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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Feb 27. 2021

<패왕별희>, 이토록 처참한 덧없음


드디어 <패왕별희>를 봤던 작년 6월 오후의 멍한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청데이의 처연함에, 뒤로 갈수록 주샨의 처절함에 마음을 뺏겼고, 영화가 끝난 후 곱씹어 생각하게 되는 건 샬루였다.


사실 나는 장국영도 공리도 같은 시대를 산 게 아니다보니 그들에 대한 윗 세대들의 애절한 향수를 이해할 수 없다. 매해 4월 1일만 되면 눈물로 장국영을 그릴 수도 없다. 그게 못내 아쉽다. 같은 시대에 태어나고 자라면서 그들이 어떻게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잡는지 볼 수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테지만, 나는 장예모가 이끌었던 중국 영화의 다시 없을 황금기도, 장국영 양조위 유덕화 등등이 휘어잡았다던 시절의 홍콩 영화도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공리와 장국영의 출연작 중 내가 본 건 기껏해야 <인생>과 <붉은 보리밭>, <아비정전>과 <천녀유혼> 정도. 하지만 둘 다 일단 너무 아름다워서 스크린으로 관객을 훅 끌어당겨 버리고 마는 배우라고 생각했다. 진짜 좋은 배우란 그를 둘러싼 공기까지 연기할 줄 아는 배우라고 하던데, 장국영과 공리는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주변의 아우라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재능과 마스크를 지녔다고 느꼈다. 쇠락과 허무의 시대에 연기한 사람들은 현세대의 배우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그 분위기를 갖는 것 같다. 


예전에 학부 수업 중 어떤 교수님이 장예모의 <인생>을 보여주셨을 때 열악한 화질과 오역 난무하는 자막으로나마 중국 근현대사를 쭉 훑어서 <패왕별희>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글로 배우는 것과 픽셔널한 개인사를 영상으로 보는 건 또 다른 일이니 말이다. <인생>을 보고 나서도 며칠간 멍했고 여운에 젖어 있었다. 중국 근현대의 곡절을 아예 모르고 감상했으면 그 격동을 영문도 모르고 그냥 봤을 텐데, 조금이라도 알고 몰입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데이의 우희를 사랑하는 원대인 역 배우 갈우가 <인생>에선 공리와 부부 역인 ‘부귀’를 연기했기에 느낀 반가움은 덤이었다.





1. 주샨과 데이

두 인물을 따로 떼어 해석하는 게 불가능할 것 같으니, 두 인물 각자의 이야기도 이 관계 속으로 녹여서 말해야겠다. 내겐 청데이와 주샨의 관계성이 내겐 이 영화 최고의 매력이었고 영화 자체의 존재 이유기 때문이다. 샬루-데이의 아슬한 우정이든, 주샨-샬루의 결혼 생활이든, 예술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든 관객마다 꽂히는 포인트는 다 달랐겠지만. 내겐 데이-주샨의 애증이 없었다면 이 영화의 가치가 반절로 뚝 떨어졌을 것 같다.


둘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데이만이 주샨을, 주샨만이 데이를 이해할 수 있다. 왜냐면 둘은 모두 뭔가를 뺏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여성화’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둘을 샬루가 구했고 또 버렸기 때문이다. 샬루는 그야말로 데이와 주샨의 인생을 망치러 온 구원자지만, 그 이상을 해내진 못했다. 그들을 탄탄히 두 발로 서게 만든 것, 그들 각자를 완성시킨 것은 모두 서로에 대한 미움이고 증오고 질투와 꺼림칙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민이었으니. 


데이(두지)는 매춘부의 자식이고 주샨은 그 자신이 매춘부이다. (어디선가 봤는데, 데이의 모가 ‘남자애를 더 이상 매음굴에서 키울 수 없어서 그래요’라며 애원하고 애를 맡기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걱정대로 두지 역시 그 골목에서 남창으로 컸을 것이며 그렇게 해서 주샨과 만났으리란 얘기가 뇌리에 콱 박혔다. 결국 주샨과 데이는 어떻게든 만날 운명이었을 거란 이야기.) 둘은 매번 서로에게 침을 뱉거나 남이 뱉은 침을 닦아주거나 남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모욕 주거나 하며 비웃고 짓밟는 데 온 힘을 다 쏟는 관계지만, 그 모든 게 샬루라는 하나의 남성(성)을 향한 갈구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그 둘은 똑 닮은 인물이다. 동전의 앞뒷면 같은 쌍둥이다. 샬루는 평생 두 우희를 다 가졌고, 샬루와 함께 하기 위해 데이와 주샨은 그들의 가장 귀한 것을 버리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기에 데이와 주샨 역시 불행해졌다.



- 육손과 신발


데이와 주샨이 가장 귀한 것을 ‘버렸다’는 말보단 ‘상실했다’는 말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데이는 어린 시절 육손이었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를 극단에 맡기기 위해 예고 없이 한 손가락을 절단했다. 그 여섯 번째 손가락은 그의 남성기, 남성성, 필부로서의 평범한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것을 잃음으로써 두지는 운명을 거부하고 극단에 들어갈 수 있었고, 곡 ‘사범’의 ‘나는 본래 계집으로 태어나…’를 노래하는 유망주로 자라 장 내관과 원 대인에게 욕망당하는 여인 노릇도 하게 되었다. 육손, 즉 남성성을 ‘거세’당한 두지는 이전의 생을 탈피하고 ‘우희’로 평생을 불사르게 되었다.


그런데 우희로서의 삶을 산 건 반쯤은 그의 의지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손가락이 잘리고 내버려진 건 어린 두지의 의지가 아니었다 쳐도 그 이후에 그가 극단으로 다시 돌아간 것은 분명 자유를 포기하는 의지적 선택이었다. 그건 두지가 샤오라이즈와 함께 난생처음 본 경극에 푹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어긋나려 할 때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꽉 잡아준 시투 때문이기도 했다. 밖은 얼어붙을 만큼 추우니 자기와 같은 자리에서 자자던 시투, 두지를 체벌해 입에서 피를 내서라도 제대로 대사를 읊게 하려던 시투, 항우의 패검을 닮은 진검을 뽑으며 ‘난 왕이 되고 네가 왕비가 되는 거야’(곧바로 데이빗 보위의 heroes 가사가 떠오르는 장면이었다)라고 말하던 시투. 그런 말에 반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행복한 자유를 버리고 불행한 부자유를 선택해 자기가 그걸 정말로 ‘원했다’고 믿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후회와 자기기만이 따랐을까? 그 세월을 몰라주고 '겨우 여자에 빠져서' 공연과 자신을 떠나려는 샬루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원 대인에게서 어렵게 검을 찾아온 샬루의 신혼 첫날밤, 검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샬루 앞에서 아프게 일그러지는 얼굴이 너무 애틋하고 저렸다.


주샨도 데이와 마찬가지다. 주샨은 샬루에게 올 때도 맨발로 왔고 그를 영영 떠날 때도 맨발로 갔다. 신발이란 건 기본적으로 자아를 담는 그릇을 상징한다. 헌 신을 버리고 왔다는 건 아마 주샨이 매춘부 팔자는 평생 간다는 마담의 저주를 노골적으로 비웃을 수 있을 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곳을 벗어나고 싶고 필부와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의지가 그 정도로 강했다는 뜻일 것이다. 과거의 오명을 다 버리고 맨발로 올 만큼 간절히 당신의 신부가 되고 싶다는 애절함을 샬루에게 어필한 것일 테다. 그런 주샨에게 다시 신발을 던져준 데이의 행동 역시 동정을 흉내 낸 낙인이었을 것이다. 너는 절대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낙인인 동시에, 샬루의 옆 자리는 천한 여자에 싸구려 연기자인 주샨이 꿰찰 수 없다는 강력한 경고.

그러나 그렇게 꼬박 몇십 년의 견제를 날린 건 데이인데도, 결국 주샨이 목을 매게 만든 건 데이를 포함한 뭇사람들의 적의가 아니라 영원히 자기편일 줄로 믿었던 단 한 사람인 샬루의 부인(否認)이고 부정(不定)이었다. 자살한 주샨은 붉은 혼례복을 챙겨 입었음에도 신발은 신고 있지 않다. 헌 신을 신느니 차라리 신을 벗고 처음 당신에게 왔을 때처럼 깨끗한 신부로 떠나겠다는 다짐이었을까, 아니면 당신이 내게 신겨준 신마저도 거부하고 무위의 상태로 떠나겠다는 나름의 반항이었을까. 어느 쪽이든 허공에 매달린 하얀 발이 너무 슬프고 불쌍했다.


데이가 남성성을 상실하고 포기함으로써 여성화된 인물이라면, 주샨은 여성으로 나고 자라 창녀/성녀라는 극화된 여성성을 수행하며 지쳐 스러져간 인물이다. 창녀로 등장해 샬루의 아내가 되고 그를 끝까지 돌보다가, 나중엔 기어이 데이의 엄마처럼 품에 안고 어르는 모습에서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아이를 유산한 후부터 일종의 모성애를 느끼는 것처럼 차차 데이를 진심으로 아끼는 듯한 주샨의 모습이 데이에겐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지. 주샨의 체념한 얼굴에서 데이는 자기 엄마를 읽어내진 않았을까. 평생의 동료를 앗아가고 내 공연을 망친 라이벌로부터 내 엄마의 마지막 얼굴을 발견하는 기분은 어땠을까.

그러나 너를 버리고 평생 원망을 들을지언정 네가 안전해야 한다는 듯이, 창녀로서의 운명을 바꾸면서까지 자신을 지켜주려 했던 어미의 기획은 실패했다. 데이는 결국 장 내관과 원 대인에게(그리고 어쩌면 스크린에 드러나지 않은 무수한 권력자 남성들에게도) 몸을 내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또다른 창녀가 그의 상처받은 섹슈얼리티를 위로한다. 모성애. 모체와 모성에 대한 그리움, 분노와 혐오. 여성화된 신체, 언행, 정신에 대한 자기혐오, 그것이 밖으로 향하며 똑같은 피해자인 다른 여성을 찌르는… 그러다가 결국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이해하고야 마는, 날 이해할 수 있는 건 천지간에 이 사람뿐이란 걸 깨닫고야 마는 순간들. 이 끔찍하고 질척한 관계성이, 너무나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감정이고 관계였던 것들이 이 영화에서 아주 다르게 구현되는 방식. 그게 너무 숨 막혔고 너무 덧없고 너무 아름다웠고, 그래서 싫었고 사랑스러웠다.


처음 시놉시스를 읽을 때는 시투를 두고 두지와 주샨이 싸우게 되는 전형적인 캣파이트 서사가 이렇게 섬세하고 공격적이고 복잡하게 그려질 줄 몰랐다. 본처 대 첩의 대립구도 잡아놓고 여혐만 엄청 하는 영화거나, 잘해봤자 두 남자의 브로맨스를 빙자한 로맨스에 한 여자가 새우 등 터지고 (콜바넴 류의) 여자 바보 만드는 영화겠지 싶어서 떨리는 마음으로 보러 갔는데. 그게 아니라서 너무 좋았다.

과연 데이와 주샨은 샬루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는 했을까? 그러니까 샬루의 남성성 말고, 샬루라는 인간 자체를 사랑한 게 맞기는 할까? 주샨은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데이는 확실히 샬루가 아닌 ‘항우’를 연기하는 남자를 사랑했던 것 아닐까. 어쩌면 그들이 진짜로 욕망한 건 평범하고 행복한 삶 혹은 완벽한 예술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어 더 슬펐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 최고의 명대사를 딱 하나만 뽑으라면 이거다.

“고마워요, 주샨 양.”


안 주느니만 못 했을 호의를 베푸는 주샨. 안 하느니만 못했을 위로를 하는 주샨.

그런 주샨 앞에서, 그런 주샨을 사랑하고 데이와 주샨 중에 항상 주샨을 고르는 샬루 때문에 가장 처참하게 패하는 데이.

네 동정을 받느니 차라리 악녀 역이 되겠다고, 비참해도 혼자 비참하겠다고,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우아하게 거부하는 데이.


하지만 주샨의 경우도 억울하긴 매한가지다. 여자만 아니었다면 샬루보다도 똑똑하고 데이보다도 야망 있고 원 대인보다도 더 능한 전략가가 되었을 주샨이 단지 여자로 태어나서, 매춘부 출신이라는 점에 평생 발목 잡히고 남자에게 버려질까 전전긍긍하게 되고 그 남자가 제공하는 ‘사모님’ 대접에 감사해하며 남자의 아이를 유산하자마자 ‘미안해’라고 외치게 되는 그의 인생이 너무 불행하고 안타깝고 이입돼서 미칠 것 같았다. 그런 둘이서, 한 명은 방금 자기 남편에게 버려진 ‘여자’에게 겉옷을 걸쳐주고 다른 한 명은 자기 자리를 뺏은 ‘여자’에게 등을 돌리고 척척 걸어나가는 장면…. 우희의 금빛 망토가 털썩 떨어지는 장면을 앞으로 오래오래 기억할 것 같다.

주샨이 자살한 후 11년, 그 긴 세월을 데이는 대체 어떻게 견뎠을까? 그 시절이 데이의 신산한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괴로운 시절이었을 것만 같아서 자꾸 상상하게 된다.




- 샬루, 패왕도 필부도 되지 못할 비운


그래서 대체 왜 두 우희는 가짜 패왕을 그리도 사랑했는가, 라고 던진 누군가의 물음을 읽었다. 사실 나도 보면서는 계속 샬루 이 놈은 대체 뭐야? 싶었는데 또 남이 ‘가짜 패왕’이라고 하는 건 약간 반발하고 싶은 기분이다. 묘하다. 묘한 캐릭터였고, 너무나 평범해서 이입이 쉽지만 바로 그래서 이입하기 싫은, 그를 이해한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기도. 사실 데이와 주샨처럼 자기가 사랑하는 것에 미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어떻게 보면 샬루가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고, 데이와 주샨은 처음부터 비극적 죽음을 맞이할 게 뻔히 보일 만큼 강렬한 사랑에 빠져있던 비정상들이다.


샬루가 임팩트 있는 한 방을 던질 기회, 그리하여 관객의 가슴에 ‘역시 샬루도 두 우희가 사랑할 만한 남자였다’며 깊은 여운을 남길 인물로 자리잡을 기회는 사실 많았다. 그는 청데이를 한 번만 살려달라고 원 대인에게 부탁하러 갔을 때 그가 시킨 대로 일곱 걸음을 걸을 수도 있었다. 혹은 일곱 걸음 대신 자기 방식대로 다섯 걸음 걸으면서 원 대인을 멋있게 면박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평소처럼 어물어물하다가 둘 중 무엇도 하지 못하고 뒤이어 등장한 주샨의 존재감에 완전히 주도권을 내어주고 만다. (그 장면에서 패왕답게 일곱 걸음 걸어서 등장한 것은 주샨이었다.) 그리고 그는 인민재판 과정에서 휩쓸리지 않고 뭔가 멋있는 말, 영웅다운 말, 패왕의 위엄에 걸맞는 말을 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주샨과 데이 둘 다를 지키려다가 몇 초만에 포기함으로써 둘 중 누구도 지키지 못했고,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명예와 존엄도 다 내다버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남성이다. 호쾌하고 호방하고 다정하고 강한 남성이다. 샬루의 여유는 그의 실력과 지위와 재산과 신체에서 나온다. 마지막 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 남성화된 신체와 정신이 바로 데이와 주샨이 갖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결핍된 것, 상실한 것.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뭔가를 간절히 욕망하지 않아도 흘러가는 대로 살 수 있는 여유와, 선뜻 베풀어지는 호의와 배려… 결국 그 여유와 무신경함이 샬루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긴 했지만. 군림하는 남성성이 그에게 얼마나 큰 재산이 되었는지는 그가 극단의 다른 남성들과 있을 때 일종의 ‘형님’으로 대우받는 장면들에서 잘 드러나며, 그 남성성의 과시가 '진짜로 성공한/진짜 권력을 가진' 다른 남성에 의해 좌절될 때 그가 얼마나 예민하게 구는지는 원 대인과의 만남에서 드러난다.


결국 샬루는 자신이 얼마나 특권적 위치에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누릴 건 다 누린 시대의 수혜자였다. 데이와 주샨의 순정을 바칠 만한 유일한 사람이 그걸 유용할 능력도, 알아챌 눈치도 없는 그릇이었다는 점이 그 모든 비극을 유발했다. 그래도 샬루처럼 강하면서 동시에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 되긴 쉽지 않단 걸 안다. 그는 처음부터 누군가의 구원자로 등장하지 않았던가. 도망치는 샤오라이즈가 혼나는 일을 막으려 벽돌을 깨는 묘기를 보여줄 때 말이다. 그런 사람이니까 데이와 주샨이 온 평생을 바쳐 샬루만 바라본 것일 테다. 이 뭣도 아닌 남자, 끝없이 그들을 실망시킨 샬루를 사랑함으로써 데이와 주샨의 공통분모가 유지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랑이란 얼마나 덧없고 얕고 기만적인 것인지 되새기게 되어 기분이 묘하다.






2. 거울과 가면


영화 속에 거울이 정말 자주 등장한다. 인물들은 사실상 대화의 거의 반을 거울을 통해 마주보고 하는 셈이었다. 특히 원 대인이 데이를 응시할 때, 분장실에서 데이가 샬루를 훔쳐볼 때, 샬루와 주샨이 부부 침실에서 대화할 때, 샬루를 구해달라고 뛰어온 주샨을 데이가 아니꼽게 쳐다볼 때. 그 대화들은 눈맞춤이 아니라 거울을 통해 이뤄진다.


거울은 기본적으로 반영이고 왜곡이고 투사다. 그들은 배우거나, 배우를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배우가 되지 못했지만 삶을 연기하는 사람이다. 원 대인은 ‘우희’로서의 데이를 귀애했기에, 데이는 ‘패왕’으로서의 샬루에 집착했기에 거울을 통해 상대를 본다. 그럼 주샨과 샬루의 거울은? 아마도 처음부터 샬루는 그저 실실 웃으며 상황에 끌려다녔고 주샨이 엄청난 의지로 둘의 결혼을 계획하고 주도했기에 어쩌면 둘 다 결혼 생활 내내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있지는 않았을지, 이성 간 결합이라는 게 다 결국엔 그 모양 그 짝은 아닐지 의심하게 만드는 장치 아닐까?(이건 내 희망사항일수도…) 그렇게 둘의 사랑을 의심하고 질투하는 청데이는 적의를 가득 담았단 걸 숨기지도 않는 눈빛으로 거울 속의 주샨을 노려본다. 샤오쓰마저도 당 건물의 통거울을 통해 자신이 발각당했단 사실을 깨닫는다.

영화가 결국 삶은 다 연기고, 운명은 바뀔 수 없으며, 우린 다 무대에 올라 정해진 대로 연기하는 꼭두각시나 다름없다는 메시지를 던지려 한 거라면. 모두가 가면을 쓰고 서로를 거울을 통해 내가 원하는 대로 보고있을 뿐이라는 뜻이었다면. 일관된 연출에서 어떤 고집까지도 느껴졌던 장면들.




3. 업보

같은 문화권이라 이런 느낌을 선험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는데, <패왕별희>의 핵심 주제라고 말할 수 있는 ‘운명은 바꿀 수 없다’는 명제 - 일명 업보 -가 여러 상징을 통해 논증되는 게 정말 좋았다. 필연, 운명, 업보, 이런 것들이 영화 속에서 구현되는 흐름은 단연 중국이 최고인 것 같다. 일본의 원이나 한국의 한과도 다르고 서구에서 필연이니 뭐니 하면서 따라해봤자 질적으로 못 따라오는, 몇천 년 간 우려먹으며 체화시킨 그 전통의 쪼가 있다. 어떻게 있어 보이게 설명을 못하겠지만 당장 생각나는 것만 복기해봐도:


1) 샤오쓰와 데이, 버려지고 주워지는 아이들

학대받으며 자란 아이는 제 아이도 매와 벌로만 키울 줄 알지 다른 방법을 모른다. 샤오쓰가 엇나가는 것도, 홍위병 노릇에 빠져서 제 부모와도 같은 사부들을 차례로 고발하는 것도 ‘운명적으로’ 느껴졌다. 만약 데이가 사부의 ‘사람은 다 운명대로 사는 것’이라는 경고를 귀담아듣고 샤오쓰를 거두지 않았다면 데이, 샬루, 주샨까지 모두의 노후가 좀 더 평안했을 텐데.

하지만 데이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제 어미에게서 버려졌다고 생각하며 한평생 그녀를 원망하고 찾아 헤맨 아이, 샤오쓰를 발견한 바로 그날 아침 성인 남성에게 강간당해 남성성을 거세당하고 무대 위 여성에게 평생 동화될 운명임이 선고된 아이. 그렇게 ‘모성’에 얽매인 데이가 어떻게 샤오쓰를 모른 체할 수 있었을까? 시투가 두지를 두 번 살렸듯이 데이도 샤오쓰를 두 번 거뒀고,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망치고 고발하는 굴레로 빠져들었다. 샤오쓰가 데이의 패물을 탐내 몰래 분장하고 노래를 부르다가 들켜 최후를 맞이하는 점도 상징적이다.


2) 장 내관에게서 원 대인으로 양도된 검이 상징하는 데이의 마음

데이의 ‘처녀’를 사간 장 내관이 몰락한 후, 원 대인의 집에서 다시 등장하는 패검. 검은 데이의 마음과 그가 집착하는 대상과의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상징물이다. 데이의 몸은 이리저리 권력자 남성에게 팔려 다니고 넘겨준대도, 데이가 항상 마음 깊이 꿈꾸는 쪽은 샬루-패왕이니 말이다. 하지만 정작 검의 진짜 주인인 샬루는 이 검의 존재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인민재판 장면에서 집단광기에 휩쓸린 것처럼 자기 부인은 창녀고 자기 파트너는 남자에게도 몸을 판 매국노라고 소리 지르는 초라한 샬루를 보며 데이는 ‘결국 모두가 날 배신했어’라고 읊조린다. ‘패왕이라면 내게 이럴 수는 없다’며 한스런 세월 동안 억눌렸던 감정을 토하듯이 샬루와 주샨을 저주한 직후 그가 한 행동은 바로 그 검을 불길로 던지는 것. 그걸 거의 본능적인 반응인 것처럼 뛰쳐나와서 구해낸 주샨까지. 검이야말로 데이의 마음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소재다.


3) 창녀와 창녀의 자식: 이건 앞에서 잔뜩 설명했으니 생략


4) 인장을 찍고 다시 배우가 되는 데이: 처음에는 두지가 손이 잘린 채 그 피로 극단 계약서에 장을 찍고, 나중에는 재판장에서 데이가 얼빠진 채로 가석방 서류에 장을 찍는다. 두 번 다 손이 붙들려 억지로 찍힌 것이며, 두 번의 인장을 통해 데이는 경극 배우라는 신분을 받는다/돌려받는다.


5) 샤오라이즈와 주샨, 목을 매단 사람들

주인공들의 유년기 극단에 함께 있었던 샤오라이즈의 마지막 표정과 행동이 잊히질 않는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탕후루를 주머니 가득 넣어온 것도 아리고 짠한데, 그걸 한 입에 구겨넣고 짧은 생의 마지막 행복을 제대로 누려주겠다는 듯이 먹어치우는 그 장면. 그러고도 사실상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일그러지는 얼굴이 너무 가슴 아팠다.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며, 성공한 경극 배우가 된 후에도 길가에서 탕후루 소리만 들으면 멈칫하던 데이가 주샨의 자살에 계기를 제공했을 때, 그리고 목을 매단 주샨의 시신을 목도했을 때는 또 어떤 기분이었을지.


6) ‘패왕별희’ 극 자체가 예고하는 비극적 결말

‘결국 희생되는 건 우희뿐이지.’라는 대사처럼, 패왕은 명예도 위엄도 권력도 잃은 채 그저 질기게 살아남고 두 우희는 스러진다. 이 서사가 비극으로 마감될 수밖에 없는 건 모두가 알았다. 단지 중요한 건 ‘어떻게 비극에 이르는가’ ‘언제 비극에 이르는가’뿐.



<인생>에서도 <패왕별희>와 유사한 방식의 우아한 유비와 반복이 정말 자주 등장했다. 그 영화는 사실상 내용 전체가 반복과 수미상관식 구조로 이뤄져 있었다. 그게 그 영화의 가장 좋은 점이긴 했는데, 너무 많은 게 들어가 있기도 했고 부귀의 아버지 – 부귀 – 부귀의 딸아들로 이어지는 가계 내에서 일어난 일이라, 완성도로만 따지면 확실히 더 세련된 건 <패왕별희>인 것 같다.

그리고 나는 핏줄론보단 업보론을 항상 더 선호한다. 뭐가 다르냐 싶겠지만 핏줄, 가계로 이어진 운명은 사실 별로 매력적이지도 의외이지도 않고 기존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면이 있어서 과하게 클리셰적이란 느낌. 반면 업보는 결국 모든 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라는 좀 더 순응적이고 자기혐오적이고 패배주의적인 면, 회피가 불가능한 면이 (답답하고 질리면서도) 너무 서사적으로 매력 있다. 잘 풀었을 때의 얘기지만.


가계 얘기가 이왕 나왔으니 말인데 나는 샤오쓰가 고아였고 극단의 다른 아이들도 사실상 고아였다는 점, 그 누구의 부모에 대한 언급도 1분 이상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참 인상적이었다. 데이의 모자관계는 아이를 극단에 넘기면서/어미의 옷을 태우면서 끊겼고, 샬루와 주샨마저 아이를 잃음으로써 이 영화의 모두가 누구의 아비도 어미도 자식도 아니게 되었다는 점이 정말 변태적으로 완벽했다.





4. 결말: 데이, 도즈


중년이 된 단샬루와 청데이. 관객도 없이 오직 둘 뿐인 무대. 데이는 정해진 결말은 그것뿐이라는 것처럼 시종일관 결연했으므로 칼을 뽑는 소리가 특별히 공포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쓰러지는 소리 직후의, 샬루의 부름… 처음에는 ‘데이’를 불렀는데, 그다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직이 불러진 이름은 ‘우희’가 아니라 ‘두지’였다. 거기서 깨달았다. 아, 데이는 평생 샬루에게서 패왕 항우를 바랐지만 샬루는 데이에게서 어린 날의 그 소년을 봐왔구나. 뭔가를 기대하고 투사하고 실망하며 장렬하게 불살라진 데이와, 과거를 조심히 곱씹고 보살피며 천천히 마모되어온 샬루의 차이는 그 호명에서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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