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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nzich May 16. 2017

<가타카>, 그 안의 장그래.

가타카(Gattaca)


작품 : 가타카(Gattaca, 1997)  

감독 : 앤드류 니콜

출연 : 에단 호크, 주드 로, 우마 서먼


 

 아직 오지 않은 미래, 그러나 끊임없이 현재가 되고 있는 그 미래. 이 불확실한 미래를, ‘운명’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굉장히 무책임하게 확실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좋아서 죽고 못 사는 연인이 서로가 운명이었다며 뜨겁게 사랑을 불태우다가도, 이내 헤어지고 나면 각자는 그럴 운명이었다며 위안을 삼기도 한다. 이렇게 떠올려 본 운명이라는 말 안에는 책임 질 필요도, 설명할 수도 없는 무력함이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모든 운명은 아마 ‘뜻하지 않은 운명’ 일 것이다. ‘뜻한 운명’이 있을리 없지.

 

 빈센트는 이 ‘뜻하지 않은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세상은 왜 태어날 때 부터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우주에 갈 수 없다고 선고하는가. 그것은 시스템 안에서, 아직 다가오지 않은 개인의 미래를 확률로써 재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타카 안에서, 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중요하지 않다. 선천적인 유전자가 가진 가능성의 확률만이 인간에 대한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된다.

 

 철저한 계획에 따라 완전무결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동생인 안톤을, 빈센트는 결코 ‘겁쟁이 수영게임’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그가 의지를 가지기 전까지. 혹은 그의 오기와 분노가 확률 밖의 의외성이 되어 세상이 정한 운명을 극복하기 전까지는. 비록 여기서 말하는 운명의 극복이, 그저 안톤과의 ‘겁쟁이 수영게임’에서의 승리에서 그쳤다고 할 지라도 빈센트에게는 일종의 해방과 희열 언저리의 감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감독은 아마 이 영화의 포맷에서, 안톤이 가타카의 시스템을 비롯한 사회구조를 뒤집어엎는 히어로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전자로 인한 귀속지위가 성취욕과 꿈 꿀 권리조차 박탈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애매한 상황에 놓여있는 것을 어쩌면 곧 ‘현실적’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하지만 그렇게 캐릭터와 상황의 위치를 이해하더라도, 빈센트가 그렇게도 원하던 우주비행을 이루어내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느껴지는 심상은 더 침울하고 애잔하다. 완전무결한 자신의 유전자를 빈센트에게 제공한 제롬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빈센트에게서 발견했을 것이다. 의지만으로는 자신의 꿈에 한 발자국도 다가서지 못했던 빈센트는 제롬의 유전자를 빌려 우주로 가게 되었지만 그의 뒷모습에서는 어딘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진다.

 

 이 무책임한 운명론은, 제롬에게는 절실함을 가질 여지를 남겨주지 않았고 빈센트에게는 아무에게도 축복받지 못하는 ‘혼자만의 목표 달성’으로 끝나버렸다. 두 캐릭터의 관계만을 놓고 보았을 때, 제롬은 빈센트가 더 많이 부러웠을 것이다. 온전치 못한 유전자라는 굴레를 안고 태어났지만 제롬은 자신이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빈센트의 의지와 열망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빈센트에게서 빌려올 수 없는 형태의 것이었을 테니.

 

 사실,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SF장르의 영화에서 이와 같이 ‘운명에 대한 불확실성’을 거세해 버리고 이미 ‘무조건 그렇게 될 것’으로 확정해버리는 사회 시스템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극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대표적으로 ‘아일랜드(2005년 作)’와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년 作)’는 거세된 인간의 자유의지를 되찾고 기존의 시스템을 파괴하거나 전복하는 방향의 대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구조와 제도를 일거에 바꾸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울 수 있을까. 오히려 그저 캐릭터에 대한 이입 때문에 느껴지는 쾌감과 대리만족에 그칠 뿐이었다.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속된 말로 똥수저를 물고 태어난 개인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최선의 가능성은 빈센트처럼 꼼수를 쓰는 것에 있었다. 그는 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법을 어겼으나, 동시에 시스템에서 요구하는 방향대로 자신을 위장했다. 준비와 의지는 충분하지만 그저 ‘나’의 모습이면 불가능하다기에, ‘내가 아닌 나’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가타카’에서 보여주는 극중 현실은 고도로 발달된 테크놀러지에 의해 재단된 한 인간의 운명이 얼마나 무책임하게 취급되는지를 보여준다. 뭇 SF작품들을 볼 때면,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테크놀러지가 실현되어 영상 속의 문제가 현실로 다가올 가능성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것은 보통, 과학적 지식의 발달로 인한 존재 고민의 망각이나 자유의지의 박탈 등으로 집약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타카’에서 보여지는 테크놀러지는 비록 지금 상황에 완벽히 구현되지 않을지라도 분명 적용되는 바가 있다.

 

 “욕심도 허락받아야 하는겁니까?”.

얼마 전 종영된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 장그래(임시완 분)가 오차장에게 부르짖듯 건넨 대사다. ‘잘 먹고 잘 사는 게’ 최소한의 꿈이라면, 그 꿈을 위해서도 우리는 자격을 갖춰야만 한다. 

 

 누군가는, 시대에 맞춰서 더 열심히 살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문제는, 얼마든지 열심히 살 수는 있으나 ‘무엇’에 대한 선택권이 비정상적으로 강제된다는 점이다. 취업 시장에서 ‘더 온전한 유전자’의 판단기준은 이른바 스펙으로 불리고 있으며, 의지와 열망 가득한 꿈들은 때로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어야만 유예될 수 있다. 이미 이렇게 강제된 상황에서, ‘나만의 꿈’을 꾸기란 쉽지 않다. 지금, 우리들은 대부분 보통의 ‘빈센트’임에도, 마음 속에는 자꾸 ‘제롬’을 떠올려야만 한다. 빈센트가 우주로 향하며, 제롬이 자신을 소멸하며 영화는 마무리되었지만 주체의 측면에서 둘은 모두 사라졌고, 오히려 깨달음을 얻은 쪽은 제롬일지도 모른다. 만약 감독이 삶의 여정이 가진 의미를,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고 바라본 것이 맞다면 말이다. 이미 사치일지 모르는 생각이지만, ‘돌아올 힘을 남기지 않아도 될’, ‘내가 나로서 존재해도 괜찮은’, 그런 세상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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