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12호 03화

어떤 근황

[마주침, 맞울림] 편집위원 응팡

by 연희관 공일오비

0.

요즈음 “뭐 하고 지내?”라는 물음에 섣불리 답하기 어렵다. 졸업을 앞둔 수료생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내가 하는 활동을 설명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홈리스행동’이라는 단체에서 2년째 자원활동을 하고 있다. 홈리스야학에서 한글반에 등록한 학생들과 한글을 공부하고, 금요일이면 서울역에서 ‘인권지킴이’ 활동을 하며 거리 홈리스를 만난다. 한 달에 한 번 인권지킴이 활동 때 들고 갈 홈리스 관련 글을 쓰고 가끔은 같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기도 한다.


지금은 단체 안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지만 처음 시작은 야학이었다. 그리고 야학교사 신청서에 “열심히 봉사하고 싶습니다.”라고 적었던 기억이 난다. 신청서를 다시 보면 찢고 싶어지겠지만 그땐 정말 그런 마음이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면 하면 좋겠다는 판단이었고, ‘교육 봉사’ 활동은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때에도 쭉 해왔던 일이기에 적당히 시간과 마음을 쓰면 되리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때 낸 신청서를 기점으로 어떤 삶과 세계를 마주하게 할 거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한 채 활동을 시작했다.



1.

금요일 인권지킴이 활동 때엔 차와 칫솔, 마스크, 핫팩 등 필요 물품 몇 가지를 들고 나간다. 서울역 2번 출구에서 시작해서 연세빌딩 지하도, 4번 출구 앞, 12번 출구, 두텁바위까지가 내가 담당한 구역이다. 이 구역 안 거리에 머물거나 잠자리를 만들어 두신 분에게 차를 드리며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활동의 대부분이다. 필요한 경우 이용할 수 있는 지원제도에 관해 상담하거나 동행을 하기도 하고 동료 활동가에게 지원을 연계하기도 한다.


처음엔 말을 거는 일 자체가 너무 어려웠다. 다짜고짜 차를 들고 가서 말을 거는 나를 무례하다고 느끼지는 않을지 걱정됐다. 무작정 인사를 하고 난 다음, 내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분들에게 어떤 소재로 대화를 이끌어 가야 할지도 난감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내가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그래도 여러 번 기웃거린 덕택인지 몇몇 분들과는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다른 분과 대화를 하고 있으면 먼저 다가오시는 분들도 있었다.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법도 배워갔다. 나아진다고 느끼던 어느 날, 인권지킴이 활동을 마치고 뒷정리를 하는데 모르는 분이 와서 말을 걸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그랬다. “너무 덥고 피곤하시죠? 저도 어서 집에 가고 싶네요.” 그리고 아차 싶었다. 당연히 상대도 집이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내뱉은 말이었다. 이분은 딱히 답할 말이 없으셨던지 웃으시곤 자리를 뜨셨다.


무지에서 비롯된 무례한 순간이 쌓일 때마다 ‘내가 활동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일까?’라는 물음이 자꾸만 들었다. 서울역에서 ‘거리에서 자다 햇빛에 화상 입은 피부, 추운 날 얇은 옷만 걸친 채 앉아있는 사람, 길가에 쌓인 컵라면 용기’를 보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내가 서 있는 위치와 나의 역할을 계속 고민하게 됐다. 거리에서 머물지 않는 내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내가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홈리스 문제에 목소리 내는 이유가 나의 값싼 정의감이나 자기만족 때문인 걸까 싶어 어떤 수치감이 들었다. 늘 확신이 없고 조심스러웠다. 확실한 건 내가 활동하러 매주 서울역과 아랫마을[1]에 간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매주 만나고 대화한다는 사실뿐이었다.



2.

“저도 그렇게 똑같이 죽겠죠?”, 어느 날 야학 학생 한 분이 내게 이렇게 물었다. 노숙인 시설에서 같이 생활하던 동료가 혼자 고시원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사실이니까. 비장애인 중심의 노동을 경유해 사회적 관계와 공간이 형성되고, 아파도 돈이 있어야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고, 가족이 아니라면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사회에서 노동하지 않고, 아프고, (장례를 책임질 수 있는) 가족이 없는 이들이 도착하는 삶의 끝은, ‘고독사, 무연고 사망자’ 따위일 뿐이니까. ‘모두 존엄하게 살고 또 죽을 권리가 있다.’라는, 내겐 종종 공허한 언설이고 ‘정의’에 기반한 당위가 활동하면서 만나는 누군가에겐 삶과 맞닿아 있는 현실이었다. 무력감이 짙게 스며든 한숨을 내뱉은 채 말하는 그를 보며 세상이 왜 이 모양인지 화를 내고 싶었다.


이때 불쑥 치밀어 올랐던 분노가 매주 서울역으로 향하는 이유가 되었다. 나는 거리 홈리스의 삶을 마주하고 관계를 맺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같이 분노하고 싸울 수 있는 동료가 되고 싶어서 서울역에 간다. 불심검문, 명의도용, 혐오 섞인 시선 등 취약한 상황에 쉽게 처하게 되고, 존재 자체가 불법으로 규정돼 늘 강제퇴거 위험에 내몰린 이들에게 이게 바로 차별이고 ‘나쁜 일’이니까 같이 화내자고 말하고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처음 냈던 야학교사 신청서와 다른 내용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홈리스를 시설로 치우기 바쁘고 제도에 닿지 않게 하는 사회에, 홈리스의 자리는 없다. 그들이 위치 지은 우리의 자리는 그저 조용히 거리에서, 시설에서, 열악한 거처에서 살라는 것이다. 정부는 홈리스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광장에서 우리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주어진 위치를 거부하고,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말하기 위해 우리의 광장을 꾸렸다. 나의 삶을 말할 수 있고, 시끄럽고 소란스럽게 우리의 요구가 들리는 광장을 말이다."[2]





홈리스 상태로 표상되는 불평등이, 홈리스를 향한 차별과 인권침해가 선의와 자선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서울역 앞엔 매일 교회 천막이 들어선다. 역 앞 행인들이 눈을 질끈 감으며 천막에서 내뱉는 소음을 피해 발걸음을 재촉하는 것과 달리, 천막 안 의자를 빽빽하게 채운 사람들이 있다. 예배를 마치면 간식이나 옷 등을 받을 수 있어서다.


민간 무료급식이나 교회들의 나눔이 뭐가 문제냐고? 식품위생법에서 규정하는 집단급식소 기준을 충족하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밥을 먹기 위해선 식사 때마다 무료 급식소 앞에 길게 줄을 서야 한다. 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곳이면 밥을 먹기 위해, 옷을 받기 위해 시키는 대로 기도하고 예배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밥을 먹고, 옷을 입고, 따뜻한 주거에서 사는 일이 당연한 ‘나의 권리’가 아니라 ‘감사해야 하는 일’이 된다. 게다가 민간의 봉사나 자선은 결코 이들에게 안정적인 버팀막이 될 수 없다. 하고 싶지 않거나 할 수 없으면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그럴 책임과 역량이 자선단체에는 없다. 일시적이거나 시혜적인 자선보다 더욱 필요한 건 타인의 선의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일이다.



3.

아랫마을에는 홈리스행동 뿐만 아니라 금융피해자연대 해오름, 노숙인인권실천단, 빈곤사회연대, 용산참사 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위원회도 함께 사용한다. 그러니까 아랫마을은 가난한 사람들의 배움터인 동시에 빈곤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들이 모여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아랫마을에서 활동을 업業으로 하는 활동가들이 있다. 불평등과 억압을 만드는 세계 자체에 균열을 내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윤 앞에 사람이 있다.’라는 누구도 말하지 않는 당연한 것을 이야기하고 묻는다. 그리고 그것을 사회적 가치로 재편성하고 구체적인 제도로 만들기 위해 활동한다.


1978년부터 재개발이 된다던 남대문 5가에 얼마 전 ‘드디어’ 재개발 확정 공시가 났다. 설문과 의견서를 받기 위해 ‘홈리스주거팀’[3] 활동가들을 따라 남대문 쪽방촌을 방방마다 돌아다닌 적이 있다. 쪽방 주민을 만나 재개발이 확정된 건 알고 있는지, 이주대책이나 임대주택 등 이후 터전 마련에 관해 들은 게 있는지, 중구청에 이주대책으로 무엇을 요구하면 좋을지 물었다. 조심스레 두드린 방문 뒤에 살고 있던 이들은 재개발 사실을 동료 쪽방 주민에게 들었고, 재개발 이후 주민대책을 들은 적이 없다는 답을 해주었다.[4] 주민들은 재개발 동안 머물 임시주거지와 재개발 이후에도 동네에 돌아올 수 있도록 공공임대주택, 주거이전비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도 말했다. 활동가들은 의견서를 모아 중구청에 전달했고 ‘적정한 주거대책 마련, 임시 거주 방안, 임대주택 건설 계획 등을 검토하겠다.’라는 모호하지만,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흩뿌려져 있는 목소리를 모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개 재개발이 된 지역을 두고 떠드는 이야기는 얼마나 땅값이 오를지, 얼마나 깨끗하고 편리한 시설이 들어올지다. 재개발을 해서 투기에 성공한 사람들은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 되고 철거되는 사람과 삶은 보이지도 않거니와 어쩔 수 없는 일처럼 취급된다. 그런데 1월에 발표된 ‘영등포 쪽방촌 재개발’은 조금 다르다. 쪽방촌을 철거한 뒤, 주상복합아파트 외에도 쪽방주민과 신혼부부를 위한 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한다고 한다. 원주민들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한 임시 거주지에 머무를 수 있고, 쪽방 주민들을 위한 영구임대주택 단지에는 종합복지센터와 의원 같은 돌봄시설이 함께 들어선다고도 한다. 발표를 읽으면서, 이러한 개발이 가능해진 건 앞선 남대문 쪽방촌 사례처럼 ‘원주민이 살던 공간에서 뿌리 뽑히지 않는 개발, 원래 그 공간에 머물던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말해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이 바뀌는 건, 부당하고 불평등한 세상의 ‘상식’에 끊임없이 대항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월에 있었던 용산참사 11주기 추모 및 철거민 투쟁대회에서, 누군가 단상에 올라 “투표가 아닌 투쟁으로 총선에 임하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이미 있는 선택지에서 차선을 고르는 게 투표라면, 기존의 선택지를 파기/거부하고 새로운 선택지를 만드는 게 투쟁’이라고 이해했다. 투쟁처럼 ‘세련되지 못하고 구식인’ 방식 말고 ‘창의적인’ 생각과 기술, ‘합리적’인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투쟁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그 세련되고 합리적이고 창의적인 것들이 가난하고, ‘비합리적’인 그 어떤 존재도 대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활동가들이, 아랫마을에 머무는 우리가 ‘투쟁’을 (말)하는 건 이렇게 새로운 선택지를 만드는 일이 이미 기울어진 세계와 불화하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4.

작년 ‘부양의무자기준 폐지’를 내건 청와대 앞 천막에서 연말을 보냈다. 그해 8월 관악구에서 모자가 아사한 채 발견됐다. 사망한 이는 중국에 있는 이혼한 남편과의 관계를 소명하지 못해 수급 신청을 포기했다고 한다.[5] 같은 해 9월 강서구에서는 부양의무자가 노모와 장애인 형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니까 청와대 앞 천막은 사실상 부양의무자기준 폐지 공약 파기를 선언한 정부를 향해, 비참한 삶과 죽음을 만드는 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세워졌을 테다.


농성장엔 여러 사람이 찾아왔다. 수급자, 활동가, 학생, 연구자, 노점상, 장애인, 사회복지사, 옆에서 집회하던 사람들 등등. 그리고 농성장은 각자의 이야기로 넘실거렸다. A는 수급 제도를 분석하고 글로 문제 제기하는 사람이지만 수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B의 일상을 알지 못한다. B의 일상이 ‘문제’가 되려면 사회적으로 의미 있게 전달돼야 한다.[6] B는 활동가 C와 대화하며 경험한 일을 설명할 언어를 찾고 함께 문제로 만든다. 사회복지제도를 기준에 맞는 ‘클라이언트’에게 연결하면서도 지금의 제도에 의문이 드는 사회복지사 D는 B와 C를 만나 제도의 빈틈을 깨닫는다.


나는 농성장이 몹시 추웠지만 좋았다. 농성장이 부양의무자기준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를 내걸고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농성장 한 켠에 놓인 간식은 갈 때마다 변주(!)해 있었는데 각자 조금씩 다른 주전부리를 챙겨와서 그랬다. 농성장을 지키는 꽤 긴 시간 동안 같이 발을 녹이고, 귤을 까먹고, 영화를 보고, 강연을 듣고, 나란히 누워 자면서 우리가 함께하고 있다는 감각이 피부에 와닿았다.


“만약 당신이 나를 도우러 여기에 오셨다면, 당신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봅시다.”[7]





살아온 궤적의 간극은 사안을 보는 시선, 감정, 관점의 차이를 만든다. 무엇이 문제인지, 세상이 바뀐다면 바뀐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우리가 만드는 선택지는 어떤 모양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판단은 제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가 함께하는 건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쟁에 적응하지 못하는 주체들을 사회 바깥으로 내치거나 ‘패자’로 만들거나 길들이려는[8] 사회에서, 농성장에 모였던 사람들이 승자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 말고, 그렇지 못해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일 말고 힘을 모으기를 선택했던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 또다시 근황을 묻는다면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여러 가지 삶과 언어가 교차하는 공간에서 빈틈을 메우며 함께 언어를 확보하고 힘을 보태는 중이라고 답하면 좋으려나. 결국, 별일 없이 잘 산다고 답하겠지만 말이다.


글 편집위원 응팡(mate517@naver.com)



[1] 홈리스 행동 사무실이 있는 공간이자 야학 수업이 진행되는 공간. 남영역 근처 구불구불 골목길에 자리 잡고 있다.

[2] 응팡, 「빈곤철폐의 날 퍼레이드에 다녀오다」, <홈리스뉴스>, 2019.12.1 http://homelessaction.or.kr/xe/index.php?document_srl=823588&mid=hlnews (검색일자:2020.03.11)

[3] 거리노숙, 쪽방, 고시원 등 홈리스 상태를 살고 있는 이들의 주거권 보장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단체들의 연대체. 고시원과 쪽방 등 비적정 주거 대책, 주거취약계층 주거지원사업 개선을 위한 활동 등을 한다.

[4] 남대문경찰서 뒤편에 위치한 남대문 쪽방촌엔 영업 중인 방을 기준으로 207가구 정도가 사는데, 이들 중 80명가량이 답변한 결과는 이와 같다. 재건축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았지만(73%), 절반 이상이(54%) 동료 쪽방 주민에게 들었다고 했다. 인터넷으로만 발표된 확정 공시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각각이 알고 있는 정보는 불분명했고 재건축 이후 주민대책을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70%) 이동현, 「“노숙하다가 어렵게 쪽방 살게 됐는데... 재개발돼도 여기 살고 싶다”」, <오마이뉴스>, 2019.12.21.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97960&CMPT_CD=SEARCH (검색일자 2020.03.11.)

[5] 이현정, 「굶어죽은 6살과 엄마... 3가지 못 풀면 ‘복지 사각 비극’ 계속된다」, <서울신문>, 2019.08.16.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816008003&wlog_tag3=naver (검색일자 2020.03.11.)

[6] 권김현영,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휴머니스트, 2019, p.155.

[7]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오월의봄, 2019, p.253.

[8] 브래디 미카코, 노수경 역,「아이들의 계급투쟁」, 2019,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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