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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Jul 22. 2023

<135호> Die어트

편집위원 모호

왼쪽 상단에 붉은색으로 Die어트라고 쓰여있다. 그 아래에는 박보람의 노래 <예뻐졌다>의 가사인 "나도 너처럼 사랑받길 원했어"라는 문구와 인스타그램이 띄워진 핸드폰의 그림이 있다

0. 나도 너처럼 사랑받길 원했어.(ft. 예뻐졌다)


다이어트.

본래 식단이라는 뜻의 영어 어휘로, 특정 목적을 위해 정해 놓은 식사 계획을 이르는 단어였으나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식사 이외에도 다른 수단(예를 들어 운동)을 포함하여 살을 빼는 행위 자체를 총칭하여 다이어트라고 부른다.

이는 건강을 갈고 닦는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나. 아니면 되려 건강을 죽이는 Die어트로 이루어지고 있나.

*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외모에 신경쓰기 시작한 주변 친구들과 달리 나는 공부에만 매진하기 시작했다. 명문대를 가기 위해선 고등학교 공부가 절대적이라는 생각에 지배당해 외모에 신경쓸 여유는 전혀 없었다. 나는 매일 밤을 새며 공부했다. 오로지 공부만 하며 나 홀로서 견뎌야하는 그 적적하고 외로운 밤들에 어느 순간 나는 달고 짠 야식들을 습관처럼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1년 사이에 나는 10키로 넘게 쪄버렸다.

이후 고등학교에 올라가 체육시간에 키와 체중을 재게 되었는데 경도비만으로 나와 적잖은 충격을 받았더랬다. 중학생 때까진 정상 체중에서 벗어난 적 없던 내가 과체중도 아니고 경도비만이라는 사실은 믿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이어트를 할 용기와 자극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대학 가면 살 빠지고 예뻐진다는 주변 어른들의 달콤한 이야기를 믿고 나는 체중 관리를 하지 않았다.

몸무게 상으로는 경도비만이지만 나에게 건강적인 문제는 없던 것이 그 이유 중 반이었고, 나머지 반은 가족과 친구들은 내가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해준다는 확신이었다. 그래서 ‘살’은 당시의 나에게 있어서 그렇게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볼에 복숭아를 달고 다니는 것만 같다며 ‘복숭아’라는 사랑스러운 애칭을 가지고 살던 나를 한순간 나락으로 빠뜨린 것은 19살 때 같은 반이 된 누군가의 악의였다.

쟤 저러다 바지 터지겠다

매점을 가기 위해 일어난 내 뒷모습을 향한 적나라하고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애써 내 얘기가 아닐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 아이가 바라보는 시선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순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 아이가 자신의 친구들과 속닥거리며 비웃는 소리가 고막을 터뜨릴 것처럼 울렸다. 안 들리는 줄 알았겠지만, 다 들렸다.

매점으로 가려했던 내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화장실로 향해 문을 잠그고 울렁거리는 속을 게워내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그런 말을 했지?

처음엔 그 아이를 원망했다. 그 다음엔 왜 하필 그 시점에 그 아이의 눈에 내가 들어온 것인지 나의 운을 원망했고 마지막엔 그 아이에게 조롱 당한 내 몸을 원망했다. 그 순간부터 내 몸의 살들 하나하나가 갑자기 크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평소엔 느낀 적도 없었던 팔뚝의 출렁임, 접히는 뱃살, 허벅지끼리 닿는 마찰 하나하나가 미련하게 느껴졌다. 복숭아라는 애칭을 가졌던 내 볼이 내가 먹은 음식의 양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 싫어졌다.

그 순간 난 다이어트를 결심했다. 무조건 성공해 이 불만족스러운 삶에서 벗어나겠다고 다짐했다. 건강과 운동에 대한 지식 하나 없이 결심된 나의 다이어트는 적게 먹어 몸무게 속 숫자를 줄이기만 하면 된다는 잘못된 생각에 지배되었고 그 결과 무작정 아침 점심 계란 2개, 두유 1팩만 먹는 극단적 식이를 시작했다.  


    정말 피곤해, 남들처럼 예뻐지는게  

굶는 다이어트만큼 단기적으로 효과적인 다이어트는 없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진실이었다. 극단적인 식이를 통해 나는 여름방학 한 달 동안에 10kg이상을 감량했다. 나를 본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도대체 어떻게 살을 뺀 것이냐고, 예뻐졌다고 칭찬했다. 그 말은 나를 뿌듯하게 만듦과 동시에 더 많이 살을 빼고 싶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무리를 해서 식이를 더 조였다.

그 결과 나는 기립성 저혈압을 얻었다. 또 탄수화물 부족으로 인한 복부에 붉은 반점들을 얻었고, 머리카락이 우수수 빠지기 시작했다. 샤워를 하면 빠진 머리카락으로 인해 배수구가 막힐 정도로 말이다.

굶는 다이어트로 건강에 있어 크나큰 부작용을 본 것은 비단 나의 사례만이 아닐 것이다.

179cm의 키를 지닌 모델 최소라는 평소 대식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패션 위크에서 활동할 당시 52kg에서 45kg로 몸을 만들기 위해 5주 동안 물만 마신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당시 손만 스쳐도 사포로 몸을 긁는 것 같이 고통스러웠다며, 뼈마디 마디가 아팠다고 털어놨다. 식습관을 바꾸고 다시 건강해지기까지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아이돌 출신 배우인 정채연 역시 무리한 다이어트로 건강에 이상을 겪었다. 그녀는 스스로 중학생 시절 통통했다고 했다. 당시 주변에서 ‘덩치 크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다이어트를 하게 됐다고. 연두부, 두유, 방울토마토만 먹고 음식을 거의 안 먹다시피 해 3개월 만에 16kg을 감량했지만 그때 한 다이어트로 건강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혈압이 나빠졌다고 한다. 이후 커피, 녹차 등 카페인이 든 음료는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고 밝히며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이처럼 극단적인 다이어트는 면역력 저하와 요요를 유발한다. 보통 단기간 다이어트로 굶는 다이어트를 선택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경우 면역력이 떨어지기 쉽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감기와 같은 외부 바이러스의 침투로 인한 질환, 면역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자가면역질환(몸속 항체가 정상적인 장기조직이나 세포를 공격하는 질환)이 발생할 수 있다. 면역계가 모근을 공격한다면 원형탈모가, 관절을 공격한다면 관절에 통증 등이 발생할 수 있다.

또 식사 횟수를 극단적으로 줄이거나 특정 음식만 먹게 되면 요요현상(체중을 감량하는 과정에서 감소한 체중이 유지되지 못하고, 체중 증가와 감소를 반복하는 것)이 나타나기 쉽다. 우리 몸은 영양분 공급이 일정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소모하기보다 저장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 지방이 늘기 쉬운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때 신진대사가 느려져 오히려 체중이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다이어트 이후 원래의 식사로 돌아갈 땐 느려진 신진대사로 인해 우리 몸은 여분의 칼로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살이 찌게 된다.

건강해지기 위한 다이어트에 대해서 공부를 조금이라도 했다면 굶는 다이어트라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체중조절은 자신의 비만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나이와 활동정도를 고려하면서 건강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적절하게 해야한다는 것을 안다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TV에선 마른 유명 연예인들이 하는 다이어트 약 광고를, 유튜브에서는 운동 없이 식단으로만 Nkg 빼기 등을 쉽게 접할 수 있고 공공 화장실과 버스, 심지어는 길거리를 걷다가도 몸의 마름을 위한 극단적인 방법들을 쉽게 접한다. 정작 영양교육을 통해 올바른 식습관과 영양지식, 다이어트 방법을 보급받은 적은 없는데.

현재 자신의 상태와 본래 체질이 어떻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라야만 할 것 같은 사회다. 그래서 극단적 다이어트로 세상의 틀에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마치, 엄연히 체형이 달라 맞을리 없는 신데렐라의 구두를 억지로 제 발에 우겨넣던 신데렐라 새언니처럼.


2. 니가 보는 게 전부가 아냐

초기엔 분명 건강이 목적이었을 다이어트는 미디어와 사회의 시선에 맞춰 점점 열풍이 되어간다. 그리고 그 목적 또한 건강에서 ‘마름 추구’로 변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마름은 특히 1020 여성들의 SNS에서 ‘먹토’(먹고 토하는), ‘씹뱉’(씹고 뱉는), ‘뼈말라’(뼈가 보일 정도의 마른 몸매)이라는 말을 유행시키며 그들의 몸을 서서히 망가뜨리는 중이다. 이는 일명, 프로아나 신드롬이다.

프로아나(pro-ana)는 찬성을 뜻하는 접두어 pro와 거식증을 뜻하는 anorexia가 합성된 프로아노렉시아(proanorexia)의 준말로, 거식증을 옹호하는 개인 및 집단을 말한다. 이때 거식증(신경성 식욕부진증)은 급식 및 섭식 장애의 하위 유형으로, 체중 증가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으로 인해 음식물 섭취를 지속적으로 제한하거나 거부하여 정상 수준보다 현저히 낮은 체중을 유지하며, 자신의 체형을 왜곡하고 체중 미달의 심각성을 부정하는 섭식장애를 가리킨다.

프로아나를 단순히 이전부터 문제였던 질환인 거식증으로만 정의내릴 수는 없다. 거식과 프로아나 간의 차이점을 정의내려보자. 과거의 거식 행위는 대부분 부르주아 여성의 개인적 차원에서 행해졌다. 거식을 타인과 함께하며 집단을 형성하기보다는 개별적인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반면 프로아나는 ‘집단적’으로 거식을 추구하는 양상을 보인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2021년 발표한 수치를 살펴보더라도, 최근 5년간 보인 국내 거식증 환자의 증가는 프로아나의 집단적 특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거식증 환자 중 10대 여성이 14.4%, 20대 여성이 11.4%나 증가한 사실은 그 집단(프로아나)의 중심이 1020세대 여성임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OECD 주요국의 성별 비만율 통계 자료에 따르면 조사 대상국 중 한국인들의 비만율은 5.4%로 주요 선진국 가운데 최저 수준으로(OECD Health Statistics, 2020) 평균적으로 가장 날씬한 체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고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여성의 마른 몸과 체중감량에 대한 열망은 외국보다 더욱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식품의약안전처(2019)에 따르면 2018년 7월부터 2019년 4월까지 식욕억제제를 처방받아 사용한 환자는 116만 명으로 그중 여성의 비율이 92.7%로 상당수의 여성이 체중 감량을 위해 약물 복용을 선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부 차원의 식욕억제제 관리 감독은 국민의 식욕억제제 약물 소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국내 의료용 마약류 식욕억제제 안전사용 기준을 살펴보면, 식욕억제제 처방 기준이 체질량지수(BMI) 25kg/m²로 WHO 국제 비만 기준인 30kg/m² (world Health Organization, 2020)보다 다소 낮다.  그렇기에 이는 의약품 오, 남용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신이 비만이 아님에도 비만으로 인식할 우려가 있는 것은 뼈아픈 사실이다. 식욕억제제가 당연한 것마냥 유통되며 1020 여성들 사이에 전파되면서 최근엔 기존 식욕억제제는 물론, 미국에서 ‘좀비 마약’으로 불리는 펜타닐 등 마약성 진통제에 식욕 억제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며 이 또한 널리 퍼지고 있다.

이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반영하듯, 아이들에게 식욕억제제 등이 과잉 처방되지 않도록 정부가 단속에 나섰다. 청소년에게 식욕억제제 등 의료용 마약류 4종을 과다처방한 것으로 의심되는 의료기관 약 60개소를 대상으로 기획점검을 실시한 것이다.

오유경 식약처장은 “식약처 마약류 오남용 감시단의 지속적인 기획점검이 청소년의 의료용 마약류 오남용을 억제하고 정부가 마약과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한 유튜브에서도 섭식 장애 관련 콘텐츠를 금지하기 시작했다. 유튜브는 “오랫동안 섭식장애를 미화하거나 조장하는 콘텐츠를 삭제해 왔으며 앞으로 새 가이드라인에 따라 사용자들이 따라하거나 유도할 수 있는 식사후 구토 혹은 극단적인 칼로리 계산과 같은 행동이 포함된 콘텐츠가 금지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섭식장애협회 및 기타 비영리 단체와의 협의를 통해 개발된 이번 정책 변경에 대해 가스 그레이엄 유튜브 글로벌 헬스케어 책임자 “유튜브가 시청자를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사후대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뼈말라’를 향한 프로아나들의 노력은 간절하다. 그들이 주로 활동하는 소셜미디어 트위터를 살펴보면, 해시태그 ‘#프로아나_트친소(트위터 친구를 소개합니다)’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커뮤니티를 통해 프로아나식 다이어트를 함께할 동료를 찾고 그들만의 세계를 더욱 견고하게 구축해나가는 중이다. 극단적인 식이 방법을 공유하고 식욕억제제를 불법적으로 구하는 방법까지. 특히 ‘개말라(매우 마름), ‘뼈말라(뼈만 남게 마름), ‘먹토(먹고 토하기), ‘씹뱉(씹고 뱉기)’ 등의 은어는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낸다.

그들의 이러한 극단적 다이어트에 과연 ‘성공’이란 있을까. ‘끝’이란 존재할까. 어떤 몸이 되어도 이제 그들을 만족시키기란 어렵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마른 몸을 추구하고, 더 극단적인 식이에 집착하게 된 까닭이다.

이런 그들이, 정녕 프로아나에서 벗어나기란 이미 늦은 것일까. 우리 사회는 그들을 정말 영영 놓치게 되는 것일까.


3. 이젠 나를 봐줘. 나를 더 사랑할래

늦었냐고 묻는다면, 늦었다 생각하는 시점이 가장 빠르다던 그 유명한 말을 인용하겠다.

마름에 대한 지나친 강박, 집착, 미디어로부터 주입되는 마름지상주의의 굴레에서 건강하게 벗어난 이들은 분명 존재한다. 극복이 힘들다는 것이 결코 해결대안이 없다는 말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심각성을 인지하고 변화를 원하는 순간 거식증 치료는 시작된다고 전문가들은 으레 말한다.

이정현 정신과 의사는 의학 매거진에서 “거식증 및 폭식증 자체를 치료하기 위해 충동을 조절해 주거나 식욕을 조절해 주는 약물을 일부 사용해 볼 수도 있으나 약물만으로 이런 증상들을 교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인지행동치료 등 정신치료와 병행해야 합니다. 거식증 및 대식증은 대개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여 만성적인 경과를 밟기 때문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체계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결국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고 도움을 요구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고 손을 뻗는다면 도와줄 전문가들은 언제나 두 팔을 벌려 안아줄 준비가 되어있다.

마름을 위한 무리한 절식 다이어트, 거식증, 그리고 후폭풍으로 오는 폭식증 등등으로 고생하는 것은 비단 남의 일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처음엔 우리가 한 번씩은 경험해봤을 ‘살에 대한 강박’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면, 정도의 차이 없이 우리 모두가 조심하고 항상 명심해야만 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프로아나도, 거식증 환자도 결코 남의 얘기만은 아니기에.


4. 예뻐졌다. 매일 듣고 싶었던 말.

지금의 내 근황을 궁금해하는 독자가 있다면, 나는 꽤나 잘 지내고 있다고 답하고 싶다.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을 벗어났냐고 물어본다면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웃기게도 난 여전히 365일 다이어트긴 하다. 그래서 이 글을 쓸 때 고민이 많았다.

내가 이 글을 쓸 자격이 벌써 되었나. 아무리 봐도 아닌 것 같은데. 그 생각의 반복이었다.

연세지 회의가 끝나고 이 말을 꺼냈을 때 모두가 공감해준 순간이 나름 이 글을 쓰는 용기가 되었더란다.

글을 쓰는 것과 현실과의 괴리가 있을지언정 쓰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다는 확신을 주는 순간이었노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극단적인 식이를 하지 않고 운동을 하려는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라는 것이다.

사실 세번째 파트를 쓰면서 구체적인 극복사례 예시를 쓰고 싶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 예시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거식증을 앓은 유명인들의 구체적인 극복과 관한 후속 기사는 나오지 않았고, SNS로 일반인들의 사례를 찾자니 그들 역시도 극복 중이라는 현재진행형 표현을 사용했다.

완치자의 사례를 찾기 힘든 것이 결코 극복 불가하다는 것과 직결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정말 오랜 기간에 걸친 노력의 끝에야 극복했노라고 말할 수 있기에 그들은 극복을 위해서 지금 이순간에도 노력하고 있구나, 라고 느꼈다.

마치 나처럼.

여전히 나는 노력 중이다.

살이 찌면 무심코 또다시 굶으려고 다짐하는 나에게서, 그리고 내 살을 지적하던 너에게서 벗어나려고. 살이 빠져 예뻐졌다는 말을 들으면 잊혀질 줄 알았던 상처는 생각보다 쉬이 아물지 않았다. 결국 살이 빠지냐 마느냐는 상처의 아물음과 큰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10kg가 빠진들, 15kg가 빠진들. 거울 속 나는 여전히 그대로로 보였기에.

나 역시도 극단적 식이 다이어트로 인한 부작용을 치료받기 위해 병원을 다니면서 전문가의 도움으로 그러한 극단적 다이어트의 위험성을 자각했고 건강한 운동과 식단을 하게 되었다.

전문가와의 상담과 스스로의 고민 끝에 깨달은 다이어트의 정답은 그 순간의 나를 그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원인을 스스로에게 돌리며 다그치고, 더 못나게 볼 것이 아니라.

아는 사람들에게도 숨기고픈 이야기였다. 벌써 4호째 글을 쓰는 만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 나의 필명을 바꿀까도 고민해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꾸지 않은 채 이 글을 내는 이유가 그러하다. 이런 고민을 안 해봤을 것 같은 사람도 생각보다 깊이, 그리고 아프게 경험을 했다. 그리고 이 경험은 결코 숨기기만 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이유 없이 날선, 그저 아프기만 한 그 손가락질과 비웃음에 아파했던 나와, 무수한 나들에게 이 글을 바치고 싶다.

우리는 그 자체로 아름다웠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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