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해 Feb 27. 2021

<운디네>, 사랑하는 신은 천진하다


1. “아는 만큼 보이죠.”


역사학자이자 베를린 도시개발 박물관의 도슨트인 운디네는 매일 국내외의 관광객들에게 도시 모형을 보여주며 설명을 반복한다. 배우 파울라 베어의 흔들림 없는 암기력이 대단하다 느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대사량을 소화하며, 극 중 운디네는 말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과연 아는 만큼 보이는 영화였다. 동시에 이건 초반부터 운디네의 운명을 점치는 대사기도 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면, 베를린이란 도시의 모든 것 – 시간, 공간, 그 속의 잔해들 –을 ‘아는’ 운디네는 이미 신이 될 / 신일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그 앎 덕분에 그녀는 미니어처로 재현된 도시의 조감도를 ‘보며’ 방금 자신을 배신한 연인이 카페 모퉁이에 앉아있는 모습까지 읽어낼 수 있다. <비바리움>의 모형 같은 집들 위에 인물들을 무감히 바라보는 신이 실재했다면, 자기만의 작은 도시를 바라보는 운디네와 비슷한 모습 아니었을까.


베를린이란 지명부터 ‘습지’에서 유래했으니, 그리고 ‘운디네’란 이름은 설화 속 물의 요정에게서 따온 것이니, 그가 방문객에게 보여주고 ‘어디쯤이었을지 맞춰보라’라고 주문하는 모든 장소는 이미 그녀 속에 있다. 습지 위에 세운 땅, 그 위의 건축물과 그 밑에 가라앉은 유적들은 운디네가 관할하는 영지인 셈이다.



운디네는 또 말한다. ‘과거와 현재는 같을 수 없다’고. 운디네의 설명에 따르면 베를린의 많은 건축물은 18세기 격동을 겪으며 소실되었던 유산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재현한 것이다. 그렇게 재현된 도시는 '21세기의 형식으로 구현된 18세기의 정신'이다. 그런 본질적 간극을 내포한 것들이 대부분 그렇듯, 페촐트 감독이 그린 베를린 역시 건조한 불안을 기본 정서로 삼는다. 극 중에서 자꾸만 무언가가 떨어지고 깨지고 찔리는 상해와 파열의 반복도 베를린이란 도시의 역사성·시간성과 엮어볼 수 있을 것이다.


후에 그녀의 새로운 연인 크리스토프는 운디네를 배웅하기 위해 기차를 함께 기다리다가 깜빡 졸고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 것 같냐는 운디네의 질문에 “3분? 5분? 10분?”이라고 마구 대답한다. 하지만 빙긋이 웃는 운디네가 주는 답은 “25분”이다. 여기서 실제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크리스토프가 운디네에게 머리를 기대고 단잠을 자는 동안 그 시간이 삭제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주일에 단 한 번, 기차를 몇 시간이나 타고 와 겨우 만난 연인과의 소중한 시간 중 그 잠만큼의 분량이 소실되었다. 남자는 그 사이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기억하지 못한다. ‘얼마나 지났냐’가 문제가 아니라, ‘지났다’가 이미 문제인 것이다.


잃은 시간만큼 과거와 현재는 멀어진다. 다시는 봉합될 수 없고, 애초에 일치할 수 없다. 요하네스가 돌아와도 이전의 사랑과 같을 수는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순간 운디네는 그것을 알았고, 그렇기에 결말에서 크리스토프가 제게 돌아오길 바라는 대신 그를 물 밖의 삶으로 돌려보낸다. 그게 운디네가 완성한 사랑의 법칙이다.



2. 사랑, 기다림의 반복


그렇다면 운디네의 사랑을 어떤 꼴로 정의할 수 있을까.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점이 모더니스트 건축의 가장 놀라운 발견이라고 크리스토프에게 설명하는 운디네의 대사. 그 시퀀스가 이상하게 기억에 오래 남았다. 전반적으로 페촐트 감독이 과거와 현재, 물 밖과 물속, 역사와 신화를 교묘하게 뒤섞고 전시하는 방식이 너무 능수능란해서 혼이 쏙 빠지는 영화긴 했지만, 이 장면은 유독 방점이 찍혀있단 느낌이었다. ‘형태’ 즉 형식과 방법이 ‘기능’ 즉 본질적 필요, 정수, 원념을 따른다. 운디네의 사랑이 '기능'이라면 이 기능을 따르는 것은 기다림과 반복이란 '형태'라고 풀이해볼 수 있다.


오프닝에서 잔인하게 이별을 고하고도 다시 운디네를 뒤흔들려 하는 옛사랑 요하네스는 기다리랄 땐 떠나고, 원하지 않을 땐 기다리는 남자다. 이렇게 제멋대로인 요하네스와 새로운(혹은 진정한) 운명의 남자 크리스토프는 거의 모든 면에서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데, 가장 먼저 표가 나는 건 그들의 신분이나 직업 면에서다. 요하네스의 직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가 운디네의 포럼 일정을 미리 알고 있을 정도로 박물관 내부 사정에 통달해있다는 점에서 관련 업계의 상급자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는 수영장과 전면 유리창이 딸린 좋은 주택에 살고 있고, 연인 노라와 걸어갈 때 둘의 차림새도 부티가 난다. 요하네스가 운디네에게 다시 환심을 사려 내뱉는 “저번에 갔던 호텔 예약했어. 우리 방 말이야. 연못이 있어서 네가 굉장히 좋아했잖아”란 말 역시, 운디네를 주말에 보자마자 “미안해, 호텔 예약 실패했어.”라고 귀엽게 시무룩해하더니 자신의 작은 방으로 데려가는 크리스토프와 대비된다.


산업 잠수사인 크리스토프는 늘 편한 옷을 입고 편하게 움직인다. 운디네를 어린 여자아이 대하듯 묘하게 하대하는 요하네스와 달리, 크리스토프는 운디네의 남다른 품위와 지성을 동경한다(“당신은 똑똑한 말을 해. 똑똑한 말을 멋있게 하잖아.”). 날 위해서 강의해달라며 기꺼이 학생이 되고 극존칭을 쓰기를 서슴지 않는다. 크리스토프는 운디네의 성실한 숭배자처럼 그녀를 사랑한다.


애초에 크리스토프가 외국인도 많이 섞여 있는 일반 관광객 팀의 한 명으로 운디네를 처음 만난 것을 생각하면 두 남자의 차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오프닝에 등장한 그 팀에서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편한 옷을 입었고 파격적인 머리 모양을 하기도 했고, 찰칵거리는 촬영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인종과 국적과 나이대도 매우 다양했다. 운디네가 자신을 붙잡으려는 요하네스를 무시하고 일어선 다음 숏에서 맞이한 손님들이 훔볼트 포럼에 참가한 교양 있고 정장을 차려입은 중·노년의 지식인들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색채다.


그렇기에 크리스토프는 요하네스의 존재를 감지하고 질투한다. 혹은 요하네스를 기다리다가 사랑이 끝났음을 깨달은 바로 그 순간에 크리스토프를 만났다는 사실을 늘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운디네가, 그 사실을 크리스토프가 알아챌까 봐 지레 겁낸다. 크리스토프가 운디네에게 “연인이 따로 있는 거지? 그날 날 만나기 전에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라고 묻고, 운디네의 대답에 “거짓말”이라고 우울하게 중얼댔던 마지막 통화가 아마 실제로 있었던 일은 아닐 것이다. 모니카의 말대로 그는 그 시각에 이미 뇌사 상태에 빠져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쨌든 크리스토프의 무의식에 내재한 불안이었음은 확실하다. 당황하는 운디네의 수화기 너머로 크리스토프의 목소리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의 울부짖음처럼 먹먹하게 들린다. 그의 무의식이 물이라는 매개를 통해 운디네에게 전달된 것일 수도 있고, 크리스토프의 알아챔을 내내 겁낸 운디네의 무의식이 그 통화 내용을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운디네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커다란 수조 속 사람 모형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고 착각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크리스토프가 자기 운명에 휘말려 화를 입었을까 두려워하게 된다.


바로 전의 해후에서 크리스토프의 사랑에 푹 젖어 행복에 도취된 표정을 짓던 운디네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노라와 손을 잡은 요하네스를 재회했을 때, 운디네는 애써 숨겼지만, 그녀의 심장이 잠시 멈췄고 크리스토프는 이를 알아챈다(고 운디네는 믿는다). 그는 신화 속 여인들이 흔히 그러한 것처럼 맹렬하게 질투한다(고 운디네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두 번이나 운디네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고도 끝까지 그 사실을 모른다. 물에서 손을 놓쳤던 운디네를 건져내어 심폐 소생을 했을 때, 요하네스와 노라를 목격하고 심장이 잠시 멈췄던 운디네가 그의 품에서 다시 안정을 찾았을 때. 그것을 ‘알지 못함’의 비극으로서 크리스토프와 운디네는 첫 다툼 후 다시는 둘 다 살아있는 채로 서로를 만나지 못한다. 한쪽은 살아있는 육신을 잃고서, 한쪽은 그를 따라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서 재회한 것조차 억겁 같았을 2년의 기다림 후의 일이다. 그가 운디네에게 선물한 잠수사 미니어처가 깨졌을 때 이미 사고는 예견된 것이었지만, ‘알지 못함’이 초래한 불신과 질투의 대가는 너무 컸다.



다시, 반복해서 엇갈리고 실패하는 운디네의 사랑(기능)은 기다림의 반복(형태)으로 요약될 수 있다. 요하네스와의 관계는 늘 기다리거나, 기다리라고 말하거나, 기다리길 소망하는 것으로 수렴했으니 더 말을 보탤 것도 없다. 카페 씬마다 동일한 카메라 앵글이 반복되는 ‘형식’을 통해 이 기다림의 반복이 구현된다. 크리스토프와의 사랑의 경우, 이 기다림은 다시 기차라는 상징물(형태)로서 화면에 나타난다. 기차는 근본적으로 기다린다는 행위와 연결된 사물이다. 장거리 연애 중인 운디네와 크리스토프가 늘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주말을 기다리는 것, 한 사람이 역에서 곧 도착할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것, 기차 안의 사람이 어서 재회의 시간이 오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는 것이 수많은 숏에서 반복된다.


기차에 타고 있지 않은 인물들이 기차의 외관을 멀리서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하필 운디네의 방에서 창문을 통해 철로가 교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해둔 구성에도 페촐트 감독의 은유적 의도가 있으리라 확신한다. 운디네가 급하게 훔볼트 포럼에 필요한 정보들을 외우다가 무심코 창문 밖을 바라볼 때는 후경으로 기차 두 대가 지나간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리며 교차하는 기차들이 서로를 완전히 지나치기 직전, 운디네의 방 벨이 울려 운디네가 짧은 감상에서 깨어난다. 찾아온 사람은 물론 크리스토프이며 운디네는 방문자를 확인하고도 잠시 문 앞에서 ‘기다린’ 후에 크리스토프를 맞이한다. 둘은 주말 내내 사랑을 나누며 행복에 겨워한다.


두 대가 마주쳤다 지나갈 때 두 연인이 그렇게 사랑을 확인했다면, 한 대의 기차만 등장한 숏 다음에는 불화나 불신이 찾아온다. 어쩐지 외로이 달리는 듯한 한 방향의 기차 움직임이 지난 후 곧바로 “연인이 따로 있냐”라고 묻는 크리스토프의 전화가 걸려오는 식이다.


매일 같은 노선을 같은 시간에 지나는 열차의 반복성은, 되풀이되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의 고통을 조심스레 가리킨다. 오프닝에서 운디네가 요하네스에게 떠나지 말라며 경고할 때, 마치 이전에도 그래 본 적이 있다는 양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였단 사실 역시 계속 마음에 걸린다. 그리하여 나는 상상해본다. 크리스토퍼와 요하네스 이전에도 각 시대에 맞는 모습으로 존재하며, 수없이 연인을 떠나보내고 죽여야만 했을 운디네의 신성하고 불행한 운명을.


3. 사랑하는 신은 천진하다


운디네의 신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녀는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고 누구를 제물 삼을지도 정할 수 있다. 신화 속 신과 여신들이 저를 상징하는 동물을 하나씩 데리고 다닌 것처럼 운디네와 메기 ‘빅 군터’가 자꾸 같은 숏 속에서 환상처럼 교차하는 것, 운디네가 요하네스에게 “나를 떠나면 당신을 죽일 수밖에 없어. 30분 후 다시 올 테니 그때 날 사랑한다고 말해”라고 애원이 아니라 협박처럼 말하는 것, 물속에 마치 운디네에게 봉헌되었던 과거의 신전처럼 그녀의 이름이 새겨진 돌벽이 있는 것 등등 다른 증거가 수없이 있었지만 일단 생략한다. 중요한 건 이렇게 신인 그녀가 어떻게 사랑하는지, 그로써 무엇을 하기로 하는지다.


대부분의 ‘사랑하는’ 신은 천진하다. 갖지 못하면 부수는(부숴야 하는) 신의 천진한 잔혹함에서 나는 <델마>의 델마와 <킬링 디어>의 마틴을 겹쳐 본다. 델마와 마틴은 모두 제가 갖고 싶은 사람, 제 뜻을 감히 거역한 인간을 살해하거나 억압한다. 그 결정은 모두 신성한 살해, 신성한 처벌로 규정되며 인간은 자신의 불복종을 후회할 뿐 감히 신을 탓할 수 없다.


하지만 운디네의 천진함은 델마나 마틴의 천진함과는 약간 결이 다르다. 델마가 자신의 신성을 억압하려 한 아버지를 벌하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려 한 아나를 제 곁에 묶어두면서 신성을 ‘되찾고’ 권위의 전복에 성공한다면, 운디네는 벌하고 싶지 않을 때도 벌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난 신이다. 그녀는 마음껏 순진하게 사랑만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사랑이 떠날 때 그를 성숙하게 보내주지 못하고 ‘죽여야만 하는’ 운명의 신이기 때문이다. 요하네스를 일단 살려뒀던 것(결국 죽였지만), 마지막에 크리스토프를 죽이거나 끌고 가지 않고 모니카 곁으로 살려서 보내준 것이 아마도 운디네가 계속 바라온 사랑의 형태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그의 희생은 한없이 이타적이다. 운디네의 사랑은 그리스 로마 신화나 북유럽 신화에서 목격되는 한결 ‘인간적’인 사랑보다, <행복한 라짜로>의 라짜로가 한없이 핍박당하고도 조건 없이 베푸는 예수적·비인간적 사랑에 더 가깝다. 운디네는 라짜로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 기꺼이 ‘스테잉 얼라이브’를 포기하는 신이다.


이 부분을 사람들은 ‘신화의 전복’ 혹은 ‘운명에의 역행’으로 해석한 것 같다. 하지만 난 이것이 그다지도 전복적인지 처음에는 별로 확신이 없었다. 가부장적 권위에의 적극적 반격을 시도하거나 압도적 힘을 보여줘 무릎 꿇리는 더 어린 신들, 델마와 마틴을 연상하고 그들과 운디네를 비교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질투하고 슬퍼하고 후회하고 기다리는, 다시 말해 지극히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운디네가 택한 방법이 다시 ‘전통적으로 여성적’인 희생과 구원이라는 점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에 순응하기보다 거스르는 주체성이, 죽음 대신 살림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구현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면 어느 정도 소화되는 불편함이다. (여전히 이것이 페미니즘적 전복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운디네는 최선을 다해 연쇄살인의 고리를 끊었다. 크리스토프는 그녀의 마지막 사랑이 되고 그녀의 운명은 종말을 맞이한다. 이제 크리스토프는 삶으로 돌아가 자신의 아이 – 새로운 생명을 키우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랑과 운명, 역사와 신화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생명'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천진하게 사랑하는 신이 마땅히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4. 다시, 앎과 보임으로


아는 만큼 보인다.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실을 보지 못하고 그로써 오해와 불신과 슬픔과 회한이 생긴다.


운디네에게 “거짓말”이라고 선고한(운디네가 그렇게 들은) 크리스토프도 결국 2년 후 모니카에게 “문제없어”라며 거짓말을 한다. 그는 운디네의 희생으로 기적적으로 구원받았고, 소중한 연인이 온데간데없이 행방불명된 과거의 상처를 딛고 새 사랑을 이룬 채다. 16주 된 아이를 밴 모니카와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그가 오랜만에 다시 잠수부 일을 하기 위해 들어간 물 – 이전에 ‘빅 군터’가 그에게 유유히 다가왔던 바로 그 터빈 앞 –에서 그는 운디네의 손길과 시선을 목격한다. 가까워졌던 빅 군터와 반대로 운디네는 천천히 멀어지고, 망령에 유혹당한 것인지 그리움이 지나쳤던 건지 알 수 없는 채로 그는 새벽에 운디네가 자취를 감춘 그 물로 혼자 뛰어든다.


그러나 운디네가 다시 나타난 건 그를 데려가거나 자길 기다리지 않았다고 저주하기 위함이 아니다. 운디네는 인사를 하려고 그에게 왔다. 자기가 ‘아는’ 것을 크리스토프에게도 ‘보여주려고’ 나타났다.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육신을 잃었지만,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노라고 알려주려고. 크리스토프가 인공호흡을 했을 때 운디네가 “날 다시 살려줘”라고, 즉 너의 ‘스테잉 얼라이브’를 내게 ‘보여달라’고 한 것처럼. 운디네에게 크리스토프가 “날 위해 강의해 줘”라고 즉 네가 아는 것을 내게도 알려달라고 한 것처럼. 운디네의 ‘알려줌’으로써 크리스토프의 ‘알지 못함’은 극복되고 이제 그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가닿지 못했던 곳까지 시선이 간다. 그는 한결 편안하고 성숙한 표정으로 운디네가 되돌려준 사랑의 증표를 쥐고 물 밖으로 걸어 나오고, 우는 모니카를 달래 집으로 돌아간다. 멀어지는 크리스토프를 물 밑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장면은 영화 내내 처음으로 등장한 운디네 시점의 숏이다.


‘아는 만큼 보는’ 신의 서사는 이렇게 끝난다. 그는 수몰된 과거의 폐허 위 세워진 베를린이란 도시의 신이자, 운명을 거역하고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한 신이고, 천진하게 사랑하는 신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로마>, 단절을 피하지 않는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