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곳에서 자라났나요?
어느 때 부터 기억이나? 라고 몇 번의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일곱살 무렵 이라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묘사가 가능한 사건이 있던 때, 어떤 욕구에서 나답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시기가 나는 7세(한국나이) 만6세라고 생각이 든다. 유아기가 지나고 초등 학령기로 전환 될 시기일 수 있겠다.
태어나면서부터 살던 우리 집은 출입구를 지나 할머니방, 왼편에 건너방, 오른편에 우리가 지내던 안방이 있는 작은 주택에 살았다. 실제 나의 기억엔 뚜렷하지 않지만 안방에 엄마,아빠,오빠,나까지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던 기억이 있다. 사진 기록에도 남아있으니 나의 기억이라기보다 사진을 통한 기억의 주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통해 본 그곳의 배경에는, 없는 가운데에도 해왔다는 엄마의 신혼 살림의 장롱을 배경으로 언제나 술에 취해 흥겨운 아빠의 신난 표정 앞에 그저 해맑은 남매 두 명이 디스코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런 평범한 가정의 모습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한국 나이 일곱 살 무렵 같은 동네의 끝자락에 붉은 벽돌의 새 집으로 이사를 갔다. 아빠의 진두지휘 하에 설계한 거실 하나, 주방 하나, 방 세 개의 양옥집에 우리의 거처가 옮겨가던 순간이었다. 솔직히 나는 이전까진 사진이나 부모님의 첨언에 의한 기억으로 남겨져 있던 것이고, 이곳에서의 기억이 온전한 나의 기억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롭게 지은 집은 마을의 골목 어귀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대문이 북쪽을 향할수 밖에 없었고, 우리집 정문 보다 주방 쪽의 후문을 이용하던 것이 일상이던 내 상식을 빗겨간 구조였다. 남쪽으로는 끝없는 평야가 펼쳐진 그런 세계의 집이었다.
집을 지은 이듬 해에 남쪽으로 펼쳐있던 마당에 아빠는 잔디를 심으셨다. 어딘가에서 분양해 온 잔디모종이었는데 가로세로 30센티미터 정도의 잔디블럭을 듬성듬성 뿌려두는게 아니겠는가? 저게 뭐냐고 물어본 나에게 아빠는 잔디가 전파력이 높아 금새 비어있는 사이를 채울거라고 이야기 해주셨다. 정확하진 않아도 이후에 사이를 메우며 집앞이 틈없는 잔디마당이 되었다.
무엇이든 뚝딱하고 만들어내는 재주가 많은 아빠는 잔디 마당 끝에 깊이 1미터가 넘는 8자형 우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키우고 그 위에 나무로 된 물레방아도 만드셨다. 세살 많은 오빠가 요청한 농구 골대도(당시엔 용접, 나무 백보드 모두 아빠 제작) 어느새 적절한 위치에 세워져 있었다. 조금 지나서는 한 켠에 계단이 있는 오두막을 만드셨는데, 나는 이 곳에서 생일 파티도 하고 종종 친구들을 초대해 놀기도 했다. 내가 여름방학때 서울 이모네 다녀온 일주일 새에는 집 옥상에 아빠가 직접 지은 수영장도 만들어져 있었다.
나에게 집이란 원하는 목적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세계였다. 바라는 공간을 직접 만들어내고, 생각한대로 창조되는 그런 공간이었다. 실제 눈 앞에서 경험한 바이므로. (다음으로 이어짐)
#내가살던집 #내가살던고향은
#나는왜공간의영향을많이받을까
#공간이나에게주는것
#그렇게나는내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