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서브스턴스>, 거울 대신 거기 비친 나를 부수기

by 유해




사랑받기에 실패할 때마다 실은 내 탓이 아닌 문제들을 여럿 찾아내면서 그걸 ‘고치지’ 못한 나를 원망하기 일쑤였다. 객관화해야 이해되고, 납득해야만 잊을 수 있으니까. 외모는 개중에도 원인으로 지목되기 아주 쉬운 요소였다. 가장 단순하고 즉각적이며 한 사람을 볼 때 제일 처음으로 눈에 띄는 지표. 좋은 인상을 좌우하고 살아온 나날을 비추는 ‘영혼의 거울’이라면서도 가장 ‘속물적’인 욕망과 연계되었다고 평해지는 지표. ‘고치는’ 데에 가장 많은 비용을 쏟아야 하는데, 분명한 이상향이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고치기 가장 쉬운 단점의 총체.


외모 정병, 바디 포지티브, 추구미로서의 ‘개말라’(프로아나), 때로는 조롱조 섞인 ‘럽유얼셀프’라는 구호, 그리고 탈코르셋 운동이 한 차례씩 공론장을 점유한 이후다. 그간 (여성의) 미를 논하는 담론들은 꾸준히 경합하고 확장되어 왔는데, 미추의 판단을 좌우하는 문화적 압박의 영향은 삭제된 채 진화론의 자장 안에서 ‘동물적’ 혹은 ‘본능적’인 이끌림으로만 오인되는 퇴행/지연은 여전한 듯하다. 어떤 전제들은 너무 확고한 진리처럼 자리 잡아서 거부하는 것이 비과학적이라고까지 여겨진다.


예쁜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젊고 섹시하면 매력 있다. 예쁘고 젊고 순수한데 섹시하기까지 하면 성공은 식은 죽 먹기다.


혼란의 시대에 도달한 코랄리 파르자의 <서브스턴스>는 현대 사회에서 위 전제를 성립 가능케 한 출발점 - 문화 산업-의 이면을 슬쩍 들춰낸다. 얕지만 확실한 난도질이다.



외모 강박은 공식적인 병이 아니다. 엑스레이를 찍어도, 피검사를 해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여러 질병과 마찬가지로 파괴적인 증상을 보인다. 급증하는 섭식 장애와 성형수술 등 명백한 증상이 있다. 그리고 조금 미묘한 증상도 있다. 예를 들어 SNS에 올릴 완벽한 셀카를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 같은 것이다. 외모 강박은 의사나 심리학자가 진단 내릴 수 있는 병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이 병을 알고 있다.

여성에게 ‘더 나은’ 버전의 자신이란 언제나 더 마르고, 더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에는 대가가 따른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광고는 우리가 더 아름다운 버전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돈을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바른 마스카라를 써야 인생이 바뀐다고 한다. 올바른 주름 방지 크림만이 시간을 멈출 수 있고, 5킬로그램을 감량해야 연애가 달라진다고 한다.

한 남성은 18세의 여성에게 예쁘다고 칭찬했는데 그녀가 “저도 알아요. 고마워요.”라고 대답하자 그녀에게 ‘나쁜 X’라고 부르며 자만심이 강하면 안 된다고 비난했다.
이런 문화 속에서 여성은 신체 자신감에 대해 우스꽝스러운 메시지를 받는다. 네 몸을 사랑해! 하지만 너무 사랑해선 안 돼. 자신감을 가져! 하지만 겸손해야 해. 마음속으로 편안함을 느껴!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그걸 드러내서는 안 돼. 우리는 신체 자신감을 설파하면서도 자신의 외모를 좋아하는 여성을 거만하고 심지어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취급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 러네이 엥겔른



많은 관객에게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남긴 <서브스턴스>의 종반부터 출발해보자. 한 여자가 다른 여자를 폭행하고 핏물과 살점이 난삽하게 흩뿌려진다. 무기도 없는 맨몸이라 더 끔찍한 파열음이 귓가를 가득 메운다. 날것의 구타를 행하는 여자의 얼굴에 어린 것은 오직 분노와 혐오뿐이다.

극도의 폭력이 끈질기게 이어지는 <서브스턴스>의 후반 30분은 눈 감고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힘겹다. 아름답지 않은 여성 신체를 최대한 잔혹하게 학대하는 행위 자체가 목적인 듯한 장면들이 전개된다. 끝까지 싸워야 할 적이 나 자신이기 때문에 전투에서 이겨도 카타르시스 대신 비통함이 남는다.


영화는 쾌와 불쾌의 경계를 흐리려는 고어 장르의 화법에 충실하지만, 실은 잔혹한 연출을 빌어 투사된 현실이 훨씬 비정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여성이라면 모두 알만한 고통 즉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불행은 엘리자베스와 수의 거울 앞에서도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못난 나를 거울에 대고 갈아없애버리고 싶은 자기혐오를 모르고 자란 여자가 과연 있을까? 엘리자베스의 남은 생기를 죄다 먹어치운 수가 그를 데려간 곳이, 못난 나와의 연결고리를 아예 끊어내려 한 곳이 바로 그 거울 앞이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그런데 둘로 나뉘어 동시에 존재하게 된 하나의 개체가 서로를 죽이려 할 때의 과시적 폭력보다 훨씬 가깝게 관객을 찔러오는 폭력이 있다. 이를테면 나이 든 엘리자베스가 옛 동창과의 데이트에 나가기 전 무한히 화장을 고치는 장면이 그렇다. 외출할 시간이 다가오지만 그는 목의 주름을, 늘어진 가슴을, 얼굴의 자잘한 흠을 가리는 수정 작업을 멈출 수 없다. 창밖의 ‘더 나은’ 자신을 전시한 대형 광고판을 이미 봐버린 이상 자신을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애’라고 칭송하는 팬이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를 돕지 못한다. 오히려 그 칭찬이 엘리자베스를 더 옥죈다. 50세가 되자마자 자기 이름을 건 프로그램에서 해고되고 훨씬 어리고 예쁜 여성이 그 자리를 쟁취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는 ‘젊고 예쁘지 않은 나’를 도무지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외던 말, 다시 만날 때까지 ’자신을 아껴주세요‘라던 구호는 이 시점에 다다르면 기만적 자해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장담컨대 젊었던 엘리자베스가 배우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건 것이 전적으로 그의 외모 덕이라곤 할 수 없다. 그러나 외모 덕이 없었다고도 할 수 없을 테다.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었을 때 남들이 안겨준 인정의 단맛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빼앗긴 이후에는 누구보다 무력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된다. 재능, 야망, 지성, 엘리자베스가 필히 가졌을 것이나 귀히 여기지 않았던 성취는 압도적 미와 젊음에 비하면 죄다 부차적인 가치로 취급된다. 관음하고 욕망하는 시선 없이 덩그러니 남겨진 엘리자베스는 스스로를 먹다 남은 새우 머리, 와인에 빠져 죽은 파리, 웅덩이에 빠진 쪽지 같은 허름한 존재에 대입한다. 그토록 격렬한 자기혐오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생각할 겨를이 없도록 한다: 젊고 아름다운 시절 가졌던 힘이 과연 ‘진짜 권력’이었을까?




단순한 향수나 선망, 질투만으로는 이 여자가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기혐오의 늪을 십분의 일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엘리자베스 혼자만의 늪도 아니다. <서브스턴스>의 카메라 뒤나 심사대 뒤에 위치한 평가자들은 전원 남성이었다. 대부분 남성 CEO가 운영하는 성형외과 탐색 앱이나 화장품 비교 앱은 ‘안전’과 ‘신뢰’를 강조하며 가장 위험한 수술대 위로, 끝없는 소비의 사슬로 여성들을 내몬다. 그들은 여성들이 평생 그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맹렬하고 집요하게 미워한다는 것을 모른다(혹은 모른 체한다).


여자들은 스스로를 조각조각 해체해 부위별로 평가하고 혐오하는 일에 이미 너무나 익숙하다. 따로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고 감시하는 문화가 선행하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이상적인 여성 신체의 상을 일률화하고 주입하며, 거기서 탈락한 다양한 개개인을 실패작으로 느끼게 만든다. 미는 성공과 결부되고 추는 실패와 끈끈히 달라붙는다.


물론 ‘운 좋게’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이들에게도 내재화된 남성적 시선에 의한 압박은 떨칠 수 없는 덫이다. 수가 엘리자베스 대신 맡게 된 쇼 프로그램은 건강을 위한 운동법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고, 대신 레오타드를 입은 수의 신체 자체를 내세워 노골적인 섹스 어필을 제공한다. 젊고 아름답고 조금 멍청하고 헐벗었기 때문에 신예치곤 비정상적인 속도로 인기를 얻었단 것을 잘 아는 수는 자기 몸에 기이한 ‘돌출’이 생기자 극도로 긴장한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아름다움의 세세한 기준은 변화하고, 변형은 재변형을 부른다. 지방 흡입, 미백, 양악과 쌍수부터 ‘승마살’과 ‘꼬막눈’과 도무지 유머로 승화시킬 수만은 없는 ‘중안부’ 집착까지. 여성 신체에서 개조되어야 하는 부분은 무한히 증식한다. 그러나 진실은 ‘고쳐야 하는’ 몸이 아니라 ‘(더) 고칠 수 있는’ 몸이 언제나 새롭게 발견되어온 것에 더 가깝다. 주인의 필요에 선행하는 쓰임이 외부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사투 직전 ‘본체’인 엘리자베스는 제 죽음을 감수하고서라도 젊고 아름다운 수를 살려두기를 택하며 절규한다.

아직 네가 필요해.

아름답지 못한 나를 죽여버리고 싶다. 외모에 이토록 집착하는 나약한 나 역시 죽여버리고 싶다. 그 마음을 누가 모를까?


우여곡절 끝에 괴물이 된 엘리자수가 마지막 무대로 이르는 길에서 듣고 싶었던 말은 “당신이 제일 아름다워요”가 아니라 “당신을 제일 사랑해요”다. 더 나은 나, 그래서 더 사랑받는 나에 가닿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엘리자베스는 미모 이외의 다른 길을 몰랐을 뿐.


간신히 이상적인 미에 근접하더라도 금방 그것을 잃어버리고, 결국 잊히거나(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처럼) 미움받거나(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처럼) 둘 중 하나의 결말만 가능한 생. 더 욕망 받을 만한 나를 더 바람직한 나로 생각하도록 훈련받았기에 여자들은 아름답지 못한 나를 영원히 미워하게 된다. 아름답지 않은 나를 아무것도 아닌 나와 동치시킨다. 그토록 각박한 평가의 체계에서 아예 빠져나오지 않고서야, 남성이 점유한 렌즈를 거울 뒤 시선을 아예 부수지 않고서야 여성이 일말의 자기애를 유지할 방법은 없다(그리고 그 파훼는 모든 여자가/일시에 행해야 하기에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엔딩씬에서 완전한 괴물이 되어 바닥에 바짝 붙은 엘리자수는 그제야 하늘을 바라볼 여유를 얻는다. 극 내내 반복된 야자수 인서트의 의의를 뒤늦게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다. 참혹한 형상으로 엘리자베스는 한숨처럼 웃는다. 그리고 비로소 암전. 피 튀기는 무한투쟁의 탈력감 이후에만 얻을 수 있는 이 처참한 평화야말로 코랄리 파르자가 자신에게 다른 여자들에게 안기고 싶었던 것,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유일하게 좋은 것 아니었을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노라>, 미국식 '성노동'론을 다시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