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수습편집위원 오소리

by 문우편집위원회


* 해당 글은 〈괜찮아, 사랑이야〉와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 나, 그리고 아픔을 알아가면서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1] 이 대사에서 ‘나’는 자신의 생을 정의하고 있다. ‘나’에게 삶은 족쇄 따윈 없는 자유로움이다.


앞선 구절은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인 『내 심장을 쏴라』라는 소설 속 인물의 대사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신병원에 격리된 그는 작품 내내 진정으로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친다. 다른 이의 시선이나 세상이 자신에게 선고한 병명과 역할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길 때 비로소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가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강제로 수용된 정신병원이 아니라 자유롭고 드넓은 그만의 세상이었다.


지금 여기서 그 인물의 세상이 무엇이었는지, 그가 과연 살았는지와 같은 소설의 줄거리를 줄줄 읊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굳이 제목과 글의 시작을 이 소설의 인용으로 시작한 것은, 첫째로 내게 이 글을 쓸 힘을 주었다는 고마움 때문이고, 둘째로 앞으로 할 이야기의 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은 무엇일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모습을 표현해 보자. 흔하게는 아마 사회생활을 하고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쳇바퀴와 같은 생활을 떠올릴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그 모습에서 숨 가쁘게 기침하거나, 온몸을 짓누르는 무력감에 일어나지 못하거나, 제 감정에 못 이겨 히스테리를 부리는 모습 등을 떠올리기 어렵다. ‘자연스레’ 상상했을 때, 통제되지 않는 몸은 ‘자연스러운’ 삶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스럽고 평안한 삶을 사는 것을 원할지라도, 삶이 제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건 자명하기에, 소망과 달리 당연히 나의 것일 줄 알았던 내 몸과 정신은 서서히 혹은 갑작스럽게 내 것 같지 않은 미지의 상태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아픔이라는 현실의 인지에서부터 병과의 공존은 시작된다. 아프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다음 단계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아픔을 아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열이 나 해열제를 먹거나 몸살 기운이 있어 잠시 일을 쉬겠다는 양해를 구한다는 건 인지 이후 병을 고치려 노력하겠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이 단계로 넘어가는 것조차 망설인다.


주로 정신이 아플 때 사람들은 의심한다. ‘이게 진짜 아픈 것일까’, ‘그저 엄살은 아닐까’,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할까’ 하고. 사실 불면, 집중력 산만, 과대사고, 망상, 와해된 행동이나 언어, 인지 저하, 환각, 편집증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증상은 명백히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정신병의 영역에 속하는 아픔이다. 게다가 평생 동안 성인 4명 중 1명은 정신 건강 문제를 경험한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까지 본다면 이러한 의심은 더더욱 의문스러워진다. 어째서 우리는 이런 고민을 동반하게 된 것일까? 왜 우리는 ‘정신’에 병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아픔을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우리가 판단을 내릴 때, 설령 그것이 나만의 문제일지라도 외부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병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움’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생활에 잡음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다 보니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 그리고 정신병이 사회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위는 여타 병과 달라서 우리의 결심에 끊임없이 망설임을 더한다.


역사적으로 정신병을 앓는 사람은 사회에서 격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긴 시간 이어져 왔다. 푸코에 따르면 비이성적이거나 비표준적인 인간성이 광기로, 그 이후에 정신병으로 분류되었다. 광기는 신적 소행이라 여겨질 때도, 단순히 사회적 윤리에 어긋난 행동일 때도, 강압적 약물 치료의 대상일 뿐이었을 때도, 격리와 감금의 대상인 비정상적 상태로 여겨졌다. 이러한 인식은 현재까지도 이어졌다. 보건복지부 국립건강센터에서 실시한 2024년 정신건강 실태조사에 따르면, 과반수의 사람이 정신과 치료를 망설이는 가장 큰 요인으로 부정적 시선 혹은 사회적 불이익을 꼽았다.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은 병으로서 가지는 증세뿐만 아니라 정신병이 가지는 사회적 의미 역시 감내해야 했다.



1. 정신병은 은유다.

이렇듯 정신병은 사회에서 특이한 지위를 지닌다. 나는 여기서 이것을 ‘은유’라 말하고자 한다.


혹시 ‘질병의 은유’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1978년, 수전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을 통해 질병의 은유를 폭로한다. 은유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행동, 개념, 물체 등을 그와 유사한 성질을 지닌 다른 말로 대체하는 일.’이라고 나온다. 은유에는 대상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의미는 기존의 의미와 달리 그 뜻이 미리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특정 질병을 마주할 때, 의학적인 의미를 제외하고도 어쩔 수 없이 ‘은유’를 덧붙인다. 예컨대, 암이라는 병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부정적이고 두려운 감정을 함께 느낀다. 이것은 오롯이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은유이기보단 사회 맥락적인 측면에서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암이 가져오는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며, 죽음에서 파생된 공포는 결국 병에 달라붙어 그 효과를 발산한다. ‘질병의 은유’는 사회에 의해 부여되는 질병의 새로운 이름이다.


다시 정신병으로 넘어가 개념을 연결해 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정신과 약물의 극적인 효과가 조명되어 정신병에 의학적 ‘병’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해질 무렵, 1961년, 정신의학계에 큰 파란을 일으킨 「정신병의 신화」라는 책이 출판되었다.


“나는 이 논문에서 ‘정신병은 존재하는가?’라고 질문하고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려 한다.”[2] 「정신병의 신화」의 토대가 된 논문의 첫 구절이다. 책과 논문의 저자 토머스 사스는 말 그대로 정신병은 신화(myth)임을 주장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그의 논리를 정리해 보겠다.


우선 그는 정신 의학을 사회적 행위의 관점에서 규정한다. 개인이 사회가 부여한 문화적 규범, 가치관,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에 정신에 병을 가진 것으로 낙인찍혔다는 것이다. ‘자연스럽지 못한’, ‘비정상적인’ 행위를 사회가 배척함에 따라 정신병이 탄생했기에 정신병이라는 개념은 사회에 의해 부여된, 주관적이고 문화적인 낙인이 된다. 그가 정의하는 병은 생물학적 건강 이상이었으며, 신체적 이상이 아닌 것을, 게다가 간혹 환자의 동의 없이 다루는 건 의사의 권력 밖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의 논리상 정신병은 실체 없는 은유였다.


여기서 정신병을 ‘존재하지 않기에 잘못된 것이다.’ 혹은 ‘정신병은 의미 없는 망상일 뿐이다.’와 같은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사스의 주장이 가져오는 결과를 쏙 빼내어 보면 그의 주장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그가 원한 것은 의학적 분석으로의 정신병 그 이상, 즉 사회적 분석을 통한 정신병의 이해였다. 의학이나 과학이 아니라 사람과 사회의 측면에서 정신병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밝히자면, 「정신병의 신화」는 저자가 정신과 의사이기 때문인지 간혹 정신의학서로 오해받기는 하지만, 정신의학이나 인간학 서적이 아니다.


사스가 해당 책을 저술하던 1900년대 중반보다 현대에서는 사스가 주장하는 비인간적이고 강압적인 정신 치료 행위가 현저히 줄었으며, 비약적인 의학적 발달을 이루었다. 게다가 지금 정신의학계에서는 정신병이 신화라고 받아들여지고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사스의 주장은 의학에만 치중되어 있던 당시 정신병 개념에 질문을 던졌다. 정신병을 과학적으로만 정의해도 되는지, 정신병에 달라붙어 있는 사회적 낙인을 의사나 대중들이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신병은 과학의 언어만으로 표현되기에는 너무나 감정적이고, 문화의 언어만으로 표현되기엔 너무나 이성적이었다. 지금도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정신병의 은유‘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정상적이지 못한 것’으로의 정신병을 강조하다 보면, 정신병을 꼭 치료해야 하는 불결한 대상이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비정상’이라는 것은 정신병 자체가 아니라 사회에 의해 부여된 낙인이었으며, 이러한 ‘정신병의 은유’를 뒤엎고자 하는 운동이 이미 존재한다. 세상이 씌운 왜곡된 은유는 자신이 아님을, 옳지 않음을 나서서 외치고 ‘미친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 외침을 ‘매드 프라이드’(Mad Pride)라 부른다. 당사자들은 사스가 던진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정신병이 있다’라는 말이 모욕적인 표현이 되었는가?”[3] 하고.



2. 은유는 이렇게 낙인을 찍는다.

은유는 다양한 형태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우리의 생각에 침범한다.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아도 우리가 접하는 모든 매체 속 제작자의 의도 아래에는 은유가 숨어있기 마련이며, 우리는 공유된 매체를 통해 그것을 무의식 속에 저장한다. 은유는 재현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 공유를 통해 힘을 발휘한다.


미디어는 은유가 재현되는 대표적인 예시이다. 특히 정신병을 앓는 인물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매력적인 소재가 되었다. 다만, 이것이 다소 현실과 동떨어진 형태로 이루어지며 문제가 되었다. 1960-70년대의 경우, 정신병은 반문화적 성향을 강조하는 형태로 등장했다. 가상의 세계 속 조현병의 증상은 폭력뿐이었고, 정신병을 앓는 배역은 범죄자일 가능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정신병은 통제할 수 없는 시한폭탄이었고, 사회의 해악이었으며, 정신병을 통해 가질 수 있는 사회적 지위는 범죄자 아니면 괴짜 과학자 따위의 것이었다.


드라마와 영화 등의 미디어는 창작의 영역이지만, 동시에 현실을 반영하는 매체이기에 가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의미를 부여한다. 게다가 가상의 인물에게 자신을 동일시하고 감정을 이입하면서 대중들은 그 속의 공유된 가치, 신념, 표상 등의 지식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디어를 수용하는 것은 대중이고, 대중이 살아가는 곳은 현실이다. 이에 미디어의 은유가 발현되는 장소는 결국 현실이다. 예를 들어 만약 정신병에 일탈, 무능, 소수자성, 전염 등의 이미지가 더해지는 경우, 그 이미지들은 그대로 정신병의 은유,[4] 곧 낙인이 된다. 정신병의 묘사가 조심스러워야 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가 파생될 낙인의 존재를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3. ‘아픔도 오겠지요. 머물러 살겠지요. 살다간 가겠지요.’[5]

〈괜찮아, 사랑이야〉는 정신병의 자극적인 묘사가 만연했던 시절, 정신병에 대한 부정적 낙인을 일부 탈피시켰다는 평가를 듣는 2014년 방영 드라마이다. 정신병이 서사 속 비극을 강조하기 위해 도구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평가받는 과거의 여러 작품과 달리 〈괜찮아, 사랑이야〉는 정신병을 앓는 남자주인공을 앞세워 정신병이 전개의 중심으로 작용하도록 하였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정신병은 오랫동안 특수한 위치에 있었기에, 미디어 속에서도 주로 교도소나 정신병동과 같은 특수한 공간에서만 다루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다시 말해, 격리와 배제는 정신병동이 가지는 은유였던 것이다. 〈괜찮아, 사랑이야〉는 그 은유부터 뒤집었다. 작품의 주무대를 셰어하우스로 설정하여 개인과 일상의 영역에서 정신병을 다루기 시작하였다.


작품은 남자 주인공, 장재열이 자신의 환각을 마주하고 조현병을 극복하는 형태로 끝난다. 전개 자체는 정신병의 원인과 치료하는 과정을 어느 정도 자세하게 묘사해 주는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치료 과정과 결과에는 결국 의사인 여자 주인공과의 사랑이 전제되어 있었다. 정신병 치료의 극적 효과에 집중한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게 차별화에는 성공했음에도 로맨스 장르의 특성상 연인과의 관계에 집중된 서사는 조현병 치료에 연인의 사랑을 강조하였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아가 여기서 장재열의 정신병이 사랑의 힘이나 애절함을 강조하는 일종의 드라마 속 장치로서 작용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전에 정신병을 극적인 서사를 위해 도구적으로 사용하던 관습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러 비판 사이에서 〈괜찮아, 사랑이야〉는 정신병을 정상과 비정상의 대립 구조가 아닌 수용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드라마이다.



4. ‘아침이 오기 전에 새벽이 제일 어두운 법이다.’[6]

많은 의학 드라마는 의사와 환자라는 이분법적인 관계에서 전개된다. 정신 의학을 다룬 〈괜찮아, 사랑이야〉도 정신과 의사인 여자 주인공과 환자인 남자 주인공의 갈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의사와 환자라는 수직적인 관계를 깰 때다. 과거부터 의사와 환자는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관계 속에서 그려졌는데, 특히 의사는 모든 전권이 일임된 우위에 있는 인물로 재현되었다. 여전히 의사들은 무신경하고 비인간적이라는 환자의 불만을 심심치 않게 받고 있으며, 사스 또한 당시의 정신과 의사들이 환자들을 향해 과도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수직적 관계라는 인식은 의사와 환자 간의 갈등과 몰이해를 가져왔고, 현재까지 이를 의식하고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져 왔다. 그리고 2023년, 그 관계의 또 다른 양상을 드러낸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가 방영되었다. 드라마는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하여, 정신병동 의료진의 일상을 전체 서사의 근간으로 설정했다. 다양한 에피소드로 정신병을 직접적으로 다루며, 그 속의 편견을 헤집고 이내 해체한다.


드라마의 주인공 김다은은 정신과 간호사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보호 병동에 입원한 우울증 환자였다. 보호 병동에 입원하고서부터 그녀가 계속 되뇐 것은 단 하나였다. “난 그 정도는 아닌데….” 자신이 누구보다 정신병동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했다. 빠르게 퇴원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기에 그대로 행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은 환자가 아니며, 분명 주변 사람들이 착각해서 입원하게 된 것이라 믿었기에 약은 먹지 않았다. 약을 먹으면 정신병 환자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었으니까. 비록 우울감이 좀 있어도 정신병은 아니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보호 병동에 입원하는 순간, 다은은 꼼짝없이 보호자와 의사의 동의 없이는 퇴원할 수 없는 정신병 환자였다.


다은이 자신의 우울증을 인정하기 전, 그녀의 담당의가 하는 모든 말들은 다은에게 오해에 불과했다. 자신이 간호사임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거나, 알면서도 환자 취급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실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어긋나기 십상이다. 의사는 환자의 정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정보의 선택은 항상 환자의 고통이나 결핍과 맞닿아 있지 못한다. 치료의 우선순위와 진료의 순서는 환자의 요청이 아닌 담당의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신을 열심히 전달하고 호소하는 것 외에 환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게다가 환자는 자신의 상태를, 언어를 매개로 전달하도록 요구받지만, 언어는 이리저리 꼬여버린 정신을 서술하기엔 턱없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설령 힘겹게 의사와 의사소통에 성공한다 해도 의사는 절대적인 해결사가 되어주지 못한다. 환자의 치료를 돕는 약물을 처방하거나 특정한 행동을 지시할 수는 있어도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지는 않는다. 다은의 경우처럼 치료의 시작인 아픔을 인정하는 것도 결국 환자 본인의 몫이다.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한 애를 누가 간호사로 쓰고 싶어 하니?”[7] 우연히 들은 말 한마디가 퇴원 이후 간호사로 복직하려던 다은을 멈췄다. 그 순간 다은은 이미 자신에게 우울증 환자에 달라붙은 은유가, 편견이라는 얼룩이 묻었음을 인지했다. 그녀는 곧 자신의 병이 부끄러워졌고, 손가락질하는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주변 동료와 가족들의 위로와 격려에 힘겹게 복직하고서도 문제가 터졌다. 보호자들은 정신병력이 있는 다은에게는 치료받지 않겠다고 따졌고, 병원 홍보팀장은 반복되는 민원에 그녀가 잘리기를 원했다. 그들은 말했다. “이렇게 아픈 분이 사회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욕심인 것 같은데요.”[8]


편견을 가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될 것 같을 때, 당연하게 그 대상을 해악 취급해 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불만을 제기한 보호자들은 모두 정신병동 입원 환자의 주변인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신병력으로 인한 사회에서의 배제를 쉽게 말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재발 가능성이 있는 정신병은 위험 요소였고, 자신들의 불만을 근거 있는 혐오와 어쩔 수 없는 차별이라 여겼을 것이다. 만약 정신병력이 있는 사람이 사회생활을 해도 된다는 의제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내심 그런 사람이 내 이웃이, 내 동료가, 하물며 내 가족의 주치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정신병의 은유는 정신병을 앓았던 혹은 앓고 있는 이들이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막았고, 이미 사회에서 고립된 그들이 돌아가지 못하도록 내쳤다. 정신병에 남은 것은 은유뿐이라는 주장처럼 정신병의 은유가 발휘하는 힘은 대단했다. 자기 자신을 ‘정상’이라 여기는 이들이 보기에 다은은 시한폭탄 그 자체였다.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정신병의 의학적 치료 과정을 세세하고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정신병을 사회적 측면에서도 다루었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정신병의 모습이 어떻게 사회에서 빠르게 배제되는지 보여주었다. 일부 사람들은 정신병이 끝까지 괴리된 존재로 남기를 원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병동이라는 공간에서 정신병이 어떻게 수용되고 이해받을 수 있는지, 어떤 지지와 응원이 필요한지 우리에게 하나의 표본을 만들어 주었다.



5. “제게도 활공장이 필요했습니다.”[9]

대략 2010년 이후부터 우리나라에서 정신병을 앓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와 영화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미디어 안에서 비정상을 설명하는 장치로서만 기능하던 정신병은 정형화된 은유 안에서 차별이라는 상처를 입은 채 사회에 내던져졌다.


수전 손택은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비록 우리가 은유 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도 잘 알고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거나 끌어 들여오는 은유에는 반드시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10]고. 사실 그렇다. 은유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신병의 병리와 은유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지금까지 미디어가 부정적 사회적 담론을 형성했다면, 앞으론 미디어가 역으로 편견에 도전하고 부당한 은유를 해체하는 협력자가 되기를 원한다. 나는 이제 미디어가 끼친 악영향을 정신병이 돌려받을 차례라고 생각했다. 미디어의 노출로 인해 정신병이 오히려 터부시된 과거를 지나 우리는 그 과거를 새로운 은유로 덮어야 할 것이다.


해체하는 과정은 다양할 수 있다. 정신병의 편견에 문제를 제기하는 창작물이 등장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았고, 미디어는 이제서야 수많은 가능성 중 몇 가지를 재현했을 뿐이다. 따지자면, 본문에서 소개한 두 작품에서도 정신병의 묘사가 치료와 사회 복귀라는 새로운 편견의 가능성을 불러왔다고 지적할 수 있다. 무조건적인 ‘완치’가 유일한 병의 방향성은 아니다. 즉, 이 또한 은유다. 그러나 은유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서 새로운 은유를 형성하는 것이 두렵다고 가시화를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영원히 과거의 은유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중세에 악마의 소행이라 여겨진 정신병이 근대에서 의학적 의미를 얻은 것처럼, 배제의 대상이었던 정신병이 수용의 대상이 되기 위해선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혐오는 모름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된다고도 한다. 잘 알지 못한다고 피하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존중보다는 또 다른 편견과 혐오로 돌아올 수 있다.


〈괜찮아, 사랑이야〉와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두 작품은 그나마 근래에 정신병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노력한 작품들이다. 여전히 현실에서는 범죄 사건에 정신병력이 등장하면 모든 관심이 정신병에 집중되곤 한다. 게다가 언론에서 정신병을 범죄와 직접적으로 연관시키지 못하도록 막는 ‘정신건강보도 권고기준’이 제정된 것도 겨우 작년 말의 일이다. 정신병의 불확실성을 빌미로 사람들은 개인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거나 언제 재발할지 모른다며 사회 울타리의 밖으로 내몬다. 나는 우리가 불확실성을 이유로 개인을 살벌하게 재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로 돌아가 유의미한 활동을 수행하는 환자만이 옳은 치료를 해냈다고 말하지도 않았으면 한다. 더 나아가 치료를 해내야 하는 것이라 강요하지 않고, 동시에 사각지대에서 치료를 원하는 이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불확실한 병증과 더불어 나아가는 그들에게 씌워진 부당한 은유의 색안경을 벗고, 벗길 것을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이제 이 글의 시작이 되어준 『내 심장을 쏴라』로 마침표를 찍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정신병원에서의 삶을 과감히 묘사한 이 작품이 사회의 평가 위에 자신만의 일대기를 써 내려가는 이들의 이야기라 생각한 한편, 작 중에서 망설임 없이 자신의 삶으로 몸을 내던지는 인물이 부러웠던 듯싶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서론과 결론 모두에 자리를 내면서까지 소개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로 마지막까지 이 인물들의 삶을 빌려 나의 소망을 건넨다.


정신병원에서 자신의 진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던 인물들에게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는 ‘활공장’은 작 중 삶의 시작점으로, 억압의 공간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러니 활공장을 찾는다는 건 이제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치겠다는 뜻이다. 비상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다.


당신이 활공장을 찾아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기를, 내가 아닌 은유를 벗어던지고 온전한 나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1] 정유정, 『내 심장을 쏴라』, 은행나무, 2016, 286.

[2] 토머스 사스, 『정신병의 신화』, 윤삼호 옮김, 서울 : 교양인, 2024, 9.

[3] 최한별, “미친 사람들’의 당당한 이름, ‘매드 프라이드’”, 비마이너, 2015.12.04,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9135

[4] 김미라, 김소희,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정신질환 재현과 ‘은유(metaphor)’의 해체」,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24권, 12호, 2024, 176.

[5] 도종환, 「바람이 오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송필용 그림, 알에이치코리아, 2014. (노희경, 〈괜찮아, 사랑이야〉, SBS, 2014, 14화, 지해수 역 대사. 드라마에서 인물이 해당 시를 읽고 인용했다)

[6] 이남규, 오보현, 김다희,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넷플릭스, 2023, 1화, 송효신 역 대사. (“원래 아침이 오기 전에 새벽이 제일 어두운 법이잖아요.”라는 대사를 변형했다)

[7] 위의 드라마, 10화, 유찬 모 역 대사.

[8] 위의 드라마, 11화, 병희 모 역 대사.

[9] 정유정, 『내 심장을 쏴라』, 은행나무, 2016, 333.

[10]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이재원 옮김, 이후, 2002, 252.


참고문헌

리단,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반비, 2021.

토머스 사스, 『정신병의 신화』, 윤삼호 옮김, 서울 : 교양인, 2024.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이재원 옮김, 이후, 2002.

정유정, 『내 심장을 쏴라』, 은행나무, 2016.

도종환, 「바람이 오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송필용 그림, 알에이치코리아, 2014.

김미라, 김소희,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정신질환 재현과 ‘은유(metaphor)’의 해체」,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24권, 12호, 2024, pp. 173-189.

이종명, 이승아, 「일상으로 들어온 정신병」, 『미디어, 젠더 & 문화』, 32권, 1호, 2017, pp. 41-74.

“은유”, 고려대한국어대사전.

보건복지부 국립정신건강센터, 2024년 국민 정신건강 지식 및 태도 조사(배포), 2024.07.04.

최한별, “미친 사람들’의 당당한 이름, ‘매드 프라이드’”, 비마이너, 2015.12.04,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9135

이형민, “의사와 환자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다”, 매드타임스, 2022.03.22, https://www.mad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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