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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니 Aug 31. 2024

복숭아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연다. 눈앞에 놓인 복숭아 세 개를 꺼내 싱크대로 가져간다. 집어 든 복숭아는 말랑하고 까끌까끌하다. 표면을 차가운 물로 잘 씻은 다음 하나씩 도마 위에 올린 뒤 과도를 꺼낸다. 한 손에 복숭아를 들고 살살 돌려가며 껍질을 도려낸다. 달짝지근한 향이 코끝에 닿는다. 수분을 머금은 노란색 과육이 창문에서 내려온 빛에 빛나 반짝인다. 노래 세 곡이 끝나면 그릇에는 옅은 노란색에 붉은빛이 도는 복숭아가 수북해진다. 그렇다. 나는 요즘 복숭아에 푹 빠져있다.


복숭아를 좋아하느냐고 누군가 내게 물었다면 나는 모호하게 글쎄요, 하고 답하며 말끝을 흐렸을 것이다. 적어도 이번 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복숭아가 여름에 나는 과일이라는 걸 올해 알았을 정도로 나는 관심이 없었다. 과일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좋아하는 과일 순위를 쉽게 대답할 수 있을 정도다. 다만 유일하게도 복숭아만 나와 거리가 멀었다. 물복이냐 딱복이냐라는 취향도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멀어지게 된 이유는 있었다. 어린 시절 집에 홀로 있을 때였다. 배가 고팠던 나는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는 엄마가 만들어둔 몇 가지 반찬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하얀 비닐봉지 안에 복숭아가 놓여있었다. 밥을 혼자 차려 먹을 정도로 크지 않았던 나는 복숭아를 꺼내 대충 베어 물었다. 끈적한 과즙이 팔뚝을 타고 뚝뚝 흐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맛있게 먹었던 거로 기억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화장실에 갔을 때 나는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얼굴과 목 주변에 우둘투둘한 두드러기가 올라와 있었다. 티셔츠를 들여 몸을 살펴보니 전신에 똑같이 자국 같은 게 올라와 있었다. 놀란 나는 두드러기를 꾹꾹 누르기도 하고, 비벼도 보았지만 피부가 벌게지기만 할 뿐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시간이 지나길 비는 법밖에 없었다. 나중에 돌아온 부모님에게도 말도 못 하고 나는 새벽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끙끙거렸다. 만약, 이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다음 날 눈을 뜨고 화장실에 달려가 내 몸을 확인했다. 다행히 어제 그 두드러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 쉰 그 순간에도 나는 어젯밤에 느꼈던 공포를 다시 떠올렸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는 복숭아를 입에 대지 않기로 다짐했다. 스무 해가 넘는 동안 그 마음은 이어졌다.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복숭아를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이 간질간질했고, 팔뚝과 종아리가 까칠한 천에 긁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복숭아를 생각하지 않는 게 편했다. 복숭아를 사 먹지 않았으니 입에 댈 일도 없었고, 누군가 복숭아를 주려고 하면 '복숭아털 알레르기'가 있어서요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권하지 않았다. 


그렇게 복숭아와 영원히 상관없이 살게 될 줄 알았던 어느 날, 건강검진으로 알레르기 검사를 받고 나서 알았다. 내게는 복숭아 알레르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과지에 나온 알레르기 반응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먼지 알레르기였다.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어렸을 때 이후로 그 두드러기가 다른 원인이라고 생각해보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당장 다시 복숭아를 먹을 수 있게 된 건 아니었다. 너무 오랫동안 먹지 않았고, 알레르기가 아니더라도 내가 복숭아를 떠올렸을 때 느꼈던 가려움은 있었으니까.




다시 복숭아와 마주한 건 임신을 하고 나서였다. 입덧이 심해진 나는 아침에 무언가를 먹지 않으면 견디지 못했고, 가벼운 크래커나 수박 주스 정도만 넘어갈 정도로 식욕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카페의 과일 스무디 메뉴판에서 복숭아 스무디가 눈에 띄었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복숭아라는 말이 나왔다. 그냥 주문을 취소할까 고민하던 차에 음료는 이미 나와버렸다. 나는 손에 든 복숭아 스무디를 보며 고민했다. 하지만 이미 알레르기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한 모금을 넘기자 전에 느끼지 못했던 단맛이 입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나는 단숨에 마셔버렸고, 임신 후 처음으로 맛있게 무언가를 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음 날, 그다음 날에도 카페에서 똑같은 메뉴를 시켜 카페 주인이 내 얼굴을 보면 이미 메뉴를 떠올리는 그것처럼 보일 때까지 되자 여름이 성큼 찾아왔다.


마트를 지나다 우연히 맡게 된 복숭아 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큰마음을 먹고 마트에서 자두 대신 복숭아 여섯 개를 샀다. 껍질에 빼곡한 하얀 털을 보자 몸이 간지러웠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하나를 집어 빨리 찬물을 틀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껍질을 벅벅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투른 칼질로 둥그렇게 껍질을 도려냈다. 접시에 담았고 단숨에 복숭아 두 개를 먹어치웠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같은 개수의 복숭아를 깎았다. 복숭아 껍질을 끊기지 않고 한 번에 자를 수 있게 되었을 무렵, 나는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도 복숭아를 계속해서 먹겠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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