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래퍼'를 찾아서 - 편집위원 녕
I’m not from his RIB
재키와이가 내 취향의 래퍼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토 튠을 자주 쓰는 하이 톤 랩에, 일본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패션, 그리고 스윙스 산하의 레이블 인디고 뮤직 소속이라는 점까지 영 내 취향은 아니었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 한 후에도 힙합을 좋아했지만, 내가 자주 듣는 여성 래퍼는 슬릭과 최삼이었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고 실력도 좋지만, 그로 인해 힙합 씬의 중심에서 밀려난 여성 래퍼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재키와이가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는 것을 친구에게 들었을 때는 좀 의아했다. 그러나 재키와이의 두 번째 EP <Neo EvE>를 듣는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난 인간 창녀도 성녀도 아니네
울려 적신호 삐뽀 수갑은 차기 싫어
금목걸이 가져다줘 나도 성공하고 싶어
내 이름은 앨리스 여긴 너무 이상해
여왕이 되려면 깔려야 해 쟤네 밑으로
나는 갈래 저 위로
재키와이 - <Anarchy> 中
앨범의 제목은 <Neo Eve>일지언정, <RIB>에서 “I’m not from his RIB”이라 외치는 재키와이는 이브보다는 가부장적 신과 아담에게 저항한 릴리스에 가깝다. 종교 권력으로 자신을 성추행했던 목사 외삼촌과 그를 두둔하는 부모를 고발한 <To. Lordfxxker>는 경이로웠다. 힙합 씬의 중심에서 이런 메시지를 외치다니, 이런 래퍼를 내가 본 적이 있었던가?
니네 던진 돌에 난 됐지 이런 썅년이
새벽 네 시 문이 열리고 누가 들어와 난 잠에서 깼지
목사 한다는 외삼촌이란 새끼 가끔씩 내 몸을 만져댔지
너희를 위해 기도했으니 돈을 달라며 깽판 쳤지
종교에 미친 우리 부모님 쩔쩔매며 안절부절했지
난 당신 따윈 안 믿었고 일요일이 오면 소름이 끼쳤어
어두운 옷장 안에서 언어 유희 아냐
진짜 그 안에서 쳐맞고 당신을 보기 위해서 멍한 눈으로 준비를 했어
혐오란 단어를 알기도 전에 싹은 트고 있었지 내 맘 안에서
모든 학대란 학대 아래서 살아있는 내 숨은 죽었어
(중략)
지금 내가 사는 서울 빨간 십자가들의 터울
내가 너한테 뭘 빌어야 한다면 저것들 치워서 만들어줘 불바다로
재키와이 - <To. Lordfxxker> 中
그 순간, 내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여성 래퍼’들이 생각났다. 힙합 씬에서 어렵게 나타나고 음악을 하고 앨범을 내도, 끊임없는 장애물에 부딪혀 사라진 ‘여성 래퍼’들 말이다. 재키와이 이전의 그 ‘여성 래퍼’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오랜만에 그들을 기억하고 싶었다.
여성 래퍼 = 윤미래와 아이들?
한국 힙합 씬에서 여성 래퍼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인가? 많은 이들은 자연스럽게 윤미래를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대중의 인식에서 최고의 한국 여성 래퍼는 윤미래다. 랩과 알앤비 보컬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하드웨어, 업타운/타샤니/솔로 활동의 성공적이었던 커리어, 한국 1세대 힙합의 전설 타이거JK와의 결혼까지 윤미래의 수식어는 다양하다.
그러나 윤미래가 19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한국 힙합 씬에서 여성 래퍼 원톱으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독보적인 래퍼인가? 윤미래가 다양한 장점이 있는 뮤지션이라는 점은 사실이지만, 윤미래에게는 래퍼로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바로 한국어 가사를 본인이 100% 직접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윤미래는 한국어를 늦게 익힌 편이었고, 데뷔 초에 낸 곡들에서도 본인이 직접 작사한 한국어 랩은 많지 않다. 가장 최근에 발매한 정규 앨범 2집 <GEMINI>에서도 그랬다. 세계적인 래퍼 나스(Nas), 드레이크(Drake) 등도 고스트 라이터 논란에 휘말리며 곤욕을 겪은 힙합 씬에서, 래퍼가 자신의 가사를 100% 쓰지 않는다는 것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작업물이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그동안 윤미래 이상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여성 래퍼가 없었다는 점은 더욱더 서글프다. 한국 힙합 씬에는 다양한 여성 래퍼들이 존재해 왔지만, ‘여성 래퍼=윤미래’라는 견고한 신화는 다른 여성 래퍼들의 존재를 지우고 억압하는 기제로 쓰였다. 한국 힙합 씬에서 모든 여성 래퍼들은 윤미래와 비교를 당했다. 윤미래와 비슷한 허스키한 톤의 여성 래퍼는 환영받았고, 윤미래보다 높은 톤의 목소리를 가진 래퍼는 외면받았다. 이러한 윤미래 신화가 심화하여 나타난 래퍼 중 하나가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 2의 트루디다. 트루디는 랩 스타일, 패션, 헤어스타일 등 윤미래의 모든 것을 따라 한 카피캣이라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했다. 그리고 마침내 <언프리티 랩스타> 시즌 2에서 우승했다. 트루디는 한국 힙합 씬에서 부당한 방법일지라도 영리하게 윤미래 신화를 이용한 케이스다. 그러나 윤미래 신화는 남성 래퍼들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 잣대다. 한국 힙합 씬에서 딱 한 명의 절대적인 남성 래퍼를 뽑을 수 있나? 뛰어난 실력자는 여럿 있을지라도 남성 래퍼에게는 하나의 절대적 기준으로 작용하는 래퍼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윤미래 신화는 여성 래퍼에게만 적용되는 잣대이자 유리 천장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윤미래 본인도 유리 천장에서 자유로운 뮤지션이 절대 아니었다는 점이다. 타이거 JK와의 결혼과 육아, 그리고 소속사와의 분쟁 등으로 인해 윤미래는 지속적인 음악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정규 3집을 낸 이후 2018년 정규 4집 <GEMINI 2>를 내기까지 11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렇기에 윤미래는 엠넷 <4가지쇼> 타이거JK 편에서도 여성 래퍼 원톱이라는 수식어를 부담스러워하고 후배 여성 래퍼들을 응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윤미래 신화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국 힙합 씬의 여성 래퍼들에게 굴레로 작용했다.
그렇다면 윤미래 말고 한국 힙합 씬에는 어떤 여성 래퍼가 있었는가? 대중에게는 한국 힙합 1세대의 대표적인 그룹 허니패밀리 멤버이자 브라운아이드걸스의 멤버인 미료, 대중적으로는 2000년대 중반부터 타이미가 익숙하긴 하다. 은지원, 미스터 타이푼과 함께 그룹 클로버의 일원으로 함께 활동한 길미 역시 주목받았다.
그러나 나에게 그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여성 래퍼는 타이미나 졸리브이가 아닌 리미(rimi)다. 리미는 2006년 힙합 레이블 소울커넥션에서 믹스테잎 <Awesome Girl>로 데뷔하면서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에 등장했다. 그러나 리미는 당시 버벌진트, 산이, 스윙스 등이 속했던 크루 오버클래스의 여성 래퍼로 더 유명해졌다. 당시에도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유력 크루/레이블 중 여성 래퍼 구성원은 희귀했다. 한국 힙합 2세대 레이블 중에서도 덜 마초적이었던 소울컴퍼니에서 유일한 여성 멤버는 보컬인 셀마였다. 부산의 유일무이했던 힙합 레이블 지기펠라즈에 EXID의 LE가 소속되어 있긴 했지만, LE는 지기펠라즈 시절에 눈에 띄는 작업물을 내놓지는 못했다. 리미는 달랐다. 리미는 가사 쓰는 능력이 뛰어난 래퍼였고, 여성 래퍼로서는 드물게 2010년에 16곡의 정규 앨범 <Rap Messiah>를 내기도 했다. 당시에 스스로를 같은 크루의 버벌진트나 산이를 넘어설 랩 메시아라고 묘사한 <Rap Messiah>나 이별할 때의 자책감을 솔직하게 표현한 <얼굴이 못생겨서 싫었던 거니>를 많이 좋아했다.
그러나 당시의 리미 역시 ‘여성 래퍼’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연애와 섹스에 쿨하고 센 화장을 하는 ‘여성 래퍼’의 모습을 리미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구현했다. 물론 이는 리미 개인의 책임이 아닌 힙합 씬의 책임이다. 이는 미국 힙합 씬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여성 래퍼의 ‘Bad Bitch’, 팜므파탈 프레임이 한국 힙합 씬에 그대로 들어왔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다. 그리고 그런 리미에게 여성 래퍼의 코르셋이 치명적으로 작용한 사건이 벌어졌다.
2011년, 한국의 유명한 힙합 커뮤니티 사이트 힙합플레이야에서 두 명의 아마추어 남성 래퍼가 리미에 대한 디스 곡을 내면서 성희롱성 가사를 썼다. 이에 대해 리미는 고소로 대응하겠다고 말했지만, 오히려 힙합 씬 안에서는 조롱당했다. “스스로 ‘Bad Bitch’라고 지칭하고 섹스어필했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식의 2차 가해가 각종 힙합 커뮤니티에서 난무했고, 이 사건 이후 리미는 한국 힙합 씬을 떠났다. 여성 래퍼에 대한 코르셋이 얼마나 유해한지 보여준 사건이다.
이 시기에 여성 래퍼의 코르셋에 대한 지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3년, 한국 힙합 씬에도 컨트롤 디스전에 여러 래퍼가 엮이면서 여성 래퍼 간의 디스전이 벌어졌다. 졸리브이가 같은 여성 래퍼인 타이미, 키디비에게 뚜렷한 작업물 없이 섹스어필로만 힙합 씬에 남으려는 점을 디스했다. 이는 한국 힙합 2세대에서 벌어졌던 거의 유일한 여성 래퍼 간 디스전이었다. 졸리브이의 지적은 유의미했으나, 여성 래퍼 개인에게만 책임을 돌리고 힙합 씬의 구조적인 문제는 지적하지 못했다. 이에 맞디스곡을 낸 타이미와 키디비 역시 섹시함이 여성 래퍼의 특권이라고 주장했다. 즉, 이 디스전은 소모적인 다툼 이외의 논의로 확장되지 않았다.
그리고 2015년 1월, <언프리티 랩스타> 1이 시작되었다.
‘언프리티 랩스타’가 아닌 ‘프리티 언랩스타’
<언프리티 랩스타>는 2015~2017년 엠넷에서 방영된 <쇼미더머니>의 스핀오프 프로그램으로 여성 래퍼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었다. 물론 그만큼 논란도 있었다. <쇼미더머니>는 어찌 됐건 성별 상관없이 참가할 수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여성 래퍼만이 참가할 수 있는 <언프리티 랩스타>는 특혜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돌았다. 그러나 <언프리티 랩스타>가 여성 래퍼를 위한 ‘특혜’라고 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 우선 <쇼미더머니>는 예선에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이지만, <언프리티 랩스타>는 사전 섭외를 통해 10명 내외의 소수 인원만이 기회를 가져가는 프로그램이었다. 즉, 기존에 힙합 씬에서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지니거나 규모 있는 레이블에 속한 여성 래퍼만이 기회를 차지할 수 있었다. <언프리티 랩스타>에서는 <쇼미더머니>처럼 낮은 인지도에서 시작해 성장한 시즌 1의 진돗개와 로꼬, 시즌 6의 우원재와 같은 케이스가 등장할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언프리티 랩스타>는 그동안 힙합 씬이 여성 래퍼에게 씌운 굴레를 그대로 씌웠다. <쇼미더머니>도 힙합의 자극적인 면만 강조한 프로그램이었으나, <언프리티 랩스타>는 거기에 교묘한 여성 혐오까지 더해진 프로그램이었다. 오히려 <언프리티 랩스타>가 추구하는 여성 래퍼의 모습은 ‘언프리티 랩스타’가 아닌 ‘프리티 언랩스타’에 가까웠다.
우선 ‘프리티’는 여성 래퍼들에게 적용되는 외모 코르셋을 의미한다. 흔히 여성 래퍼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는 니키 미나즈, 카디비와 같은 래퍼들이다. 진한 메이크업에 노출이 있는 스트릿 패션의 ‘Bad Bitch’ 이미지는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여성 래퍼들의 코르셋이 되었다. 실제로 이 모습에 맞지 않는 여성 래퍼는 조롱당하기도 한다. 본인의 패션 스타일로 인해 래퍼는커녕 과외 선생님 같다고 조롱당한 시즌 3의 케이시처럼.
<언프리티 랩스타>의 이러한 외모 코르셋은 여성 래퍼에 대한 성적 대상화와 연결되어 있다. <언프리티 랩스타>에서 주어지는 주제 중에서는 섹시 컨셉, 섹스어필이 항상 있었다. 시즌 2의 육지담은 섹시함을 여성 래퍼의 특권이라고 말했지만, 섹시함은 언제나 여성 래퍼에게만 강요되었다. 이때 흔히 나오는 반례가 섹시 컨셉을 자주 내세우는 박재범 등 소수의 남성 래퍼들이다. 그러나 똑같이 섹시 컨셉을 해도 여성 래퍼가 표현하는 방식과 남성 래퍼가 표현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언프리티 랩스타>에서 남성 심사위원들이 섹스어필 주제를 제시하면 여성 참가자들은 철저히 스스로를 성적 대상화하였다. 여성 래퍼는 섹시한 컨셉에서 본인의 트월킹, 몸매, 패션 등을 강조한다. 그러나 남성 래퍼가 섹시한 컨셉을 내세울 때는 항상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동반한다. 박재범의 대표적인 곡 <몸매> 가사를 보더라도 성적 대상화를 당하는 대상은 여성이고, 남성 래퍼는 이를 소비하는 주체다. 이렇듯 힙합 씬에서 여성과 남성의 성적 대상화 방식은 전혀 다르며, 힙합 씬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보여준다.
I be like hold up wait a minute girl
어딜 가 너무 쳐다봐서 미안해
근데 니가 너무 섹시해서
눈을 뗄 수가 없어
보고싶어 너의 몸몸몸매
박재범 - <몸매> 中
더불어 ‘언랩스타’는 여성 래퍼의 실력에 대한 편견을 의미한다. 여성 래퍼는 남성 래퍼보다 랩을 못한다는 편견 역시 <언프리티 랩스타>에서 유효했다. 이는 시즌 3에서 여성 래퍼 vs 남성 래퍼 공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 에피소드에서 남성 래퍼들과 대결하는 공연이 있다고 사회자가 밝히는 순간, 여성 래퍼들은 자신감을 잃었고 공연에서도 위축된 모습이었다. 이때 래퍼 킬라그램이 여성 래퍼들의 공연을 보고 “위문 공연”이라고 말한 것은 저열했지만 본질을 관통했다. 힙합 씬이 여전히 여성 래퍼들의 실력을 의심하고 인정하지 않으며, 눈요깃거리로 여긴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줬다. 이에 대해서는 <언프리티 랩스타> 심사위원들 대다수가 남성이었다는 점 역시 특기할 만하다. 힙합 씬에 여성 래퍼 자체가 부족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제작진이 현존하는 여성 래퍼 중에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으로 나올 만한 실력자가 없다고 판단한 점이다. 그나마 시즌 3에서는 제시 등 시즌 1의 선배들이 등장하긴 했지만 여전히 주요 심사위원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언프리티 랩스타>에서는 많은 여성 대상 오디션 프로그램과 유사하게 여성들끼리의 캣파이팅을 강조했다. <언프리티 랩스타>가 시즌 1에서 치타의 “피곤하겠죠. 여자들만 있으니까.”와 제시의 “여자들은 잘해줘도 소용없어요.”를 강조한 편집에서 이 프로그램의 방향성은 밝혀졌다. <쇼미더머니>에서 남성 래퍼들이 서로 싸우는 것은 힙합과 디스의 면모지만, <언프리티 랩스타>에서 여성 래퍼들이 디스하는 것은 ‘여자’라서 그런 거다.
이렇게 여성 래퍼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언프리티 랩스타>에서도 여성 래퍼들의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치타는 시즌 1에서 우승함으로써 힙합 씬에서 자신의 기반을 더 다질 수 있었고, 시즌 2에서 탈락할 위기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아이돌 출신 예지는 솔로 음원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언프리티 랩스타>는 힙합 씬에서 여전히 여성 래퍼들이 얼마나 험난한 위치에 있는지를 다시 보여줬다. 한국 힙합 1세대 크루인 허니패밀리 소속이자 브라운아이드걸스 멤버인 미료, 클로버의 멤버 길미 등 베테랑 여성 래퍼들까지 <언프리티 랩스타>에 나와야 했다. 이는 <쇼미더머니> 6에서 피타입이 출연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 한국 힙합 1세대 래퍼 피타입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을지언정, <쇼미더머니>에 가르침을 주기 위해 자신감 있게 나왔다. 그렇기에 <쇼미더머니>에서 탈락했어도 언더 힙합 씬에서 신인 래퍼들을 지원하는 do the right rap 캠페인을 펼칠 수 있었다. 반면 미료와 길미는 피타입처럼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최근까지 활발하게 한 것도 아니었고, 본인이 설 자리가 그나마 <언프리티 랩스타>밖에 없었다.
여성 래퍼가 어렵게 <언프리티 랩스타>의 도박에서 성공했더라도 험난하긴 마찬가지다. <언프리티 랩스타>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던 산이는 예지의 싱글 곡 <미친개>에 피쳐링하면서 성희롱 가사를 썼다. 산이는 예지 본인의 허락을 받고 가사를 썼다고 밝혔지만, 그렇다고 한들 성희롱 가사인 건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요구에 쿨하게 응해야 하는 여성 래퍼의 모습은 비참했고, 다시 한 번 힙합 씬에서의 여성 혐오와 차별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할 만큼 했다
그러나 힙합 씬도 한국 사회의 흐름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2015~2016년에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래퍼 중에서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고 페미니즘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이들이 생겼다.
2014년도에 첫 앨범을 낸 최삼은 2015년, MC메타와 함께 발표한 곡 <쇼미더힙합>에서부터 힙합 씬의 여성 혐오를 비판했다. 이러한 최삼의 문제의식은 2017년 싱글 앨범 <TABOO>에서 온전히 드러났다. <할 만큼 했다>는 디지털 성폭력을 비판했고, <꽃뱀>은 ‘꽃뱀’을 가부장제로 인해 꺾였어도 물러나지 않는 여성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아무 생각 없다기엔 선택적으로 잡은 침묵
암묵적인 동의, 다 알고 있는 친목
그 대단한 유대로 한다는 게 남의 배변 구경
네 머리만큼 네 모든 게 싹 다구려
포르노에 필터 먹이면 그게 다 예술
넌 만나게 될 걸 눈앞에 피 흘리는 예수
네가 던진 돌은 정확하게 약자를 향해
넌 뭣도 아냐 그냥 똑같은 기득권 방패
최삼 - <할 만큼 했다> 中
그래 다 나를 탓해
왜 조심하지 않아 일을 만들어 둘 다 똑같아
그렇다면 어떻게 해도 전부가 내 탓이라면
그저 태어나고 사는 것조차 다 내 탓이라면
퍽 기울어진 평등에 사는 나는
더이상 여기 머물러 있고 싶지가 않은 마음
넌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음 어디까지 갈 것 같아?
난 아직 기어다녀 내 다릴 부러뜨렸거든
다 기어다녀 우릴 부러뜨렸거든
아직 기어 다녀 기어 다녀
널 물어뜯어 버려 다 집어삼켜 버려
최삼 - <꽃뱀> 中
힙합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페미니스트라면 슬릭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페미니즘 행사의 김연자로 유명한 래퍼 슬릭. 그러나 슬릭은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기 전부터 힙합 씬에 큰 충격을 준 래퍼였다. 여성 래퍼에 대한 코르셋이 만연한 힙합 씬에서 홀연히 나타난 노 메이크업, 숏컷, 그리고 뛰어난 실력의 래퍼 슬릭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다. 그런 슬릭이 페미니스트로 성장하는 과정 역시 팬으로서 뿌듯했다.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기 전에 슬릭이 낸 정규 앨범 1집 <Colossus>도 여성 팬에게 힘이 되는 곡들이 많았다. 여성 팬을 ‘소녀 팬’으로만 보는 래퍼들이 즐비한 힙합 씬에서, “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 난 너의 팬”이라 말하며 팬들을 응원하는 <공연장 맨 앞줄에>는 값졌다. 같은 앨범에 수록된 <One and Only> 역시 자의식이 넘치는 스웩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 관해 이야기했다.
Suede Timb's on my feet 바지 내려 입는 여대생
숱하게 지나다니지는 않아 내 style
꽁무니에 달리는 시선 난 부러 엉덩이에 힘줘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맘에 안 들었지
그 무엇보다 내가 느끼는 기분이 중요하다는 말 따위는
하나도 맘에 닿지 않아 고막까지 안 들렸지
그런 말들은 다 빛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표현일 뿐
Dark circle 짙게 묻은 내 얼굴과는
아무 상관 없는 동화 속 허풍인 줄 알았어
감은 눈 뜨고 보니 거울 속에 내가 묻네 “넌 누굴 닮았어?”
난 one and only 누구보다
나다워 오직 나 하나만
아름다워 (내비둬 내비둬)
상관 말어 (내비둬 내비둬)
<One and Only> - 슬릭 中
래퍼들의 프리스타일 랩을 들려주는 프로그램 <마이크 스웨거(Mic Swagger)>에서 슬릭은 자신을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hell’ a feminist)로 소개하면서 랩을 했다. 이 프리스타일 랩은 힙합 씬 내외로 큰 이슈가 되었고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캡처 사진이 크게 유행했다.
하나 얘기할 게 있어
내가 아니면 아무도 얘기 안 할 것 같아서
여긴 아직도 계집애 같다는 말을 욕으로 한다면서
아직도 게이 같다는 말을 욕으로 한다면서
아직도 아무도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걸 모른다면서
그게 힙합이라고 하면 나는 오늘부터 힙합 관둠
<마이크 스웨거(Mic Swagger)> - 에피소드 17 中 슬릭 파트
그 후에도 “나는 너의 용기야”로 페미니즘의 언어를 랩으로 담은 <Ma Girls>, 낙태죄와 출산지도를 비판한 사운드클라우드의 <내꺼야>를 내면서 슬릭은 페미니스트 래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또한 슬릭뿐 아니라 그가 속한 레이블 데이즈얼라이브 역시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레이블로 거듭난다. 그리고 2018년, 슬릭과 데이즈얼라이브는 이수역 폭행 사건을 기점으로 래퍼 산이와 페미니즘 관련 디스전을 벌이게 된다. 2018년 11월, 산이는 본인의 페이스북에 이수역 폭행 사건 동영상을 올리면서 페미니스트들에게 비판을 받고 이로 인해 유튜브에 <FEMINIST>라는 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곡은 ‘가족 사랑하니까 여성을 혐오하지 않아’라는 논리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에 데이즈얼라이브의 제리케이와 슬릭은 각각 맞디스곡 <NO YOU ARE NOT>과 <EQUALIST>을 냈다. 이때 슬릭이 “내가 바라는 것 시스템을 탓하라면서 시스템 밖으로 추방하지 않기”라 말했을 때의 서글픔이란.
최삼과 슬릭이 꾸준히 페미니즘적 지향을 보여준 래퍼들이라면, 컨트롤 디스전과 <언프리티 랩스타> 출연 당시만 해도 여성 래퍼의 코르셋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키디비의 변화는 다른 의미로 놀라웠다. 2016년, 자신이 조였던 코르셋에서 벗어나 힙합 씬과 미디어의 여성 혐오를 차분히 지적하는 <Nobody’s Perfect>을 들을 때는 반가우면서도 신기했다.
수많은 사람들 중 여자의 고충은 비슷해
내가 좀 괜찮은 여자가 되려면 꾹 참아야만 하는 비스켓
티비에는 마른 몸을 강요하면서 잘 먹는 여자가 이쁘대
원치 않아도 시작된 이 게임은 여자라는 이름에
그 참가 자격이 주어지지 예쁜 애는 돈을 움켜쥐지
소개남은 주선자에게 첫 질문을 해 “Hey is she pretty?”
백치는 괜찮아도 돼지는 안돼 정돈 안된 손톱, 털도 안돼
완벽한 Bitch들에게 깔아주는 레드 카펫
<Nobody’s Perfect> - 키디비 中
페미니즘을 외치는 여성 래퍼들을 보면서 느꼈던 해방감은 내가 힙합 씬에서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씬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모습은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슬릭이 속한 데이즈얼라이브는 제리케이, 슬릭, 리코 단 세 명이 속해있는 작은 레이블이다. 그리고 데이즈얼라이브는 페미니즘 지지 기조를 띄면서 힙합 씬의 주변부로 점차 밀려나게 되었다. 최삼 역시 현재 힙합 레이블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키디비는 브랜뉴뮤직 소속이지만 2017년 이후로 정식 음원을 내지 않았다. 힙합 씬에서 올바른 가치를 추구하는 뮤지션들이 생기는 건 반가웠지만, 그로 인해 그들은 씬의 주변부로 밀려나고 불이익을 받았다. 여전히 <쇼미더머니>는 흥행했고, 나는 힙합 씬에서 잘나가는 래퍼들의 곡을 점차 듣지 않게 되었다.
Not Maria but Human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여성 페미니스트 힙합 팬의 입장에서 재키와이의 등장은 기이하기까지 했다. “Not Maria but Human”이라 외치는 래퍼, 인디고 뮤직과 딩고 프리스타일의 콜라보로 나왔던 곡 <띵>에서 다른 남자 래퍼들을 제치고 훅을 가져간 래퍼 재키와이. “복면 안 쓰고도 물리쳐 한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워”라는 가사로 가볍게 마미손을 풍자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 넘치는 모습을 보여줬던 재키와이. 그리고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띵>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재키와이의 가사를 들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마 난 이번 겨울이 끝나도 살아남을 거야 인마
너는 말했지 여자 래퍼 수명 2년이라고
근데 이미 5년째 꼭 붙어있지
이젠 이 바닥 밑바닥도 아닌 꼭대기
넌 신경 써봐 니 안위
Dingo X Indigo Music - <띵> 中 재키와이 파트
이는 재키와이에게만 해당하는 변화가 아니다. <언프리티 랩스타>에서 여자들만 있으면 피곤하다고 말하던 치타는, 웹 예능 <쎈마이웨이>에서 제아와 함께 데이트 폭력과 디지털 성폭력에 단호하게 No를 외치는 상담가가 되었다. 이전 가사들에서 다른 여자들과 자신을 구분 짓던 헤이즈는, 정규 앨범 1집의 타이틀곡 <She’s fine>에서는 더 이상 연애와 남들의 오지랖에 신경 쓰지 않는다. 매번 페미니즘 행사에서 최삼과 슬릭을 볼 때면 반갑고 기쁘면서도 울컥했다. 그리고 <고등래퍼> 시즌 3에서 여성 래퍼 최초로 우승한 이영지를 봤을 때는 울어버리고 말았다. <언프리티 랩스타>의 코르셋과 캣파이팅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여성 래퍼를 <고등 래퍼>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영지의 우승은 한국 힙합 씬에서 한 시대의 끝을 보여줬다. 여성 래퍼의 기준이 윤미래 신화와 코르셋으로 국한되는 시대는 끝났다.
물론 여전히 여성 래퍼의 길은 좁고 힘들다. 여전히 여성 래퍼는 남성 래퍼에 비해 외모 평가에서 자유롭지 않다. 재키와이는 카메라에 비치는 모습이 매번 다르다고 ‘천의 얼굴’로 불린다. 많은 여성 래퍼들의 연관검색어로는 여전히 몸매, 성형, 실물 등이 뜬다. 아직도 여성 래퍼는 페미니즘적 생각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순간 마녀사냥을 당한다. 그럼에도 여성 페미니스트 힙합 팬인 내가 지금까지 힙합 씬에 남을 수 있게 한 원동력은 바로 여성 래퍼들의 용기였다. 그래서 지금도, 앞으로도 그들에게 박수와 연대를 보내고자 한다. 슬릭의 가사대로, 힙합 씬에서 페미니스트인 우리는 서로의 용기와 방패가 될 것이다.
녕(laurenrhee34@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