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줄 장부가 사라지던 날

AI의 거대한 기술 번화

by 이대팔

​​"변화는 늘 소리 없이 다가와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요즘 뉴스를 보며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AI가 신입사원, 대리급 직원정도까지 대체가능하고, 미국 CES에서 선보인 로봇은 모든 관절이 365도 회전될 수준에 올라와 대량생산 현장에 투입할 수 있다고 성능자랑을 하고, 글로벌 기업들은 AI도입으로 대규모 해고를 단행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누군가는 기회라고 말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변화와 속도가 공포로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전 세계가 동시에 겪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위에 서 있다.
​돌이켜보면 기술이 세상을 뒤흔들었던 '전환기'는 과거에도 있었다.


​사라진 풍경: 줄 서던 극장과 두툼한 비디오테이프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 영화 한 편을 보려면 시내 중심가 극장 앞에 길게 줄을 서야 했다. 흥행작이 나와 매진이라도 되면 다른 회차, 다른 날에 와야 했고, 그래도 꼭 보고 싶으면 극장 앞에 기웃기웃 서성이던 암표상에게 웃돈을 주고 표를 사야 했다.


그러다 동네마다 비디오방이 생기며 줄 설 필요가 없어졌고, 그 두툼했던 비디오테이프는 CD로, 그리고 지금의 OTT 서비스로 옷을 갈아입었다. 공중전화에서 삐삐로, 핸드폰에서 스마트폰으로. 기술은 늘 우리 곁에서 쉼 없이 변하며 발전해 왔다.


1995년 윈도우의 습격, 그리고 책상 위에서 사라진 4명


​내가 2000년도에 재경팀 신입사원으로 입사했을 때, 사무실에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 있었다.

딱딱한 검은 표지에 옆면은 붉은색, 속지는 빽빽한 모눈종이 같은 '수기 장부'를 작성하던 여직원 5명이 있었다.

그들은 모나미 흰색몸통의 볼편을 들고 직접 계정별 원장을 적는 일을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하고 있었다.


​95년 출시된 'MS 윈도우'라는 기술이 회계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입사한 즈음 사무실에 상륙하자, 내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수기장부를 손으로 적던 5명 중 4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밤샘 야근을 앗아간 '자동화'의 기억


​회계프로그램이 도입되어 업무변화가 안정되고 몇 년 후 재경팀은 늘 서류더미 속에 살았다.

산더미 같은 지출결의서와 계산서, 영수증 등의 증빙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회계 프로그램에 일일이 입력하느라 마감시즌이면 3~4일씩 밤늦게까지 일하는 게 당연했다.


​세금계산서의 날짜, 금액, 부가세, 업체명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뱅킹 내역을 엑셀로 내려받아 다시 키인(Key-in)하였고, ​수출입 면장의 깨알 같은 글씨를 보며 선적일자와 외화 금액을 몇 번이고 검증하느라 눈동자는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고뇌고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세금계산서, 뱅킹 거래내역, 면장등은 '원클릭'이면 장부로 자동 연동되는 간단한 작업이, 당시에는 사람의 노동력을 갈아 넣어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다.


물류팀도 마찬가지였다. 창고의 재고입출 수량을 종이에 적어주던, 입출고 담당 직원들은 ERP가 도입되자 3분의 1로 줄어 들었다. 이제 수기로 재고를 관리하는 곳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5년의 변화가 이제는 '한 달'의 변화로


나의 경험과 기억에 있는, ​MS윈도우 95가 등장하고 기업 현장에서 인원이 체감될 정도로 줄어들기까지 약 5년의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지금의 AI시대의 변화는 1년이 아니라 월 단위, 아니 거의 실시간으로 요동치고 있다.
​일부 업종이나 지역의 문제가 아닌. 전 세계가 동시에 겪고 있는 이 급격한 변화는 분명 두렵다.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길이라 더 답답하기도 하고, 25년 동안 익숙하게 해온 내 직업에 대한 불안이 가득하다.


담담하게 맞이할 '준비'


​하지만 과거의 기술 변화가 그랬듯, 우리는 결국 이 파도를 넘어서야 한다.

더구나 여유로운 준비의 시간이 있지도 않다.


장부를 손으로 적던 시대가 저물고 회계 프로그램의 시대가 왔을 때, 누군가는 도태되었지만 누군가는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더 가치 있는 일을 찾아냈다.

회계프로그램 도입으로 권고사직을 당한 이들중 어떤 이는 다른 회사에 이력서를 냬며 '나는 장부정리를 잘하고 글씨도 잘 쓴다'고 했을 것이고, 어떤 이는 바로 볼펜을 버리고 회계프로그램 공부를 하고 사용법을 익혀 시대변화를 준비했을 것이다.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급격한 AI 변화 시대.

일상과 직업, 그리고 세계가 어떻게 변할지 다 예측할 수도 없고 온갖 여러 추측과 주장만이 SNS에 가득할 뿐이다.


​새로운 도구가 손에 쥐어졌을 때, 그것이 나를 대체하는 괴물이 될지, 아니면 나를 더 멀리 데려다 줄 날개가 될지 모를 거대한 소용돌이 같은 변화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변화를 기억하며 이 큰 흐름을 불안해하고 회피하기보다 담담하게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 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