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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Feb 28. 2021

<퍼스널 쇼퍼>, 욕망을 지키고 싶다면 금기를 깨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리움이든 애증이든 미련이든, 감정이 찰랑찰랑 넘치게 되면 인간은 왜 꼭 금기를 배반하는 실수를 저지르고야 마는지. 볼 수 없는 것을 믿고 보이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인간에게 새겨진 본성 중 하나인지.


금기의 ‘존재’는 그 ‘내용’과는 관계없이 힘을 발휘한다. 그 내용이 얼마나 사소한지 아닌지와도 상관없다. 금기는 존재함으로써(만) 의미를 갖는다. 수많은 의례-지극히 인간적인 것-들이 그러하듯이. 스스로 영매를 자처하지만 모린은 결국 ‘대리하는 자’에 불과하고 그 사실이 그를 인간의 육신에 계속 매어놓는다. 설령 영매가 맞다 한들 어쩔 것인가. 루이스는 영원히 떠나갔고, 모린은 그 자신의 쓸모(혹은 존재의 의미. 이 시대에는 그 둘을 구별하는 것이 유난히 더 어렵다)를 증명하는데 영원히 어려움을 겪을 것만 같다는 불안을 내려놓지 못하며, 그 사실은 그녀를 영원히 외롭게 만든다. 모린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내심 바라는 것처럼 강박적으로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유령을 본다는 자신의 말을 스스로도 완전히 믿지는 못한다. 그 불안과 모순이 모린을 현실에 남겨둔다. 증명될 수 있는 사실이 그를 내버려 두고 패대기치고 욕망에 잡아먹히게 하고 위험에 처하게 하고, 증명될 수 없는 믿음은 그에게 희망을 주고 미완의 애도를 대신 채워준다.


처음부터 짐작되는 진범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죽은 쌍둥이 루이스의 신호를 기다리는 모린을 보며, 그가 어리석다거나 안쓰럽다는 감상보다는 뻔한 결론을 저토록 정면으로 부정하다니 너무도 인간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유령이 아닌 인간이 범인이란 결론이 ‘뻔한 결론’이라고 생각한 건 처음부터 ‘유령은 없다’는 개인적 믿음을 전제로 하고 영화를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유령의 존재가 끝까지 증명되지 않고 열린 해석의 영역에 배치되기를 내심 바랐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그러니 이 영화가 제시한 해석의 방향은 크게 두 갈래다. 유령을 믿는 쪽과 믿지 않는 쪽. 유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면, 모린을 스토킹하고 키라를 죽인 범인은 잉고가 맞으며 영화 내의 모든 사건은 집착과 치정으로 요약된다. 문자는 모린의 루이스 이야기를 들은 잉고가 꾸며낸 연막이고, 컵은 혼자 움직인 적 없다. 그가 목격한 이상 현상들은 PTSD나 신경증에 의한 환시에 불과하다. 영화의 모든 연출과 서사는 모린의 정신이 철저하게 무너져 완벽하게 병들고 가냘픈 유령 같은 존재로 완성되는 과정을 서술하기 위한 장치다. 반면 유령의 존재를 믿는다면, 모린의 쌍둥이 루이스는 죽어서도 그녀를 따라다니며 알 수 없는 문자를 보내고 관심을 끌기 위해 고용주를 살해하기까지 하는 원혼이 된다. 모린이 라라와 새 애인을 보러 갈 때도, 자신의 애인을 만나러 갈 때도 루이스는 끊임없이 모린에게 집착한다. 그렇게 본다면 영화는 모린을 얼른 죽음 이후의 세계로 끌고 오고 싶어 하는 쌍둥이의 욕망이 좌절될 뻔했다가 어설픈 조우나마 성사시키는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혹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유령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가 한데 존재한다고. 완벽한 분리는 없으며 중첩된 두 믿음의 세계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잉고가 키라를 살해한 것 자체는 사실이겠지만 그는 ‘실행’한 것일 뿐, 이전까지 신호를 보낸 것은 루이스가 맞을지도 모른다. 유령의 존재를 믿는다고 확언한 심령론자 잉고에게 루이스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키라의 유령 역시 존재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사람 없이 몇 번이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장면은 불확실한 모린의 시점이 아닌 사실의 영역처럼 연출된다. 그때 타고 내린 것이 이 유령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모호함이 모린을 미치기 직전의 상태로 몰고 간다. 그러나 그는 쌍둥이와 생전에 했던 약속(“먼저 죽은 사람이 신호를 보내기로 맹세했죠”)이 과연 지켜질지 ‘끝을 보고 싶어’하는 자이자 항상 벅찰 정도로 앞서가던 루이스를 ‘따라가는’ 자이므로, 미치지 않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바로 전작이자,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연기가 종종 줄리엣 비노쉬를 압도할 만큼 성장했다고 느끼게 만든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도 ‘갑작스레 사라지는’ 인간 혹은 신호에 대한 신이 있었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서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기한 발렌틴은 갑자기 스크린에서 사라진 후부터 등장인물 중 그 누구의 입에도 오르지 않음으로써 일종의 공동을 형성한다. 마치 발렌틴이 실종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인 것만 같다. 이 빈 부분은 계속해서 초자연적 세계를 암시함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낸다. 발렌틴의 직업이 매니저, 즉 연예인의 수족이 되면서도 조명을 받으면 안 되고 눈에 띄면 안 되는 사람인 것 또한 같은 맥락에 있다. 발렌틴은 말 그대로 ‘부재함으로써 존재하는’ 자인 셈이다. <퍼스널 쇼퍼>에서는 반대로 모린이 현실에 존재하는 자고 그와 동전의 앞뒷면 같은 루이스가 부재하지만, 모린이 현실에 단단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내내 불안하게 떠돌기만 한다는 점에서 그는 쌍둥이의 유령을 몸소 재현 중인 것이나 다름없다.


모린은 미국 국적으로 파리에서 일하고 있는 이방인이고, 스스로 유령을 보는 영매라고 믿으며, 직업은 남의 옷을 대신 골라주고 구매해주는 퍼스널 쇼퍼다. 의사가 모린에게 루이스와 같은 심장 질환의 가능성을 선고하는 순간의 연출은 성서에서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창조되는 순간을 암시한다. 즉 모린이 가진 모든 표지가 그가 어디까지나 타인의 부산물이고 대리인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대리인으로서 그녀는 자기 역할과 욕망에 충실할 수 없고 오히려 그 욕망을 두려워한다. 키라에게 입힐 옷을 미리 입어보라는 점원의 유혹에는 난색을 보이고, 애인과의 통화도 건조한 태도로 일관하는 식이다.


키라의 편집증만큼 티가 나지 않을 뿐, 충분히 강박적으로 통제되던 그녀의 욕망이 점차 고조되다가 결국 폭발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모린이 키라의 옷을 몰래 입고 키라의 침대에서 자위하는 장면이다. 모린의 자기위로는 실재하는 타자 없이 타자를 떠올리는 행위다. 모린이 그 순간 욕망한 대상이 가족애와 성애적 집착의 아슬한 경계에 서 있는 루이스인지, 처음 본 사이에 유령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큼 강하게 끌린 잉고인지, 옷과 침대의 주인인 키라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의 가장 내밀한 욕구가 분출되는 순간마저도 그녀는 문자 발신인의 지시를 따르던 중이었다. “널 원하고 널 가질 거야”라고 선언하고, “널 불안하게 만드는 게 뭐지?”라고 질문하는 미명의 타자. 모린은 그에게 ‘금기 없인 욕망도 없지’라고 답하며 드디어 금기의 필요를, 찾아 헤매던 답을 알게 된다.



결국 모린은 살아있음에도 망자(로 상징되는 타자)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에게 귀속된 자를 상징한다.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현대인’을 바라보고 그려보는 방식이란 그런 것일까. 타국에 있는 모린의 애인이 접촉 불가한 페이스타임 화면 안에서만 실체를 갖다가 정작 모린이 정말로 그를 찾아갔을 때는 (키라와의 소통처럼) 메모로만 등장하는 것도, 모린이 처음 입어보는 키라의 옷이 하필 하네스인 것까지도 모두 일관되게 한 방향을 가리킨다. 모린이 현실에 불만족하는 자,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것을 갈구하는 자, 그럼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금기 안으로 구속한 자라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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