)


멋진 주인공이 되기보단 작품을 관객에게 설득시키는 배우, 이야기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연기를 추구하는 배우, 망가지고 찌질해짐으로써 장면을 흥미롭게 만드는 배우. 최근엔 기획에 참여하거나 연출도 하며 발을 넓히고 있다.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이 앞으로 할 선택들을, 믿고 기다려도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기다리는 건 파블로 라라인과의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차기작……)


<치쿠아로테스>(2019) 포스터.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감독.





+ 맥락에 어울리지 않아 본문에 포함하지 않은 작품들을 덧붙인다.

<와스프 네트워크>(2019)의 헤르난데즈는, 많지 않은 분량으로 다양한 면을 보여준다. 네트워크의 총책임자로서 올가에게 남편이 ‘반역자’가 아님을 전달하기 이전, 그가 아내와 작별하는 장면이 먼저 나온다. 예의 바르지만 복잡하고 그늘진 얼굴로 올가에게 하는 말은, 단순한 정보 전달 이상이다. 진심으로 전하는 위로, 공감, 존중이 느껴진다. 딸에게 말하지 말라고 할 때는 단호해지지만, 위협적이지는 않다. 그가 동료들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짐작된다. 위협적이지 않으면서 단호하고, 권위적이지 않으면서 통솔력이 있다. 올가의 임신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풍부한 표정에선 따뜻함과 유쾌함마저 묻어난다.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바람직한 모습처럼 느껴진다.


<와스프 네트워크>(2019)


여기 아주 상반된 힘이 있다. 카리스마도 권위도 아닌, 그냥 독재, 폭력. <눈먼 자들의 도시>(2008)를 본 사람이라면, 제3병 동의 왕을 잊지 못할 것이다. 원작을 먼저 읽은 나는 픽션 캐릭터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싫어했는데, 뒤늦게 영화를 보기 전 사랑하는 배우 가엘이 그를 연기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좀 속상했다. 아주 악당이라도 조커처럼 나름의 매력이 있는 캐릭터가 있는가 하면, 혐오만 불러일으키는 캐릭터가 있는데, 제3병 동의 왕은 후자였던 것이다. 허나 영화를 보고, 침대에 올라선 가엘을 본 후 나는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혐오하는 인물은,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가엘은 또, 너무 잘 해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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