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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Feb 27. 2021

<마틴 에덴>,
얼룩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 천재

<마틴 에덴>은 내가 2020년 극장에서 본 영화 중 <1917> 이후 두 번째로 별점 5점을 매긴 영화다. 평론가 이동진이 ‘사랑이야말로 철저히 계급의 장력에 지배된다는 사실’에 관한 영화라고 썼는데 이번에도 그의 말이 (얄밉게도) 가장 적확한 평이었던 것 같다. 영화가 나를 인도한 곳은 젊은 연인들의 이뤄질 수 없는 로맨스에 대한 절절한 감동이 아니라, 후천적 노력으로는 아비투스의 격차를 뛰어넘을 수 없단 걸 깨달은 주인공의 자기 파괴적 절망에 대한 건조한 이입이었으니.


허버트 스펜서의 저작이 한창 유행하던 즈음의 이탈리아 남부 항구도시 어딘가라는 흐릿한 시공간적 설정 속에서 마틴 에덴은 선원과 공장 잡부 일을 전전하는 노동계급으로, 그가 사랑하는 엘레나는 부유하고 귀족적 매너를 잃지 않은 오르시니 가의 잘 교육받은 딸로 등장한다. 그려놓은 듯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대비다. 마틴은 준수한 외모와 덩치와 주먹을 장점 삼아 이용하며 거리의 왕자처럼 군림해왔지만, 더 귀한 것 – 엘레나와, 그녀의 계급과, 그에 걸맞은 높은 수준의 교양 -을 갈망하게 되면서 그의 불행이 시작된다. 엘레나가 몸에 두른 위엄과 상냥함, 우아함, 여유와 순진함. 마틴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 자연스럽게 구현할 수 없는 오리지널리티. 엘레나의 값짐과 자신의 부박함 사이 드넓은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히기 위해, 마틴은 탐욕스럽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닥치는 대로 고전을 읽고 지식을 쌓는다. 더 나아가 자신만의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마틴은 어떤 불꽃을 내면에서 발화시킨다. 혹은 불꽃이 먼저였고 그것이 그를 쓰는 일로 유도했든가.

어쨌든 단지 읽는 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 시작되었을 그 불꽃은 (마틴 자신은 그것까지도 엘레나와 합일되기 위한 장치로 착각했으나) 그를 엘레나를 향한 열정 이상의 경지로 데려다 놓는다. 쓰기 위해 펜을 든 인간보다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펜을 든 인간이 언제나 더 강하고 진실된 글을 쓴다는 건 진리이니까. 그러나 이를 아직 감지하지 못한 마틴은 꾸준히 노력해도 엘레나의 세계에는 도무지 섞여들 수 없는 자신, 엘레나의 생일 파티 대신 괴짜 루스 브리센덴이 데려간 고급 사창가의 파티 따위에서 더 편안해하는 인간인 자신을 혐오한다. 엘레나와 헤어지고 몇 년 후 유명 작가가 되었어도 이 자기혐오는 마틴을 떠나지 않는데, 단지 이젠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껍데기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덧그리는 사회와 대중에 대한 환멸까지 더해졌을 뿐이다. 엘레나와의 첫 만남 당시 마틴이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여기 웃기는 얼룩이 있다’고 짚어냈던 그 얼룩(범선)은, 기실 엘레나가 향유하고 들이마셔온 공기 속에서 불순물밖에 될 수 없는 처지인 마틴 자신의 운명을 예고한 것이었을 테다.


마틴은 분명 엘레나를 사랑하지만, 어쩐 일인지 엘레나에게 가장 무겁고 짙은 진심을 고백할 때는 항상 ‘당신을 사랑해요’ 대신 ‘당신을 닮고 싶어요. 당신이 말하고 생각하고 읽는 것들을 나도 알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처음엔 사랑과 호감을 담아, 마지막엔 원망과 배신감과 자기 파괴적 분노를 담아 내질러진 그 말은 곧 두 연인의 본질이 로맨스보다도 사제 관계 혹은 갈망당하고 질투당하는 자와 갈망하고 질투하는 자의 관계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엘레나는 이끌고 가리키고 가르치는 자고 마틴은 순순히 따라가며 습득하는 자다. 하지만 마틴의 경험에 기반한 배움들이 엘레나의 ‘교육’을 필연적으로 넘어서면서 각자가 연인과 그려보았던 미래의 행복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백일몽이 되고 만다. ‘교육으로 가난을 없앨 수 있다’는 말을 직접 힘차게 발화하기도 했던 마틴이지만, 정말로 그렇기만 하다고 전력을 다해 믿는 연인의 무지를 견디기는 힘겨웠던 걸까. 오직 교육만으로 가난과 그 가난이 평생 뼈에 새긴 굴종과 억척스러움을 단박에 종식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엘레나의 ‘무지’는, 사실 무지라기보단 험한 세상을 제대로 알지 못해도 되는 그의 배경에서 기인한 무심함과 순진함에 더 가깝기에 더욱 절망적이다. 정규 교육을 받으라거나, 글 쓰는 일은 취미로 삼고 생계유지를 위해 회계사가 되라거나, 최소한 ‘제대로 된’ 글쓰기를 익히라고 계속해서 권유하는 엘레나 앞에서 마틴도 제 나름대로 노력하긴 한다. 하지만 오직 사랑만을 믿으며 상대를 입맛대로 깎아가는 연애는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단 것 역시 수없는 연인들의 실패를 통해 경험적으로 증명된 서사다. 마틴이 쓰는 글이 너무 우울하고 날 것이고 비관적이기만 하다고 여기는 엘레나와, 엘레나가 좋아하고 믿는 세상의 모습이 너무 뻔하고 좁고 대책 없이 희망적이라고 무의식 중에 평가하게 된 마틴의 ‘사랑’은 그래서 위기를 뛰어넘지 못한다. 슬프게도 둘을 영원히 하나로 묶어줄 만한 기적은 없었다.



혹여 영화가 담은 메시지가 너무 단순하고 간명하다는 비판이나, 남성-마초-인 마틴이 곱게 자란 여성인 엘레나를 다루는 방식이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남성적) 시선을 대리하게 되기 때문에 마틴 역시 성별권력이라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포식자/가해자란 비판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난 두 쪽 다 별로 동의하진 않는다.


첫째로 <마틴 에덴>은 (이 영화를 극찬한 봉준호의 <기생충>이 그러했듯이) 단순함과 간명함을 일부러 의도하고 만든 영화다. 메시지가 너무 쉽고 명징하게 드러나는 ‘참’이라고 해서 그것이 곧 깊이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게다가 이를 전하는 연출과 전달 방식까지 일관되게 납작하다고 말하기는 더 어렵다. 마틴의 서사를 담은 필름 사이사이 삽입된 뜻 모를 푸티지들, 이름도 얼굴도 역사도 알려지지 않은 항구 노동자들과 여자들과 아이들을 담은 그 장면들은 곧 이 극이 마틴과 엘레나라는 특정한 인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확장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어떤 서사가 남성중심적인가를 따지는 것만이 영화의 의의를 결정하는 전부는 아니다. 나는 ‘여성은 가장 최후의 식민지’라는 명제에 대체로 동의하고 매우 공감하는 편이고, 그래서 내가 이런 소리를 하게 된 게 놀랍긴 하지만, 이 영화는 마틴 에덴이라는 ‘남성’을 감싸려는 의도가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마틴 에덴의 남성성에 대한 그 어떤 연민적 어조도 찾아볼 수 없다. 굳이 마틴 에덴이라는 한 인간의 속성을 낱낱이 해체해서 따져보자면 그중 영화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계급성과 탐미적 예술성,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충돌이 야기한 자기파괴이지 그의 남성성이 아니다. 나 역시 남성이 쓰고 남성이 만든 영화마다 온 감각을 곤두세워 ‘남자 주인공이 감독/작가/연출진의 페르소나인가?’ ‘은근하게 남성에게만 옹호적인 어조를 띠는가?’ ‘남자 주인공의 서사 이면에 제작자 남성의 자기연민이 투영되어 있는가?’ 등등을 탐지하고자 애쓰는 예민한 관객이라 자평하는데, 이 영화에선 전혀 그런 유의 불쾌함을 느끼지 못했다. 여성혐오적인 부분들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였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라, 애초에 여성혐오로 읽어낼 만한 부분이 깨끗이 삭제된 – 정말이지 지극히 계급과 물질성의 문제만 집요히 다룬 – 영화라고 느껴졌단 뜻이다.


과연 엘레나가 연인의 일방적 대상화와 몰이해에 오독당한 피해자이기만 한가? 물론 영화 결말부에 마틴이 성공한 작가가 되자 그가 가문에 편입되는 일을 거부하던 태도를 무르고 다시 잘해보라는 식으로 밀어붙인 엘레나의 부모나, 그에 냉큼 응한 것처럼 마틴을 찾아온 엘레나가 표현된 방식을 생각하면 엘레나가 좀 기회주의자처럼 그려졌단 찜찜함을 느끼는 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 아닌가. 여기서 엘레나가 다시 찾아왔기 때문에 꽃뱀에 가깝다는 말도 안 되는 비난은 그냥 무시해도 된다. 중요한 건 둘의 관계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쪽이 과연 누구인지를 명확히 가려낼 수 없단 점이다. 두 연인이 끝내 이별할 때, 엘레나가 마틴의 험한 태도에 충격받는 동시에 마틴 역시 엘레나의 몰이해와 계급의식에 새삼 다시 상처받는다. 이 상처들 간의 무게를 재고 어느 것이 더 심각하다거나 더 잔혹하다는 진단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 계급과 성별, 빈부와 물리적 힘, 수많은 차원들이 교차하며 직조된 연인 - 혹은 사제 - 관계는 마틴-강자, 엘레나-약자라는 일차원적 도식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굳이, 정말 굳이 성차에 따른 착취적 관계의 기미라도 찾아보고 싶다면 마틴-엘레나가 아니라 마틴과 같은 계급 출신의 여자친구인 마르게리따를 눈여겨보는 것이 더 적절한 방향일 테다. 마틴은 거의 노골적일 정도로 마르게리따를 대체재 취급하고 하대한다.)


엘레나가 여성이기 때문에 언제나 어디서나 모든 층위에서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여성성을 피해자성과 동치하는 착각이고, 피식자라는 속성을 여성성에 천착시키는 오류다. 게다가 엘레나에겐 기회가 있었다. 엘레나는 마틴이 (다소 난폭하게) 데려간 마틴의 마을에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노동자와 주정뱅이와 창녀들의 삶을 목격했다. 하지만 곧 자신이 직시한 내용을 견디지 못하고 "마틴, 이러지 마. 이제 제발 집에 데려다줘"라고 애원했다. 안온하고 청결한 자기 가문의 저택으로, 자기가 나고 자란 좁은 세계로 다시 자신의 시야를 고정시키기를 바란 것이다. 그는 분명 ‘알 수 있었는데 알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기가 ‘원래 가진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자기가 당한 것, 잃은 것, 갖지 못한 것에만 집중하기 쉬워진다. 나 역시 그렇다. 하지만 엘레나가 여성이고 마틴이 남성이기 때문에, 엘레나가 마틴보다 어리고 세상 물정을 몰랐기 때문에, 엘레나가 마틴의 남성적/일방적 시선의 피해자라고 말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는 어디까지나 상류 계급의 여성이고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르쳐온 귀족적이고 시혜적인 사유를 진통 없이 내면화한 존재다. 엘레나에겐 마틴만큼 자기변명의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다는 아쉬움 정도는 토로할 수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마틴과의 미래란 결국 그 자신의 부와 특권을 내려놓는 일이 아니라 마틴을 번듯한 전문직으로 만들어 자기 가문의 완벽한 그림 속으로 들여오는 일에 불과했는데.


 


내가 개척자/천재의 서사를 유난히 좋아하나, 그래서 마틴 에덴에게도 이렇게 관대하게 구나 곰곰 고민해 봤다. 몇 년 전 <파이널 포트레이트>의 자코메티와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의 에곤 쉴레를 무척 흥미로워하고, <잉글랜드 이즈 마인>의 모리세이와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의 류이치 사카모토의 천재성에 거의 눈이 뒤집혀서 찬양했던 것을 약간은 민망해하며 복기했다. 하지만 천재의 서사라고 다 좋은 게 아니고 그 인물이 주조된 방식이 내 입맛에 맞는지가 가장 중요한 요인 같다. <마틴 에덴>은 주인공의 천재성보다도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버티는 기간 동안 경제적 궁핍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는 모습을 더 끈질기게 묘사한 영화기에 현실적이었다. 마틴 에덴이 모순과 정열과 직설로 꽉 채워진 인물이라 특히 더 좋았다.(하지만 이 직설적 논법은 이 영화의 배경이 이탈리아였기에 별 의도 없이 자연스레 등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틴은 자신과 같은 계급 이탈자, 이단아들만이 모든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으면서 그 어떤 집단, 어떤 헤게모니에도 귀속되길 거부한다. 그 점이 그의 안타깝고도 매력적인 오만이다. 마틴은 노동자들의 파업을 철없는 어린아이들의 쓸데없는 짓거리처럼 평하며 스스로 자유주의자라 선언하는 부르주아의 이중성 앞에 분노한다. 동시에 제 목줄을 쥔 주인이 ‘국가’라는 공동의 적에서 ‘우리’라는 더욱 위험하고 실체 없는 존재로 바뀌었을 뿐인데, 이젠 안심하고 노동조합에 충성하며 ‘전체’를 강조하는 사회주의의 전제는 의심하지도 않는 프롤레타리아의 맹목성에도 분노한다. 그는 파시즘을 증오하고 민주주의적 절차가 내포한 다수성의 폭력을 혐오한다. ‘개인’이란 관념이 체득 가능한 감각으로 서서히 부상하던 시기의 독서가답게 자신을 ‘진정한 개인주의자’로 선포했지만, 그의 강경한 사유는 파고들수록 테제가 아니라 안티 테제에 가깝게 보인다. 개인이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는 제1원칙 이외의 모든 ‘주의’에 반대하는 듯한 마틴 사상의 정수는, 아직 마틴 에덴이란 이름을 제외한 모든 정보가 베일에 싸여있던 오프닝에 등장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리하여 세상은 나보다 강하다. 그 힘에 맞서 내가 가진 건 나 자신뿐이지만, 다수에 짓눌리지 않는 한 나 역시 하나의 힘이며 내 글의 힘으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한, 내 힘은 가공할 만하다. 왜냐하면 감옥을 짓는 자는 자유를 쌓는 이보다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


결말에서 넓은 아파트를 통째로 쓰며, 비서와 속기사를 고용해 자연스레 사람을 부리고, 목숨을 건 검술 결투나 무의미한 약물 복용에 인생을 허비하는 마틴은 자신이 과거에 그토록 혐오하던 '금발의 귀족'과 똑 닮은 꼴을 하고 있다. 자신은 입만 놀리며 모든 메모를 속기사에게 맡기는 장면은, 그가 그 순간 열변을 토하며 비판하던 대상이 바로 그리스의 귀족들의 지적 노동 – “철학이 태어난 이유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육체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노예 덕분에 오직 사유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 따라서 우리는 정부에 요청한다. 문화와 지식에서 나오는 수입 일부는 노예와 하인에게 돌아가야 한다.” – 이기에 완성되는 완벽한 아이러니다.



마틴의 일대기를 전개하는 내내 삽입하는 오래된 화질의 푸티지들이 연출상의 우아함을 더하고 집중력을 환기시킨다. 마틴과 줄리아 남매의 어린 시절 홈비디오, 바다와 소년들, 마틴의 침몰하는 정신을 상징하듯 느리게 침몰하는 배를 담은 필름들. 마틴의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기억들. 이 오래되고 손상된 필름들을 일부러 마틴의 정신 속으로 침투시킨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다가 영화에 한층 더 매혹되었는데, 마침 씨네21에 게재된 좋은 평론을 찾아 공유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 이 영화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모던시네마의 거장들이 남긴 전형적인 유산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유사성은 피상적인 수준에서 구사되고 있을 뿐이다. <마틴 에덴>의 탁월함은 그런 부분이 전부는 아니다.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마치 이면화, 또는 삼면화를 만드는 것처럼, 픽션과 기록 필름의 재료들을 두고 한편으로는 이탈리아 영화사의 거대한 이름들을 흔적에 새겨두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연표가 부재한 시간의 틈새로 수많은 ‘이름 없는’ 이미지들을 불러들인다. 내 관심은 후자에 있다. 이야기와 주제의 차원으로 드러나는 통상적인 영화사의 흔적만큼이나 주요하게 작용하는 이면의 계보에 대해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서사적 접근은 흥미롭지 않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이야기와는 무관하게 영화가 생산하는 매혹에 대해서다.

필름에 새겨진 익명의 표상들은 <마틴 에덴>이 이름을 가진 단 한 사람의 연대기적 영화가 되기를 거부한다. 신원을 모르는 선원 노동자들, 도시의 사람들, 과거에 촬영된 인물들의 얼굴과 몸짓이 화면을 채우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마르첼로는 영화란 본래 누가 찍었는지, 누가 찍힌 것인지 알 수 없는 비인칭적 이미지를 생산하는 광학 매체에 지나지 않음을 무심히 보여주고 있다. 배우와 연출자(혹은 촬영감독)의 이름이 공식화된 것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나서 얼마 뒤에 벌어진 산업의 산물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이미지, 누구도 아닌 표상, 아무것도 지니지 않음을 실행하는 영상. 그것이 필름의 본성이다. 마틴 또한 그 상태에서 출발했지만, 엘레나를 만나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쓰고, 사회주의자로 신문에 실리며, 스스로를 ‘진정한 개인주의자’라고 선언한다(그리고 이 순간 엘레나에게서 추방당한다). 이제 그는 이름 없는 영화의 한 부분으로 속할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죽음을 맞이하는 대신 ‘유명 작가’가 된다. 하지만 이는 추방의 신호와 다르지 않다.


첫 장면에서 보이는 녹음기와 주기적으로 삽입되는 손상된 필름, 그리고 마틴이 원고와 편지를 쓰기 위해 구매하는 타자기.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저작(<축음기, 영화, 타자기>)을 패러디해서 말한다면, <마틴 에덴>은 마틴이 건드리는 녹음기, 필름, 타자기의 작동으로 움직인다. 영화가 기원에 간직한 저장 매체의 신호들. 사운드와 이미지와 텍스트는 이 매체들의 기억으로 정립될 것이다. 마르첼로는 원작 소설의 주인공과 다르게 “<마틴 에덴>의 마틴은 20세기의 인물”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여러 의미를 내포하지만(이를테면 영화에서도 주요하게 두드러지는 사회주의와 자본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그가 언급한 세 개의 저장 매체를 손에 쥔 인물이라는 의미로, 즉 자신의 목소리와 몸짓과 문자를 기계장치에 저장한 인간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마틴은 이중의 삶을 산다. 이야기의 차원에서는 하급 계층 노동자의 삶/부르주아 작가의 삶으로 나눌 수 있을 테지만, 이미지의 조건이라는 차원에서라면 현실의 삶과 기록 매체에서의 삶을 사는 마틴으로 분화된다. 현실의 마틴은, 필름 표면과 녹음기의 마틴으로 되돌아오지 못한다. 마틴은 거듭해서 좌절에 직면한다. 그래서일까, <마틴 에덴>에는 강력한 상실감과 향수의 정서로 가득하지만, 돌아갈 수 있을 법한 구체적인 장소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틴의 유년기는 필름의 조각으로 진동할 뿐, 현실의 감각을 향해 가닿지 않는다. 그런 물질적 지표의 불가능성에서 연인들의 이별, 스승의 자살, 전달되지 못한 감정, 사랑의 실패라는 영화의 파국적 내러티브가 연결된다. 필름의 삶에 주박된 마틴은 현실에서의 사랑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마틴이 엘레나의 집에서 본 회화 작품의 얼룩은 그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마틴은 해안가에 도착한다. 모래사장에 앉은 마틴 주변으로 어느 노인과 이름 모를 흑인들과 군인들이 보인다. 그래, 이곳은 이름 없는 자들을 위한 영화의 영역이다.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그 이상의 숫자가 나란히 서는 형상을 위한 장소다.


이곳에 마틴의 자리는 없다. 그의 사방으로 익명의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다. 남은 방향은 하나다. 지평선을 향해 뛰어드는 마틴의 신체는 롱숏의 구도 안에서 작은 얼룩처럼 보인다. 마틴의 몸짓은 마치 필름의 손상된 자국처럼 프레임에 각인된다.


그런 영화들이 만들어지던 시대가 있었다. 몬티 헬먼의 <자유의 이차선>, 필립 가렐의 <비밀의 아이>, 알랭 타네의 <백색 도시>, 빔 벤더스의 <사물의 상태>…. 필름의 물질적 성질을 매개로 영화와 세계를 다시 접속하려는 성찰적 작업 말이다. 곤경에 처한 영화의 시기에 영화의 역량과 의미 자체를 조심스럽게 질문하는 시도. 피에트로 마르첼로는 디지털 이미지와 아카이브 푸티지의 시대에 그러한 시도를 연상케 하는 비범하고 기묘한 작업을 내놓았다. <마틴 에덴>은 초기 영화와 무성영화의 기억을 경유해 오늘날의 영화에 새겨진 빈 곳을 주시한다. 폐허에서 구축된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이다.


- 김병규 영화평론가, <'마틴 에덴'이 영화 이미지와 필름의 물질성에 대해 던지는 질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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