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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Yonu Oct 29. 2019

예의 없는 세상, 예의 없는 회사

잘 거르고 갑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어제 오후 9시경 대뜸 도착한 문자 한 통

이 멜 확인해주세요


처음에는 스팸문자인 줄 알았다. 그래도 뿌려둔 이력서가 있기에 일단 이메일을 확인했다. 그러자 5시경 와있는 메일 한 통. 번역 테스트 메일이란다. 어찌나 급히 보냈는지 회사명도 안 적어 보냈다. 보낸 이메일의 주소로 겨우 회사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느낌이 싸했지만 의외로 제시한 연봉이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나는 어제 오후 7시경 바라던 회사의 탈락 통보를 받은 상태여서 조금 절박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지금 바로 하자, 일단 파일을 열었다.


그런데 내용이 테스트용이라기보다는 회사에서 당장 사용하는 업무용 번역을 보낸 것 같았다. 이런 용도로 사람 모집한다고 적어 놓은 건가 싶어서 통화가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바로 전화가 온다.


"저, 이거 테스트 후에 퀄리티 확인하고 면접 가능한 건가요?"


"네, 당장 내일도 가능합니다."


그는 굉장히 나이 든 노인의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서 굉장한 곤조가 느껴졌다. 순간 나의 머릿속에는 나이 든 대표의 고래고래 화를 못 이겨 사직서를 쓰고 당장 퇴사해버리는 어느 번역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도 일단, 나도 수중의 돈이 떨어져가는 프리랜서고 제시한 연봉이 높으니 번역하자. 그렇게 나는 번역을 시작했다. 내용도 많고 전문용어가 들어있어 2시간이 걸렸고 한국어-> 영어 번역의 경우 따로 프로그램까지 돌려서 혹시나 있을 문법 오류까지 확인해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오전 9시가 그 회사의 공식 업무 시간이라 9시 5분쯤엔가 문자를 보냈다. 어젯밤에 번역 보냈으니 확인해달라고. 그러자 그는 안 그래도 보고 있었다며 답신이 왔다. 내가 생각보다 일찍 번역본을 보내서 그랬는지 "일찍 일어났네요" 하며 신이 난 투였다. 다 확인하고 연락을 준다고 해서 업무 때문에 바쁠 테니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10시쯤 되었을까, 나는 다시 문자를 했다. "바쁘실 것 같아 이제 연락드립니다, 번역은 마음에 드시나요?" 하니까 그가 아주 어이없는 답변을 했다.


솔직히 말하세요, 번역기 돌렸죠?


보내 놓고 실수했다 생각했는지 금세 다시 보낸다.


번역기 어느 정도는 돌렸죠?


그리고 또 보낸다.


솔직히 말하세요


나는 기가 찼다. 일단 나는 신입도 아니고 3년 차 경력을 가진 경력 번역자다. 유학 경험도 있거니와 매거진 '여느와 여느유럽사람들'의 글을 보면 알겠지만 네이티브 영어 스피커들도 나를 네이티브라고 넘겨짚을 정도의 영어실력은 갖추고 있다.


게다가 내가 화가 났던 것은 그의 추궁하는 투의 말투였다. 아직 내가 그의 부하직원도 아니고 돈을 받고 번역을 한 것도 아닌데, 저런 말투는 당신이 대관절 무엇이기에.


나는 그에게 통화가 가능하냐고 물었는데 통화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렇게 무식한 사람에게 번역기나 돌리는 무식한 3년 차 번역업무 지원자라는 오명을 쓰고 싶진 않았다. 나는 그에게 문자로 반박을 적어 보냈다.


1. 빠른 번역을 목표로 드리는 과정에서 문체가 이상해 보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2. 어떤 상황(보고용이라던가)인지 몰랐기에 적절한 문체 사용이 어려웠습니다.

3. 그래서 중심 내용만 추출하는데 중점을 더욱 두고 번역했습니다.

4. 특정 용어는 제가 잘 모르는 분야라 몇 가지 단어는 영어사전을 이용한 점은 인정합니다.

5. 영문 번역의 경우에는 오히려 영어 작문 프로그램(번역기가 아닌)으로 문법 오류 검사까지 마쳐서 보냈습니다.

-번역기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좋은 직원 채용하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온 그의 문자


면접을 봅시다


이건 뭔 X 소리야.




정말 혹시나, 내 번역이 그렇게 형편없었나 싶어서 같은 직종에 있는 번역가 언니에게 자문을 구했다. 보통 번역 테스트를 보면 보기 전에 서류상으로 테스트 내용을 외부에 유출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나 각서를 쓴다. 이 회사는 그런 부분을 모두 건너뛰었으므로 나는 마음껏 유출했다.


"언니, 이것 좀 봐주세요. 이 번역이 번역기 돌린 번역처럼 그렇게 형편없나요?"


"아니? 안 그런데? 그 사람이 영어 못해서 그런 듯."




하,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이 예의 없는 세상에 이 예의 없는 회사야. 덕분에 굳이 면접 보러 가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다. 잘 거르고 갑니다. 연봉이 높았으면 뭘 하나. 네놈의 노예가 됐을 텐데. 이런데를 두고 블랙기업이라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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