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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Feb 28. 2021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
언제나 말해지기를 기다리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가 초기작부터 집요하게 끌고 온 두 주제를 다시 한번 소환한다. ‘가족’, 그리고 ‘진실과 거짓’. 이 영화가 처음 선보이는 긴장은 좋은 엄마보단 훌륭한 배우가 되길 택한 파비안느(까뜨린느 드뇌브)와 평생 그런 엄마를 애증하며 살아온 딸 뤼미르(줄리엣 비노쉬)의 재회 직후, 뤼미르가 파비안느의 새로 나온 자서전을 들고 “여기엔 단 하나의 진실도 없다”고 분개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여기서 이미 관객은 영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작품 세계에 무리 없이 포섭된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속 현실’인 파비안느-뤼미르의 세계에서 풀리지 않은 응어리들은 파비안느가 촬영 중인 ‘영화 속 영화’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재회 당시 파비안느가 촬영장에서 맡은 역할은 우주비행사의 딸 ‘에이미’의 노년이다. 그녀가 누군가의 딸이라는 페르소나를 입고, 몇십 년에 한 번씩만 지구로 돌아오는 엄마를 평생 그리워하고 원망하는 감정을 연기하며 내뱉는 대사들은 반대로 현실에서 뤼미르가 파비안느에게 했던 말들과 똑 닮아있다.

그 촬영장에서 또 다른 변수가 되는 것은 에이미의 엄마인 우주비행사로 분한 배우 마농이다. 파비안느는 ‘제2의 파비안느’로 불리는 아름다운 실력파 배우 마농을 경계하고 마뜩잖아하면서도, 죽은 동료 사라의 얼굴과 너무 닮은 마농의 얼굴을 응시할 때마다 동요한다. “나는 늙어가는데 엄마는 계속 젊은 모습이야. 너무 외로워”라는 에이미의 대사 역시 파비안느에게 영원히 젊은 모습으로 박제된 사라의 기억을 환기한다.


파비안느의 에이미 연기는 첫째로 자길 미워하는 딸 뤼미르의 마음을 상상하고 길어오는 것(빌린 것)으로, 둘째로 죽어서도 자기와 딸의 삶을 떠나지 않고 여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라에 대한 그리움과 애증(자기 것)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현실과 영화의 차원을 의도적으로 혼재시키는 것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특유의 영화론과도 닿아있다. 그러니까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엄마를 미워하는 딸을 연기하며 현실에선 딸에게 미움받는 대배우 파비안느를 연기할 사람으로 대배우 까뜨린느 드뇌브를 고른 것 역시 이런 뒤섞임을 노린 것이다. 관객은 현실-영화-영화 속 영화라는 겹겹의 구조 속에서 까뜨린느 드뇌브와 파비안느, 뤼미르와 에이미, 마농과 사라를 구별하는 데에 갈수록 어려움을 겪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 혼란을 통해 현실과 영화 - 즉 실제와 가상, 진실과 거짓의 이항은 뚜렷이 구분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진실 그 자체보다는 진실을 다루고 언급하고 논박하는 사람들의 표정으로써 더 진한 여운을 남긴다. 몇 년 만의 재회에서 누군가는 새삼 다시 상처받고, 누군가는 오래된 상처를 헤집어 벌리며 그것으로 남을 공격하지만 자신 역시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누군가는 상처마저 예술로 승화시킬 수밖에 없는 자기 처지를 스스로 연민하며 그 연민으로 또 주변에 상처를 입힌다.

영화 속 인물들에겐 진실을 가려내야 한다는 압박이 과제처럼 주어지지만, 그건 마치 엉터리 연극처럼 눈에 빤히 보이는 갈등일 뿐이다. 가장 핵심적인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 자체는 사실 어렵지도 않고 다소 김 빠지게 처리된다.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은 파비안느-뤼미르 모녀의 관계에서 여전히 태산 같은 그림자로 남아있는 사라에 관한 진실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 진실은 파비안느라는 사람이 인생과 자식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진실이고, 엄마를 미워하는 뤼미르의 내면에 대한 진실이다. 뤼미르가 ‘할리우드의 B급 비디오 배우’라 자평할 만큼 별 볼 일 없는 행크와 결혼한 건 파비안느의 질투를 바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암시되면서 뤼미르-행크의 관계까지, 그 결혼의 산물인 샤를로트까지 영향을 미치는 진실이기도 하다. 뤼미르의 아버지인 피에르가 잠시 돌아오자, 정원의 거북이 피에르를 할머니가 사람으로 바꾼 것이냐고 묻는 손녀 샤를로트에게도 진실을 가르는 일은 심각한 과제로 다가온다. 그 애에게는 피에르의 존재 자체와 파비안느의 마법이 진실의 문제다.


그러나 그 모든 진실은 언제나 거기 있었기 때문에 발각된 것도 발견된 것도 아니다. 파비안느 저택 뒤편의 나뭇잎이 모두 지자 갑자기 기차 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한 것처럼. 발각과 해결보다는 직시와 해소가 필요했던 관계들에는, 진실 그 자체보다 진실을 안다고, 혹은 나도 알고 싶었다고 인정하고 함께 얘기해줄 사람이 더 중요했던 것 아닐까.




시시한 진실이 시시한 파국을 일으킨 후에는 봉합도 없고 치유도 없다. 마땅히 있어야 할 회복의 과정 대신, 사람이 얼마나 일관되게 자신밖에 모르는 존재인지 내보이는 장면들은 이 영화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가족 영화임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결말 즈음, 파비안느가 실은 뤼미르의 학창 시절 ‘오즈의 마법사’ 연극을 보러 갔음을 고백하면서 뤼미르가 감격하고, 둘이 애틋한 화해의 포옹을 하며 새롭고 희망찬 국면을 예고하나 싶지만... 곧바로 파비안느가 “아! 이 감정을 그 신(파비안느와 마농을 계속 애먹인 마지막 장면) 촬영에 썼어야 하는데. 대체 왜 그때는 이런 게 떠오르지 않은 거야?”라고 탄식하면서 뤼미르의 감동은 와장창 깨지고 만다. 파비안느는 뤼미르의 엄마에서 노년의 대배우로 돌아가고 남겨진 뤼미르에게는 다시 허탈한 분노가 찾아든다. 영화에서 에곤이 연인 발리를 소중히 안고 둘만의 마지막 밤을 보내다가도 “그대로 있어 봐! 이 모습을 그려야겠어”라고 말했던 장면이 연상되기도 한다. 예술을 업 삼은 사람의 숙명, 자기를 해체하고 바닥까지 파고들어 대상화해 팔아야 하는 사람의 고난이란.


평소대로라면 진창이 된 관계가 괴롭고 분하면서도 엄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뤼미르에게 훨씬 이입했을 것 같은데, 까뜨린느 드뇌브의 연기가 워낙 노련해서인지 파비안느의 심정도 이해될 것 같아 두 배로 괴로웠다. 뤼미르는 엄마의 사랑을 바라고 엄마가 자기 연극을 봐주러 오기를 기다리던 십 대 시절의 무대에서 필연적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라지 못한 것은 아니나, 자신의 일부를 과거에 남겨두고 왔다고 느끼는 사람이 다들 그렇듯 언제나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파비안느라고 마냥 행복하게 살기만 했을까. 자기 성취와 재능을 양껏 누리며 찬탄하기만 했을까. 파비안느가 고백했듯, 그녀 역시 자신이 배신했던 동료인 사라가 자신에게 없는 상냥함과 다정함으로 자기 딸을 뺏어가는 것 같아 초조하고 질투가 났을 것이다. 어쩌면 파비안느는 그래서 더더욱 사라의 성정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내달렸을지도 모른다.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파비안느이기에, 뤼미르와 멀어지고 반목할수록 달리기를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방향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이러다 보면 정말 영영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파비안느의 태연하고 뻔뻔한 얼굴은 어쩌면, 자신도 상처받았고 죄책감을 느끼긴 했지만, 그것을 뤼미르에게 토로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엄마의 가면 아니었을까. 점점 더 비틀리는 심정을 뤼미르 앞에서만큼은 내보일 수 없었기에 쓴 가면 말이다. 연기는 그녀 삶의 전부고 유일하게 남은 것이었으니, 연기하는 자신을 보전하는 일이 곧 그녀 삶의 목표였을 테고 그래서 뤼미르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더 위협으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현실의 가족을 역할 놀이와 구분할 수 없고 가정을 무대와 구분할 수 없는 그로서는, 연기가 아닌 진정으로 아끼게 된 존재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더 서툴렀고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영화는 시적인 구석이 있어야 해. 폭력이든 일상의 사소함이든.”이라고 자신이 행하는 예술에 대한 고집을 드러내는 파비안느의 말은 그래서 오히려 처연하게 들렸다.


처음에는 파비안느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일에 매몰되어 뤼미르를 방치한 것보다도, 그에 대해 여전히 미안해하지 않고 뤼미르의 재능 없음을, 배우로서의 실패를, 남편과의 관계를 조롱하고 이죽거리는 점에서 정말 잔혹하고 배려 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파비안느를 이해하는 와중에도 그녀가 뤼미르에게 가한 발언들이 정서적 학대에 가깝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파비안느가 뤼미르에게 ‘가혹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녀가 ‘이기적이었다’는 서술은 옳지 않다고 느낀다. 자기 직업에 충실한 여성들이 엄마라는 이유로 이기적이고 저밖에 모른다는 말을, 저런 엄마 밑에서 자랄 아이가 불쌍하다는 말을 숱하게 들어온 현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노년 여성의 여전한 욕심을 가족과 주변인들이 감당하기 힘들어할지언정, 부정하지는 않는 것처럼 그려낸 이 영화는 고레에다 세계관의 진일보나 다름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특유의 롱숏은 비교적 적었지만, 인물들이 갈등할 때마다 두 얼굴을 같은 화면에 배치하는 대신 한 사람은 뒤통수를 보여주고 한 사람은 그를 바라보며 카메라 너머의 관객이 숨죽이고 지켜보게 만드는 구도도 탁월했다. 무너지고 분노하고 속상함을 이기지 못하거나 상처를 완벽하게 숨기는 데 실패한 얼굴들이 숨김없이 까발려진다. 영화 속 촬영장에서 파비안느의 얼굴, 뤼미르의 얼굴, 마농의 얼굴이 어지러이 섞이고 그 위에 일상을 사는 샤를로트, 행크, 뤼크와 같은 부수적 인물들의 얼굴이 섬세하게 얹어진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의 얼굴을 지켜보지 못하지만, 관객은 그들이 어디를 보고 누구를 떠올리는지를 알고 있다. 그 엇갈린 얼굴이 여전히 아름답고 기품 있고 현명하고 프로페셔널한 배우들로서 표현되어 더 좋았다. 이 감독은 이제 다른 팔레트와 다른 붓을 쥐고도 이렇게 능수능란하게 아름다움을 그려낼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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