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공항을 나온 건 아직 바람이 차던 4월의 봄이었다. 어른 한 명은 충분히 들어갈 만한 이민 가방을 낑낑대며 택시 앞에 섰다. 택시기사에게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를 건네고 뒷좌석에 앉았다. 택시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리창 너머에는 오랜 세월 동안 꿈쩍도 하지 않은 듯한 나무들이 지나갔고, 나는 상점 간판을 서투르게 읽어나갔다.
도착한 곳은 한산한 주택가였다. 맨션과 주택이 이어진 골목을 지나자 카시이 유학생 회관이라는 팻말이 보였다. 기숙사 건물 중앙에 있는 사무실에 들러 입주 서류를 작성하고 월세와 보증금을 냈다. 담당자는 웃으며 앞으로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말했다. 건네받은 열쇠 두 개를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계단을 올랐다. 텅 빈 복도를 지나 방문 앞에 섰다. 열쇠를 꽂고 돌리자 철컥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조그만 화장실이 딸린 한 칸짜리 방이었다. 일인용 침대와 책상이 있었고 서랍장이 벽면을 가득 채웠다. 생활 흔적이 곳곳에 보였지만 누군가 정성스럽게 청소해 놓은 듯 말끔했다. 외투를 벗고 창문을 열었다. 창가에 비친 햇살에 마룻바닥이 반짝거렸다. 차가운 바닥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어떻게 해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까.
부모님은 서울에서 살 때보다 더 많은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다만 100엔이 1,500원이나 하는 고환율 시기여서 늘 ATM에서 돈을 꺼낼 때면 마치 잘못 세탁한 스웨터처럼 쪼그라든 것처럼 보였다. 부모님 덕택에 공부하는 처지에 손을 더 벌릴 수는 없었으므로, 생활비를 아껴 사는 게 중요했다.
식비를 아끼기 위해서 처음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다행히 기숙사에 공용 부엌이 있었고, 근처에 유명한 마트가 있었다. 1 인분씩 포장된 제품도 많이 팔고 있어 틈만 나면 마트로 향했다. 간단한 요리 재료를 사거나, 저녁마다 할인스티커가 붙은 반찬거리를 사 와서 끼니를 때웠다. 작은 밥솥으로 밥을 짓고, 카레나 야키소바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이따금 떡볶이가 간절히 떠오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마트 안에 있는 해외 식료품점에 가서 떡과 고추장을 샀다. 치쿠와를 넣거나 우동을 추가하기도 했다. 나중에 친해진 친구들에게 어릴 때부터 먹던 간식이라고 떡볶이를 만들어 준 적도 있었는데, 그들은 정말 어린 아이가 이런 매운 걸 먹을 수 있냐면서 물을 연거푸 마셨고 나는 그들을 보며 진짜 그렇다고 했다.
외식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주저 없이 단골 돈코츠 라멘집에 갔다. 학교 가는 길에 있는 가게였는데 기숙사에서 자전거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가게 문 앞에 늘어선 자전거들 옆에 내 자전거를 익숙한 듯 세워두고, 미닫이문을 열면 구수한 돈코츠 냄새가 풍겨왔다. 작은 가게였다. 둘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 네 개 정도로 카운터 석까지 다 해야 열 명 남짓 들어갈 것 같았다. 나이가 지긋한 여주인이 계산하고, 주방에서 머리에 흰 두건을 묶은 아저씨가 큰 냄비를 휘휘 저었다. 가끔 여주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는 아저씨가 카운터로 와서 돈을 거슬러주었다.
이곳에 가면 돈을 아끼지 않고 가장 호화스러운 세트를 골랐다. 돈코츠 라멘에 만두와 볶음밥까지 나오는 메뉴로 1,200엔짜리였다. 메뉴를 주문한 뒤 작은 알갱이 모양의 얼음이 담긴 물을 마시며 입맛을 다셨다. 라멘은 금방 나왔다. 돼지뼈를 우려낸 국물에서 미세하게 간장 향이 났다. 면을 다 먹고 국물에 볶음밥을 적셔 먹을 때는 정말 살만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졸업하고 회사에 들어갔다. 요리는 하지 않게 되었고 돈코츠 라멘도 더는 찾지 않았다. 그러다 한번 남자친구와 규슈지역을 일주일간 여행하기로 계획했을 때, 유학 시절에 살던 곳이 떠올랐다. 중심가와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하루 정도는 시간을 내어 예전 동네를 둘러보기로 했다.
비가 내리는 여름이었다. 시내에 있는 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유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몇 명과 눈이 마주쳤다. 들뜬 마음으로 눈에 익은 골목을 걸어 들어가다가 나는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눈에 보이는 건 반쯤 지워진 기숙사였다. 누군가가 지우개로 지운 듯 건물의 반이 사라져 공터가 되어 있었다. 내가 살았던 F동 역시 없었다. 한참 말을 잇지 못하다 손가락으로 먼 허공을 가리켰다. 그리고 남자친구에게 저쯤 어딘가에 내 방이 있었다고 말했다.
풀이 죽은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남자친구는 여기까지 왔으니 네가 좋아하는 그 라멘집에 가보자고 했다. 걸어서는 한참 걸리는데 괜찮겠냐고 묻자,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늘 자전거로 지나간 거리를 그와 함께 걸었다. 두 번째로 자주 가던 슈퍼마켓을 지났고, 늘 맛이 궁금했지만 결국 한 번도 가지 않은 빵집도 뒤로했다. 30분 정도 걷자 익숙한 노란색 차양이 보였다.
라멘집 상호는 바뀌어 있었다. 나카무라집이라는 선명하고 굵은 한자 위에 라면, 만두, 볶음밥이라고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익숙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메뉴판이 어딘가 익숙했다. 예전 자주 먹던 세트 메뉴도 있었다. 주변을 다시 둘러보니 인테리어도 거의 바뀌지 않아 보였다. 낡은 맥주와 포스터 역시 익숙했다. 예전과 똑같은 세트 메뉴에 맥주도 주문했다. 라멘은 똑같이 금방 나왔다. 젓가락을 들어 면을 먹기 시작했다. 국물 한 모금도 떠먹었다. 어찌 된 일일까, 내가 기억하는 맛과 비슷했다. 혹시 단지 상호를 바꾸고, 아들이 운영하는 건 아닐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남은 라멘을 마저 먹었다.
호텔로 돌아가려고 다시 버스를 탔다. 굵어진 비 때문인지 창밖 풍경이 흐릿했다. 나는 유리창 가까이 얼굴을 대고 거리와 기억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자전거로 학교에 가면서 늘 보던 풍경 중 어디가 바뀌었는지, 여전한지. 그러다 이내 그만두고 눈을 감았다. 오래전 돈코츠 라멘집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예전에 내가 산 방 안의 모습도, 공용키친에서 동전을 넣고 가스레인지 앞에서 요리했던 순간도. 기억의 조각들이 작은 꽃봉오리가 피어나듯 떠올랐다. 그러다 불현듯 모르는 사이 나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건너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