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신전의 아름다움은 솔로몬의 신전이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비견될 정도다 - 앙리 무오, 프랑스 박물학자
이번 여행의 이유는 순전히 '앙코르와트'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앙코르와트만 보러 가려했지만 한국에서 씨엠립으로 향하는 직항 비행기가 없어 가는 김에 한국-말레이시아-캄보디아-하노이-한국으로 여행 계획을 짰다. 몇몇 접경 국가에는 씨엠립으로 향하는 버스도 있으나 이동시간이 길고 나의 체력(늙음) 때문에 비행기를 선택했다. 한때는 젊음하나 믿고 토론토에서 10시간이 넘는 버스를 타고 뉴욕을 왕복하기도 했지만 그건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2019년 처음 유럽을 방문했을 때 나는 그들의 조각상들과 건축 수준에 깜짝 놀랐다. 북미에서 몇 년을 살았기 때문에 유럽이건 북미건 거기서 거기일 줄 알았는데 유럽 역사의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가 나를 압도했다. 총균쇠도 읽었고 문화유적, 발전이라는 것이 경쟁이 아님은 알고 있으나 부끄럽게도 마음 한편에는 '아시아의 문화유적'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열등감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 최대 불교 사원이라는 앙코르와트로 나를 이끌었다.
참고로 앙코르와트는 1일, 3일, 7일의 방문권을 판매하며 가격은 날짜가 길어질수록 높아진다. 발권은 카드와 현금이 가능하나 무조건 달러로 해야 하고 현장 발권과 온라인 발권이 가능하다. 나는 현장에서 발권해 종이 티켓을 간직하고 싶었지만 관광객이 몰려 발권에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가이드의 권유로 온라인 발권을 했다. 온라인 발권은 아주 빠르게 이뤄졌다. 역시 돈이 걸린 일이라면 빠를 수밖에 없는 건가.
앙코르와트 입장 티켓에는 본인 사진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온라인 결제 시 내 사진을 바로 찍을 수 있었으나 얼굴 인식이 잘 되지 않아 가지고 있던 증명사진을 넣었다. 앙코르와트는 거대한 사원들로 이뤄졌기에 중간중간 검표를 한다. 그런데 한 검표원이 내 표를 확인하고 내게 "곤.니.찌.와"라고 말했다. 나는 껄껄 웃으며 "안.녕.하.세.요"로 답했다. 그가 무안할 것 같아 악수 한번 세게 하고 헤어졌다.
앙코르와트는 건축물의 웅장함과 부조의 섬세함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공간이었다. 1122년부터 1150년까지 28년에 걸쳐 이 거대한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한 크메르 제국의 강성함이 감히 상상이 안 됐다. 다만 크메르 제국은 앙코르와트 건축 후 약 30년이 안된 1177년에 참족의 공격을 받아 나라가 거의 무너질 위기에까지 처하기도 했다. 이때 앙코르와트에도 변화가 생기는데 참족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낸 크메르 제국이 국교를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꾸면서 원래 힌두교 사원으로 지어졌던 앙코르와트도 불교 사원으로 변신을 하게 됐다.
앙코르와트는 힌두교 신화, 불교 신화, 전쟁 설화 등 많은 이야기들을 부조로 간직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문화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촘촘한 부조들을 보고 있자니 왜 이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진시황릉의 병마용이 생각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크메르 제국이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앙코르와트의 수난기가 시작됐다. 제대로 된 관리가 이뤄지지 못했고 프랑스 식민시기, 킬링필드 등을 겪으며 문화재 약탈도 당했다.
때문에 현재의 앙코르와트는 처음 지어졌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등 유적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증대되면서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이 나서 재건에 힘쓰고 있다.
앙코르와트 재건에 많은 국가들이 도움을 주고 있으나 자연 속에 위치한 탓에 원숭이와 같은 야생동물들도 많이 보였다. 생명은 소중하지만 이런 야생동물들이 의도치 않게 앙코르와트를 훼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머리가 복잡했다.
또 투어 중 곳곳에서 약탈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방문객들이 "나 다녀감"이라는 방명록 아닌 방명록을 벽에 새겨두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낙서가 1881년에 새겨진 낙서다. 낙서조차도 유서 깊다. 이때 가이드가 "프랑스, 태국, 일본 등의 방문객들이 방명록을 남겼다"면서 "왜 한국은 없지?"하고 나에게 물었는데 조선시대였던 우리나라의 그 당시 국력이 그리 강하지 못했던 것을 그는 몰랐던 모양이다.
앙코르와트는 안젤리나 졸리 주연 영화 '툼 레이더'를 통해 서구세계에 더욱 유명해졌다. 사실은 관리 부족으로 나무들이 유적에 파고든 것인데 이런 이질적 모습이 오히려 앙코르와트가 유명해지는데 일조했다. 가이드도 연신 '툼 레이더'를 언급하며 "툼 레이더 나무를 보러 가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유적에 큰 손상을 입힐 수 있는 정도의 상황이 오면 나무를 일부 잘라내기도 한다고 했다.
사원 곳곳에는 무너진 것인지 방치된 것인지 모를 돌무더기도 있었는데 관광객들이 위에 돌 탑을 쌓아 올려둔 모습은 재밌었다. 돌 탑 쌓기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도 몇 개 올려 보았다. 투어를 함께한 필리핀 남성은 필리핀에서는 주로 계곡에서 돌 탑 쌓기를 많이 한다고 하며 자신도 탑을 올렸다. 우리나라처럼 돌 탑을 쌓으며 무언가를 기원하는 의미는 없는 듯했다. 물론 나도 순전히 재미로 탑을 올렸을 뿐이다.
이후 가이드는 "공룡을 보여주겠다"며 우리에게 이 부조를 보여줬다. 사진 가운데에 위치한 부조는 실제로 발견 당시 많은 진짜 공룡을 새긴 것이냐며 설왕설래가 있었다고 한다. 또 하필 스테고사우르스를 닮았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앙코르와트 관련 서적을 읽다 미리 알게 됐는데 크메르 제국 시절에 공룡이 살았을 리는 없고 하마로 추정된다고 한다. 스테고사우르스의 골판처럼 보이는 부분은 불교의 꽃잎 장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래도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는 것은 재미난 일이다. 그 외 코뿔소, 코끼리, 악어 등의 부조도 자주 볼 수 있었다.
마지막은 일몰이었다. 앙코르와트의 일몰을 보기 위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는 상태였다. 일몰을 보기 위해서는 약간의 등산이 필요했는데 날씨도 더운데 앙코르와트가 거의 야외에 있고 계단 등을 오르는 활동을 수반하기에 투어에 함께한 필리핀 관광객 한 사람은 일몰 보기를 포기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같이 온 다른 필리핀 사람들의 응원 속에 그녀도 함께 일몰을 보러 산을 올랐다.
투어는 한국인 1명(나), 필리핀인 3명으로 이뤄졌었는데 하루를 함께하다 보니 많이 친해져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다. 특히 세 사람 모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어 한국에 대한 얘기도 많이 했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필리핀에서 꽤 인기를 끌었던지 드라마 얘기도 하고, 배우 이선균의 자살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리고 한국의 날씨는 왜 그렇게 춥냐는 질문도... Hot, Hotter, Hottest, Hell이라는 필리핀 날씨에 비하면 한국은 추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제가 한국 방문하기 좋냐는 질문에는 4월 정도에 벚꽃 구경을 고려해 보라고 했다. 물론 그때도 필리핀 사람들은 추울 것이다...
재미난 점은 셋 중 두 명과 나머지 한 명의 출신 섬이 달라 같은 나라 출신임에도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영어로만 이뤄졌다. 같은 섬 출신인 두 명은 내게 "우리 섬 언어로 얘기하면 저 친구는 못 알아듣는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앙코르와트는 분명 장엄한 유적지다. 다만 관리가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전 세계가 힘을 합쳐 재건 작업에 나서고 있으니 언젠가는 초기 모습을 간직한 앙코르와트를 볼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아마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