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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Feb 27. 2021

<로마>, 단절을 피하지 않는 사랑


언제부턴가 누군가의 ‘자전적 이야기’에 기대보다도 큰 불안을 느끼게 됐다. 재능 있고 사려 깊은 스토리텔러였던 사람도 자전적 이야기를 전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일 때가 왕왕 있다는 걸 알게 되며 생긴 버릇이다. 실재하는 주변인들이 별로 밝히고 싶지 않았을 듯한 약점, 실수, 상처를 ‘실존 인물에게 허락은 받은 걸까’, ‘이렇게 자세한데 과연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소상하게 드러내는 이야기를 여럿 봐왔다. 허락을 받았다 한들 그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발화자 자신의 감정에만 너무 매몰된 나머지 ‘이야기’가 응당 가져야 할 보편성을 잃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런 찜찜함은 그 자전적 이야기의 재료가 된 인물 중 감독보다 발언권이 적은 누군가를 발견할 때 증폭된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그 영화의 제작자보다 발언권이 큰 등장인물이 존재하긴 어렵겠지만, 실존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마치 그려놓은 듯한 강자-약자 구도 속에 위치한다면 그건 또 다른 얘기다. “나에게 <로마>는 클레오의 인디오 외모가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영화다. (…) 그래서 나는 <로마>를 만든 것이 클레오의 아이가 아니라, 소피아의 아이라는 사실이 여전히 거북하다”던 윤웅원 건축가의 평에 깊이 동의한 것도 이 때문이다. <로마>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란 옛 선언의 훌륭한 예시가 될 법한 영화다. 하지만 동시에 ‘소피아의 아이’가 만든 영화이기에 떨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간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란 그 유명한 질문을 던지곤 서발턴도 ‘말을 걸면’ 말할 수 있다고 답했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조차 남의 입을 빌려 말해야 하는 하위 주체들은 영영 누군가의 ‘말 걸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이 영화를 알폰소의 리보에 대한 ‘말 걸기’로 해석할 수 있을까. 내내 동요 없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클레오가 결말에서 “그 아이를 원치 않았어요”라고 울며 고백한 것은 이런 꾸준한 ‘말 걸기’의 누적으로, 다시 말해 소피아를 비롯한 고용주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인해 드디어 서발턴의 입을 연 것으로 볼 수 있을까. 그건 지나치게 소피아 가족만을 위한 선해가 아닐까 하는 회의가 계속 남는다. 나이 어린 페페나 소피와 클레오 사이의 사랑은 어찌어찌 납득한다 쳐도, 소피아와 클레오 간의 유대감까지 마냥 낭만적으로 보는 건 무리다.

<로마>를 보기 전 자신을 키워낸 여성들에 대한 애정을 담아 만들었다는 비화를 읽으며 남성 감독이 ‘나를 키운 여성들’에 대한 경애를 담아낸 또 하나의 영화를 떠올렸다. 마이크 밀스 감독의 세심한 수작인 <우리의 20세기>다. 그러나 <우리의 20세기>의 세 여성이 극복해야 하는 것이 세대 차에 따른 사회문화적 식견 차이뿐이었던 것과 달리, <로마>의 두 여성 인물이 서로에게 가닿기 위해 뛰어넘어야 하는 장해는 훨씬 더 높고 많다. 사실 클레오와 소피아는 한때 사랑했던 남자에게서 버림받은 여성이라는 점만을 제외하곤 그 어떤 공통점도 갖지 않는다. 인종, 계층, 언어의 단절은 오래 묵은 유대감만으로 극복하기엔 너무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극 중에서 소피아는 한 번도 클레오에게 뭔가를 묻지 않고, 대답을 기다려주지도 않는다. 둘의 대화는 ‘말 걸기’보단 일방적 인도·지시와 순응적 침묵에 더 가깝다. 감동적인 해변가 시퀀스에서 소피아가 잔뜩 힘을 주고 내뱉은 “우리는 널 사랑한단다.”란 명대사가 기대만큼 와닿지 않았던 이유다.


물론 소피아 내외와 그 친지들은 모두 책임감 있고 착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클레오를 가족처럼 생각하려 애썼다. 소피아가 클레오를 아낀 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소피아의 어머니 역시 출산이 임박한 클레오에게 아기 침대를 사주러 함께 가고, 페르민이 총구를 들이민 절체절명의 순간 클레오를 보호하려 하거나 병원까지 클레오를 꼭 안고 가기도 한다. 하지만 다소 시혜적으로 내려지는 친절의 이면에서는 자기 소유물을 귀애하는 권력자의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사랑하던 개가 죽으면 머리만 떼어 박제한 소피아의 지인들을 생각해 보자. 우스꽝스럽고 섬찟한 그 사고방식 속엔 지극히 지배계층 백인다운 욕구가 도사리고 있다. 사냥한 사슴을 박제한 건 더 서슴없이 이뤄진 결정일 테다. 그렇다면 친밀히 지내며 오래도록 사랑한 피고용인을 비슷한 방식으로 기억 속에 박제하지 못할 건 또 뭔가. 단지 아름답게, 단지 사랑만을 담아서. 박제는 비유일 뿐이지만 페페네 집에 자리한, 안토니오와 소피아가 오랜 시간 모아 왔을 수집품의 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다 보면 지나친 비약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다소 뜬금없이 책장에 자리해 계속 시선을 뺏는 불상처럼 여러 ‘이방의’ 장식물 같은 것 말이다.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소피아와 페페 가족이 포식자의 위치에 있다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 클레오는 언제까지고 밑바닥의 피식자일 수밖에 없음은 명백하다.


그렇다고 ‘<로마>에서 서발턴은 말할 수 없다’고 단정 짓자니, 자꾸 그들 사이의 두터운 맥락과 역사가 뚜렷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델라에게 “나중에 말해줄게”라고 말하는 클레오의 모습은 앞으로 그녀가 가질 발화자로서의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혼란 속에서도 분명한 사실은 알폰소 쿠아론이 클레오와 자신 사이,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와 진실 사이의 틈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오히려 이 단절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내용이 어쩔 수 없는 단절을 내포한다면 형식상의 역설로 극복하겠다는 다짐이 작용한 걸지도 모른다.

백인이 채 10%도 되지 않고 나머지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혼혈인 멕시코의 인종 구성을 생각하면, 페페와 소피아 가족은 애초에 침탈자의 후예라는 낙인을 벗을 수 없는 처지다. 고용주 가족이 앉은 소파 옆에 무릎 꿇고 함께 쇼 프로를 본 지 단 몇 초만에 차를 끓여오라는 요구가 떨어지고, 이에 순순히 일어나는 클레오의 모습은 개개인의 친절로 극복할 수 없는 구조의 힘을 감지하게 만드는 대표적 예시다. 개똥을 치우지 않아서 안토니오가 떠났다는 길 잃은 원망이나, 왜 아이가 통화 내용을 듣게 했냐는 말도 안 되는 화풀이도 마찬가지다.

알폰소 감독은 과거에 실제로 숱하게 반복됐을지도 모르는 그 장면들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거나 항변하는 태도 없이 그저 내보인다. 그는 어머니 소피아의 무신경함, 자신이 속한 계층의 계급의식에 대한 가감 없는 폭로를 감수하고서라도 클레오와 자신 가족 사이의 단차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리기를 택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먼저 흑백의 화면을 통해 ‘이건 내가 다시 재구성한 기억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실히 한다. 영화를 만들 때 온전한 사실이 맞는지 의심되는 부분, 리보의 기억과 다르거나 리보가 아예 기억할 수 없는 부분도 당연히 있었을 테다. 그러나 어색한 봉합은 자칫 섣부른 미화로 이어질 수 있기에 알폰소 감독은 기억나는 사실만을 가지고 최대한의 구현을 시도한다. 멕시코시티의 강렬한 햇빛과 색채를 몽땅 빼버리고 흑백의 회상을 택한 것은 단절을 미흡하게라도 ‘메꿀’ 의지가 없단 의도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다.



단절이 눈에 띄면 띄는 대로 놔둠으로써 오히려 이해를 꾀하려는 연출의 두 번째 장치로는 소리가 있다. 소피아와 클레오의 삶이 가장 극적으로 무너지는 순간마다 서사와는 관련 없는 소리들이 삽입된다. 누군가는 그걸 소음이라 말했지만 나는 그 엉망진창인 노래들이 소음 이상의 미학적 의미를 갖는다고 느꼈다. 소리는 화면 속 인물들의 절망적인 상황과는 동떨어진 분위기를 전하면서 이야기와 진실 사이의 틈을 더욱 벌린다. 예를 들어 안토니오가 가족을 버리고 떠난 후 소피아가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을 때 갑자기 형편없는 군악대가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며 지나간다. 소피아가 흐느껴 울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등밖에 볼 수 없었을 클레오나 페페와 달리 그의 표정을 볼 수 있는 관객은 그의 속에서 치미는 설움을 감지할 수 있다. 군악대의 엉터리 음악은 소피아 대신 울어주는 대리물이자 해학적 아이러니다.

소피아 일가가 놀러 간 친척 집에서의 화재 시퀀스에서도 비슷한 아이러니가 발견된다. 나무에 불티가 옮겨붙으면서 낮까지 평화와 유희의 공간이었던 숲 속 들판은 초토화되고, 화려한 파티는 완전히 엉망이 된다. 컵을 깨버려 이유 모를 불안을 느끼던 클레오와, 남편에게 배신당한 처지를 쉽게 보고 다가온 남자의 희롱을 거절하던 소피아의 기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한밤의 화재는 둘의 삶이 이제 완전히 다른 국면을 맞이할 것이고 둘은 변화를 준비하는 새 자세를 익혀야 할 것이란 상징적 사건이다. 그런데 이런 난장판 속에서 이름도 모를 엑스트라가 등장해 탈을 벗고 노래를 부른다. 성악가의 가곡 같은 아름다운 노래는 그의 등 뒤에 한창 벌어지는 소요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 불을 끄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은 죄다 후경으로 처리되고, 그의 얼굴도 목소리도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영상을 꽉 채운다. 갑자기 적정량 이상의 비현실성이 삽입되는 이 신에서 관객은 공포와 혼란이 전이되는 감각을 느낀다. 그 공포와 혼란의 주인은 물론 소피아와 클레오다.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길거리의 사물들 역시 노래와 함께 등장한다. 노래들은 모두 클레오나 소피아의 침잠하는 정신을 다시 현실로 건져 올리는 자극이 된다. 아이를 잃은 클레오가 멍하니 창가에 앉아 있을 때 저 멀리서 들려오는 괴이한 음악이 그의 눈길에 생기를 돋우고, 아델라가 ‘네가 좋아하는 칼갈이 아저씨가 왔다’며 클레오를 위로하는 식이다. 그런데 그 행상, 군악대, 소방전, 칼 가는 아저씨 등이 화면에 지나갈 때에는 항상 소리가 한참 앞서 등장하고 사물은 뒤에 온다. 소리를 듣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궁금해할 찰나 눈앞에 그 소리의 근원이 등장하는 셈이다. 이런 소리와 화면 사이의 어색한 지연 혹은 단절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먼저 고난을 받아들이는 인생에 대한 알폰소 쿠아론의 은유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건 분명 알지만 그게 어떤 형태일지, 어디서 어떤 속도로 나타날지는 전혀 알 수 없고, 다만 ‘예고된’ 것이니 이를 기다리고 감내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은유 말이다.

또는 ‘진짜 과거’와 현재에 불러내진 과거의 풍경 사이 단절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다. 소리의 등장으로 관객은 그 출처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게 되지만 도저히 감을 잡지 못할 때도 있다. 이렇듯 알폰소 감독이 기억하는, 그가 보여주는 제한된 과거의 영상을 보고 ‘진짜 과거’의 진실이 어땠는지 점쳐보고자 하는 일은 도달 불가한 목표다. 그 누구도, 기억의 주인이자 제작자인 알폰소 감독마저도 진실을 낱낱이 알 수는 없다.


이렇게 알폰소 쿠아론은 극도로 절제된 흑백의 색조와, 화면을 내버려 두고 먼저 도착하는 소리를 통해 과거를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구현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기억에 의존했다는 점을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그로써 그는 거장의 ‘자전적 이야기’가 완벽한 사실이리라고 여길 사람들의 착각을 미연에 차단하고 리보와 어머니를 비롯한 현실의 사람들을 보호한다.

소피아와 클레오는 아마 죽는 날까지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같은 높이의 땅에 설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소피아의 아이와 클레오, 혹은 소피아의 아이와 클레오의 아이는 같은 언어로 꿈을 꾸고 함께 누워 하강하는 비행기를 보는 사이로 끝맺을 수 있지 않을까. 소피아의 아이가 이루고 싶었던 소박한 소망은 아마도 그 정도였을 것 같다.




그런 소망을 간직한 채, 극 중 철 모르는 막내의 입을 빌려 알폰소 감독은 말한다. “내가 늙었을 때 클레오도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었어.” 아버지에게서 버려진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분투한 어머니와 가정부 리보에게 헌사하는 자전적 영화에서 두 번이나 등장하는 이 대사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영화를 보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볍게 얹혔던 것들은 증발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구절, 장면, 눈빛이 오랜 인상으로 침전할 때가 있다. <로마>에서 예상치 못하게 깊숙이 가라앉아 남은 것은 바로 이 대사였다.

감독의 유년을 표현하는 인물이지만, 그래봤자 전지적 관찰자도 못 되는 조연 4번 정도에 불과한 페페의 대사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무거운 대사로 남은 건 주인공 클레오가 워낙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말 걸기’ 전에는 좀체 말하지 않는 클레오는 그저 침묵하고 인내하고 감당한다.


“내가 늙었을 때 클레오도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었다는 페페의 말을 한 번 뒤집어본다. 오프닝에서 바닥에 고인 물이 현실의 풍경을 정확히 반전해서 보여주던 창이 되었던 것처럼. 그 창을 통해 나는 이 영화가 초연 상영되는 영화제에 자리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과 그의 사랑하는 리보를 본다. 상영 중 종종 옆자리에 앉은 리보의 표정을 살피는 알폰소 감독을 상상한다. 리보는 클레오만큼이나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고, 클레오보단 잘 웃고 잘 우는 사람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들은 그날 함께 자신들이 기억하는 ‘로마’를 회고한다. 영화가 끝난 후 알폰소는 말한다. “내가 어렸을 때 리보도 거기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었어.”

기억은 완벽히 재현될 수 없다. 과거와 현재는 같을 수 없다. 현재의 다 자란 내가 아무리 천재적인 스토리텔링의 거장이래도, 아무리 강박적으로 과거를 잡아두고 정밀한 그림을 그리려 한대도 어딘가 빈 부분은 반드시 존재한다. 현재의 기억을 그러모아 재현한 과거의 풍경에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게다가 그 그림 속의 가장 큰 조각이 나와 다른 인종, 다른 계급의 가정부일 때는 더더욱 위험이 크다. ‘틀린’ 조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필연적인 오류와 왜곡의 가능성을 내포한 조각들을 부여잡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오랫동안 분투했을 테다. 그가 클레오를 동정하지 않으려, 클레오와 자기 가족들의 관계성을 미화하지 않으려 애쓴 흔적을 영화의 곳곳에서 발견하며 관객은 알폰소가 리보를 얼마나 이해하고 싶었는지 깨닫는다. 이해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란 걸 다시금 느낀다.


“내가 늙었을 때 클레오도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었어.” 다시 말해, “내가 어렸을 때 당신이 나와 함께 있었는데, 사실 그때의 당신은 지금 내가 기억하는 것과는 다른 사람이었을지도 몰라.” 나의 기억은 틀렸을지도 모르고, 내가 타고난 특질과 당신이 타고난 특질 간의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우리의 이해를 더욱 다르게 했을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불완전한 과거의 당신을 기억하고 싶었어. 이렇게 필름 속에 당신과 내가 서로를 사랑했던 과거를 남겨두고 싶었어. 현재의 알폰소가 페페의 입을 통해 과거의 리보에게 건네는 대사에서, 나는 사랑을 뜻하는 다른 표현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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