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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Feb 28. 2021

<칠드런 액트>, 영원히 젊고 어리석을 네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정법원의 유능한 판사 피오나 메이(엠마 톰슨)는 지독한 워커홀릭이다. 남편 잭(스탠리 투치)은 동료 교수와 바람을 피웠다고 당당하게 고백하며 가정에 소홀했던 피오나를 탓한다. 안정감의 뿌리였던 완벽한 가정이 한순간에 무너지자 피오나는 큰 충격을 받지만, 그날도 중요한 재판을 위해 법정에 나가야만 한다. 여호와의 증인이자 백혈병 환자인 소년이 종교적 신념을 이유로 수혈과 수술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오나는 물론 아동법(the Children Act: 미성년자와 관련한 사건을 판결할 때 최우선으로 아동의 복지를 고려해야 하는 규정)에 따라 그 소년의 의지를 꺾고 강제로 수혈을 명령하려 했지만, 이례적으로 판결 전 그 소년 - 애덤 -에게 직접 의사를 묻고 참고하기로 한다.

그날 병실에서 애덤(핀 화이트헤드)을 마주한 피오나는 즉시 그 애가 정말로 ‘특별한’ 감수성과 재능의 소유자며 이대로 죽기엔 너무 아까운 젊음이란 판단을 내린다. 알고 보니 애덤은 죽음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신념에 따른 죽음이기 때문에 고귀하고 이유 있는 죽음이라고 여기는 듯한 애덤에게, 피오나는 최악의 경우 고통만 더 심해진 채 계속 살아가야 할 수도 있다며 현실을 알려준다. 동요하는 애덤의 부탁으로 피오나는 노래를 불러주기도 한다. 결국 피오나는 원래 생각했던 대로 강제로라도 수혈하라는 판결을 내리고, 애덤은 체념한 듯 그 조치를 받아들인다.

얼마 후부터 피오나는 자신을 따라다니는 애덤의 시선을 느낀다. 건강을 되찾은 애덤은 피오나의 판결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며 과한 경의와 애정을 표하고, ‘제 인생은 혼란뿐’이라며 종교를 포기한 자신을 피오나가 대신 이끌어주길 부탁한다. 애덤의 시선에 존경뿐만 아니라 묘한 성애까지 섞인 것을 감지한 피오나가 최선을 다해 그를 밀어내지만, 애덤은 굴하지 않기에 결국 피오나는 그를 상처 줄 수밖에 없었다. 단호한 축객령을 내리고 그의 편지도 뜯어보지 않은 채로 몇 달이 지나고, 잭이 돌아오자 피오나는 과거를 묻고 행복한 가정을 다시 꾸려보기로 한다. 그러나 잭과 함께 간 크리스마스 부부 동반 파티에서 피오나는 애덤의 병이 재발해 이번엔 정말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는다. 피아노 연주 중 뛰쳐나가 달려갔지만,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완연했던 애덤은 피오나에게 마지막 감사를 건네고 숨을 거둔다. 집으로 돌아온 피오나는 애덤의 편지와 시를 열어보며 오열한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읽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성공적으로 영화화되는 작품이 워낙 많다 보니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정서가 후회라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앞서 본 이언 매큐언 원작 기반의 영화 <어톤먼트>, <체실 비치에서>  역시 자기가 알던 과거가 온통 틀린 구석뿐이라고 뒤늦게 깨달은 사람의 불운에 대한 이야기였다. <칠드런 액트>는 그가 직접 각본 각색에 참여한 영화다.


관람 전에 예상했던 날 선 법정 드라마는 아니었다. 냉철하지만 정 없는 사람은 아니었던 판사 피오나가 애덤의 사건을 맡고 그를 만나게 되며 천천히 감화되는 (다소 진부한) 플롯을 그려보며 갔기에 당황스럽기도 했다. 피오나가 결국 애덤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해 수혈 거부를 받아들이는 파격적 선택이든, 애덤을 너무 아끼게 되어 그의 결정을 철저히 무시하는 길이라 할지라도 수혈을 명령하는 선택이든, 그 ‘선택’의 기로를 함께 달리는 영화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오나가 판결을 내리는 순간은 생각보다 굉장히 빨리 찾아온다. 애덤의 생사를 결정하는 재판을 기점으로 한 막이 내린다는 느낌이었다. 그 판결 이후로 영화가 차분히 담은 것은 애덤과 피오나의 나이 차만큼 엇갈리는 삶의 태도다.


사실 오프닝 장면의 샴쌍둥이 재판부터 '둘 다 자연사하게 두느니 분리해서 한 명만이라도 살리는 것이 낫다'라며 지극히 이성적인 판결을 내린 피오나이기에, 애덤과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그를 살릴 것이 짐작되기는 했다. 그리고 후에 애덤이 말했듯 이제껏 법정에서 환자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치료 중단 요청을 허락한 경우는 한 건도 없었다. 즉 아동법(칠드런 액트)을 따르는 가정법원에서 애덤의 수혈 거부 의사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은 처음부터 거의 정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정해진 결론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피오나는 평소와 다르게 과감한 결정을 한다. 애덤의 아버지 헨리 씨가 '그 애는 정말로 특별한 애'라든가 '부디 한 번만 만나보신다면 그 애가 어떤 아이인지 아실 것'이라고 호소했을 때, 남편의 당당한 불륜으로 혼란해진 피오나의 마음에 어떤 균열이 겹쳐 일어났는지 애덤을 직접 보러 가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한 번의 병문안으로 인해 애덤과 피오나는 삶의 가장 중대한 변곡점을 맞는다. 이제 막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소년, 법적 성년이 되기까지 단 석 달이 남았을 뿐이지만 생명의 빛은 파리하게 꺼져가고 있던 소년에게 피오나는 예이츠의 시구를 붙인 노래를 불러주고 만다. 그 만남으로 인해 애덤의 정신은 완전히 새롭게 개화한다.


강변의 들판에 내 사랑과 나는 서 있었지.
기울어진 내 어깨에 그녀가 눈처럼 흰 손을 얹었네.
강둑에 풀이 자라듯 인생을 편히 받아들이라고 그녀는 말했지.
하지만 나는 젊고 어리석었기에 이제야 눈물 흘리네.
- Down by the Salley Gardens


'피가 곧 영혼'이니 '다른 사람의 피를 수혈받는 것은 부정한 일'이라는 여호와의 증인의 가르침에 따르면, 애덤은 피오나의 결정으로 인해 ‘부정한 몸’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애덤은 피오나를 원망하거나 위협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피오나가 선물한 것이나 다름없는 ‘두 번째’ 인생을 다 쏟아부어 그녀를 쫓아다니고 숭배한다. 시종일관 경의를 담아 피오나를 'my lady'라고 부르는 것은 기본이고, 출장지까지 기차로 따라가 스토킹을 하거나, 부치지 못한 편지를 떠넘기듯 전해주는 등 피오나가 그를 경원시할 충분한 이유를 제공한다. “판사님하고 남편분한테 방해가 되지 않을게요. 제발 같이 살게 해주세요”라며 말도 안 되는 요청을 하기까지 한다.


선 넘은 집착이지만, 어린아이와 성년의 경계에서 생의 길잡이가 될 만한 좋은 어른을 만나본 사람이라면 이 집착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애덤은 부담스러울 만큼 이글대는 눈으로 피오나를 향해 매 순간 투신한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한창일 애욕까지 갈아 넣어 피오나와 함께하기를 원한다. 언젠가는 추억이 될 기억으로 ‘편히 받아들이고’ 넘어가기란 애덤에겐 불가능한 과제다.  피오나의 모든 말, 그녀가 불러준 노래, 그녀의 우아한 권위와 친절과 흠 없는 판결까지 애덤에겐 너무나 강렬한 자극이었기 때문이다. 존경과 애착을, 천진한 욕망과 질척이는 숭배를 명확히 분리할 수 없는 ‘사고’는 그 나이 때 숱하게 일어나는 일 아니던가.


인생의 모든 것이던 종교는 이미 애덤을 실망시킨지 오래다. 종교 그 자체보다는, 신앙이 모태부터 그에게 내재한 속성인 것처럼 가르쳐온 어른들이 그를 실망하게 만든 것이다. 애덤이 결국 수혈을 받던 순간 애덤의 부모는 눈물을 흘렸다. 애덤은 뒤늦게 그 눈물이 타락하게 된 아들에 대한 걱정의 눈물이 아니라, 자기들은 거스를 수 없는 신의 가르침을 법의 힘으로 대신 거역해준 피오나에 대한 감사의 눈물, 아들이 살아남게 되었다는 안도와 기쁨의 눈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렇게 한 번 신앙을 ‘배신’하고도 아들과 함께 왕국회관 예배에 매주 꼬박꼬박 참석하려 하는 부모를 어린 애덤이 과연 이해할 수 있었을까. 자식이 마치 자신들의 소유물인 양,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신앙을 심어준 당사자들 역시 아주 불완전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소년의 혼란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래서 애덤은 삶의 새로운 길잡이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가 아는 가장 단단하고 아름답고 정의로운 사람, 그의 새로운 신이 되어줄 사람으로 피오나를 지목한다. 그가 유달리 충실하고 섬세하고 지적인 사람이었기에 그런 굳센 지표가 더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인간의 불완전함과 유약함을 머리로는 이해했대도 편히 받아들이기엔 아직 너무 짧은 생을 살았기 때문일지도. 하지만 그가 찾아낸 피오나는 그의 기대만큼 완벽하고 강한 사람이 아니기에 애덤에게서 끊임없이 도망가기를 택한다.

정면으로 부딪쳐오는 애덤의 마음을 알면서도 피오나가 그를 피해 다닌 이유는 물론 그녀가 지극히 상식적이고 책임감 있는 어른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애덤보다 훨씬 긴 삶을 사는 동안 마모되고 남편이 입힌 치명타로 산산이 조각난 자신의 영혼이 존경과 욕망의 대상은 될 수 없다는 자격지심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다시 한번 죽어가는 애덤의 병상 옆에 앉고 나서야 피오나는 깨닫게 된다. 애덤과 같은 종류, 같은 밀도의 마음은 아니더라도 자신이 그 소년에게 얼마나 매혹됐었고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애덤의 임종 직전까지 그의 두 번째 삶을 지배한 것은 피오나에 대한 열정이었지만, 그녀는 한 번도 애덤의 편지를 끝까지 읽고 제대로 이해해주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래서 이제는 그 찬란한 시절의 다시없을 마음을, 그것의 주인이었던 영민하고 아름다웠던 인간을 다시 살릴 수도 없다는 후회까지도. 애덤이 피오나가 꽃피워준 새 자아를 완전히 불사르느라 미처 더 자라지 못하고 스러졌다면, 피오나는 애덤을 잃으며 비로소 내면의 잿더미를 똑바로 마주한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각자의 ‘애덤’을 잃으며 성년이 된다.


어떤 면에선 에단 호크,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퍼스트 리폼드>가 떠오르는 작품이기도 했다. 종교와 환경이란 두 축이 날카롭게 대립할 줄 알았건만 실은 에단 호크가 연기한 목사 톨러의 자기 파괴적 참회에 초점을 맞춰야 그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종교와 법 사이의 영리한 줄타기일 줄 알았던 이 영화도 실은 피오나로 표상되는 인간의 연약한 내면에 집중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애덤은 물론이고, 피오나를 대놓고 배신하겠다고 선언한 남편 잭마저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오로지 그녀만이 자기 마음과 욕심에 늘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젊고 어리석은’ 주인공은 애덤이 아니라 피오나였다고 말해야 한다. 앞으로 피오나는 애덤이 '세상에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하게 했을 자신의 회피적 태도를 얼마나 후회하며 살게 될지. 훨씬 젊지만, 훨씬 먼저 떠난 그녀의 어린 연인 - 물론 그들이 연인이 아니었음을 알지만, 아주 시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을 추억하게 될 피오나의 여생이 가끔 얼마나 쓸쓸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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