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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세편집위원회 Jul 20. 2023

<135호> 농활

수습편집위원 한풀

연한 초록색 배경에 허수아비와 구름, 나무가 그려져 있다. 가운데에는 흰색 배경에 진한 초록색 글씨로 크고 굵게 '농활'이라고 적혀 있다.
인터뷰 참여자 목록이다. '반달', '살구', '하지', '짱돌', '자유'가 인터뷰에 참여하였다. 위 사진은 각각이 농활을 다녀온 시기를 표로 나타내었다.

농활? 그게 뭐야? 일단 만들어!                              

하지: 농활 가자.
나: 그게 뭔데?
하지: 농활.
나: 그러니까 그게 뭐야?
하지: 가서 농사도 짓고 요리도 해. 아무튼 재밌어. 가자.
나: 그래!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 어디다 신청해?
하지: 지금 코로나 때문에 없어. 가려면 만들어야 해.
나: ….응?
하지: 만들자.
나: ………….응.


친구에 대한 믿음이었을까? 시간 많은 휴학생의 패기였을까? 새로운 것을 향한 호기심이었을까? 코로나 이전의 대학 문화에 대한 로망이었을까? 그 이유가 어찌 됐든, 이 짧은 대화로 ‘농활 되살리기’가 시작되었다. 농활이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농활을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전 농활 담당자에게 연락하고, 역대 농활 자료들을 훑어보고, 농민회에 연락하였다. 그렇게 공부한 농활은 다음과 같다.

농활은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하였다. 최초의 농활이 몇 년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80년대 학번의 사람들도 기억하는 것이 농활이다. 농활은 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과 전국농민연맹(전농)의 조직사업 중 하나였다. 전국적으로 한대련에 속해있는 대부분의 대학들이 전농을 통해 각 지역의 농민과 연을 맺고 배정받은 각 지역에서 농활을 진행하였다. 전농이 대학과 지역을 연결하고, 8년 단위로 배정받는 지역이 바뀌는 체계였다. 그러나 현재는 한대련이 해산하였고, 농민회의 조직력도 약해졌다. 협력하던 두 단체가 각각의 어려움을 맞이하면서 농활 자체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세대학교 농활은 특히나 규모가 큰 편이었으며, 많은 농활대원을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익산시 농민회밖에 없어, 2013년부터는 농활을 전라북도 익산으로 갔다. 이전에는 논산으로 농활을 갔다고 한다. 2020년, 또다른 위기인 코로나19로 인해 농활이 중단되었으나 2022년 여름, 100명의 농활대원과 함께 농활을 재개하였다.

농활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중앙농활추진위원회(농추위)는 코로나19 전후로 구성이 다르다. 코로나19 전에는 중앙 3주체와 각 단과대 농주체로 구성되었는데, 후에는 중앙 3주체와 집행부로 구성되었다.

농추위의 조직도이다. 왼쪽은 코로나19 전 농추위가 중앙 3주체와 단과대 농주체로 이루어졌음을, 오른쪽은 코로나19 후 농추위가 중앙 3주체와 집행부로 이루어졌음을 설명한다.

농주체, 선전단장, 여성주체로 이루어진 중앙 3주체는 농활의 기조를 정하고, 농활 전체 실무 및 회계를 담당하고, 익산시 농민회와 소통한다. 중앙농주체는 농활의 총 담당자이며, 중앙여성주체는 폭력예방교육, 여성주의 교양 등 평등한 농활을 위해 노력한다. 코로나19 전에는 중앙선전단장이 상경집회와 선전전을 담당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선전단 활동이 중단된 상태이다.

그렇다면 농활에 가면 우리는 무엇을 할까? 농활에서의 첫날은 특별한 일과를 보낸다. 바로 별명과 주체와 규칙을 정하는 것이다. 농활에서는 다양한 학우들을 만난다. 처음 보는 사이든, 이미 친한 사이든 농활에서만큼은 서로 간의 나이권력, 학번권력을 지우고 평등한 농활을 만들어가기 위해 별명을 정해서 부른다. 또한, 농활에서 필요한 각각의 일을 챙기는 주체를 정한다. 한 마을로 가는 참가 단위를 농활대라 부르고, 농활대원은 개별 농활 참여자를 뜻하는데, 모든 농활대원이 최소 하나의 주체를 맡는다. 능동적으로 농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농활대를 책임지고 농민과 소통하는 농주체, 식단을 정하는 요리 주체, ‘청소하자!’라고 말하는 청소 주체, 사진을 남기는 기록 주체, 신발을 정리하는 신발 주체 등이 있다. 농활대원이 머무르는 마을회관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곳은 신발장이다. 신발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으면 마을 주민들에게 농활대의 좋은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어 신발 주체를 정하기도 한다. 농활대와 소통하고, 일거리를 주는 등 농활을 담당하는 마을의 농민은 마을주체이다. 농활대원들은 마을주체를 주로 '삼촌'이라 부른다. 많은 경우 남성인 농민이 마을주체를 맡는다. 그리고 20년 넘게 다르게 살아온 농활대원이 한데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는 만큼, 규칙을 정해 배려한다. 가공식품 먹지 않기, 깨끗이 숙소 이용하기, 마을 분들한테 항상 반갑게 인사하기, 디지털 디톡스 등이다.

왼쪽은 농활대에서 정한 규칙을 전지에 적어 마을회관의 벽에 붙여 놓은 사진이다. 오른쪽은 밥가와 식단, 식사당번을 적은 종이를 붙여 놓은 사진이다.


둘째 날부터 농활의 일과는 근로, 식사, 마실, 교양으로 이루어진다. 농촌의 일을 돕는 근로는 마을마다 다르고 계절마다 다른데, 딸기 꼭지를 따기도 하고, 비닐하우스를 갈 수도 있고, 깨를 털 수도 있다. 식사는 당번을 정해두고 전부 스스로 준비하고 정리한다. 10명 이상의 인원이 먹을 밥을 준비하는 것도 농활에서 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다. 마실은 마을에 나들이를 다니는 것으로, 돌아다니며 마을 주민들에게 농활 왔다고 인사를 드린다. 농활의 꽃이라 불리는 교양은 매일 밤, 농추위에서 준비한 발제문을 읽고 농활대원들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다. 2022년 농활은 농촌에서 생동하는 기후위기의 현실을 주제로 잡아 ‘농가에서 체감하는 기후위기’, ‘양봉업의 장기적인 미래를 상상하며’, ‘기후위기와 비거니즘’, ‘기후위기와 질병’, ‘기후위기와 우울’ 등의 글을 읽었다.


농민학생‘연대’활동

농활은 흔히 농촌 체험활동 혹은 농촌 봉사활동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연세대학교의 농활은 농민학생연대활동의 준말로, 일회적인 체험이나 시혜적인 봉사가 아닌, 학생과 농민 간의 연결에 중점을 둔다. 마을의 일을 돕는 근로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농민들이 학생들에게 마을회관을 내어준다는 것 자체가 농민에게 신세를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농활은 학생과 농민이 서로의 삶에 다가감으로써 사회의 공동구성원으로서 함께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쳐 노력하고자 하는 일련의 활동이다.

2008년 농활 자료집은 연대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연대라고 함은 어느 한쪽이 우월한 입장이 아니라 동등한, 그리고 사회적 약자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문제가 자신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고,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나: 농활에서의 연대가 뭐라고 생각해?

반달: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 많았던 것 같아. 농활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느꼈어. 기억하는 얼굴이 많아지고 그 사람들도 내 얼굴을 많이 기억하기 시작하는 것. 얼굴이 아니더라도 순간, 장소, 모든 것이 의미 있었어. 적어도 농촌 문제에 대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그 자체가 연대 아닐까?

하지: 연대감은 공통된 것으로 이어져 있다는 감각 아닐까? 2022년 농활에서 우리가 대주제로 기후위기 가져갔을 때 농민회에서 엄청 좋아하셨잖아. 그런 것처럼 우리가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다같이 얘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마을에 가서 “기후위기 때문에 작물농사 어떻게 된다면서요?”라고 말을 건네면 “날씨 더워져서 다른 작물로 바꿔야 하나 생각 중이다”라고 대답해주실 때. 같은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감각이 들 때.

살구: 작년 가을농활에서 공통의 의제가 생겼어. 마을 주민 7명이랑 다같이 농정세 교양을 하는데, 스마트팜 얘기를 했더니 농민 분들이 너무 공감을 해줬어. 그리고 기후위기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말이 너무 잘 통하는 거야. 애초에 기후위기를 가장 잘 체감하는 사람이 농민이잖아. 땅과 기후를 사용해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생각만 하는 것들을, 실제로 어떻게 작물이 변하고 있는지 얘기해 주셨어. 그리고 비거니즘도 알고 계시는 거야!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국가 차원에서 농업교육을 시켜주는데, 작물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사과의 상한선이 어떻게 되는지 이런 것들을 알려주고 작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가르쳐 준대. 그 교육에서 비거니즘도 배운다는 거야. 그래서 삼촌이 먼저 고기를 안 먹는게 기후위기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얘기하셨어. 공통의 의제가 너무, 있다는 것을 느꼈지.

짱돌: 과연 며칠 가서 연대라는 걸 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농민회랑 몇 번 소통을 못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마지막에는 ‘도착하면 연락드릴게요’ 하면서 버스를 탔는데, 그런 접점이 생겼다는 점에서도 하나의 연대의 시작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 그냥 내가 익산에 아는 사람들이 몇 명 있다는 것. 사실 되게 이상하잖아. 흔치 않은 기회잖아. 신촌에 대학을 다니고 있는 20대 사람들이 익산에 아는 농부들이 몇 있다는 것? 그러면 익산에서 무슨 일 있다고 하면 눈이 한 번 더 가잖아?


농활을 통해 농촌을 처음 가는 농활대원도 많다. 어느덧 농촌은 교과서 속 사진이나 TV 속 풍경이 되었다. 멀어진 농촌은 우리가 농촌에 의존하는 것들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했다. 그러나 농활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농촌은 우리와 동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우리의 세계이다. 농촌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 농민의 이야기가 나와 상관없지 않다는 것, 학생과 농민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서부터 연대는 쉽게 출발한다. 연대가 꼭 집회에 참여하거나, 함께 투쟁하거나, 아는 농민 한 명쯤 있어야 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일단 농활에 가는 것에서 연대는 시작한다.


상석마을 삼촌: 너희가 이렇게 농활에 오는 것만으로도 연대야. 와서 벽화를 그리든, 피(잡초)를 뽑든, 할머니가 무거워서 못 드는 장롱을 옮기든, 일단 농활이랍시고 와서 농민의 일을 돕고, 돌아가서 우리 쌀, 국산 먹거리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해.


그리고 연대는 빠르게 뻗어 나가 상상력을 일깨운다. 한 명의 농활대원이 해준 이야기를 빌린다. “익산에서 하림 본사를 본 게 충격적이었어. 서울 인구는 천만 명이니까, 매년 닭을 수억 마리 먹을 텐데, 서울에서 목이 잘리는 닭이 한 명도 없잖아. 서울은 그 많은 죽음을, 수억의 죽음을 누구에게 떠넘기고 있는가? 그 엄청난 악취와 폐수는 어느 지역에 떠넘기고 있는가? 몰랐는데 그게 익산이었더라. 그런 외주를 생각하면서 농촌과 도시는 하나임을 느꼈어. 근데 모든 안 좋은 건 농촌에게 떠넘기고 있는 하나.”

농촌사회학자 정은정은 저서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이란 실체를 정의하자면 살아오면서 먹은 음식의 총체이다. 음식은 오로지 물리적 맛과 영양, 칼로리의 총합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개개의 모든 음식에는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자연의 변천까지 망라되어 있고, 여기에 개인의 기억과 사연까지 깃들어 있다.” (정은정, 2021,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 한티재, pp.24)

그 모든 기억과 사연이 출발되는 지점에서 생활하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기억과 사연을 궁금해하고 간직하고 생각하는 것, 그렇게 쉽게 지나치지 못하게 되는 것이 농활에서의 연대라 감히 칭한다. 연대의 차원에서 농활을 한 번이라도 간 사람과 한 번도 가지 않은 사람은 분명 다르다고 믿는다.


농활에서의 식사. 비건 김치찌개와 미역국, 그리고 마늘을 다지는 모습이다.


괜찮겠어? 난, 멈추지 않는 페미니즘인데?

*누군가는 페미니즘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고 느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논리의 비약이나 지나친 확장을 낯설어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필자의 역량 부족 때문이다. 거듭된 고민 끝에 비겁하게 각주를 달았다. 미안하다. 필자를 탓하라!

*한 가지만 합의하고 출발하자. 고작 남성과 여성이 평등해지는 것이 페미니즘인가? 아니다!


농활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페미니즘이다. 그 이유는 단순히 농활에 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농활에 페미니즘이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는, 동시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농활의 안전과 평등을 위해서이다. 짱돌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들과 어떤 규칙을 만들고 며칠 내내 같이 지낸다는 것은 성인지감수성이 꼭 필요한 일”이다. “우리가 어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함께 지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농활에서의 페미니즘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형태가 견고한 농활의 중앙 3주체 중 하나가 중앙여성주체라는 점, 농활에서의 첫날 교양은 반드시 여성주의 교양글로 진행한다는 점에 미루어 보건데, 농활이 학생운동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페미니즘 의제가 들어오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1 언어의 차이

자유: 농촌은 도시보다 성 고정관념이 뚜렷한 공간이잖아. 농활에서도 삼촌이 남학생 위주로 근로를 시키고 여학생은 요리하게끔 하는 경우도 많아. 그럴 때는 ‘미리 작업 스케줄이랑 요리 당번을 다 정해놔서 이 인원이 꼭 근로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씀드려. 그런데 사실은 이게 농민과 학생 간 감수성의 간극을 좁히는 시도를 피하는 거잖아. 이럴 때는 농활의 페미니즘이 참 어려워.

하지: 농활마다 최소 한 번은 듣기 불편한 말을 들었어. 안 들을 수가 없어. 이런 부분에서 농민들이랑 얘기하는 게 특히 어려워.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고, 나는 굉장히 엘리트적인 페미니즘을 하고 있고, 20대 여성의 페미니즘을 하고 있는데, 이걸 그대로 농촌에서 적용할 수가 없잖아. 물론 그대로 적용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게 해야 할 때도 있지만…

                   

2 설득의 경험

살구: 내가 2022년 가을에 갔던 마을에 삼촌이 2018년 농활에서, “여자애들이 있어야 남자애들이 일할 때 힘도 나고 좋지”라는 말을 하셔서 문제가 됐었어. 지난 가을에 갔더니 삼촌이 계속 그 얘기를 하시더라. “내가 지난번에 그런 얘기했다가 농활 끊겼잖아~” 그래서 내가 “삼촌이 잘못했네~” 하면서 몇 번 지나가다가, 여성주의 교양 시간에 삼촌이랑 같이 있었는데, 삼촌이 또 그 얘기를 하시는 거야. “맞는 말이지 않냐?”고. 내가 속으로 ‘아, 지금이 기회다’라고 생각하고 얘기를 했어.

        살구: 삼촌, 저 오늘 일 진짜 열심히 했죠?

        삼촌: 응, 그렇지.

        살구: 제가 제일 잘했죠?

        삼촌: 응, 그렇지.

        살구: 삼촌이 그렇게 얘기하시면, 여자애들도 일 하러 왔는데, 여자애들은 남자애들 일 응원하러 오게             된 거잖아요. 저 오늘 일 진짜 열심히 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속상해요.

그 이후로 삼촌이 다시는 얘기를 안 꺼내셨어. 나한테는 엄청난 설득의 경험이었어. 우리 아빠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이는 삼촌이 나의 말에 동의를 했다는 것 말이야. 무언가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 농활에서 페미니즘을 말하는 게 더, 더, 필요한 일이겠구나.


3 상상력

자유: 농활대는 마을회관에서 머무르는데, 마을회관은 숙박을 위한 전용시설이 아니잖아. 그러면 딱딱한 바닥에 몸을 온전히 내어주어 얇은 담요를 덮고 자야 하고, 물리적으로 개인 공간이 전혀 없고, 화장실도 열악해. 벌레도 많고. 거기에다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체조하고 근로하고, 밤에는 교양까지 하니까 엄청 피곤하고 예민하지. 이런 불편함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로 포장하려는 건 아니야. 그런데 ‘우리나라가 정말로 잘 발전하고 있다면, 왜 이렇게 낙후되는 곳이 생기고 지역 간 격차가 생기고 농촌은 왜 열악할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농활의 페미니즘 중 하나라고 생각해. 내가 서울에서 누리던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농활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확장해서 내가 경험하지 못하는 또다른 세계를 학습하는 것이 정말… 페미니즘의 현장이지.


왼쪽은 전날 입은 옷을 각자 손빨래하고 빨랫줄을 만들어 널어놓은 모습이다. 오른쪽은 신발에 앉은 벌레를 찍은 사진이다.

4 공동체

살구: 농활은 전날 밤에 교양을 하고 치고박고 싸우고 갈등하고 대립해도 어쨌든 다음날 아침을 같이 먹어야 하는 곳이야.

반달: 농활의 바뀌지 않는 정체성은 만남이야. 농민과 학생 간, 학생과 학생 간 만남. 나는 사회가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변화하려면 더 많은 사람과 대화해야한다고 믿어서 농활이 정말 소중했지. 그리고 이게 한 쪽과 한 쪽의 만남이라기보다는 농활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영역으로 사람들에게 가닿기를 바랬고, 그렇게 인식하는게 너무 즐거웠어.


5 발견하지 못한 곳

하지: 난 항상 궁금했던 게, 농촌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거야. 요새 농사는 다 외국인이 짓는다고 하던데, 왜 나는 농활에서 외국인을 본 적이 없을까? 외국인들은 어디에 있길래 우리의 눈에 띄지 않고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도 얘기가 안 나올까? 한번 만나보고 싶어. 농촌에서 외국인노동자들이 얼마나 차별적인 대우를 받고 살고 있는지도 궁금해. 나는 농활을 재밌어하면서 오는 사람이고, 와서 페미니즘을 한다고 하는 학생인데 내가 눈감고 지나가는 부분이 있겠구나, 싶었어.



한편, 농활의 페미니즘이 항상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학생회의 탈정치화와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2015년 이전에는 학생회와 협업하여 농활이 진행되었다. 총학생회장은 ‘농대장’이라는 이름으로 학생회 차원에서 농활을 적극 홍보했다. 학생회를 하는 사람들이 참여자를 모으니 농활대원도 많았다. 학생회와 협업하니 학교의 공식적인 지원을 받기에도 수월하였다.

그러나 학생회는 더 이상 농활에 적극적이지 않고, 농활의 정치성과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은 꾸준하다. 2017년 공과대학 농주체는 농활의 정치성을 지적하며 농활을 분리하였다. 당시 과 단위로 농활대가 튼튼히 자리잡고 있었으니, 공과대학 전체가 손쉽게 농활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그렇게 공과대학은 농활을 따로 진행하였다. 현재는 과 단위의 농활 자체가 전부 사라졌으니 공과대학에서 따로 진행하는 농활은 없는 것으로 안다.                              

나: 공과대학이 농활을 분리했던 일을 기억하시나요?

반달: 제가 도와줬던 기억이 나요. 자세히는 기억이 안 나요. 17년도였는데, 당시에는 학생사회가 살아있었으니 조직력이 좋았죠. 그렇게 공과대학만 해서도 버스가 6~7대 갔을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한 번 하고 거의 바로 사라졌던 것 같아요.

살구: 제가 19년도에 중앙농주체 맡았을 때 다시 공대랑 합치려고 만나보기도 했는데, 잘 안 됐어요.


자, 이제 페미니즘으로 꽁꽁 뭉쳐 전통을 이으면서도 진입장벽이 있는 농활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기조를 저버리고 학생회와 함께하여 많은 인원이 농활을 기억하도록 할 것인가? 실은 후자는 불가능하다. 농활은 페미니즘을 분리할 수 없다. 그것이 농활이기 때문이다. 농활은 페미니즘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고 페미니즘은 농활을 통해 실천된다. 이러한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페미니즘은 멈추지 않고 확장되고 있다.


농활과 코로나19

코로나19로 2020년부터 2022년 봄농활까지, 농활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농활을 이어가고자 하는 노력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2020년 10월, 당시 농추위는 고등교육혁신원 워크스테이션에 “내일의 농활대”라는 이름으로 참가했다. 농활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하면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안고,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렇게 ‘소농에게 활로가 없다’는 문제를 인식했다. 작물을 직접 팔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니 시장에다 그때그때 조금씩 팔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익산의 고구마 농가와 협업하여 고구마를 팔았다. 농활을 설명하는 엽서와 고구마 스티커도 같이 나누어 주었다. 2021년 4월에는 농활의 일상을 기록하고 소개하는 “어쩌다, 농활”이라는 잡지를 만들었다.


살구: 일단 뭐든 해야 농활이 안 끊길 것 같았어. 농활이 지금도 있고 계속되고 있다는 걸 기록하고 싶었어.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문장으로 만들어낸 다음 끼워 넣는다는 느낌이 강했어. 하면서 스스로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하고 마음이 안 좋았지.


그렇게 농활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2022년, 나와 하지와 짱돌이 농활을 이어받았다.


나: 작년에 왜 농활 하려고 했어?

하지: 이대로 코로나 때문에 농활을 그만두는 것은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어. 농활 가서 만나거나 더 친해진 친구들도 많잖아. 그런 친구들이랑 학교에서 계속 만나면 농활 얘기가 안 나올 수 없으니까 우리끼리도 추억을 하는거지. 그래서 그냥 자연스럽게 농활을 다시 가야겠다고 생각했어. 코로나가 끝나면 농활을 다시 간다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어.


그러나 우리가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예상보다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우선 모든 농활대가 흩어졌다. 원래 유지되던 농활의 형태는 주로 과 중심의 농활대였는데, 그것이 완전히 무너졌다. 같은 과 사람들이 모이면 아무리 대형 과여도 일면식은 있을 것이고, 다같이 협동하는 분위기도 자연스레 형성되곤 하는데, 친구들 몇 명이서 신청한 그룹이 모인 농활대에는 정체성이 없었다. 농활을 가본 사람도 없었고, 농활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보여줄 ‘선배’들이 부재했다. 농활에서는 가공식품 소비를 자제하고, 농민들과 어떻게 인사를 주고받는지, 농활의 문화를 전할 ‘선배’들이 없었다. 농추위에서 ‘농활은 이렇게 하는 겁니다’라고 백번 말해봤자 간섭처럼 들릴 뿐이었을 것이다.

2022년 농활은 순탄치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코로나19로 농활의 전통이 끊긴 탓이라고 분석했다. 농활에서는 늘 사건사고가 있다지만서도, 감히 그 이상의 상황이었다고 생각한 이유는 코로나19 때문이었다. 시골은 불이 많이 없어 밤에 아주 어두컴컴해지니 밤에는 마을회관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 마을 어른들이 주는 음식은 되도록이면 사양해야 한다는 것, 공식적으로 술을 마시는 시간은 없으니 일찍 자고 다음 날 일정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것, 교양은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의제에 대해 다같이 토론할 수 있도록 진행해야 한다는 것, 식사는 반드시 직접 준비하고 직접 해결할 것. 농활의 모든 사소함과 그것에서 비롯하는 안전함을 코로나19가 망가뜨렸다.


하지: 작년 농활을 생각하면 우리 셋(나, 하지, 짱돌)이 밤마다 터지는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다가 택시를 불러서 타고 가던 것만 생각나.
안전벨트를 매고 이동하는 수박.


농활 정상영업합니다

페미니즘과 탈정치화, 코로나19에 둘러싸인 농활을 생각하다 보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다 결국 본질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는데, 농활의 필요성과 역할 그리고 마지막에 대해서이다. 이제 농활은 필요할까? 앞으로의 농활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 농활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한 적 있어?

살구: 늘. 예전에 2013년 중앙농주체를 만났었는데, 똑같이 말하더라. 농활은 항상 사람이 줄었어.

하지: 19년까지는 계속해서 참가자가 줄고 있긴 하지만, 농활을 가려는 사람들이 매년 꾸준히 있으니까 이 행사 자체가 없어지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막상 작년 여름농활을 해보니까, 이제 농활이 없어지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이제는 정말 더이상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자유: 사실 ‘이제는 없애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어. 우선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고 있는 것 아닌가 했지. 그래서 농활 문을 닫자는 얘기도 했어. 대신, 갈 사람이 없어서나 농활이 필요 없어져서가 아니라, 이 농활의 기조를 이어갈 사람이 없어서임을 분명히 하자는 얘기를 했었지.
나: 계속 농활이 있었으면 좋겠어?

하지: 응. 농활이라는 것의 본질은 도시와 농촌 간의 만남이니까. 농촌과 도시를 분절할 순 없잖아. 농촌은 다른 세계가 아니잖아. 그렇게 대학생과 농민의 만남은 어쨌든 있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만나고 연대하는 것이 이 사회에서 대학생의 역할이라고도 생각해. 대학생이 가장 그런 활동을 하기 쉬운 위치이기도 하고.

살구: 응. 타인을 만나고 50대 농민 남성을 만나는 일이 정말 드문 일인데, 그 경험의 기회가 나는 정말 좋았어. 실제로 농사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이 사람들이 실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익히는 게 쉽지 않잖아. 이 사람이 여기서 농사를 짓고 있다는 걸 보고 나면 뭔가를 결정할 때 생각이 날 수밖에 없어. 농활은 몰랐던 세계를 확인하는 일이고, 이런 경험이 많이 쌓여야 한다고 생각해. 쌀 뒤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되고, 그 쌀 뒤에 있는 사람이 나를 알고 걱정해주고, 나 또한 쌀 뒤에 있는 삶을 걱정할 수밖에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좋은 삶이야.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경험을 했으면 좋겠어서 농활이 계속 있으면 좋겠어.

반달: 응. 그리고 점점 더 필요하다고 봐. 농촌사회는 점점 더 위기니까. 그런데 이제 정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많잖아. 수도권에 인구의 절반이 산다는데. 기업화, 기후위기, 고령화 이런 모든 문제를 농활만큼 잘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 경험을 대학생들이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대학생은 많은 것을 형성해나가기 시작하는 시기니까.
나: 왜 농활을 사랑해?

반달: … 그러게. 난 처음부터 좋았는데(웃음). 꾸준히 찾아갈 수 있고, 나를 언제든 환영해주고, 누구와도 어떤 주제로든 밤새도록 얘기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인 게 좋았어. 그리고 많은 것들을 배우게 해준 공간인게 가장 의미가 깊어.

살구: 아주 많은 이유가 있고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데, 농활을 다녀온 경험이 나 자신과 나의 삶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낸 아주 큰 요소이고, 그 모습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야. 농활을 통해서 다른 삶의 공간, 다른 세계와 조우할 수 있었고, 그곳에 찾아가고,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만나면서 내가 살아가는 세계 또한 확장됐어. 태풍이 오면 익산이 걱정되고, 가을이 오면 윤례이모네 대추가 잘 열렸는지 궁금하고, 상석마을에는 또 어떤 벽화가 그려질지 기대돼. 농활에 가지 않았다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세계였을 거야. 내가 상종삼촌과 윤례이모를 걱정하는 것처럼 이모 삼촌들도 내 안부를 묻고, 내가 다시 가면 아주 반가워해주셔. 나를 알고, 걱정하고, 반기는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다는 게 정말 큰 위안이 될 때가 있어.

자유: 불편한 것들을 마주하고 당연한 것들을 불편하게 바라보며 ‘불편하려고’ 떠나는 농활의 감각이 좋아. 몇 안 되는 안전한 전통을 사랑하는 걸까. 그리고 농활은 정말 마음이 넘쳐나는 곳이야. 나도 모르는 학교 선배들을 기억하는 삼촌들의 마음, 농활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추억 가득한 마음을 농활에 가면 느낄 수 있어. 마을회관에 딱 도착하면, 그 모든 정이 넘쳐흐르는 것 같아. 올해 결국 해보기로 한 이유도, 아직도 농활을 기억하고 농활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고, 여전히 농활을 가고자 하는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야.


그렇게 올해도 농활을 간다. 2023년 7월 25일 화요일부터 29일 토요일까지, 2023 여름농활이 진행될 예정이다. 여름농활 참여자 모집은 연세농활 인스타그램(@ys_nonghwal)을 통해 공지된다. 글의 현장을 온 몸으로 확인하고, 감각하고, 함께할 사람들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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