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문우 작가연맹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맘때에 이 정도로 춥지는 않았을 터인데, 이미 1구역에는 한파주의보가 떨어졌다. 매일 격변하는 날씨로 ‘정상적인’ 날씨 예측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오래전에 납득한 원은 묵묵히 두꺼운 자켓을 입고 집을 나섰다. 라이브프린팅 도입 이후 첫 매출 분석 회의를 하는 날이라 평소보다 일찍 나와서인지 주위에 사람도 없고 어둑어둑했다. 원은 두 팔로 가슴께를 감싸 안으며 서둘러 광장을 가로질렀다. ‘안으로의 일탈’이 라이브프린팅 시장에 늦게 발을 들인 만큼 중요한 회의였다. 아직 정확한 수치는 몰랐지만, 한발 앞서 라이브프린팅을 시작했으며 오랫동안 ‘안으로의 일탈’과 함께했던 제를 채간 라이벌 출판사의 매출이 좋지 않다는 소문은 들었었다. 탈지구 오디션에 뽑힌 후의 인지도와 새로운 기술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해서 제의 신간을 라이브프린팅 책으로 바꿔 출판했을 것이다. 그러나 출판 직후 짧게 화제는 되었지만 출판사가 예상한 매출은 얻지 못했다고 들었다. ‘안으로의 일탈’과 함께 ‘종이출판의 마지막 보루’처럼 여겨지던 제의 글이 라이브프린팅으로 출판되다니, 골수팬들의 실망과 의아함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의아한 건 원도 마찬가지였지만, ‘제도 결국 변했다’라는 팬들의 추론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아무리 출판사를 옮겼어도, 제가 마지막으로 지구에서 쓴 책을 라이브프린팅으로 출판할 리가 없다. 작가와 연락도 안 되니 출판사 쪽에서 제멋대로 도박을 한 것이겠지. 제로부터 연락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제의 마지막일 수 있는 책이 라이브프린팅으로 넘어갔다는 생각은 제의 안위만큼이나 원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직장에서는 마치 태양광 판 추락 사태가 일어난 적이 없었다는 듯 그럭저럭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직장 동료들끼리 진지하게 다른 구역에서 일어난 지진이나, 이후에도 잇달았던 잔해 추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일상에서 신행성의 존재가 언급되지 않을수록 원은 더욱 근질근질해졌다. 부질없어 보이는 활동에 지쳐서, 남은 일생 동안은 편안하게 살고 싶어서 반신련을 나왔을 터인데, 자신이 기에게 준 자료가 반탈 활동에 대대적으로 쓰이면서 불가피하게 골치 아픈 일에 다시 엮여버린 원이었다. 자료의 출처는 익명으로 지켜졌지만, 자신이 보낸 영상이 캡쳐본으로 인터넷 상을 떠돌아다니거나 언론에서 사용될 때마다 가슴이 철렁였다.
텅 빈 듯한 광장에서 유일하게 인척이 느껴지는 곳은 휘황찬란한 CCBS 본사보다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텐트 무리였다. 지진 직후부터 CCBS 정문을 둘러싼 시위대는 아직까지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갑자기 나타난 시위대를 둘러싼 주민들의 우려의 목소리가 컸지만, 어느샌가 1구역의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바람에 펄럭이는 현수막에는 익숙한 로고가 박혀있었다. 묻힐 뻔했던 17구역 사건을 강제로 공식 언론의 구역까지 끌어오고, 신행성의 현 상황과 탈지구 오디션 합격자에 대한 진상규명 시위에 앞장서게 된 반탈지구연합이었다. 그리고 지진 직후 기자회견 이후로부터 반탈의 얼굴이 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기였다. 신행성을 둘러싼 논란이 커진 만큼 언론의 관심과 음모론의 대상이 된 기의 얼굴은 텔레비전에 나올 때마다 어딘가 지쳐 보였다. 그 이유가 단지 바쁜 것 때문은 아니라는 걸 원은 알고 있었다. 17구역의 실종자 명단은 나날이 늘어났지만, 생존자 명단에는 아직도 기가 애타게 찾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기에게는 미안하지만, 원은 생존자 명단에서 그 이름을 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다.
내일 신행성공동체연합 쪽이랑 직접 만나기로 했어요. 기자들도 불렀으니까 오늘 뉴스에 결과가 나올 거예요.
한동안 연락이 없던 기에게서 어제 받은 메시지였다. 텐트를 둘러싼 카메라 크루를 지켜보던 원은 눈길을 하늘로 돌렸다. 만성적으로 뿌옇게 흐린 공기 때문에 신기루처럼 뒤틀려 보이는 일출을 보며, 그 너머 어딘가에서 죽어가고 있을 행성을 떠올렸다.
“기, 여기 있었네요.”
“앗, 완. 일찍 일어났네요?”
기는 들고 있던 꽁초를 밟아 끄고는 곧바로 한 개비를 더 꺼내 불을 붙였다. 그러고는 완 쪽을 향해 몸을 돌려 자세를 고쳐 앉아 담뱃갑을 내밀었다.
“하나 피울래요?”
“괜찮아요. 매번 거절해도 매번 권하시네요.”
기는 어차피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왼쪽 입꼬리를 잠깐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완은 담배 연기를 뱉는 기와 약간의 거리를 둔 채 걸터앉았다. 그는 지난 육 개월을 쉼 없이 달려온 사람이다. 어마어마한 관심과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면서 어떻게 이런 삶을 버텨내고 있는 걸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으나 무엇부터 물어봐야 하는지, 어떻게 물어봐야 하는지, 그 전에 감히 물어봐도 되는 건지... 기는 의중을 알 수 없는 건조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생각들이 엉켜 머릿속이 복잡했다.
“제일 생각나는 게 뭐예요?”
입을 먼저 연 것은 기였다. 그는 저요? 하고 되묻는 완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글쎄요. 머리맡에 두고 자던 인형들 그립다고 하면 이상한가요.”
“아뇨, 그럴 리가요. 저도 보고 싶네요. 예전에 자연사박물관에 파는 멸종동물 인형이 갑자기 엄청 유행했던 적이 있거든요. 저도 하나 있었어요. 안에 든 솜이 다 헤져서 힘없는 물개 인형이었는데, 평소에는 있어도 별 신경 안 쓰다가 가끔씩 생각나서 안고 자던.”
“앗, 제가 어릴 때 엄마가 그 코끼리 인형을 좋아했다고 들었어요. 창고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음, 어차피 지금은 다 소용없겠네요.”
기는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고, 완은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답했다. 완은 기를 슬깃 바라보았다. 완은 그가 언제나 얼굴에 띠고 있는 특유의 미소가 어딘지 정말 기묘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다.
“기는 특별히 생각나는 거라도 있어요? 물개 인형이 제일 보고 싶다는 건... 이상하잖아요.”
“이상할 건 없죠.”
“무슨 말 하는지 알면서... 아니잖아요.”
기는 담배갑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철제 담배갑의 이음쇠가 덜그럭거리는 소리만이 침묵을 채웠다.
‘할 수 있을 만큼 계속하고 싶다’고, 어린 날의 기는 쉽게도 했던 말이다. 물론 그 시절의 기에게는 각오와 용기, 포기가 필요한 판단이었으리라.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터무니없을 만큼 어리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확실한 길은 정해져 있고 그것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던 길들은, 눈앞의 공기만큼이나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늘 곁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도 손가락 틈으로 도망치듯 흘러가 버렸고 그걸 막을 수도 없었다. 그저 뒤로 돌아갈 수 없으니, 걸어 온 방향이 잘못되지 않았기를 기도하며-어쩌면 이미 잘못되었더라도 어쩔 수 없이- 마저 발걸음을 옮기는 정도였다.
완의 질문에 기가 잠시 생각을 하는 동안 바람이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손가락에 가까워진 불씨가 따끔하게 뜨거웠다. 가족이나 파트너, 그 비슷한 관계에 대해 물어보고자 했던 걸까. 아니면 이 일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
“제일 보고 싶은 게 물개 인형이면 어떤가요. 아무리 작은 거라도 돌아갈 곳을 떠올리는 건 생각보다 중요하더라고요.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계속 소중하게 지켜질 수 있도록이요. 전에는 거창한 목표를 세워 두고, 큰 계획을 쪼개고 작게 만들어서 하나하나 이루다 보면, 사소해 보이는 것도 꾸준히 하다 보면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은 않네요. 그냥 눈앞에 있는 다음 계단을 밟기 바쁜 거죠. 돌아 보면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지났네, 하고.”
기는 완의 표정을 살폈다. 완의 낯은 알쏭달쏭했다. 완은 이 모든 일에 휩쓸리듯 끌려 들어온 사람에 가까운데,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애써 없앨 필요도 없지 않을까, 기의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쯤 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기가 하는 일을 잘 모르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모를지도 몰라요. 그래도 그런 사람한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완은 멋쩍게 웃었다.
완은 지난여름, 치솟는 더위에 불평하며 오디션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때보다도 더욱 긴장하고 있었다. 방송국 앞에 임의로 지어진 막사에서 그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직된 자세 탓에 자꾸만 머리가 간헐적으로 울렸다. 성의 도움으로 그럴듯하게 정리해둔 짐들 사이로 삐죽 튀어나와 있던 자신의 ‘신행성 프로젝트 지원서'를, 완은 웃는 얼굴 뒤로 조용히 떠올리고 있었다.
당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은 완 혼자만의 일이었지만, 현재는 그 어떤 누구도 미래에 대해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정확한 정보 하나 없이 막연히 더 나은 삶을 살고자 신행성을 목표로 하던 완이었다. 하지만 그 두루뭉술한 목표조차 한낱 신기루임이 밝혀진 지금, 완은 말 그대로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갑작스레 눈앞을 스치며 떨어지던 로봇 팔. 보지 말았어야 했을까.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힌트가 될 그 무엇도 알지 못한 채 이 자리에 왔더라면. 그랬다면 상황이 좀 좋아졌을까. 적어도 자신을 낡았지만 아늑한 아파트 단지에서 메마른 대도시의 임시 천막으로 몰아넣은 누군가에 대한 불평으로 좌절스러운 날들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 그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네요. 그래도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언젠가 꼭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완을 부를게요.”
하얀 김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성기고 지쳐있었으되 여전히 짙은 심지가 남아있었다. 그 목소리에서 완은 언젠가 성의 책장에서 보았던 자작나무를 떠올리곤 했다. 기의 말은 어렴풋이 대화의 종결을 알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잠시간의 침묵이 필요한 듯했다. 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외면한다 한들 로봇 팔의 인물을 본 것도, 그 내용을 올려 원이라는 인물과의 접점을 만들어낸 것도 모두 자신임을 완은 알고 있었다. 그 몇 가지 행동들로 인해 지극히 평범했을 완의 삶은 완전히 모습을 달리했다. 누군가는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의 책임을 물을 상대가 필요했다. 정보가 들어오는 족족 터지지 않는 핸드폰에 기록해 두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누군가를 찾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텔레비전의 선전을 그대로 믿고 뚜렷한 목표 없이 따르던 저와 다르게 겉보기에 화려한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하여 ‘사람들을 위한 길’을 고수하는 기의 모습을 알아버린 이상, 완은 기를 탓할 수 없었다. 짧은 지식을 바탕으로 알아낸 제1구역 지배층 개개인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니, 그들은 각자 이 상황의 결정적인 부분에서 보란 듯이 빠져있었다. 엉켜버린 채로 크기만 불려간 분노가 사실은 특정한 실체를 향하고 있지 않았음을 깨닫는 순간, 한데 모인 강한 원망은 쏘아 올린 그대로 돌아와 완을 집어 삼켜버렸다. 한참 전의 일이었다. 자책과 긴장 속에서 완은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제가 보아도 터무니없던 기자 회견과 이어지던 농성, 극심한 피로와 좌절. 그 속에서 완이 택한 생존 전략은 이전의 상태를 최대한 유지하는 것이었다. 날마다 들리는 소식은 완을 매일매일 바꾸어 놓기에 충분했지만, 너무 먼 곳을 바라보는 일은 완에게 버거웠다.
“... 아, 맞다. 성이가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몸을 일으키기에는 많은 힘이 필요했다. 보란 듯 엉덩이를 장갑 낀 손으로 탈탈 털었다. 뭔가 찾은 게 있다나 봐요. 내일 신행성 공동체… … 그 사람들 만나기 전에 잠시 볼 수 있냐고 묻던데요. 부러 활기 도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말을 한다고 온 것이, 그만.
“저 부른다고 하신 건 기억하고 있을게요. 할 일이 별로 없어서, 이런 거라도 해야 마음이 풀리거든요.”
감기 조심하세요. 때에 맞지 않는 상투적인 인사를 끝으로, 가벼운 듯 무거운 완의 발걸음은 기로부터 멀어져 갔다.
덜컹.
문이 열리고 식사가 배달되었다. 식사라고 해봤자 적당한 포만감과 영양 섭취가 가능한 젤이 들어간 포 세 개가 다였다. 제는 그것을 받아들고 용병의 발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다음, 포를 까서 내용물을 손가락에 묻혀 침대 아래에 들어갔다. 같은 제형의 재료로 그려진 바를 정(正)자가 벌써 수십 개에 달하고 있었다. 이 셈법이 맞다면, 여기에 갇힌 지도 꼬박 반년이다.
6개월 전 그때, 사라졌던 경비병들은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곧바로 돌아왔다. 원에게서 ‘도망쳐’라는 제목으로 온 메일의 푸시 알림을 클릭하던 찰나였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그들은 이제 무장을 하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다시 전자기기를 빼앗길 상황에 놓였다는 걸 느낀 제는 그들이 어떤 지시를 내리기 전에 재빠르게 그 메일을 읽어나가려고 노력했다. 그가 얻어낼 수 있었던 정보는 신행성이 허구라는 사실이었다. 애석하게도 그다음으로 시선을 옮긴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휴대전화를 낚아챘다. 스치듯이 본 마지막 단어는 ‘실험’이었다. 작가임에도 속독 실력은 전혀 늘지 않는 자신의 눈이 원망스러웠다.
어떤 철저한 사명감보다는 관성이 붙은 얼굴로, 그러나 충분히 위협적인 태도로 그들은 탈지구 대상자들을 오와 열에 맞추어 서게 했다. 예상했던 수순대로 그 용병들은 선발자들의 짐과 옷을 수색해 모든 전자기기와 기록수단을 빼앗아갔다. 거기에는 제의 작가 노트도 있었다. 자신의 책만큼은 끝까지 종이 발행을 강행했을 정도로 제는 물성이 있는 매체에 대한 고집이 있었다. 그래서 신작 아이디어나 번뜩 떠오른 문장들, 혹은 습작들은 휴대전화 대신 모두 종이에 기록했다. 라이브프린팅을 제시한 대신에 기존의 출판사보다 훨씬 좋은 여건을 제공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바람에 옮겨버린 마지막 출판사에서는 탈지구 성향의 제가 이런 면모를 가지고 있는 것을 신기해하기도 했다. 작가로서의 삶이 통째로 날아갈 위기에 처했는데도 제는 그것에 대해 고민할 겨를 따위 없었다. 도망쳐야 한다는 동물적인 반응과 동시에 실험이라는 단어는 어느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를 끼워 맞추느라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중년의 몸을 하고, 무기를 든 그들에 맞서 구조도 모르는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시도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우선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나면 언제든 필사적으로 도망치겠다는 각오로 눈길은 용병들이 들이닥친 문에 고정시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각자의 방으로 옮겨졌다. 같이 수용된 사람들끼리 작당 모의 하는 것을 차단할 심산인 듯했다. 그 때문인지 방음 시설은 철저했고, 창문도 옆 벽면이 아닌 천장에 최소한의 빛이 통과할 수 있을 만큼만 뚫려 위치정보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한 눈에 전체를 파악할 정도로 좁은 방이었지만, 사회 초년생에 막 접어들었을 때 생활했던 고시원보다 훨씬 쾌적했기에 원의 도망치라는 그 단말마가 좀 묘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실험’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맥락을 유추하건대, 아마 본인들이 그 대상이리라. 하지만 무슨 실험?
정체를 알 수 없는 고민과 긴장으로만 6개월의 시간을 보냈다. 그 실험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프로젝트는 잠정 중단된 듯 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여기서 나갈 수 없는가? 그들은 무엇이 폭로되는 것이 두려워 나를 아직도 먹이고 재우며 가두고 있고, 바깥세상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인 채로 제는 오도카니 바닥에 앉아 창을 쳐다보았다.
대상자들을 격리시킨 후 경비병들은 모든 것에 넌더리가 난다는 얼굴로 ‘사실’을 말하고 다녔다. 이 모든 것이 신행성에 가기 위한 준비 단계라는 사실. 신체 건강한 자들로 모집하였으나 태양계 너머 멀리 있는 신행성에 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 격리된 우주선을 타야 하므로 일정한 건강 수준을 맞추기 위함이라는 것. 그러나 제는 이 말이 꼭 탈지구 대상자들은 오염되었으니 신행성에 가기 위해서는 정화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지상의 더러운 때가 육신에 가득한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리니 깨끗한 마음으로 신께 기도드리는 자만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며 엄한 말로 선포하는 사이비 종교 같지 않은가.
제가 할 수 있는 추측은 파편으로 떨어지는 몇 문장뿐이었다. 탈지구 오디션 대상자들에게 어떤 실험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갑작스러운 지진과 그 이후에 등장한 경비의 무장을 고려할 때 적어도 이 프로젝트에는 문제가 생겼다. 즉 중단된 것으로 보는 게 옳을 터다. 반신련에서 오랫동안 일한 원이 '도망쳐'라고 말할 정도의 수준이라면 이것은, 생각하고 싶지 않으나 인간 실험이 분명하다. 그동안 탈지구 오디션에 선발되었던 사람들은 신행성 공동체연합이 운영하는 언론매체만을 통하여 선발되어 기쁘다는 소감과 앞으로의 행복을 밝은 얼굴로 다짐하고 있었을 뿐, 그 누구도 다른 매체와 개인적인 인터뷰를 하거나 SNS를 운영하지는 않았다. 한 SNS 셀럽이 오디션에 선발된 후 신행성에서의 생활을 브이로그로 올리겠다는 발언을 했으나 얼마 뒤 브이로그는커녕 계정이 삭제되었던 것을 제는 기억한다. 그렇다면 경비들이 통신수단을 빼앗은 것은 비단 이번만의 일은 아닐 것이고, 제가 겪고 있는 이 상황을 앞선 대상자들 역시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살아있다면 이 건물의 다른 어딘가 있거나, 아니면 다른 건물에 있을지도 모른다. 만일 죽었다면, ...
생각의 꼭지가 잡힐 듯 말 듯 두서없이 휘날렸다.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만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사실’을 믿고 안 믿고의 여부는 각자의 자유로 넘겨졌으나 경비병의 허리께에 달린 전기충격봉은 자유가 아닌 강제를 말하고 있었고 그 앞에서 의심은 의미도 자리도 잃었으므로 제는 결국 동지 없이 홀로 남았다. 6개월 전 그때 원에게 보낸 파일을 확인이라도 했다면 단서가 몇 가지 더 주어졌을지도 모르는데, 싶다가도 만약 그때 확인했다면 원에게 전송하기도 전에 들켰으리라는 확신이 오간다. 새 인생이 펼쳐질 거라고 믿다가 처음 보는 불길한 곳에 갇히기 직전, 지진을 틈타 직원의 것으로 보이는 휴대폰을 주운 후 ‘보고 후 삭제’ 폴더에서 아무거나 원에게 전송한 것이었다. 파일이 문서였는지 영상이었는지조차 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어떻게든 원이 잘 사용해주었으리라 여길 뿐이다. 그놈은 반신련에 있을 때도 늘 기민하고 침착했지. 죄다 나한테는 없는 능력이었어. 그래서 동경하고 존경한 거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신이 원보다 못한 존재라고 생각지 않는다. 무너져 가는 출판업, 라이브프린팅도 아니고 종이로 인쇄되는 고전적인 출판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유로, 거기에 이 업계의 핵심인력인 작가라는 점이 더해져 지난 십여 년을 무시당하며 살아왔어도 제는 기죽지 않고 당당했다. 원이 기민하다면 제는 느린 만큼 신중했고 정확했다. 무게를 지키며 자신을 존중할 줄 알았다. 그게 반신련 시절 제가 다른 활동가들보다 비교적 오래, 또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었다.
기록하며 기억하고 정보의 편린들을 수집할 것이다. 방법을 찾을 것이다. 살아나갈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환경이 바뀌었어도 종이책이 면면히 살아남았듯이. 딱딱하게 굳은 집게손가락 끝의 젤을 매만지며 제는 다짐했다.
“영수증 필요하세요?”
완은 고개를 내젓고 말없이 고물상에게서 책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이상하게 보일 것이 분명했기에 자켓 품속에 책을 감싸 안고 골목길에서 빠져나왔다. 1구역에서 서점은 사라진 지 오래였기에 그럴듯한 종이책의 자취를 찾는 데 몇 달이 걸렸다. 결국 찾아낸 책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사들이는 한 고물상점의 서랍장 안에 있었다. 이제는 출판이 종료된 작가 제의 단편집, 겉표지가 뜯겨있어 제목은 보지 못했지만 성이 마음에 들어 할 건 분명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큰길로 나선 완은 주변 사람들과 같이 걸음걸이를 늦췄다. 외부인이라는 걸 드러내서 좋은 일은 없었다. 다른 웃음소리, 특이한 말버릇, 사뭇 다른 몸짓은 ‘원주민’의 매서운 눈총과 비웃음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에서 크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외곽 지역 피난민들과 1구역 주민 사이의 작고 큰 충돌은 어느새 일상이 되어있었다. 시민들의 관용에는 한계가 있고 연민의 유효기간은 짧았기에, 완은 어느새 성만큼이나 바깥에서 말을 안 하게 되었다.
불편함을 감내하며 종이책을 찾아내려 했던 건 성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겨우 1구역에 도착하자마자 반탈 회의에 불려 갔다 온 직후 성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로봇팔 추락의 심각성과 생체 실험 의혹에 대한 얘기를 못 들었을 리가 없지만 이에 대해 완과 대화할 의욕도, 기력도 없어 보였다. 17구역에서 나올 때 막무가내로 들고 오게 한 완의 오디션 지원서에 대해서는 당연히 아무 말이 없었다. 완 또한 오디션의 진실을 알게 된 후 굳이 그 주제를 들먹이진 않았다. 그렇게 며칠을 바람 빠진 풍선처럼 비적거리던 성은 반탈의 두 번째 대규모 시위를 기점으로 집에 들어오는 날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성과 제대로 얘기를 나누고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언제였을까? 17구역 상황을 직접 겪어봤을 뿐 아니라 반탈 내에서도 자료 수집을 꼼꼼하게 잘하기로 알려진 성이기에, 17구역 참사의 진상 규명과 실종자 및 사상자 확인을 주도하게 되었다. 평소에도 맡은 일 하나는 확실하게 잘 해내던 성이지만 17구역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이라 그런지, 상황의 위급성이 와닿아서인지 성은 눈에 불을 켜고 반탈의 업무에 더욱 온 힘을 쏟았다. 덕분에 바쁜 성 대신 완이 반탈과 성 사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도 맡게 된 것이다. 성이 이전의 의욕을 되찾은 건 다행이었지만, 무언가에 쫓기듯 몸을 혹사하는 가족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기와 만나기 위해서라도 성이 집에 일찍 와있을 것이다. 임시 숙소에 가까워질수록 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거처에 도착하자 기는 이미 와있었다. 성의 몸통이 화면을 가리고 있었지만, 테이블 위에 놓인 패드 화면에는 사람들의 사진이 나열되어 있었다. 방안의 무거운 분위기에 들어갈 엄두를 못 낸 완은 입구에서 서성이며 책을 만지작거렸다.
“미, 미안해요.” 긴 침묵을 깬 건 성이었다. 얼굴이 반쯤 손에 파묻혀있어 기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성이 왜 미안해요. 성이 미안해할 건 하나도 없는데. 모르고 있는 것보단 확실하게 아는 게 나을 수도…” 기의 손이 떨렸다.
“...서인게 확실한 거죠? 정말로 서도...” 성이 패드를 들고 화면을 휙휙 넘기더니 기 쪽에 돌려 무언가를 보여줬다. 낮은 목소리로 말해 완에게 잘 들리지는 않았다.
“무너진 건물 안에서…가스 유, 유출로 불이…유골이 오, 온전하지는 않아…신원 확인은 거의 확실…”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는 괜찮다고 했는데… 그래서 믿으려고 했는데…”
울음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기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더 이상은 엿보면 안 될 거 같은 느낌에 완은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 인기척은 귀신같이 알아챈 성이 고개만 돌려 뒤를 돌아봤다. ‘눈치 없이 이 타이밍에 오냐?’라고 질책하는 듯한 성의 매서운 눈빛에 완은 성에게 책을 건네준다는 목적도 잊고 줄행랑칠 뻔했다. 완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기에게 무언가를 중얼거린 성은 급하게 방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이, 이게 뭐가 좋은 일이라고 여, 엿듣고 있어?”
“아니, 엿들으려 한 게 아니라…” 노려보는 성의 표정을 보고 변명은 포기했다. “17구역이 왜? 우리 동네는 괜찮대?”
“우, 우리 동네에만 위성 떨어졌냐? 17구역 저, 전체가 뒤집혔는데.” 성이 한숨을 푹 쉬며 표정이 누그러뜨렸다.
“초반에 나오길 자, 잘했어. 지역 통제가 더 시, 심해졌더라고. 실제 사, 사상자 수도 C… CBS에서 보도한 것보다 훨씬 높고. 기도…” 반대 팔을 감싸 안은 성의 오른손이 불안한 듯 달달 떨었다. “...아니다, 그건 얘, 얘기하지 말자. 방금 서, 서 씨 얘기 들었으면 어디 가서 떠, 떠들고 다니지 말고. 시, 신행성공동체여, 연합 쪽이랑 만날 때 17구역 사, 사상자 보도 왜곡 건 증거자료로 써야 하니까 미, 미리 새, 새어나가면 안 돼.”
“내가 아무한테나 가서 떠들 이유가 없잖아?” 완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더 할 말 어, 없으면 기랑 마저 할 얘기가 이, 있어서. 갈 때까지 이 방 드, 들어오지 말고.”
“잠깐만-” 성 앞에서 완은 스스로가 갑자기 부끄럽게 느껴졌다. 얼마나 힘들게 책을 찾았는지 떵떵대려 했던 원래 계획과 달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문 뒤에서 기가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 마주보고 있긴 했지만, 이미 성의 온 신경은 방 안에 쏠려 있다는 것을 완은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성에게 책을 준다 하더라도 기뻐할지, 완의 확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왜?”
“우..리 밥 언제 먹냐고.” 생각치도 못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냐’라는 성의 표정에 완은 내면의 비명을 질렀다.
“머, 먼저 챙겨 먹어. 기다리지 말고.” 위안이라도 하듯 방으로 들어가기 전 살풋 웃어준 성이었지만, 전혀 완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평소의 미소와 너무 달랐다.
닫힌 문 앞에서 몇 분이나 우두커니 서서 기다렸지만, 성은 다시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전부를 바꿔버릴 만큼 거대한 사건이 다른 이들의 삶에 잠시 떠올랐다 지나가는 소문으로 남는 것. 종종 있는 일이다. 두꺼운 렌즈 너머의 눈이 뻐근하게 당겨왔다. 번쩍이는 화면을 너무도 오래 바라본 탓이다.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원은 두어 번 눈을 문질렀다. 다시 까맣게 변하려던 스크린을 눌러 밝혔다. 종합 뉴스 포탈의 사회면 기사들만을 모아둔 페이지가 보였다.
‘신행성공동체연합’ vs ‘반탈지구연합’, 드디어 ‘전면전’ 일어나나
“자라날 아이들이 걱정이죠”, 17구역의 CCBS 무단 점거 200일 돌파 … 인근 주민들 우려 잇따라
[칼럼] 지역 간 깊어가는 갈등의 골, 공감과 이해로 풀어나가야
…
‘제목하고는.’
한동안 주류 언론에서 주목받지 못하던 반탈의 일이, 공식 단체명까지 거론되어 나온 데에는 이미 이름이 팔릴 대로 팔린 기의 영향이 컸으리라. 제목만으로도 기자의 출신 구역을 추측할 수 있을 법한 기사들 사이로 그의 지친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물론 저에게는 그 단단한 눈빛으로 더 기억되고 있다지만, 언론에 잡히는 사진들이 사진들이다 보니. 어쩌면 그 몇 안 되는 기사들을 통해서라도 그들의 상황을 파악하려는 자신의 모습도 기 만큼이나 지쳐있을 테지. 원은 한숨을 쉬었다.
신행성 프로젝트 자체의 문제를 아는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 그래서 생존의 위협을 받고 1구역까지 휩쓸려온 타지역의 주민들을, 1구역 사람들은 단순히 없어도 될 지역 갈등을 조장하는 무리 정도로 인지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침범’한 낯선 사람들을 마주한 이들의 태도는 생경함과 경계, 약간의 동정에서 출발해 무시와 조롱, 은근한 압박으로 변모해갔다. 반년 전부터 서서히 끊겨 이제는 아무런 내용도 올라오지 않는 피드를 떠올렸다. 신행성에 대한 이런저런 기대, 동생과의 일상. 줄줄이 늘어놓은 인형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던 그도 지금 기와 함께 있는 것일까.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안부 인사 하나라도 보내려던 시도가 계속 좌절되어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동그란 두 눈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은 그제서야 자신이 출판사 1층 라운지에서 동료들과 식사를 하던 중이었음을 깨달았다.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급히 페이지를 전환했다. 네, 아니, 잠시만요. 저희 지금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죠? 적당히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내니 정적이 흘렀다.
“이제 금방이잖아요. 그, 왜, 방송국 앞에 텐트…”
말끝을 흐리며, 그는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손가락에 빙빙 감고 있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구나. 오후 6시 52분. 기사들에 따르면 두 단체가 만나기로 한 시각은 오후 7시였다. 멍하니 시계를 바라보던 원은 다시금 진행되던 대화에 자신을 좀 더 던져넣기로 마음먹었다. 한동안 대답이 없자, 원의 말을 기다리던 한 사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솔직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조금 더 정중한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조금 아쉽죠. 제 말은.”
“그게 무슨 말인가요?”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 적어도 이렇게 사람들이 다니는 광장 한복판은 조금... 그렇지 않나요? 그것도 반년도 더 넘게. 이 사람들 나갈 생각도 없는 것 같고…”
“그 사람들이 말하는 ‘반탈'이 정확히 뭔지도 잘 모르겠고…”
그는 말을 얼버무렸다. 다섯이 모여 앉은 테이블에는 또 한 차례 정적이 흘렀다. 말을 꺼냈던 그는 이미 단단히 올라간 타이를 다시 한번 조였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적어도 명확한 의사 전달을 해줬으면 한다는 점은 저도 동의해요.”
방금 전 원의 주의를 환기시킨 사원의 말이었다.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차분히 말을 잇는 모습이, 고민 없이 던지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원의 지난날들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원은 자신이 말할 차례가 한 번 지난 틈을 타,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잠시 고민하고 있었다. 동시에 고민하는 자신에 대해 얕게 질책하고 있었다. 커피가 식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한 가지 의견을 공유하고 있었다. ‘지금 들이닥친 17구역의 사람들은 불편하다’. 그리고 원은 다시금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원은 기의 얼굴을 떠올렸다. 시선은 의미 없이, 진작에 바꿔둔 홀로패드 페이지를 향해있었다. ‘[기획 기사] 돌아보는 21세기 (3): 또 한 번의 변동, 기후 변화’라고 적힌 다소 큰 글씨가 띄워져 있었다. 그 아래에는 ‘북극곰’ 한 마리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이 담겨있었다.
“아, … 저는.”
말소리가 멎고 제게 닿은 시선을 느꼈다. 원은 목을 가다듬었다. 토독, 커피잔을 두드렸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그들은 신행성을 둘러싼 일들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구역이기에 도리어 국가의 주도 아래 정보가 효율적으로 차단되어 온 것이다. 1구역에 거점을 잡았으면서 동시에 신행성에 관련한 일들에 깊이 관여한 사람으로서 원은 자신이 어떻게 말해야 1구역의 사람들이 지금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반탈 쪽의 입장을 이상하리만치 잘 아는 것처럼 설명한다는 인상을 직장 동료들에게 구태여 남기고 싶지 않았다.
원이 주저하며 입을 열던 바로 그때였다. 일순 등 뒤의 창문에서 밝은 빛이 들어오더니,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놀라 서로를 마주 보던 얼굴들은 일시적인 정전으로 인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반짝 빛이 들어온 홀로패드의 화면은 오후 6시 58분을 알리고 있었다.
홀로패드가 책상에서 떨어지고, 온갖 사무용품들이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수 초 뒤였다. 사무실 전등이 아직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 안의 긴장과 아연실색한 사람들이 분위기는 공기만으로도 감지할 수 있었다. 원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 이 상황에 입술만 달싹였다.. 1구역의 하늘이 잿빛으로 뒤덮이고, 저절로 화재를 감지한 인공 구름들이 비를 뿌리고 있었다.
반탈과 신행성공동체연합의 간담회는 기약 없이 미뤄졌다. 굉음과 빛 공해, 그리고 무섭게 번진 불씨의 원인은 모두 신행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라고 매스컴에서는 떠들고 있지만, 실은 신행성의 것임이 확실한) 비행물체였다. 그것이 CCBS 본사에서 고작 1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추락해버렸다는 점이 문제였다. 여느 거드름 피우는 단체가 그렇듯이 신행성공동체연합은 약속 시간보다 조금 더 늦게 CCBS로 향하고 있었다. 그 약간의 틈이 신공연 핵심인력들의 운명을 뒤바꾸어 놓았다. 눈을 멀게 할 정도의 빛을 뿜어내며 떨어졌던 그 물체 때문에 핸들링을 잘못한 여러 운전자들이 7종 추돌 사고를 내 버렸고, 그중 일부는 화마에 뒤덮였다. 간담회에 참석할 인원들은 그 ‘일부’였다.
방송국 앞에서 움막살이를 하던 17구역 사람들도 불안에 떨기는 매한가지였다. 17구역의 기억이 채 잊히기도 전에 1구역에서마저 사고가 일어나버렸다. 그것도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었다. 이미 진을 쏙 빼놓고도 남은 이 투쟁의 결말이 몇 달 심지어는 몇 년 뒤로 미뤄져 버린 것도 한몫했다.
“오후 6시 58분경, 한 물체가 1구역을 덮쳤습니다. [...] 이 사태에 대해 재난학 교수 윤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 드디어 아포칼립스가 이 행성을 덮치고 있는 듯합니다. 더불어 신행성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의심을 해보아야 합니다. [...]”
CCBS 앞에 설치된 전광판 앞에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앵커와 교수의 모습이 번갈아 잡혔다. 기, 완, 성은 완과 성이 지내는 텐트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이제서야 조, 종말이니 뭐니 하다니…”
집중력이 흐트러진 듯 잠시 뉴스에 귀를 기울인 성은 새된 목소리로 불만을 표했다. 17구역에 같은 것이 떨어졌을 때는 모든 뉴스가 지워졌고, 조작되었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다. 성이 어렸을 적 잠결에 할머니로부터 무용담처럼 들었던 무슨 무슨 참사들, 무슨 무슨 운동과 그 모습이 똑 닮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한 세기가 지나도 달라진 것은 없다고 자조했던 것이 불과 몇 개월 전이었는데. 지금으로 봐서는 오히려 더 퇴행했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1구역만 관심 갖는 것 한두 번인가요.”
기는 어느 때보다도 날이 섰다. 지금이 분위기를 반전시켜 반탈 쪽으로 끌고 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신행성을 누구보다 믿고 그것에 찬사를 보내던 단체의 대표인사가 죽었다. 이제 모두가 신행성의 정체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 영상은 언제 공개하는 게 좋을까요?”
완의 질문에 기는 가벼운 한숨을 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곧 공개를 하는 게 좋겠죠. 정확한 시점은 이따 회의에서 결정될 거예요. 신공연 대표가 사고를 당한 건 안타깝지만, 우리는 이 타이밍을 잘 이용해야 해요. 어쩔 수 없어요.”
“그, 그런데 이 영상…은, 직접, 찍은 건, 건가요? 일단 기가 드론, 드론을 운용한 건, 아, 아닌 것 같고…”
“반탈이 드론까지 운영할 수 있는 단체였나요? 돈이 그렇게 많았나?”
“드론, 드론이 아무리 저렴해졌다고는 해도 가격이 만만, 만만찮은데...”
“아... 그게요.”
언론에는 반탈 측에서 촬영한 영상이라고 밝힐 것이다. 아주 타당해서 더 의심할 것도 없었다. 대체 반탈이 아니라면 이 영상을 누가 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반탈에는 익명의 제보자-동료가 구해준 영상이라고 말해둔 상태였다. 그러나 활동가들이 그 ‘동료’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신행성공동체연합이 붕괴를 목전에 두었고 이제 운동의 성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려고 하는 지금 일손은 턱없이 부족했다. 반탈에서는 사무실에 사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치즈 고양이 여름은 물론 대꾸조차도 하지 않았다. 하품 한 번을 크게 하고 입맛을 다신 뒤 햇볕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곳에서 잠을 청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영상까지 구해서 보내주신 걸 보면 꽤 능력이 있으신 분인 것 같은데. 그분 혹시 반탈 일하실 생각은 없대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눈으로도 표정으로도 은연중에 그렇게 말하고 있음을 기는 모르지 않았다. 그들도, 기도 그게 예의가 아님을 알기 때문에 말하지 않고 있을 뿐. 다만 기가 망설이는 것은.
십여 년 전 마지막으로 원을 보았을 때. 비가 소리 없이 내리던 발코니. 비 맞은 축축한 흙냄새와 그 사이에 섞여 풍기던 담배 냄새. 필터까지 타들어 가는 담배를 바라보던 피로한 시선. 시간도 공간도 정지한 것 같았던 그 날. 그해의 첫 봄비라 풍경은 어느 때보다도 파릇하고 경쾌한데 어깨 위로 무겁게만 내려오던 공기. 이제 담배 끊으셔야죠. 넌지시 말하니 그쵸. 끊을 수 있겠죠? 하고 저를 보고 지친 얼굴로 웃던 원의 얼굴. 어디로 가시려는 거예요? 담배를 끊고, 반신련을 끊고... 동료를, 저를 끊고. 당신을 믿고 의지했는데. 어디로...
이미 떠난 그를 다시 이 일에 얽히게 하는 것은 아닌지. 예전에 반신련 하시던 분이에요. 지금은 활동 안 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기는 미안해서.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사무실로 갈까요?”
제일 최선인, 그리고 제일 나약한 답을 고른다.
“헉, 헉. 워, 원?”
“제?! 통화가 돼? 지금 어디야. 괜찮아?”
“여, 여기 난리 났어!”
‘난리’라는 말만으로 이 사태를 설명할 수 있을까.
처음엔 누워있던 침대가 진동하는 줄 알았다. 놀라서 일어나려 했지만 굉음과 함께 방 전체가 흔들리는 진동에 중심을 못 잡고 넘어진 제는 침대 밑으로 기어갔다. 진동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등이 한 번, 두 번 깜빡거리더니 소리도 없이 꺼져버렸다. 천장에 뚫린 창도 무언가로 가려진 듯 방은 완전한 어둠에 집어 삼켜졌다. 밖에 들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방문을 두들기고, 혹시나 하는 바람에 힘껏 문을 밀어보기도 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바깥이나 스피커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긴장되고 혼란스러우면서도 눈물 나도록 무료하게 반복되던 일상에 갑자기 발생한 특이점.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주변의 무반응과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는 점에 미루어보아 경비들이 꾸민 일은 아닐 것이다. 꼼짝없이 갇힌 입장으로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대처할 마음의 준비밖에 할 수 없었다.
창문을 통한 빛도 차단되고, 유일하게 시간의 경과를 알 수 있는 식사 배달과 신체 점검도 끊겼다. 몇 분, 몇 시간, 며칠이 지난 걸까? 마지막으로 남은 물을 마시고 마른 침만 삼키고 있을 때, 복도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경비의 기척이 반가운 건 처음이었다. 평소보다 발소리가 크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 문이 벌컥 열리고 눈에 불빛이 비춰졌다.
“나오십시오!”
복도 또한 어두컴컴하고, 방보다 현저히 추웠다. 지독한 연기 냄새도 났다.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제의 어깨가 자연스럽게 움츠려 들었다. 경비들은 손전등으로 길을 밝히며 합격자들을 줄 세워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었다. 분명히 보통 어딘가로 끌려갈 때는 합격자 한 명당 경비 한 명꼴로 엄격히 통제되었는데, 한눈에 봐도 경비들이 수적으로 열세였다. 다른 사람들도 이를 눈치챘는지, 평소의 얌전한 모습과 다르게 경비들을 흘긋흘긋 쳐다보며 자신들의 불만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렇게나 철저히 감시하고 감금한 합격자들을 갑자기 허술하게 경계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경비들 대부분을 동원해야 할 만큼 큰 사건이 벌어졌던지, 남은 경비가 몇 명 없다는 거겠지.’
제는 자신과 함께 선두를 이끌고 있는 경비를 살펴보았다. 마스크와 두꺼운 재질의 조끼, 전기충격기를 허리춤에 차고 있기는 했지만 그 외의 다른 장비는 없는 것 같았다. 다른 경비들은 더 허술했다. 급하게 호출된 걸까? 경비들이 수시로 명령을 내려받던 무전기가 조용하기 때문인가? 자기들끼리 당황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우왕좌왕하는 꼴이 너무나도 명백했다.
“저기요,” 제의 뒷사람이 용기를 내어 큰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 대체 지금 어디로 가는 겁니까? 지진이라도 난 겁니까?” 제 옆의 경비가 대장인 듯 홀로 답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단지 정전이 나서 더 편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입…”
“장난해요? 누가 봐도 지진이었잖아요!”
“대체 우릴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조용히 해!” 봇물 터지듯 쏟아지던 합격자들의 불만에 폭발한 경비가 완전히 뒤돌아 제에게 등을 돌렸다.
“한마디만 더 하면…”
어디에서 그런 대담함이 나왔는지, 제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등을 보인 경비의 허리춤에서 전기충격기를 꺼냈는지, 어떻게 손이 떨지도 않고 정확하게 그의 목덜미에 꽂아 넣었는지.
경비들을 제압한 합격자들이 얼싸안고 기뻐하려는 걸 제가 막았다. 언제 다른 경비들이 올 줄 모른다. 지금도 CCTV가 작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이곳을 나가야 한다. 손전등은 몇 개밖에 없고, 건물 구조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이 건물에 갇혀 지내면서 하나 알아낸 건 눈에 띄는 출입구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환풍구나 배수구도 전부 주먹 크기만 했다. 항상 실내 적정 온도로 유지되던 건물 내부가 이렇게 춥다는 것, 그리고 어딘가에서 계속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는 사실이 제에게 희망으로 다가왔다. 마땅히 다른 계획이 없는 합격자들도 모두 제의 생각에 동감했다. 그때, 복도의 붉은 비상등이 켜지더니 귀를 찢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가 대책 없이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제는 쓰러진 경비의 품을 마구 뒤져 손전등과 휴대전화를 낚아채고는, 그들을 뒤따라 뛰었다.
“무슨 일이야? 어딘데? 내가 데리러 갈게!”
“몰라, 모르는데… 헥, 헥… 일단 누가 쫓아오는 거 같진 않은데…” 복도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빛, 빛이 보여!” 모퉁이를 돌자마자 보이는 천장의 커다란 구멍에 제의 말문이 순간 끊겼다. 위험하게 바닥에 흐트러진 유리와 철 파편들, 정체불명의 철과 철사의 융합체가 반은 천장에 걸쳐져 매달리고 반은 부서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위성인 걸까, 라며 궁금해할 겨를도 없었다. 합격자들은 찔리거나 베일 걱정도 하지 않고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처럼 그 물체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딱딱한 흙과 풀을 쥐어 잡고 올라와서야 지금까지 지하에 갇혀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상으로 올라온 제를 반긴 건 평소보다 뿌연 하늘, 울창한 나무, 그리고 그 나무들에 반쯤 가려져 보이는 글자 C였다.
“나 어딘지 알아.” 원이 다급한 목소리로 무언가 물었지만, 제에겐 들리지 않았다. “나 지금 어딘지 알겠어.”
추위가 피부를 무자비하게 찌르고, 철사에 긁힌 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제는 쓰러진 나무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돌멩이로 가려진 내리막길을 성급히 내려갔다. 환경단체들이 목숨 걸고 지키려 한 1구역의 녹지. 부동산 사업과 도시 개발로 하나둘 없어져 가던 녹지 중 유일하게 ‘허용된’ 구역. 어쩌다 보니 CCBS의 뒷산에 위치해 자신들이 환경 보호에 앞장선다는 이미지를 마음껏 착취할 수 있게 해주고, 몇 남지 않은 토종 식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일반인 출입이 금지된 숲. 점점 거대한 글자 C가 가까워질수록 크고 작은 비행물체 조각들이 더 많아졌다. 제는 몇 번이나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굴하지 않고 성큼성큼 내려갔다.
“거기인 게 확실해?” 말은 의문형이었지만 이미 원이 차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틀림없어.”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 좀 데리러 와 줘.” 뒤에서 다른 합격자들의 울음소리, 환호성이 들렸다. 드디어 탈출했다는 사실을 실감하자 지난 몇 개월 간 쌓아둔 긴장이 한 번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제발 나 좀 데리러 와 줘, 원아.” 순간 몸 전체에서 힘이 빠지면서 무릎이 꺾였다. 뒤따르던 일행 중 누군가가 팔을 붙잡고 부축해주었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기자가 숲 입구 팻말을 부순 팔뚝만 한 고철 덩어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1구역으로 떨어진 비행물체의 파편이 도시 여기저기로 떨어져서 많은 물질적 피해와 시민들의 불편이 크다, 도심에 가까운 환경 보호 구역에도 파편이 떨어져 안타까움을 자아낸다는 투의 멘트를 이어나갔다. 그들을 처음 본 사람은 카메라 촬영기사였다. 카메라의 초점이 순식간에 기자 뒤에서 비틀거리며 나오는 기묘한 무리에 맞춰졌다. 기자 또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정해진 멘트를 잊어버린 채 그들을 향해 뛰어갔다. 어딘가 낯익은, 병원 가운을 입은 창백한 사람들의 돌발등장은 생방송 뉴스 채널을 틀어둔 모든 TV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반탈 사무실의 혼란은 쉽게 떠나가지 않았다. 반탈과 신공연의 만남이 미루어지고, 영상을 언제 어떻게 공개할 것인지도 정해지지 않은 와중에- 늘 모자란 인력은 또다시 조금씩 나뉘어 정전으로 인해 마비되었던 업무를 복구하는 일에 매진해야 했다. 차가운 계절은 이미 바깥을 어둑어둑하게 만든 뒤였기에 더욱 그랬다. 성을 위해 사 온 책을 든 채 입구 근처의 의자에 앉아 있던 완은 들어갈 타이밍을 찾지 못하고 앉았다 일어났다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안에서 가끔 새어 나오는 큰 목소리들은 구분해낼 수 없을 정도로 혼잡했고, 자신이 도울 일이 있을까 생각해 보아도 지금은 방해만 되지 않을까 하는 결론에 닿았던 탓이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지금 TV, 아니, 뭐든 틀어 봐요!”
“아직 사무실 통신은 복구가 안 됐는데…”
낯설지 않은 목소리들이 우왕좌왕하는 것을 겨우 알아들은 완은 급히 휴대폰을 꺼내 들고 사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여기, 이걸로 화면만 연결하면 될 것 같아요!”
사무실의 모두가 상황을 확인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설마, 그렇기까지야 하겠어? 세상은 이성과 합리 위에서만 굴러간다고 굳게 믿으며, 부당함에 나서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괜한 유난이라 여겼던 이들 역시 눈앞에 들이밀어진 광경 앞에서는 자신이 했던 말을 주워 삼키기 바빴다. 신행성으로 떠나기 위한 ‘준비’가 무엇이었는지, 사람들은 뒤늦게 나타난 구급대원들의 간단한 점검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저마다 기자를 붙잡고 두서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말들이었지만 결국 같은 말들이었다.
반탈은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영상의 진위를 의심하는 이들은 언제나 있겠지만 지금만큼 이 영상이 주목받을 수 있는 시기는 없을 것이었다. 짧은 제목, 길지 않은 설명. 쏟아져 나오는 비슷한 기사들은 스스로를 복제하고 있는 양 그 수를 늘려갔고, 반탈 측의 입장을 전달하기를 꺼리던 언론사들 역시 사실 확인 같은 문제는 뒤로 미루어둔 채 제 입맛대로 영상을 캡처하여 기사에 실었다. 어떤 부분이 실려도 상관은 없었다. 17구역 비행기 추락 사고에 연루된 이들을 제외한 2회 참가자들이 신행성에 도착해 있던 것이 아니라 1구역의 '땅에서 솟아난' 광경과 드론 영상이 나란히 놓이기만 한다면 가리키는 것은 명확할 터였다.
1구역 녹지 현장은 정리가 되기는커녕,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경계까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녹지와 가장 가까이 있는 CCBS는 그 이미지를 적절히 이용하고 있었을 뿐, 국가에서 소유권을 제한하고 있는 장소였기에 이곳의 혼란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혼란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조차 되지 않았던 장소인 탓에 구경꾼과 기자, 환자를 이송할 구급차까지 한데 섞여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시끄러운 현장에서 잠시 몇 번의 전화벨이 울리고, 모두가 각자의 휴대폰을 들어 쏟아지는 소식을 확인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인체 실험. 눈앞에 있는 이들이 그 대상자였고 어쩌면 이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을지 모른다는 사실까지.
제의 이야기를 듣던 기자 역시 인터뷰를 잠시 중지하고 영상을 확인했다. 제가 고개를 쭉 내밀자 기자는 제가 볼 수 있도록 제의 옆에 가까이 왔다.
“어, 이건…”
“혹시 무슨 영상인지 아시나요? 보신 적 있어요?”
누군가의 고발이든, 파고든 사람의 제보이든 프로젝트 안에서 새어 나온 영상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하루 이틀 전의 일이 아닌데도 이제서야 공개된 것을 보면 그랬다. 제는 문득, 편지가 담긴 유리병을 바다에 던지는 심정으로 자신이 전송했던 어떤 파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파일이 지금 공개된 게 아닐까. 장담할 수 없었지만 제는 이 영상에 따라붙을 말들을 자연스럽게 연상할 수 있었다. 조작된 영상이 분명하다느니, 의도가 의심스럽다느니. 제는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직원 휴대폰에서 찾아서 겨우 외부로 보낸 영상이에요. 틀림없습니다.”
“제! 잠깐만요, 잠시만 지나갈게요. 제! 제, …”
쏟아지는 인파를 헤치며 달려온 원의 머리는 제법 흐트러져 있었다. 전화를 받고 곧장 차를 몰았다. CCBS 본사 뒤편으로 통하는 길이 조금 막히는가 싶더니, 이윽고 제멋대로 주차된 차들에 아주 막혀버린 것이다. 예전에는 자동차에 라디오 같은 것이 붙어있었는데. 짜증을 삭히며 핸들만 연신 주무르다, 홀로패드를 꺼내 들었다. 손바닥으로 대충 밀어 안경을 올려 썼다. 접속자가 많은지, 뉴스 패널 피드의 로딩 시간이 길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늦어지는 건 조금 이상한데. 괜스레 마음이 조급해졌다. 시동을 껐다. 열쇠와 홀로패드만 챙기고 차에서 빠져나왔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저밖에 없을 텐데, 단숨에 이렇게 사람이 몰릴 일인가. 원래 1구역의 차가 이렇게도 많았던가. 하루가 너무도 길었다. 높고 낮은 차체 사이로 방송사 트럭 몇 대와 촬영 장비 등이 보였다. 저편으로 시선을 돌리자 높고 견고한 방송사 건물 밑으로 수많은 사람들과, 그들에게 둘러싸인 흰 옷의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저 안에 제가 있다. 사실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기자라는 직함을 단 사람들은 대부분이 사건 전반의 화제성에만 집중해 정작 관심과 조명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소홀한 면이 없잖아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원이었다. 그렇기에 제를 빨리 찾아(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까지도) 우선적으로 안정을 취하게 해주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의 일이라는 사실 또한, 원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반신련에서 활동할 때에도 힘을 써 사람들 사이를 뚫는 데에는 능력이 없던 원이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래.’ 원은 굳건히 버티고 선 사람들 틈을 어깨로 눌러 밀며, 오랫동안 묻어놓고 살았던 욕 비슷한 것을 잇새로 내뱉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는 이미 어떤 기자에게 붙들려 인터뷰를 당하고 있었다. 실제로 만나는 건 오랜만이었지만, 어느새 수척해진 얼굴 너머로 제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운나쁘게 좀전의 일을 취재하러 간 기자들에게 붙들린 것일까. 멀리서 보아도 그 표정은 분명 피로에 절어있었지만 기자에게는 그 사실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취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원은 숨을 들이켠 후 다시 한 차례 기자와 제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물론, 그때도 어깨를 썼다.
“워, 원? 너 원이야?”
“제, 조금 정신없겠지만 일단 내 차로 가자. 좀 전에 일 때문에 사람이 좀 몰려서…”
“어, 혹시 아는 사람이세요?”
아까까지 제를 인터뷰하고 있는 듯 보였던 기자가 물어왔다. 카메라 쪽으로 손짓을 했다. 카메라맨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메모리를 갈아 끼우는 게 느껴졌다.
“아, 네.”
“그러시구나. 혹시 그러면 저희 인터뷰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보시다시피 사안이 꽤 파격적이고 중대해서요. 혹시 1구역 분이세요?”
서슴없이 물어오는 얼굴은 흥분한 듯 상기되어있었다. 쏟아지는 질문들에는 일정한 강세가 실렸다. 아무래도 어떤 특종을 우연히 건진 모양이었다. 제를 바라보며 미처 고르지 못한 숨을 정리하고 있을 때, 저 앞으로 어떤 화면 하나가 불쑥 밀려왔다. 안경을 고쳐 쓰며 그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
“혹시 이 영상을 보신 적 있으신가요?”
기자의 물음에 원은 순간 숨을 들이켜고 몸을 긴장시켰다. 이 영상이 돌고 돌아 다시 자신과 제에게 왔다. 저게 기자의 손에 들어가 있는 경로는 제법 명료해 보였다. 기는 언제나 확실하고 전략적인 사람이었다. 자신과 달리 사람과 여론을 주무르는 일에 능했기 때문에, 활동에 항상 필요한 인재였다. 그런 기가 이런 기회를 놓쳤을 리가 없다. 영상이 공개되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았다. 다만 그것의 출처를 묻는 이가 자신 앞에 서 있다는 것이 당황스러울 뿐이다.
“세간에서는 반탈측에서 갑작스레 제공한 이 영상이 조작되었을 여지가 충분하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방금 저분께서 본인이 외부로 유출시킨 영상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가까운 분이시면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자세히 있으신지….”
원은 제를 잠시 쳐다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카메라 렌즈로 옮겼다. 침묵하는 수 초 동안 셀 수 없는 생각이 원의 뇌를 스쳐 지나갔다. 영상의 진위성은 제보 채널이 명확해지고, 제와 원, 기 사이에서 주고받은 메일이 공개되면 해결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원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한때 인생을 바칠 듯이 열성적이었다가 끝내 자신의 젊음이 산화한 것을 보고 나서야 겨우 벗어났던 그 활동 판에 다시 들어간다는 것. 끝이 없는 싸움. 지금 보이는 일말의 희망조차 사실 탈지구 프로젝트를 둘러싼 일들이 가십 거리로 소비하기 딱 좋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원은 모르지 않았다. 안으로의 일탈은 훌륭한 직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먹고 살 만큼의 소득은 따박따박 가져다주었다. 그렇지만 반탈은…? 무엇보다도 지난 육 개월간 방송에 비칠 때마다 꾸준히 수척해져 가던 기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수천 번 되뇌었다. 머릿속에 혼란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기자가 침묵을 깼다.
“선생님?”
“저… 저는….”
기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원은 반신련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아직 이름도 정해지지 않은 신생 출판 업체 하나에 자리를 얻어둔 상황이었다. 상임대표에게 몇 달 있다 퇴직하겠다고 말만 하면 되었으나 목에서, 앞니에서 단어는 턱턱 걸렸다. 이들을 두고 그만하겠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신행성 프로젝트가 결국 시작되는 것을 보면서 이미 많은 이들이 떠나갔다. 떠나려면 지금밖에 없었으나 그만큼 남은 이들이 눈에 밟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반신련에 들어온 신규 활동가들을 보면서 원은 작은 안심과 희망을 얻었고 쉬이 단체를 나올 수 있었다. 어느 정도의 개운하지 않은 맛은 감수해야 했으나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본 사람들 때문에. 그중에 기가 있었다. 처음 시작한 이의 어떤 단단함과 불타는 열정. 그래, 내가 없어도 어떻게든 잘 굴러가겠구나. 곧 떠날 사람이 이제 막 시작한 사람에게 느끼던 안정과 기대.
아주 가끔 메일을 주고받았으나 단순한 안부 인사였다. 이태가 지난 뒤로는 메일도 오가지 않았다. 이미 단체에서 나간 이에게 무슨 말로 소식을 전할 것인가. 다른 것도 아니고 지독한 번아웃과 무력감으로 그만둔 사람에게. 게다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야 제게 소식을 전한 선임이다. 그 마음을 섬세함이라고 부르든 배신감이라고 부르든 원은 자신이 할 말이 없다고 여겼다.
여러 공격과 저항을 깔끔하게 무시하면서 신행성 프로젝트는 수월하게 지속됐다. 결국 탈 지구 오디션이라는 전 지구적인 행사가 발표된 날 원은 기를 떠올렸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 사람. 그만두었을까? 나처럼? 얼굴에는 여전히 열정과 패기가 서려 있을까. 아닐 거라는 걸 알면서도 원은 변한 그의 얼굴을 차마 떠올리기가 망설여졌다. 소식이라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다. 다만 원은 알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인연들은 시간의 더께를 걷어내는 것이 두려웠다. 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돌아볼 수 있고 가닿을 수 있지만 굳이 하고 싶지 않은 사람.
17구역 추락 사건 이후 반탈이 이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원은 오랜만에 기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을 보고도 이름으로 확신했을 정도로 그는 아주 많이 변해 있었다.
“원? TV에 누구 나와요?”
“아… 아는 사람이라서요.”
세월이 시간을 바꾸어 놓는다지만, 원은 그의 얼굴에서 바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지난날의 열정은 사라지고 거대한 피로와 불확실, 그리고 작금의 사태에 대한 아득함이 그 자리를 대신한 기의 얼굴. 무엇이 그의 얼굴을 이렇게나 다르게 만들어 놓았을지 원은 짐작할 수 있었다. 반신련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던 시절 자신이 매일 아침 거울에서 마주했던 것과 꼭 같았으므로. 그 이후 가슴 속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죄책감을 원은 쉬이 묻지 못했다. 이제 나와는 상관없잖아. 난 그때 그만뒀고, 일찍 나오길 잘 한 거야. 원은 그때마다 조금 폭력적인 방식으로 제 마음을 덮었다.
그리고 지금, 저 카메라 너머 어딘가에 있을 기를 생각한다. 피로에 물들고 탈진하기 직전인 그 얼굴을. 예전의 자신과 닮아져 버린 그를. 아무리 윽박질러 덮어 버려도 부정할 수 없는 마음을 다시 들여다본다. 더 이상 누군가 그렇게 지치는 것을 보기 싫다는 작은 속삭임. 특히 그이가 기라면 더욱 옆에 서 있어주고 싶다는….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정보들이 하나의 수직선에 일렬로 정렬되는 순간에도 원은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운동이 중요했던 때는 아쉽지만 오래전에 지났다고. 이제는 같이 일한 이들을, 제게 소중했던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고. 더 이상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다. 모두를 지킬 수 없다면 당장 손에 잡히는 기만이라도.
영원 같은 찰나가 지나고, 원은 입을 연다.
“기. TV에서 뭐 중요한, 중요한 말 하고 있어요? 아까부터 가만히 뚜, 뚫어져라...”
“아, 아는 사람이라서요...”
반가움 그 이상의 감정이 솟는 걸 느끼면서 기는 자기가 정말 주책없다고 생각했다.
“누군데요?”
“…옛 친구예요.”
TV에서는 며칠째 뉴스 이외의 모든 정규 편성이 중단된 채 신행성 관련 이야기만이 넘쳐흘렀다. 스스로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꾀죄죄하고 초췌한 자신이 햇빛에 한껏 얼굴을 찡그리며 지상으로 나오는 모습이 뉴스 자료화면에 비춰졌다. 처음 보도 자료를 봤을 때는 저런 몰골로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에 경악했지만 지금은 저 캡처 화면만 해도 과장 없이 벌써 수십, 아니 수백 번째 보는 지라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참 복잡하게 빙빙 돌아가던 머리는 과부하라도 온 건지 어느 부분에서 툭 걸려 이제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화면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원의 얼굴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제는 손을 까딱해서 TV의 소리를 끄고는 자세를 바꿔 천장을 보고 누웠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온 지 3일 정도 지났다. 제를 포함한 생존자들은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신원 보호 및 원활한 심리 치료를 위해 각자의 정확한 병실 위치는 비밀에 부쳐졌다. 딱히 찾아올 지인도 친구도 없는 사람들이라 이런 격리 아닌 격리 조치에도 아쉬울 건 없겠으나 제는 결과적으로 지난 몇 달간 갇혀 있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삶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 3일 동안 제를 방문한 건 6시간마다 건강 상태 체크를 하러 오는 담당 간호사뿐이었다. 제는 약물이 똑똑 떨어지는 링거 장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벽에 걸린 아날로그 시계의 초침 소리는 링거의 약물이 떨어지는 속도보다 미묘하게 빨랐는데, 제는 자꾸 그것이 신경 쓰였다. 서로 맞지 않는 것들. 아마 영원히 만나지 않을.
원은 차를 세우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음이 초조했지만 애써 침착하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이래도 괜찮은가에 대해 계속 고민했으나 이걸 정리해두는 게 뒤탈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원은 화면에 띄워 둔 뉴스 볼륨을 낮추고 주소록을 뒤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스크롤을 내리던 원의 손이 멈추었다. 원은 조용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고 두어 번의 전화 연결음 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원은 전화 연결음이 끊기자마자 먼저 입을 열었다.
“뉴스 확인했죠?”
“그 세월이 지나도 얼굴은 하나도 안 변했더라고요. 잘 지내는 모양이죠?”
“죽은 사람으로 살고 있는 당신만 할까요.”
“나 참, 거두절미하고 할 말부터 하는 것도 하나도 안 변했네요.”
“한가하게 안부나 묻자고 전화하진 않았으니까요.”
어차피 그도 원이 곧 연락하리라는 걸 짐작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원은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는 그에게 올라오는 짜증을 애써 눌렀다. 짧은 정적 후에 상대가 말을 받았다.
“알아요. 요즘 올라오는 영상 자료 보니 우리 쪽 내부 유출이 있으리라 생각했죠. 물론 당신도 염두에 두던 사람 중 하나였고. 당신도 똑같이 언더조직에 몸 담갔다가 포부 좋게 그만둬 놓고도 손을 못 떼서 나한테 계속 손 벌려 아카이브니 뭐니 열심히 하던 걸 이제 와서 반탈 본부에 그대로 넘기기라도 했나 보죠?”
그는 침묵했다. 주변을 감싼 고요 사이로 볼륨을 줄여놓은 뉴스 소리가 작게 왱알거렸다. 뉴스 화면 속 기자회견장에 앉아 발언하는 기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결의와 확신에 차 있었다. 원은 스크린을 아예 꺼버렸다.
“거기도 한바탕 뒤집어졌어요. 나도 버티기 위태로워요 이제.”
“그렇죠. 일을 시끄럽게 만들어서 좋은 게 없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죠.”
“하지만 나만 그런 건 아니죠. 우리 둘 다 좋을 게 없죠. 지금 신공연의 만행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데. 물 들어오는 때잖아요. 탈지구 오디션 폐지까지 밀고 나가야죠. 이런 순간에 반탈 언더조직 이야기가 폭로된다? 전부 수포로 만드는 일인데? 어느 정치인이 그랬죠.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나 주울 건지?”
“인용도 차암 훌륭한 인용을 드네요. 그럼 내가 미쳐 돌아서 전부 이야기해버릴 거라는 가능성은 어때요?”
“글쎄, 적어도 내가 아는 당신은 그러진 않을 것 같네요.”
“당신은, 그래도 정치적 의제가 아닌 사람에 대한 일말의 연민이 없나요? 기는 어떻고요?”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런 얘기나 하자고 전화한 건 아닐 텐데요.”
원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아니요, 내가 전화를 한 건 기를 위해서입니다. 대의에 눌려 활동가가 죽어나는 모습 더 이상 보기 힘들어서요. 당신이 이 모든 일에 얼마나 남은 애정이 있을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기를 위해서든 반탈을 위해서든 당신들이 지금 나설 때가 아니라는 걸 경고하려고요. 지금 언더조직 이야기를 폭로하면 그래도 매시간 번아웃되어서 돌아가는 반탈 활동에 제동이 걸리지 않겠어요? 급한 방법이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활동가들이 쉴 수 있다면 못할 것도 없어요. 당신네 반탈 언더조직에게 민주주의랍시고 권위적으로 의사결정하고, 사석에서 경솔한 언행 하고, 비단 이런 문제만 있겠어요? 당신들이 활동가들을 함부로 대하고 희생을 강요하고 도구처럼 쓰고 갈아치운 데에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그리고 기가 당신과 만난다고 했을 때부터 말렸어야 했는데.”
“쉽게 말해 당신은 이쪽에서 영상이니 자료니 빼가서 마음대로 써놓고는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여길 폭로할 거라는 말이네요.
서는 덤덤하게 말하면서도 두 번의 ‘마음대로’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일종의 선전포고죠. 꿘 놈들이 그런 거창한 거 또 좋아하지 않겠어요. 앞으로 여러 경로로 다시 듣게 될 겁니다. 기도 그만 속이고, 어린 활동가들도 놔줄 때가 되었어요. 당신도 쉬어야 하지 않을까요.”
원은 점점 격양되는 어조를 정돈해보려 애썼으나 잘되고 있는 지에는 자신이 없었다.
“글쎄요, 두고 보지요.”
전화가 끊겼다. 원은 답답한 마음에 숨을 들이 내쉬고는 시트를 뒤로 젖혀 몸을 비스듬히 기대 생각을 정리했다. 서에게는 전달했고, 이제 제, 그다음에 기에게 가봐야지. 그는 이내 곧바로 제에게 문자를 보냈다.
야, 나 병원 앞이다. 병실 번호 알려줘.
[…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국제 탈지구 오디션은 무기한 연기하고, 프로젝트 국장 및 안전위원회 임원들이 책임지고 사임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킨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사죄드립니다.]
“별걸 다 하네, 진짜.”
기가 들고 온 사과를 입에 넣은 채 제가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기는 턱을 괴고 같이 TV를 보고 있었고, 원은 착실하게 사과를 깎았다. 제와 달리 두 사람은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이렇게 빨리 굽힌다고요?” 제가 기와 원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쓸 정도로 집착하던 탈지구 오디션을 이렇게 쉽게 끝낸다고?”
“합격자들의 등장으로 더 이상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입도 안 댄 기의 커피잔은 차게 식어갔다. “이미 여론마저 자신들에게 적대적이니, 이 이상의 폭로와 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 자체적으로 닫아버리는 게 더 이득이라고 계산한걸 거에요. 신행성 프로젝트의 간판으로 내세우던 간부 몇 명을 희생하고, 진짜 책임자들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숨어버리겠죠.”
“아직 다 끝난 것도 아니야.” 조용히 과일만 깎던 원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단어 선택하는 거 봐라. ‘무기한 연기’라잖냐. 당장 겁이 나니까 후퇴하는 거지.”
“그래도 너무 빠르지 않냐?” 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사람들 생각은 당최 이해할 수 없다니까.”
“그러게요. 사실 저도 신공연이 이렇게 빨리 포기할 줄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가며 사과문을 읽어나가는 CCBS 국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기의 시선이 원에게 돌아갔다. 원은 묵묵하게 사과만 깎았다.
똑똑, 어디선가 나타난 간호사가 문가를 완고하게 두드렸다. 기와 원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의료진은 환자들의 안전과 안위를 위해 웬만한 외부인의 출입은 전면 금지했었다. 오랜 친구라고 주장한 원뿐만 아니라 반탈로 유명인이 된 기까지 들어오는 데에는 많은 부탁과 회유가 필요했다. 담당의의 예외적인 허락을 받은 기와 원은 병원 직원들의 말에 무조건 복종해야 했다. 그들은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와 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제 씨 꼭 만나 뵙고 싶었는걸요.. 푹 쉬세요.”
“왜 기한테만 인사하세요, 라이브프린팅 베스트셀러 작가님? 서운하게.”
“계속 그거로 놀릴 거면 다시 오지 마, 전자책으로 넘어간 배신자야.” 간호사가 밀어 내보내는 원의 뒷모습을 향해 제가 소리쳤다. “그 출판사 고소해버릴 거야!”
아직도 둘만 있을 땐 어색했다.
“반탈 일하러 갈 거죠? 그쪽도 많이 시끄럽죠?”
“당연하죠. 오디션이 사실상 폐지되었다 해도 할 일은 아직 많이 남았어요. 오히려 해야 할 일이 더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기가 한숨을 푹 쉬었다. “반탈 내에서도 말이 많아요. 여태까지 탈지구 오디션 반대 운동과 신행성 프로젝트 진상 조사에만 힘써왔는데, 갑자기 목표가 사라지니까 갈팡질팡하네요.”
“어제 캐나다인가 미국인가에서 온 전문가 인터뷰하는 거 보니까 아직 신행성에 사람들이 남아있다는데, 그거 때문인가? 그건 또 뭔 일인데?”
입꼬리만 올라가는 기의 표정에서 애써 웃는다는 것이 확실하게 티 났다. “아무리 원이라도 그건 말해줄 수 없어요. 반탈 내부에서 해결할 일이에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기는 능숙하게 모자를 눌러썼다. 원도 병원 로비를 유심히 살펴보고 기자가 없다는 걸 확인한 후에야 기를 따라 뒷문으로 걸었다.
“그것뿐이겠어요?” 못 이기겠다는 듯 말을 꺼내는 기였다. “언젠가 프로젝트가 무산되면 반탈의 방향성이 흔들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신행성 규명 조사 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네요. 아직 17구역 진상 조사도 제대로 안 됐고, 실종자 탐색과 2차 피해 예방도 미숙한 단계인데…”
기가 누구 때문에 17구역 참사의 진상 규명에 이렇게 절박한지, 원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사건과 문제점이 터지는 이 시국에서, 이에 대응하지 못하고 17구역 일에만 매달리는 게 반탈 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원은 감히 기에게 어떠한 조언을 줄 수도, 말릴 수도 없었다. 재난에 우선순위를 매길 수는 없지만,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다고 충고할 자격이 원에게 있는 걸까.
“도움 필요하면 연락하고.” 무거운 입을 겨우 열었다. “힘내요.”
“원도요.” 기는 또 억지로 웃고 있었겠지만, 원은 차마 기와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세상은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시끄럽게 돌아갔다. 사과로 넘어갈 일이 아니다. 제대로 진상 규명하고 책임자들 끌어내려라. 생존자들 보상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냐. 매시간 각종 언론과 다양한 의제의 인권단체에서 성명이 쏟아져 나왔다. 각 구역의 중심지에서는 수천수만 명 규모의 집회가 열렸다. 사람들은 모이면 신행성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그 어느 때보다 신행성 이슈에 모든 이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반탈의 지난 행보가 서서히 재조명되고 있었다.
원에게 출근은 지옥이었다. 매일 같이 제와 신행성에 대한 질문이 몰려들었다. 친하지 않던 동료들도 탕비실에서 만나면 아는 체를 했다. 이름을 불리는 데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더 이상 웃으면서 사람들을 상대할 수가 없어진 원은 결국 올해 남은 연차를 전부 합친 장기휴가를 내버렸다. 휴직신청서를 부재중이던 부장실에 던지듯 뛰쳐나온 원은 휴가가 끝나도 더 이상 회사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는 매일 같이 이어지는 회담과 회의에 바쁘게 참석했다. 뭐가 하고 싶고 하기 싫은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만 생각해야 했다. 그 기준에 따르면 이건 옳은 일이고, 자신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기는 이것이 인류를 위해, 가족과 친구를 위해, 그리고 옛 연인 서의 죽음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기에게 자기 자신은 모두를 위해 달려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한편 신행성에 대한 반감 여론은 어느 순간 한군데로 집결되었다. 화살은 신행성에 남은 사람들, 일명 표류자들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부분 유명 정치인이나 기업가, 연예인의 자식과 그 가족들이었고 신행성 프로젝트의 최초 투자자이기도 했다. 그들에 대해 집중 조명한 보도자료나 다큐멘터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신행성 프로젝트 추진 과정에서 표류자 A 씨에게 폭압적 대우를 당했다는 CCBS 내부고발자의 증언도 멀리 퍼져나갔다. 매서운 엄벌주의 여론이 여기저기에서 끓어올랐다.
- 생존자들이 내 딸 내 아들이었다고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표류자 xx들에게는 망해가는 행성에 방치되어 몰살되는 것도 인도적 대우다.
- 오죽하면 똑같이 나쁜 놈들인 CCBS에서도 욕을 먹냐. 더 파헤쳐 봐야 한다.
- 싹 다 끌고 와서 재판하고 목매다는 거 생중계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
- 신행성 표류자 B 씨 과거 SNS 게시글 논란’
- 표류자들 신상 다 떴어. 사촌의 지인이 알려준 건데 반탈 출신이라 확실한 정보야. 글 내려가기 전에 빨리 확인해.
그동안 반탈에는 전례 없는 분열이 일어났다. 사건이 계속 예상치 못하는 방향으로 빠지는 통에 대책 매뉴얼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내부에서는 사후대처에 대한 의견 차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표류자들에게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입장과 저들도 결국 방패에 불과하며 사안 전체의 진상 규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입장이 미묘하게 갈라섰다. 반탈의 활동에 제동이 걸렸다. 기는 공동 상임대표와 말다툼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지금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 우리 말에 귀 기울이고 있잖아요. 여론 주도권을 잃어서 좋을 건 없어요. 지금은 적당히 맞춰주며 사람들을 잡고 있는 게 중요해요. 그걸 전략 삼아야 한다고요.”
“말씀하신 대로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니 더욱 저희가 새로운 여론을 이끌 수 있을 거예요. 반탈이 걸어온 세월이 있는데 여론에 맞춰 저자세로 나오자니요? 제가 아는 반탈은 정의가 최우선인 반정부 반체제 단체입니다. 그럴 수 없어요.”
“명분을 생각하다 모든 걸 잃으면 어떡해요? 무엇이 우선인지 생각해야 해요, 기. 대중이 돌아서는 건 정부의 탄압을 받는 것과 또 달라요. 매일 아침 휙휙 바뀌는 여론의 다음 타겟은 우리일 수 없을 것 같나요?”
“아뇨, 반탈을 둘러싼 유언비어들부터 수습하고 진상 규명을 강하게 요구해야 해요. 아닙니다, 저는 다른 단체들에게 연대 요청부터 해보겠습니다.”
기는 상임대표실을 빠져나왔다. 업무의 고됨보다도 사람과의 마찰이 에너지를 배로 쓰는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었다. 기는 주머니에 든 담배케이스를 달깍이며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때 앞쪽 테이블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던 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타, 타이밍이 영 조, 좋아 보이진 않, 지만, 하, 할 말이 이, 있어요. 와, 완이 일이에요.”
완. 오랜만에 들어보는 듯한 이름이었다. 구태여 정확히 흘러간 시간만을 따지자면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았겠지만, 그 사이 일어난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탓에 상당히 바랜 이름처럼 들렸던 던 것이다. 아, 그 사람이요. 정도의 의미를 내포하는, 다소 애매한 표정만을 지어보였다. 성의 한숨소리가 들렸다.
“도통, … … . 나, 나오려 하지를 않, 아요. 연락도, 잘, 안 바, 받고… .”
“네?” 기가 고개를 들었다. 정돈되지 않은 입술이 자꾸만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연락 면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늘 그래왔다. 언제 어디서든 홀로패드를 들고 다니던 완. 문자를 보내면 아무리 늦어도 5분 안에 답이 오던 완이었기에. 이번은 달랐다. 그래, 순식간에 망가져버린 17구역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이후로 완에게 오롯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음을 성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열심히 사는 것 같기는 하지만 어딘가 부족해보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흘러넘치는 긍정적인 외향 에너지를 감히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성이 이전까지 알아온 완은 그랬다. 그러나 함께 1구역으로 넘어오고 여기서 생활하는 동안 완은 변할 수밖에 없었다. 성은 그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런 완이 이제는 연락까지 받지 않는다. 그토록 좋아하던 메신저도 다 무시한 채, 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뜬 것이다.
찾아보고 싶은 게 있어. 걱정하지 마.
그 말이 전부였다. 홀로패드를 사용해 모니터를 가동시킨 후, 완은 떠났다. 성, 완이 가져온 책 받았어요? 아까 전부터 준다고 계속 들고 다니던데. 지나가는 누군가가 물었으나 완이 머물렀던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였다. 언제부터인지 망가진 듯한 홀로패드의 위치 추적 기록은 아직도 완이 17구역, 그러니까 저와 완이 살던 작은 아파트에 있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한편, 완은 1구역 중심부에서 조금 외곽에 위치한 ‘21세기 도서관'에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데다가 일전의 소동으로 외벽 한 쪽이 크게 파손되어 내부는 먼지로 가득찬 상태였다. 자꾸만 흐르는 땀을 훔치고 기침을 물렀다. 손에는 자신의 탈지구 오디션 지원 서류와 함께 여기저기 인덱스가 붙은 책 한 권이 들려있었다. 성에게 주려던 책이었다.
왜 주지 못했느냐. 하면 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바쁜 성. 아침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와서는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지는 성. 너무 변해버린 성.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단어가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머릿속에 둥둥 떠다닐 뿐이었다. 그렇다면 왜 떠나왔느냐. 여기에는 대답할 수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이 변했고 적응은 어려웠다. 사태가 언제 해결될지, 과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어서 임시 거처에 살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 몸 뉘일 수는 있으나 안정적이지 못한. 성은 반탈 일이 바빠지자 그거라도 붙들고 살아가는 듯해서 완은 더욱 외로웠다. 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 뿌리 없는 풀 같아. 완은 자주 생각했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도 짐작했다. 애초에 17구역에서 나고 자란 것도 아니건만 완은 마치 고향을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기의 일상을 유지해주던 것들은 무너졌고 계속 쓰러지고 있어서, 완은 지금 자기 손에 쥔 것만이라도 꼭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탈지구 오디션 지원서와 낡은 종이책. 이제는, 전부 다 쓸모없게 된 것들. 완은 책을 꽉 쥐고 표지를 매만졌다.
단순히 홀로패드를 수십 개 가져다 놓고 전자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공간 대신, 21세기에 나온 실물 종이책들을 많이 보관하고 있는 진짜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 것은 역시 시간을 모래처럼 소비하며 하릴없이 1구역을 돌아다니던 어느 하루였다. 듣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으나 언제 성과 같이 가봐야지, 가봐야지 하는 다짐은 속절없이 멀어져만 갔다. 저를 둘러싼 세상이 전부 바스러져 가는 걸 견디고 견디다 못해 완은 뛰쳐나오듯 그 도서관으로 온 것이었다.
좀 더 일찍 올 걸 그랬네. 도서관에 들어서자마자 저를 감싸는 먼지 쌓인 고요함과 오래된 무게감에 완은 눈물이 날 정도였다. 1구역으로 온 뒤부터는 머무는 곳에서도 느끼지 못한 안정감이었다. 메시지가 온 것을 알리는 홀로패드의 불빛을 못 본 척 가려두며 완은 도서관 안쪽에서 제법 아늑한 공간을 찾아 자리를 만들고 책을 쓸어 보았다.
오래전부터 좋아해 온 제의 책이었다.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제목은 20세기 시인의 시구에서 따왔다고 했다.
완은 서가를 조금 더 돌아다녀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렸을 적 자신을 주로 맡아 길렀던 조부모에 의해 반강제로 끌려간 이후로는 방문해 본 적이 없는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은 꽤나 까다로운 일이었다. 젊었을 적 도서관 사서를 했다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그곳에 가면 항상 나무 책장과 낡은 종이가 풍기는 쿰쿰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완에게 있어 그 향은 21세기의 고리타분함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삶에 남아있어야 할 것이었지, 자신의 삶에 자리 잡을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렇게 일주일 중 한두 번을 꼬박 도서관에서 보내면 항상 그 끝은 어떻게든 그곳을 빨리 떠나려는 완과 최대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애를 쓰는 성의 기싸움으로 향했다. 그럴 때마다 완과 성의 조모는 늘 짐짓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다가 결국 성의 손을 들어주었고, 심술이 잔뜩 난 완에게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꼭 간식거리를 하나 쥐여 주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완은 그 기억을 더듬어 서가를 이용하는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800번대가 문학 코너였지..?’
몇 번을 헤매고 나서야 완은 원하는 곳에 도달했다.
“찾았다!”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읍니다.
그 활자를 몇 번이고 만져 보았다. 제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 시구를 쓴 작가와 시 전반에 대해 들은 적은 있지만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방금 그 책을 꺼냈던 책장을 등지고 앉아서는 상념에 잠겼다. 어쩌면 완은 그 문장과 자신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자의든 타의든 다른 반탈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모든 사활을 걸고 있었다. 탈지구 오디션이 무기한 중지됨에 따라 흐지부지해진 반탈 활동의 끝자락을 붙잡고 어떻게든 불씨를 지펴보려는 이들. 그리고 그들의 운동이 숭고하다고 믿으며 가뭄에 콩 나듯 찾아오는 신입 활동가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반탈로 매몰시키는 성을 보며 완은 숭고함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승산이 없는 게임에 매달리게 하는 것일까. 언제나 지친 얼굴을 하면서 그 끈을 놓지 않는 바닥에는 무엇이 깔려 있는 것일까. 성과의 혈연 탓에 반탈의 보호를 받고 있긴 했지만 탈지구 프로젝트 오디션을 준비했다는 사실 때문에 ‘반탈이 추구하는 진정한 정의’에 공감하지 못하는, 혹은 하지 못할 이방인 취급 받는 것도 점점 지치는 일이었다.
완이 한숨인 듯 실소인 듯한 호흡을 내뱉으며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그곳에 책만큼이나 빛바래고 누런 종이 한 장이 끼어있었다.
여기 사람이 있다. 용산 참사 11주기 추모 행사
용산? 거주 구역이 재정립되기 전의 지명일 것이라 짐작은 갔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정확히 어디인지 꼭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학창 시절에 역사에 큰 관심이 없었고, 살면서 17구역을 나가본 적도 몇 번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스쳐 지나가며 본 듯한 익숙함에 완은 조심스럽게 페이지 사이에서 낡은 종이를 떼어냈다.
자를 대고 자른 듯 완벽한 직사각형 모양의 신문 기사는 어떠한 구김도 없이 보존되어있었다. 사진도 없는 아주 짧은 기사였다. 잉크 색이 바랬지만 ‘철거민’, ‘국가폭력’, ‘진상 규명’과 같은 단어들이 불쑥불쑥 보였다. 간단히 요약된 사건 전말을 보아하니 사상자도 나와 당시에 꽤 논란이 되었던 일인 듯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인터넷에 쉽게 검색해볼 수 있었겠지만, 완은 주머니 속의 패드를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꺼내진 않았다. 분명 SNS에 열중이었던 완인데 최근에는 기기를 끄고 다닐 때가 많았고, 켜더라도 화면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용산 참사에 대해 검색해보더라도, 오래 전 사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있을까? 17구역의 완은 인터넷의 위력을 굳건히 믿었겠지만, 신행성 프로젝트에 대한 의문과 피해자들의 증언이 인터넷에서 속속히 삭제되고 SNS 계정이 사실상 무력화된 현재 상태에서 예전만큼의 확신을 가지긴 어려웠다. 17구역 사진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처럼, 인터넷엔 이 기사와 같은 내용의 자료가 아직 남아있을까? 있다 하더라도, 피해자들과 추모자들이 원했던 모습으로 기억될지, 아니면 후에 힘을 가진 자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었을지 미래의 완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외부세력이 개입하지 않더라도 잊혀지는 건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참사가 수많은 과거와 미래의 비극 속에서 잊혀졌던 것처럼, 탈지구 오디션이라는 대규모 사기극의 존재조차 흙 속에 묻혀지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는 11년이 지나도록 이 사건을 계속 기억하고 추모했다. 누군가는 짧게라도 이에 대해 기사를 썼고, 다른 누군가는 기사를 반듯하게 잘라내어 책 안에 숨겨두는 노력을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이 사건이 그만큼 중요했을 것이다. 자연스레 화젯거리에서 밀려나고 대중의 기억에서 잊혀지는 와중에도 그들은 책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긴 세월을 용케도 버텨낸 책과 종이가 완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자신들을 잊지 말라고. 자신들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완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채로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어둔 탈지구 오디션 지원서를 펼쳤다. 그 난리 속에서도 17구역에서부터 어떻게든 들고 온, 이젠 무의미한 서류.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벌써 과거 자신의 글이 낯설었다. 옛날 옛적, 17구역에서 완은 성의 합리적인 의심과 현실성 없는 합격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도전하는 사람이었다. 이 서류를 적었던 완에게는 신행성에 대한 기대도, 미래에 대한 계획도 없었다. 단지 진심으로 이것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막연한 절박함이 있었다. 지금 이곳보다는 나은 곳이 있을 것이라고, 모두에게 더 좋은 삶을 위한 두 번째 기회가 있다는 철없는 희망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완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생체 실험의 피해자가 되긴 전 모든 합격자들, 그리고 수많은 탈락자들과 지원자들이 모두 같은 꿈을 가졌을 것이다.
손안에 쥔 지원서를 구겼다. 완은 애초에 이 모든 일에 연루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연루되었으면 안 됐다. 어쩌다 보니 완이 사는 17구역에 위성이 떨어졌고, 어쩌다 보니 가족이 반탈 내부에서 일했기 때문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을 뿐이었다.
완은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탈지구 오디션조차 신기루라는 것이 밝혀진 이 시점에서 자신에게 미래가 있긴 한지, 반탈 외에는 의지할 곳이 없는 1구역에서 계속 살 수 있을지조차 막막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성만큼은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성은 나무에만 집중해 숲을 못 보는 성격이다. 의무감과 죄책감에 얽매여, 흔들리는 반탈 내에서 자신의 일을 계속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반탈의 목표가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씩 놓고 있는 성이었다. 숭고한 대의에는 미안했지만, 완은 그 숲속에서 성만큼은 잃고 싶지 않았다.
곧 도서관 문이 닫힌다는 사서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창문 밖을 보니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니,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방치해둔 패드를 켜니 성으로부터의 메시지와 전화가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큰일 났다. 집에 가면 무조건 혼난다.’
완은 노랗게 바랜 신문 기사를 낡은 시집 속에 조심스럽게 다시 꽂아 넣었다. 시간이 더 흘러 용산의 기억이 더 깊이 파묻혔을 때, 또 다른 사람이 이를 찾아 기억해주지 않을까. 잠시 망설이던 완은 시집의 책장을 넘겨 그 사이에 지원서를 꽂아넣었다. 집에서 들고 나올 때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찢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젠 허무맹랑한 상술에 넘어갔다고 비웃음을 당하더라도 과거의 부끄러운 자신이 기억되었으면 했다. 혹시 먼 미래에 탈지구 오디션 합격자들의 극적인 탈출이나 신행성 측과 반탈 간의 치열한 언론 싸움만 기억된다면, 더 나아가 탈지구 오디션의 존재 자체가 잊혀진다면 누군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런 멍청한 내가 있었다고, 기약 없는 희망임을 알면서도 이를 꿈꿨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억해줬으면 했다.
도서관을 나서는 사람은 완밖에 없었다. 사서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가기 전, 완은 마지막으로 뒤돌아봤다. 당연하게도, 빽빽이 꽂아진 책들 중에서 완이 본 책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 수많은 책장 어딘가에 아무도 없앨 수 없는 기억들이 숨어있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 깊숙이서 무언가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엔 꼭 성에게 책을 건네주리라. 그리고 성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앉혀놓고 책을 읽게 할 것이다. 어쩌면 성은 용산 참사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모른다면 아는 체 좀 하고 나서, 같이 찾아보면 되겠지. 그리고-
성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이것도 안 받으면 나 정말로 죽을 수도.”
완은 혼날 마음의 준비를 하며 전화를 받았다. 미안하다며 사과하는 사람치고는 표정이 너무 밝았다. 밤하늘에 박힌 빛들은 아마 지구를 에워싸는 수많은 위성들의 불빛일 것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아는 완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완을 반기는 수많은 별빛으로 보였다.
기는 물속에 빠져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지치고 피로했다. 내가 무엇을 위해 그동안 이 단체에 헌신했나. 갈등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반탈 사무실은 점점 예민해져 갔다. 기의 생각에 동의해주었던 활동가들 대다수는 밤샘 토론회에서 일어난 극명한 의견대립 끝에 반탈을 나가기로 결정했고 그들은 기 역시 같이 반탈을 탈퇴할 것을 제안해왔다. 그러나 기는,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다. 점점 좁아지는 입지와 멀어져가는 반탈이라는 단체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서 도저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사라진 연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고 17구역의 피해 조사는 그저 그렇게, 권력 밖에 있는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 늘 그렇듯 별다른 성과 없이 마무리될 거라는 뒷말이 들려왔다. 몇 달 전이었으면 피케팅이라도 했겠지만 기는 지금 손에 무언가를 쥘 힘이 나지 않았다.
똑똑.
“들어오세요.”
완이었다. SNS에 항상 접속 상태인 완이 메신저를 닫아두고 사라져 버렸다고 하루 종일 걱정하던 성과 ‘찾았어요! 지금 통화돼요.’라고 온 짤막한 그의 메시지가 가물가물 떠올랐다. 그게 벌써 일주일 전이었나. 시간이 가는 것도 당최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기는 무거운 입꼬리를 끌어올려 그에게 웃어 보였다.
“돌아왔네요. 성이 그날 많이 걱정했어요. 어디 갔었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기도 걱정해주셨다는 말 성한테 들었는걸요. 음, 마음이 요새 복잡해서요. 혼자 있고 싶어서 도서관에 갔었어요.”
“마음은 좀 정리됐나요?”
“네. 그래서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어떤요?”
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술을 한번 적시고 말을 이었다.
“반탈 그만두려고요.”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다는 게 이거였구나. 기는 직감했다.
“완도, 새 단체로 가는 건가요?”
“아뇨, 저는…”
그럼요? 질문을 해야 하나, 말을 아껴야 하나. 기는 힘없이 완의 눈만 바라보았다.
“이 일을 지속할 만한 여력도 시간도 없는 것 같아요. 당장 생활비 버는 게 급해서 탈 지구 오디션까지 준비했던 사람인걸요. 물론 반탈의 뜻에는 공감하지만....”
“성은요?”
“탈퇴까지는 아니어도 좀 쉬기로 합의했어요. 지금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잃어버리고 있고, 이대로 가다간 자기가 무너진다는 점에 동의했고요.”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나요?”
“방금 말씀드리고 왔어요. 기한테 마지막 인사하러 온 거예요.”
“…그렇군요. 제가 뭐라고 말을 덧붙일 수 있겠어요, 두 분의 결정인데. …이제 못 보는 건 좀 아쉽네요. 어디서든 잘 지내길 바라요. 연락하고요.”
기는 마지막 예의로 손을 내밀었다. 아주 짧은 망설임 후 완 쪽에서도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허공에서 손이 가볍게 흔들렸다.
문이 쿵 닫히는 소리는 선고처럼 들렸다. 방금 나눈 악수와 무색하게, 이제 저들을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는. 기는 의자에 쭉 미끄러져 기대었다. 사직서가 눈에 아른거렸다.
이제 이렇다 할 의제가 크게 터지지 않는 반탈은 내부 갈등으로 여전히 지지부진했다. 탈퇴를 준비해서 새로운 단체를 설립할 것을 준비하는 세력은 가장 효과적인 타이밍을 노리고 몸을 움츠리고 있었고, 기를 계속해서 압박해왔다. 그런 와중에 이리저리 처리해야 할 실무는 줄지 않았다. 완과 성이 나가고 나니, 그들의 빈자리가 생각보다 큰 것이 보였다. 그들의 일손을 안타까워하느라 그들을 인간적으로 그리워할 시간을 할애할 생각조차 못 하는 요즘이었다.
기는 자신이 소진되어 간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계속 몸과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더 이상 타오르는 신념이나 날카로운 사고라는 것은 없었다. 그저 반탈이 믿고 있는 것은 옳은 것이 되어버렸고, 기는 그것을 의심하면 안 되었다. 그러는 순간 너무 많은 것들이 흔들릴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 선생들은 말뚝에 묶인 코끼리 이야기를 자주 하면서 꿈을 크게 가지라고 이야기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이야기에는 꿈 따위가 아니라 이 판의 이야기가 꼭 들어맞는 것만 같았다. 이것 바깥의 삶을 상상한 지 너무 오래 되어 버린 생활. 반탈을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자신의 지난날들이 퍽 우스웠다. 살기 위해 이 단체에 들어왔고, 더 잘 살고 싶어서 이 단체에 기여하고 거기서부터 스스로의 쓰임과 효능을 느꼈다. 스스로를 채우기 위해 반탈에 들어왔는데, 이제 반탈이 기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지금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잃어버리고 있고, 이대로 가다간 자기가 무너진다는 점에 동의했고요.”
조금이라도 업무에 집중하지 않을 때는 자꾸 그 말이 맴돌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말이 맴돌아 집중이 끊겼다. 완과 성은 아직 반탈과 떼어내 지킬 자기 자신이 있었다. 그때의 완의 눈과 입매는 지쳐 보였지만 그곳에는 어떤 확신이 어려있었다.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기의 마음속에는 내심 응원하는 심정 반과 시기 어린 생각 반이 뒤얽혔다. 그때의 그들에 비해서 자신은 너무도 볼품 없었다. 이제 그만둘 때가 되었다는 것을 기의 온 몸에서 외쳐대고 있었지만, 기는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나가면 이 단체는 얼마 못가다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자신은 현재에 있는데, 반탈은 역사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특히나 운동이 본격적으로 점화되고 가시화되었던 때부터 기는 반탈이었고 반탈은 기가 되어버렸다.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책상에 팔꿈치를 괸 채 얼굴을 감싸 쥐었다. 과열된 머리를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하던 그때 켜 둔 데스크탑 모니터에 메시지 알림이 왔다. 원이었다.
긴히 할 얘기가 있는데 이번 주 중으로 술 괜찮아요?
아뇨, 이번 주는 좀…
입력란에 그렇게 타자를 치다가 다 지워버렸다.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 원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이틀 뒤에 시간 되세요?
한껏 여몄던 코트의 단추를 풀었다. 유난히 따뜻한 겨울날이었다. 기는 원이 보내준 주소를 홀로패드에 띄운 채 20분째 비슷한 길을 돌고 있었다. 분명 자주 왔던 곳인데 너무도 많이 변해있었다. 분명 여러 번 지나쳤을 법도 한데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둘만의 만남을 위해 원이 택한 장소는 기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원이 반신련을 떠나기 전, 둘은 이곳에서 종종 잔을 기울이고는 했다.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지고, 공간 또한 멀어진 지 오래였다. 그 길을 기는 다시 걷고 있던 것이다. 조금은 변해 버린 환경에 들어설 곳을 잃은 채.
바닥 두 개를 붙여놓은 정도 크기의 네온사인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기의 눈이 커졌다. 이제부터는 아는 대로.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밀어 넣은 채 걸음을 바삐 했다. 조금은 좁다란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면 보이는 지하문. 늘 어떤 문이든 우선 밀어 보는 것이 습관이 된 기였으나 여기서는 무조건 문을 당겨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벽돌로 벽을 칠해놓은 어둑한 공간 안에 들어서면 그다음 원을 찾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아니나 다를까, 노란색 전구 두 개가 걸린 테이블 앞에 원이 앉아있었다. 커다란 잔에 가득 찬 맥주를 그대로 둔 채 종지에 담겨 나온 공짜 안주만 천천히 집어 먹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성큼성큼 걸어가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맥주 김빠지면 맛없는데.”
원은 시선만 올려 눈앞의 기를 바라보았다. 손끝에 동그란 땅콩이 닿았다. 그 표면을 헤아리다, 아무렇지 않게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기도 알 때 되었잖아요. 여기는 술보다 안주가 더 맛있다니까.”
그리고, 먼저 잔을 들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그렇게 말하고 웃어 보이는 눈가에 패인 주름이 선연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기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러네요. 더 맛없어지기 전에 마저 주문할까요?
“그래서, 그 ‘긴히 할 얘기’ 말인데요.”
“…네, 긴히 할 얘기요.”
먼저 용건에 대해 말을 꺼낸 쪽은 원이었다. 이전까지는 일상적인 이야기, 과거에 대한 얕은 회상이 오갔다. 기는 간만에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되는 대화 주제를 만나 마음이 놓인 참이었다. 때문에 그는 구태여 본론을 먼저 꺼내고 싶지 않았다. 기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무거워진 공기가 어깨 위로 느껴졌다. 답지 않게 긴장한 모습을 보다 못한 원의 말이 빨라졌다. 흘러내린 안경을 올려 썼다.
“많이 힘들죠, 요 근래.”
“…… .”
“기.”
“딱히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없어요. 한창 신행성 일 터졌을 때보다야-,”
“지금 무얼 하고 있냐고 묻는 게 아니에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힘들 수 있어요. 여기저기서 시끄러우면 피곤하지 않나요, 머리도 아프고.”
“…괜찮아요, 저는.”
가장 바닥에 깔린 무언가를 들추어내려는 것만 같았다. 자꾸만 그 아래 지레를 밀어 넣고 내리누르는 시도가 불편했다. 저도 몰래 빗장을 닫고 물러나는 것이다. 오랜 시달림이 만들어낸 방어 기제, 또 그나마 믿는 사람에게 불필요한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절실함이었다. 원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묘한 정적이 흘렀다. 맥주잔을 들었다.
“기.”
“아니에요. 괜한 걱정을 끼쳐드린 것 같네요. 정말 괜찮아요, 저 아니면 할 사람도 없고.”
“정말이네요. 김빠지니까 맛이 하나도 없네.”
무거운 잔이 테이블에 닿자 안주 그릇이 살짝 흔들린다. 기는 시선을 내렸다.
“도망치자는 게 아니에요.”
“네?”
“기는, 그 때 내가 도망치던 것처럼 보이던가요?”
“... 아뇨, 그건 아닌데,”
“자신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 그뿐이에요. 기가 소모되는 게 나는 좀 걱정이, 아니, 무서워서요.”
여느 때보다 가라앉은 눈이었다. 마주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는 근래 저의 사정을 꿰뚫는 듯 굴 수 있을까. 입술을 깨물며 잔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또 한 번의 침묵이 흘렀다. 직전의 침묵보다 긴 시간이었다. 원이 안주를 씹는 소리가 울렸다. 기는 자신이 입을 열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 힘들죠, 아무래도.”
겨우 내뱉은 한 마디에 온 마음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가슴께 쌓아두었던 무언가가 쑥 빠져나가고, 들어차는 차가운 바람이 어색했다. 술을 한 모금 넘겼다. 원의 시선이 다시 기에게로 향했다. 기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떤 기분인지 아시잖아요.”
“요즘 같은 때에 다 알고 있다고 하면 그거 꼰대라고 해요. 이해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기의 생각이 궁금한 거예요, 나는.”
“…….”
“돌려 말하지 않아도 돼요. 기는 충분히 할 만큼 했어요. 이제는 기도 생각해줘야죠.”
“요즘 반탈 분위기를 몰라서 그래요. 잡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무너지고 말 거예요.”
“그게 꼭 기일 필요는 없어요. 단체야 무너지면 다시 만들면 돼요. 조금 더, 당장 필요한 때가 오면 또 다른 이름 아래 사람들이 모이게 될 거예요. 여태껏 그래왔듯이.”
완강한 어조였다. 기는 여전히 스스로가 도망치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기는 사무실을 떠올렸다. 자신의 자리. 함께 하던 사람들. 완과 성의 얼굴. 떠나가는 얼굴. 사직서. 더 깊은 생각의 어드메로 빠져가던 기를 붙잡아 올린 것은 또 원이었다. 그의 금빛 안경이 주황빛 조명에 빛났다.
“단체의 유지를 바라고 시작한 일이 아니잖아요. 기, 잊으면 안 돼요.”
기는 원의 말에 이상하게 가슴 한켠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기는 지금의 상황이, 말이, 시선이 전부 어색했다. 맘속의 모래성이 마치 바람에 조금씩 허물어지듯 사르륵사르륵 심장을 긁었다. 비록 정신없고 바쁜 와중에도 이제는 나름대로 능숙하고 안정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여겨왔는데, 그럼에도 얼마나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못했는가. 수년간 바쁘게 달려오는 동안, 이런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보지 못했구나. 원이 했던 말들을 자신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줄곧 꾹꾹 눌러오던 마음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귀로 직접 부딪혀 들어오니 새삼 낯설었다. 눈가가 화끈 달아올랐다. 아, 이런. 마지막으로 남 앞에서 울어본 게 언제였더라.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고여 드는 부끄러움도 잠시 기는 터져 나오는 감정의 파도에 그대로 휩쓸리고 말았다.
원은 오열하는 기의 등을 쓸어주었다. 조금 당황한 기색의 사장에게는 죄송하다와 괜찮다가 섞인 고갯짓을 보내고는 애써 웃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간간히 느껴졌으나 다행스럽게도 날카롭지는 않았다. 사실 처음 기를 불러냈을 때부터 각오했던 상황 중 하나였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음이 복잡하게 얽혀드는 모양새까지 전부 예측할 수는 없었다. 원은 힘겹게 눈물을 토해내는 기를 바라보며 씁쓸한 안타까움이 넘실댔다. 기가 이렇게까지 상처를 눌러놓고 살게 된 데에 자신의 잘못이 전혀 없지 않다는 죄책감이 밀려왔지만 이렇게 불러내어 다독이는 것으로 자신은 최선을 다한 것이리라, 마음을 다잡기로 했다.
원은 비가 오던 그 날 기가 떠난 자리에서 담배를 밟아 끄며 애써 닦아내던 자신의 눈물이 떠올랐다. 정신없이 일에 치여있던 어느 날 사무실 앞으로 찾아와 말없이 울던 예전 애인의 눈물도, 탈지구 오디션이 확정 발표되던 날 반신련 선배들이 흘리던 눈물도, 지하 벙커에서 생존자들이 기어 나오던 날 제의 먼지 섞인 눈물도. 지금은 오래되어 부분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여러 기억 조각들이 뒤섞여 떠올랐다. 남의 고통에 대고 이러는 게 썩 예의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원은 기의 눈물방울에 지난 과거가 계속 겹쳐 보였다. 그리고 원은 생각하지 않으려 해봐도 그 모든 장면에 반탈과 언더조직, 그리고 서의 모습이 자꾸만 드리워짐을 느꼈다. 기에 대한 죄책감이 다시 피어올랐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나은 일도 있다. 원은 서에 대해 함구하는 것이기에 대한 배려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적어도 당분간은 반탈이니 뭐니 하는 과거 일은 잊고 지낼 양이고, 아마 이후에도 다른 방향으로 다시 일어설 것이다. 원은 괜히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이 안정되면… 기의 마음도 안정되면… 그땐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원은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벽에 붙은 손피켓에 눈길이 가 닿았다. ‘탈지구 반대한다 진실을 규명하라’ 반탈이 아직 반신련이던 시절 원이 친하게 지내던 한 선배가 이 가게를 처음 알려주었다. 넉살이 좋아 사장과도 거리낌 없이 지냈고, 그러면서 여기 있는 반신련/반탈의 자취를 거진 그 선배가 달아놓고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지만 자연스레 연락이 끊기고 지금은 서로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도 모르게 된 지 오래였다. 원은 ‘운동권’이라는 위치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오느라 주변 사람을 충분히 돌아보지 못했다는 후회로 이때 생각만 하면 마음이 무거웠다. 나라고 기에게 참견할 입장은 못 되는데 말이야. 나이 먹는다고 철이 드는 것도 아니고. 원은 기에게 좀 더 가까이 의자를 당겨 앉아 조심스레 그를 안고 등을 도닥였다.
완과 성은 서로가 어려웠다. 기억이 나지 않을 어린 시절부터 늘 함께였던 오랜 시간은 관성대로 쌓여 오기만 했을 뿐, 바깥에서 새로운 힘이 작용하자 둘 사이에서 의문으로만 남았다. 완에게는 늘 믿어 온 목표와 방향이 흔들린 성이 불안해 보였고, 성에게는 자신에게 없는 낙관으로 힘을 주던 완의 확신 없는 모습이 그랬다. 완이 오래된 서가에 자신의 후회가 담긴 새로운 흔적을 남겨 두었다는 사실도,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묻혀 있던 누군가의 낡은 흔적을 끌어안고 나왔다는 사실을 성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니 완이 막막함 속을 헤매고 있지 않기만을 바라며 다시 전화를 거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 어디길래 전화를….”
“진짜, 진짜 미안해. 조용히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소리를 꺼 놓는 바람에. 별일 없었어! 지금 돌아가는 길이야. 저번에 21세기 도서관 이야기했던 거 생각나서 한번 와 봤거든. 그래서, …”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대답을 이어가는 완의 목소리가 약간은 들뜬 것처럼 들렸기에 성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이제야 다시 자신이 알던 완을 만난 것 같았다. 어느 정도는 무모하지만 그 이상의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니까. 어쩌다 전화를 이렇게 늦게 받았느냐는 걱정 섞인 질책은 필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본 것들을 떠올리며 톤을 높여 말하는 목소리에 다른 것은 묻어 있지 않았으므로. 성은 잔뜩 보내 놓은 메시지가 민망해질 정도였기에 애써 용건을 만들어냈다.
“저, 저녁 먹을 시간… 한참 지나서. 어, 어떻게 하, 할 거냐고 물어보려고….”
“겨우 그거 물어보려고 그렇게 전화를 했어?”
“걱정도 되, 되고….”
“무슨 걱정이 그렇게 많으신지. 지금 출발하면 조금 걸릴 거 같은데 나올래? 밖에서 먹자.”
“그, 그냥 기다려도 돼.”
“배고플 거잖아. 집에서 해 먹기도 복잡하고, 계속 시켜 먹기만 했으니까 간만에 기분 내면 좋잖아. 줄 것도 있고.”
마지막 말 뒤에는 아차 하는 듯한 다급한 말들이 이어졌다. 만나서 놀래켜주려고 했는데, 그런 내용들. 미련을 놓지 못하고 방황하던 모습을 두고 온 사람처럼 어설프지만 굳은 목소리였다. 성은 무얼 주려고 했는지 묻지 않았다. 완의 말대로 만나서 이야기하면 될 것이었다. 꼭 별이 빛나지 않아도 밤하늘을 비출 무언가는 있는 것처럼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찾지 못한다 해도 어떻게든, 두 발을 디디고 설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