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호루몽>, 살아남는다는 것은 이긴다는 것

by 유해
살아남는다는 것은 이긴다는 것.
살아남는다는 것은 참가한다는 것.

- <호루몽> 신숙옥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선정작으로 전주에서 관람한 이일하 감독의 <호루몽>. CGV 기획전 상영 중이라 추천작으로 들고 와본다.


숙옥과 어머니 케이코


재일 조선인 2, 3세대 감독들의 다큐멘터리를 꾸준히 지켜봐온 이라면 <호루몽>의 주인공 신숙옥의 얼굴을 모르기 어려울 것이다.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혐한 단체)에 대항하는 반차별주의 일본인 단체를 다룬 이일하 감독의 전작 <카운터스> 속 신숙옥은 든든한 활동가 선배이자 큰누님마냥 아주 잠시 얼굴을 비추면서도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는 덩치 큰 전직 야쿠자 출신 행동주의자들을 기꺼이 집에 초대해 교육하고 함께 식사하고 자이니치 할머니들과의 대화를 주선하는 역할을 맡는다.


2000년대 초반 한국 방송 <한민족 리포트>를 통해서도 국내에 소개된 바 있는 신숙옥은, 양복 입고 젠체하며 '위안부' 문제에 헛소리를 얹는 일본인 중년 남성 논객들을 간단히 제압한다. 언제 어디서나 기죽지 않는,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한 형형한 눈빛과 싸움을 두려워 않는 배포는 누구에게나 깊은 인상을 남긴다. 생활력 없는 아버지와 살 의지를 잃은 어머니 사이 막내딸로 빈궁하게 자랐다지만, 타고난 낙천성이 그를 어머니와 같은 좌절의 구덩이에서 꺼내주었다면 투사의 기질은 언제나 그를 전장으로 내몰고 승자로 만들어온 것만 같다.


조선인이고 여자니까 다른 사람보다 2배로 잘하는 건 안 돼요. 네 배로 잘해야 돼요. 가만히 있다간 남자한테도 일을 뺏기고 일본인한테도 일을 뺏기니까.



사무용품도 멀쩡한 공간도 대여해주지 않고 대출도 나오지 않는 극도의 차별 속에서도 젊은 신숙옥은 용케 자기 회사를 열고, 여성 고용 증진 추세에 발맞춘 인재 추천과 강연을 통해 명성을 다지며 입지전적인 기업가가 되어간다. "여자와 함께 사는 방법을 모르는 기업들에게 일종의 지침을 제공"하는 게 자기 역할이었다고 회고하는 그의 커리어, 바라보는 목표점이 그토록 확실했던 그의 시야는 현대의 일하는 여성들에게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경애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그 커리어의 시작점이 실은 모델 에이전시로 그를 이끈 연예계 큰 손과의 만남이었단 일화는 그 시절 어린 자이니치 여성의 갈 곳 없는 비통함을 낱낱이 드러낸다.


"그 사람에게 한밤중 전화해서 어느 가교에서 만났어요. 만나자마자 '나는 처녀니까 1천만 엔에 나를 사줘요, 처녀를 사겠다는 사람에게 어디든 소개해 주세요'라고 말했어요. 그 남자가 깜짝 놀라고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하더니 나를 어느 모델 회사에 소개시켜 줬죠. 천만 엔 정도면 우리 집 빚도 다 갚고, 가난에서 벗어나서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거예요. 정말 그땐 밤중에 속이 답답해서 돈 생각에 잠을 못 이뤘으니까요..."



지극한 가난과 차별. 태어나고 자란 땅에서 언제까지나 '불법체재자' 딱지가 붙는 신세. 겨우 스물두엇 먹은 여자아이가 '처녀인 나'를 가장 값비싼 것으로 팔아먹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기까지 견뎌왔을 극악한 시선들이란. 신숙옥이 20대 초반의 결심을 털어놓을 때 뒤에 깔리는 음악은 얄궂게도 마츠다 세이코의 푸른 산호초다. 버블경제의 풍요를 등에 업은 발랄하고 우아한 선율과 자이니치 여성의 신산한 십 대가 이루는 낙차는 비극적일 정도로 깊다.


그렇게 감히 짐작할 수 없는 세월의 상처를 모조리 먹어치우고, 언제나 날 거꾸러뜨릴 준비가 되어있는 사회를 딛고, 재일조선인 북송 사업의 유혹과 성폭력의 위협에서 좌충우돌 탈출해가며, 방황밖에 허용받지 못한 억세고 질긴 여자아이가 찢길지언정 굽히지 않으며 어른이 되어온 생을 영화는 담담히 읊어간다. 오키나와 주민, 지진 피해지역의 자이니치 가정, 장애인, 위안부 할머니들과 연대하며 모두의 의지처가 되는 굳은 어른이.




반-차별단체 카운터스를 추적한 이일하 감독의 여정은 17년경 일단락된다(그리고 그사이 카운터스의 물리력을 담당한 조직 '오토코구미'의 실질적 리더였던 조장, 다카하시 나오키 씨가 병으로 사망한다).

한국 시민사회가 그의 소식을 직접적으로 듣기 어려워진 2018년 이후 신숙옥은 오키나와 미군 시설 반대운동에 연대하다가 DHC 방송국의 날조와 음해를 겪고, 뒤이은 혐한 우익들의 스토킹과 물리적 폭력 앞에 놓이게 된다. 젊은 여성 탤런트를 초대해 우익 중년 남성 우익 인사들이 뉴스를 '가르쳐준다'는 취지의 (대놓고 역겨운) 프로그램인 DHC의 '뉴스여자'에서, 오키나와 주민들의 평화운동에 사회운동가로써 힘을 보탰을 뿐인 신숙옥을 소개하며 무려 '북한의 브로커'나 '간첩'에 준하는 반사회 테러조직의 주동자라 몰아간 것이다. 어엿한 공영방송의 정규 프로그램이 가짜뉴스의 발원지가 되길 서슴지 않자 그에 신난 일본 혐한 극우파들이 호응하며 기세등등 신숙옥을 온/오프라인에서 불링하기 시작한다. 그의 말마따나 '여자고, 자이니치고, 민족 이름으로 살고, 건방지고... 그런 제가 이용하기 가장 쉬우니까' 표적이 되고만 것이다. 연로한 어머니까지 위협하는 행태에 지쳐 독일로 떠났던 그는 2021년경 DHC와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저에게 오키나와인은 일본 국제박람회에 조선인과 함께 '전시'되었던 동지입니다.
차별 반대라는 건,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것이지 조선인, 한국인 차별에만 반대한다는 건 말이 안되는 거예요.
(...) 이렇게 단순한 차별에 지면 안 되겠다. 이렇게 분명한 적에게 쫄면 안 되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신숙옥은 1심, 2심, 최종심까지 모두 DHC에 승소한다. 뻔뻔하게도 억울해하며 항소를 거듭했던 DHC는 문제가 된 '뉴스여자' 프로그램의 폐지 및 사이트 다시보기 서비스를 종료하는 처분을 받았고 신숙옥에게 고액의 배상을 했다. DHC는 결국 한국에서 철수하더니 22년 매각되어 뿌리 깊은 혐오발언에 강제로 종지부를 찍었다고 한다. 개인이 기업을 상대로, 그것도 혐오발언의 법리적 맥락적 수행적 성립을 증명해 가며 재판에서 승리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그야말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싸워서 살아남는' 사람이었던 신숙옥은 최종 승소 소식을 들은 직후 일면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인들에게 전화를 돌린다. 무거운 얼굴에 점차 그다운 활기와 해방감이 번지는 것을 관객도 벅찬 마음으로 바라본다. 아마도 그는 자기와 같은 약한 이들에게 자기마저 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꿋꿋이 버틴 것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신숙옥과 변호인 카네다(김) 씨는 DHC 소송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일본의 마지막 양심을 보여준 사법부에 감사한다"고 말한다. 2016년 헤이트스피치 금지법 제정을 통해 광의의 차별금지법으로 다가가는 한 걸음을 먼저 내딛은 일본 시민사회에서 다행히도 신숙옥은 이제야 그만의 작은 쉴 땅을 얻어낸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나고 자란 땅에서 여전히 갈 길은 멀고, 그가 조국이라 생각하고 싶었을 반도의 두 나라 모두 그와 그의 어머니를 받아들여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외삼촌과 할아버지가 북송사업 이후 비참하게 물품을 구걸하다시피 하다 북에서 돌아가셨던 2000년대 초반, 신숙옥은 '드디어 북조선과 연이 끊어졌다'는 안도감을 느꼈다고 솔직하게 서술한 바 있다. 또 숙옥의 어머니 케이코는 한민족의 정에 일말의 기대를 안고 90년대에 남한으로 수화를 배우러 왔다가 사람들의 무심한 태도에 상처를 받고 뒤늦게나마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므로 언제까지나 표류하는 이들 모녀에게는 아직도 '비빌 언덕' 따위 없다. 뿌리와는 점점 멀어지고 마시는 공기는 폐를 찌르듯 공격적이고 불친절하다. 그런 삶만이 그들, 자이니치들, 여자들, 힘없고 돈 없어 범법으로 규정당한 이들에게 남아있다.


그 속에서 신숙옥은 언제나처럼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한다. 그건 곧 '잘 보이기' 대신 '잘 싸우기'를 택하는 것. 결말부에서 그가 찾아간 장애 시설의 친구들과의 대화 중 이런 신숙옥의 잘 다듬어진 결기를 함축한다. 장애가 있는 한 분이 부자연스럽게 저자세를 취하고 과하게 고마워하자 신숙옥은 웃고 떠들면서 그런 행동을 자연스레 만류한다. "사랑받고 싶어서 맑고 밝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 하는 거지?"라 그를 놀린다(그 친구 역시 호탕하게 웃으며 맞아! 하고 인정해버린다).


사랑받고 싶어서 비굴하리만큼 친절하고 준법적인 사람으로 커봤자, '정상' 혹은 '일반' 혹은 '주류'에 안전히 속하고 싶어서 태도를 아름답게만 가다듬어봤자 그들이 우리에게 부스러기도 던져주지 않을 거란 거 잘 알지 않냐고. 그럴 바엔 차라리 싸워서 얻어내자고 지지 말고 살아서 나의 존재를 입증하자고, 신숙옥의 매섭고도 다정한 눈초리가 그렇게 이르는 것만 같다.


그건 나 역시도 가장 동경하고 이상적으로 생각하며 갖고 싶은 태도이지만 언제나 조금씩은 비껴서서 눈치 보게 될 때가 많았는데. 찬물 맞고 지금보다 더 잘 싸우고 싶어지게 만들어주는, 이토록 깊고 순수한 존경을 느끼게 해준 어른이 얼마만이었던가? 60년어치 투쟁의 구술사를 가까이에서 들어본 것만으로도 너무나 가치 있는 90분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서브스턴스>, 거울 대신 거기 비친 나를 부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