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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제모름 May 11. 2021

그이들이 사랑하는 법

노에미 멜랑(Noémie Merlant)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de la jeune ille en feu)>(2019, 감독: 셀린 시아마)

<점보(Jumbo)>(2020, 감독: 조에 비톡)


* 위 두 작품의 구체적인 장면과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그 방향과 형태는 저마다 다르다. <캐롤>(2015), 주저하고 흔들리던 테레즈의 눈빛은 캐롤과의 관계가 깊어지며 중심을 잡고 또렷해졌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굳게 다물려 확신의 미소를 띠던 마리안느의 입술은, 엘로이즈를 향해 벌어지고 떨린다. 마리안느는, 사랑을 하는 이이자, 받는 이다. 엘로이즈를 관찰하는 이이자, 그에게 관찰당하는 이다. 두 사람이 아티스트-오브제의 일방적인 관계를 맺는 대신 (때로 소피까지 포함하여) 상호작용하듯, 영화도 캐릭터-배우를 도구로 휘두르지 않는다. 배우들은 담담하고 솔직한 얼굴을 하고, 카메라는 꾸밈없이 온전히 담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IMDB 이미지.


진하게 올라붙은 눈썹, 맑고 또렷한 눈, 작고 야무진 입술과 균일한 톤의 피부. 선이 단정하고 분명한 외모다. 한 데로 묶은 어두운 색 머리카락과 투박한 드레스가 일관된 이미지를 더한다. 외모가 인상으로 이어지게 하는 건, 그것을 쓰는 방식, 연기다. 노에미 멜랑이 각인시킨 마리안느의 첫인상은, 강인하고도 자유로웠다. 배가 흔들릴 때, 그러다 도구함이 바다에 빠졌을 때, 물에 젖어 무거운 짐을 둘러메고 언덕을 오를 때, 마리안느의 신체는 필요한 만큼 힘들어하나, 정신은 굳건하다. 비명 한 번 없이, 행동을 예고하듯 일행을 슥 보곤 겉옷을 벗고 바다에 뛰어든다. 숨이 차 찡그린 채로 꾸준히, 가파른 길을 오른다. 저택에 도착해 캔버스에 물이 들어찬 것을 보고도, 극적인 반응 없이 그저 신중하게 꺼내 세워 놓는다. 옷을 다 벗은 채 모닥불 앞에 앉아 담배를 무는 어두운 실루엣은, 느긋하고 능숙하다. 한나절이 채 되지 않는 동안, 별 대사 없이 캐릭터를 드러낸 연기의 호흡도, 느긋하고 능숙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음식을 꺼내 먹는다. 담담하게 사과하고, 예의 바르게 와인을 요청한다. 허둥대거나 움츠리지 않으며, 뻔뻔하거나 과시하는 기색도 없다. 자신이 무엇이며,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잘 아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차곡차곡 건강하게 쌓인 이의 태도다. 살짝 삐딱하게 기대앉아 그림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며 씩 웃는다. 여성 화가는 ‘masculine’한 주제를 다룰 수 없는 현실, 순응하거나, 절망해 포기하거나, 맞서 싸우는 대신- 몰래 그리는 사람. 딱 그런 이의 미소다. 가지고 태어난 듯 어울리나, 사실 쌓아 온 하루하루가 그 가치를 이루는- 마리안느의, 또 노에미 멜랑의 미소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IMDB 이미지.


마지막과 이어지는-작품의 시작, 흔들리는 얼굴을 먼저 봤기에, 그 단단한 미소가 어떻게 변해 갈지 궁금해졌었다. 역시 균열이 생기는 것은 엘로이즈를 만나고부터다. 눈가에 어린 긴장은, ‘화가임을 속이고 관찰해야 하기 때문’으로 설명하기엔, 복잡한 종류의 것이다. 거짓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기술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남을 속이는, 그보다 스스로를 꾸며내는 것이 성정에 맞지 않는 이. 초상화를 위해 숨기던 시기, 관찰하다 들키자, 포장해 둘러대기보다 어색함을 마주 견딘다. 노에미 멜랑의 깔끔하고 담백한 응시는, 숨기려다 숨기지 못하는 마리안느의 감정을, 그 순간의 서늘한 바닷바람을 관객에게 전한다.


“초상화엔 법칙이 있고, 구도가 있다.” 예술가 마리안느의 언어가 아니라, 남성만이 소유한 기성 예술계의 언어다. 문장의 형태는 반박이나, 뱉는 태도는 이미 엘로이즈의 질문이 던지는 바를 인정한다. 그 투에는 혼란이 가득하며, 끝은 흐리다. 가부장제로 꽉 막힌 시대, 그나마의 자유를 준 것은 그림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그 시선의 틀에 여인들을 가두고 있었음을, 사랑과 함께 깨달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인물의 감정은 대사와 일치하지 않는다. 노에미 멜랑은 이토록 ‘솔직한’ 마리안느의 상태를 그 간극으로 드러낸다. 간극이 사라지는 순간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모델을 달랠 때 뭐라고 해요?” 엘로이즈의 물음에, 마리안느는 그리는 움직임에 집중하며, ‘뭐라고’의 답을 언어로만 내놓기 시작한다. 그림과 ‘모델’로 번갈아 던지던 시선을 점차 ‘엘로이즈’에게로 뺏기고, 진심의 떨림을 담아 속삭인다, “아름다워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IMDB 이미지.


그들이 ‘함께’ 그림과 이야기를 만드는 장면들은 하나하나 특별하다. “연인이 아닌 시인의 선택을 한 거죠.” 마리안느는 신화를 읽을 때 오르페우스에게 이입하였을 것이다. 예술가, 사랑하는 이, 선택하는 이 이므로 –그 마음을 상상하며 로맨틱한 미소가 올라 있던 입은, 엘로이즈의 해석을 들으며, 잦아들고, 벌어지며, 숨이 차오른다. 눈이 상대에게로 빨려 들어간다. 임신 중절 수술을 받는 소피의 모습을 재현하며, ‘그리자’ 던, 엘로이즈를 볼 때도, 유사한 반응이 온다. 다만 그림에 대한 몰입이 섞여 있다. 연인/사람으로서 반했던 이에게 예술가로서 다시 한번 반하는 순간이다. 고요하게 두근거린다.


말다툼을 한 후,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쫓아가 뒤에서 꽉 껴안는다. 눈을 감고 가쁘게 숨을 내쉰다. 어쩔 도리 없는 마음의 아픔이 입으로 흘러나온다.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도 그것은 새어 나와, 발걸음을 재촉했다. “뒤돌아봐.” 엘로이즈의 목소리에 휙 몸을 돌린다. 시선은 오래 머무르지 않고, 마리안느는 도망치듯 떠난다. 왜 그토록 짧게 끊었을까. 순간이 너무 아파서 피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후회했을 것이다. 허나 이후 노에미 멜랑의 눈 속에 아쉬움의 빛은 없었다. 생생한 기억의 떨림이 있었다. 충분했던 것이다. 마지막을 무의식 중에 예견하고 있었기에, 그것이 실제로 찾아왔을 때 찰나의 응시로 완전히 담을 수 있었다. 견딜 수 없이 아프고 벅찼을 것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IMDB 이미지.


작품은 말로 설명하는 대신, 움직임으로, 눈빛으로, 뉘앙스로, 두 사람의 마음을, 마리안느의 변화를 드러낸다. 아델 아에넬의 뚜렷한 에너지와 노에미 멜랑의 미세하고 분명한 진동. 관객은 그 최소한의 표현으로, 순간마다 추측할 필요도 없이 깨닫게 된다. 작품과 배우가 함께 호흡한 결과물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사이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집중한다면, <점보>(2020) 잔 개인의 감정 변화, 또 주변 사람들의 태도 변화에 초점을 둔다. 서사나 연출 자체로는 개인적으로 살짝 아쉬운 점이 보였으나, 노아미 멜랑의 연기가, 존재가, 그 점들을 선으로 이어, 완전체로 만들었다.


<점보>(2020). IMDB 이미지.


점보를 바라보는 잔을 묘사하려면 이전의 잔을 먼저 살펴야 한다. 툭 잘라내 버린 듯 부스스한 단발, 주로 한쪽으로 목이 늘어져 있는 티셔츠. 차려 자세로 경직돼 있거나 어정쩡하게 어긋나 있는 팔다리. 둥그렇게 확장되어 굴러가는 눈동자, 토라진 듯 꾹 다물려 좀처럼 열리지 않는 입술. 그리고 목소리. 소리 자체는 허스키하고 풍부하게 높으나, 내보내는 힘이 없다. 입을 완전히 벌리지 않고 목만 사용해 소리 낸다. 크기와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고 때로 안으로 말린다. 큰 소리로 속삭이는 것 같다.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는 잔의 목소리를, 노에미 멜랑은 원하는 대로 표현하며- 잔이 된다.


사람들과 있는 잔은 어색하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가방끈을 꼭 잡고 벗어나려는 듯 빠르게 걷거나, 턱을 내리고 눈을 치켜뜨며 뒤로 물러난다. 엄마와 있을 때는 훨씬 풀어지지만- 일을 마치면 조용히 창문을 열고 곧장 제 방으로 들어온다. 위베르는 잔이 틀어놓은 화면을 불편해하고, 잔은 위베르가 옆에 앉자 티 나게 숨 막혀한다. 주위에 타인이 없을 때 잔의 몸은 비로소 자연스러운 박자를 탄다. 아무도 없는 캄캄한 놀이공원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이며 기구를 문질러 닦거나, 쓰레기를 조심조심 주워 넣을 때 잔은, 방에서 모형을 만들거나 바라볼 때와 비슷한 분위기를 띤다. 효율적이지 않은, 느리고 살짝 어긋난 템포로, 동작 하나하나에 몰입한다. 차 문을 열고 일터로 향할 때 경직되었던 까닭은, 일이나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에 있었음을, 노에미 멜랑은 보여준다.


<점보>(2020). IMDB 이미지.

 

잔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을 두려워하고 어색해한다. 반응은 몸으로 바로 드러난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이상해하거나 우스워하고, 잔은 더욱 경계를 입는 순환이다. ‘악’은 붙이지 않았다. 문제는 ‘어떤 이들’에게만 있어서다. 잔은 그냥 잔일 따름임을, 작품도 노에미 멜랑도 분명히 한다. 잔은 어쩔 줄 모르는 채 사는 게 아니다. 중심이 있고 균형이 있다. 마리안느가 사람과 이야기를 그리며 단단하고 곧은 기둥을 세웠다면, 잔은 사물을 만지고 조합하며 순수한 즐거움을 뭉쳐 보관한다. 놀이공원 바닥에 누워 하늘을 보고 웃을 때 잔은 완전히 자유롭다.


잔은 표현을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다. 탈의실에 벌컥 들어온 마크에게 곧바로 화를 내지는 않지만, 묻는 말에 답하는 대신 경계하는 눈빛으로 조용히 비켜달라고 말한다. 언뜻 뚜렷하게 의사를 밝히지 못하는 듯 보이나 -이후의 관계에서 사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건 잔이다. 집에서 함께 식사하는 장면- 마크는 편하게 말을 걸고, 잔은 자기 집에서도 긴장해 있다, 그러나. 질문에 수동적으로 답하지는 않는다. 할 말이 없거나 말하고 싶지 않으면, 묘하게 웃거나 빤히 보기만 한다. 상대는 답답해하고, 궁금해하고, 애타 한다. 흥미를 끄는 말이 귀에 들어오자 눈빛이 바뀌며, 말을 한 사람이 아니라 말 자체에 빠져든다.


<점보>(2020). IMDB 이미지.


낯선 공간에서도 편안한 균형을 유지했던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만나고 온통 흔들렸다. 내내 지내왔던 곳에서도 불안하게 굳곤 했던 잔은, 점보를 만나며 확신을 얻는다. 사랑의 형태와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타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당연하나 종종 잊힐 때가 있는 이 문장들을, 노에미 멜랑이 되새겨줬다. 사랑에 빠진 이의 평범한 모습을 설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특별한 사랑의 모양을 그렸다. 그 일부를 묘사해 본다.


잔의 사랑은 편안하다.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눈을 반짝이고, 팔다리를 자유롭게 놀린다. 주로 바지에 후드를 둘러쓰던 잔은, 원피스를 입기 시작한다. ‘예쁘게 보이려는’ 시도라기보다, 안전하고 편한 기분, 상대와 살을 맞대고 싶은 욕구에 대한 표현으로 보인다. 맨다리를 드러낸 채 점보 한가운데에 털퍼덕 기대앉아 있곤 한다. 잔의 사랑은 솔직하고 열정적이다. 점보는 그가 눈치를 보지 않고 싶게 만드는 존재다. 완전히 감정을 드러내며 순간에 집중한다. 처음엔 두려워하고, 이어 신기해하고, 교감하며 점점 몰입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이상해하는 동시에 전에 없던 기쁨을 느낀다. 화내고, 짜증내고, 엉망으로 울며 몸을 던져 애원한다. 엄마에게 상처를 받곤 거침없이 인파를 헤치고 점보를 껴안는다. 사람들 가운데서 둘만의 장면을 만든다.


<점보>(2020). 트레일러 스크린샷.


잔의 말과 행동은, 내용뿐 아니라 그 모양도, 종종 예상치 못했던 모습을 한다. 망가진 모형들을 보고 엄마에게 달려들 때, 잔의 얼굴과 몸은 상대의 것과 함께 일그러진다. 둘 모두를 의도적으로 망가뜨리는 동작. 능숙한 파이터가 작정하고 타인을 해치는 것보다 더 위험하게 와닿았다. 그러다, 잔이 온몸에 실었던 그 무게가 뭔지, 깨닫고 말았다. 위베르가 말했던, ‘남에게 해 끼치지 않는 아이’는, 점보와의 관계를 ‘이해’ 하지 못하는 엄마의 것을 비롯한, ‘다른’ 것을 대하는 폭력적인 행동들에 매번 짓눌려 왔다. 가슴에 엉킨 것을 조금 꺼내어, 잔은 그렇게 누르고 있었다. 엄마의 턱을 움켜쥐었다, 짓무른 내 눈가를 똑바로 보라고. 잔의 눈동자로 노에미 멜랑은 모두 말했다. 나는 외부의 시선으로 그 적나라한 감정을 부끄러워하다, 잔에 이입하며 울렁거리게 되었고, 부끄러워하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되었다.





노에미 멜랑은 특별한 존재와 관계로 인한 변화를, 저마다의 인물에 적합한, 정확한 방법으로 그려냈다. 서사나 대사가 의도적으로 놓거나, 미처 건드리지 못하고 놓친 부분을, 겹겹이 아름다운 색으로 채워 주었다. 그렇게 담긴 -마리안느의 사랑은, 확신에 찼던 마음에 혼란을 불러일으켰고, 가득 떨리게 했다. 머뭇거리게 했다. 정의하지 않고 둘만 간직함으로써 삶을 견딜 수 있는 기억이 되었다. 잔의 사랑은, 두려워하던 마음을 편안하게 했고, 또 기쁨과 확신을 주었다. 정의하고 알림으로써 앞으로 나아갈 에너지가 되었다.


주로 자기만의 얼굴을 간직하고 연기하는 배우들에 매력을 느끼는 편이다. 이 인물의 옷을 입은 배우에게서 예상치 못한 순간 그때 그 인물이 보일 때, 가슴을 부여잡곤 했다. 노에미 멜랑의 경우 그렇지는 않았다. 단 두 작품 속에서 봤는데- 다른 사람, 그렇게 느껴졌다. 특별한 사랑에 빠졌고, 온통 흔들렸지만, 그 표정은 달랐다. 마리안느는 주로 곧고 고요했다. 담백하고 깔끔했으나, 내내 미세하게 떨렸다. 잔은 이리저리 얽히고 어긋났다. 큰 진폭으로 요동쳤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IMDB 이미지.


작품을 충분히 본 후 쓴, 배우의 연기를 아우르는 글은 아니다. 아직 노아미 멜랑이 어떤 바탕으로 연기를 하는지, 매력의 중심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감’이 포괄적으로 오지 않은 상태랄까. 이것은, 그저 두 번 놀라고 참을 수 없어 적어버린, 덕질의 예고 같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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