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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Mar 05. 2021

<미나리>와 <페어웰>, 이민 2세대의 나긋한 복기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월 내내 바빠서 <페어웰> 관람을 놓치는 바람에 스크린에서 내려갈까봐 조급했는데, 오히려 늦게 본 게 잘 된 일이 되었다. 1일에 <페어웰>을, 이틀 후엔 개봉하자마자 <미나리>를 보면서 훌륭하고 따뜻한 가족 영화 두 편을 머릿속에서 마치 연작처럼 자연스럽게 이어 붙일 수 있었다.

두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공통분모를 갖는다. 이민계지만 이민 1세대는 아닌 경계인으로서 감독 자신이 겪어온 혼란을 다룬 자전적 영화라는 점, 지혜롭지만 때론 얄밉고 걱정스러운 존재인 할머니가 등장한다는 점, 고향 땅의 질서를 보수적으로 지켜내고픈 고집을 아직 버리지 않은 가족들과 미국적 사고에의 저항 없이 자란 주인공이 자주 대립한다는 점, ‘아시안답게’ 식사 장면과 먹거리 얘기가 정말 많이 나온다는 점까지.



언젠가 ‘해방 후 미국으로 건너간 교포들은 아직도 한국이 자기가 마지막으로 본 그 모습인 줄로만 안다’는 누군가의 투덜거림을 주워들은 적 있다. ‘아직도 옛날 과자랑 싸구려 장난감만 사다 줘도 한국 사람들이 호들갑 떨며 좋아하는 줄 안다’는 뼈 있는 말이 부연으로 따라붙었다. 내게도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 돌아올 때마다 들큰하고 포장만 화려한 사탕과 과자를 잔뜩 사다 주시는 이모할머니와 친척 언니 오빠들이 있었으니 그 불만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더 이상 한국이 전쟁 직후의 시절만큼 ‘후진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려고 하지 않는 이민자들이 분명 있기는 할 것이다. 험한 꼴 보지 않으려고 언어부터 음식까지 다 낯선 땅으로 떠났는데, 그런 도전 없이 그저 안주했던 고향 땅의 지인은 비교적 고생 없이 평탄하게 잘 살게 됐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몹시 허무해졌을지도 모르는 사람들. 이제 한국에서의 삶도 대충 먹고 살만하며, 타국에서 오랜 세월 고되게 살아온 자신보다 훨씬 더 빠르게 편리하고 부유한 삶으로 진입한 경우도 많다는 걸 굳이 알고 싶지 않을 사람들. 이쪽에서 끈적하게 늘어붙은 사탕과 초콜릿을 양손 가득 받은 어린애들이 ‘이런 걸 왜 나한테?’라고 생각하며 가졌던 혼란과 의문만큼, 그쪽에서 분투하며 자라온 이민 2, 3세대의 어린애들이 한국에 ‘돌아와’ 느낄 혼란도 컸을 테다. 내가 ‘아는’ 한국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내 부모가 들려준 고향의 모습은 이런 도시적 위생적 자본주의적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물론 이것도 근 몇 년간은 아니고 최소 10여 년 전까지의 얘기지만.)


이민자와 미처 이민 가지 못한/않은 자들이 가족으로 재회할 때 생기는 까끌한 소음은 <페어웰>의 말싸움을 통해서도 제법 날카로이 구현된다. 빌리에게 “너는 언제쯤 돈 버니? 미국에서 백만 달러 벌려면 얼마나 걸리니? 중국에 있으면 백만 달러는 금방인데.”라고 신경줄을 긁는 고모 위핑의 선제공격과, “그래도 샤오바오(위핑의 아들)는 미국으로 유학 보낼 거죠? 바오가 어쩌면 아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단 걸 알면서도 걔를 미국으로 보낼 거잖아요.”라고 맞받아치는 엄마 지안의 반격. 내가 자식을 위해 내린 선택은 틀리지 않았고, 내 자식이 가진 가능성이 당신 자식의 것보다 더 크다고 증명하고 싶은 모부의 서글픈 욕심이 너무도 솔직하게 돌출된다. 그 과정에서 내가 떠나온 조국이 못나고 뒤떨어진 나라란 걸 암시해야만 하는 쪽이나, 떠나지 못한 조국의 부족함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부정해야만 하는 쪽이나 입안이 썼을 테다. 웃기고 한심하기보단 오히려 서글프고 처량한 풍경이다.


궁핍한 땅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건너간 이들이 몇십 년 지나 더 이상 궁핍하지 않은 옛 삶의 터를 바라보면서, 혹은 바라보지 않더라도 옆에서 끊임없이 “너는 어디서 왔어? 아니, 태어난 곳 말고 진짜로 어디 출신이냐고.”라고 상기시킬 때마다 자기 원류를 마주하면서 지겹게 느꼈을 혼란과 허무, 어쩌면 고국에 대한 증오까지. 그들이 그렇게 견뎌왔을 녹록지 않은 삶의 디테일을 상상할 수 있게 돕는 두 영화의 대사들을 계속 곱씹어 본다.


<미나리>에서 제이콥과 모니카는 ‘미국에 가서 서로를 구원해 주자고’ 약속하곤 한국을 뜬 이민자다. 그들이 한국 땅에선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고 뼈저리게 깨달았을 시절의 수치와, 미국으로 이주해 백인들 앞에서 예쁘고 귀여운 동양의 인형으로 대상화되거나 능력 없는 기생충 취급당하는 수치 중 어느 것이 더 짙고 무거운지 가늠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그렇게 더 나은 삶을 그리며 떠난 제이콥과 모니카(미나리)·하이옌과 하이빈(페어웰) 가족이 겪어왔을 곡절과, 살던 곳에 계속 살기로 결정한 위핑 가족의 곡절 중 어느 것이 더 억세고 굽이치는 세월이었다고 비교하는 일 역시 불가능할 것이다.


정이삭과 룰루 왕은 그렇게 선택지가 많지 않은 삶에서도 아이들만은 굳건히 지켜내고 싶어 하던, 아이들에게 ‘뭔가 해내는걸’ 보여주고 성공의 경험을 물려주고 싶어 하던 이민 1세대의 ‘아이들’이다. 그리고 이제 그 아이들이 자라 자길 키운 어른들에게 가만히 묻는 영화를 만든다. 설령 당신이 스스로 평가하기에 아무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인생이더라도, 날 어른으로 무사히 키운 것만으로 충분히 뿌듯하지 않느냐고. 우리가 여기 자리 잡아 내내 함께 해왔단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냐고.




한편 정이삭과 룰루 왕 두 감독은 ‘조국’의 문화, 습관, 가족의 모습을 연출하며 미묘한 톤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미나리>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질은 사랑이 넘쳐흐르는 영화, 가족에 대한 정이삭 감독의 애정으로 가득 찬 따뜻한 영화다. 처음에는 “괜찮아요, 쟤는 미국 애가 아니고 한국 애니까”란 엄마 모니카의 말이 안일하다 느껴질 만큼 너무나 ‘미국 애’인 앤과 데이빗이었지만, 결국 그 애들은 마지막엔 ‘한국 냄새’가 나는 외할머니 순자를 이해하게 된다. 순자의 말버릇을 따라 하고, 순자의 품에 꼭 안겨 잠들고, 조용히 울며 떠나는 순자를 쫓아 달려가서 “할머니, 가지 마세요. 우리랑 같이 있어요.”라고 말할 줄 아는 아이들이 된다. 모니카와 제이콥은 약속한 대로 서로를 구원하지 못했을지 몰라도, 그들의 어머니와 아이들은 대를 뛰어넘어 서로에게 구원을 줄 수 있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반면 아콰피나와 룰루 왕의 <페어웰>은 자기 뿌리에 대해 훨씬 서늘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정말 좋은 가족영화였지만, 그보다도 소위 미국적인 것과 중국적인 것·아시안의 것을 유치할 만큼 선명하게 대립항으로 그려낸 룰루 왕의 세계관에 더 관심이 가는 영화였다. 그 자신이 이민계로서 겪은 혼란을 ‘덤덤히 전시한다’고 평가하기엔, 중국에 대한 부정과 편견이 전혀 덤덤하지 않게, 꾸준하게 영화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솔직히 영화 초반에는 이게 동양인이 체화한 오리엔탈리즘과 자기혐오의 전형 아닌가 싶어 몇 번 헷갈렸을 정도로. 조소나 경시라기엔 애매한데, 분명 친근하진 않은 시선이 있었다.


그립지만 돌아갈 순 없고 딱히 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곳, 엄마 아빠에겐 고향인데 내겐 도무지 고향처럼 느껴지지 않는 곳 - 신축이라더니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있는 호텔, 옛날식 환풍구, 원치 않는 관심과 질문을 퍼붓는 관리인, 시끄럽게 무리 지어 난입하는 타인, 결혼식 만찬을 가재 요리로 하기로 약속해 놓곤 예고 없이 게 요리를 내오는 등의 빈번하고 소소한 사기들, 아무리 돈을 들여도 싸구려 같은 장식들, 우스꽝스러운 제의, 도무지 정이 가지 않는 극도의 가족주의와 책임론까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곳. 내가 향유하던 문화로부터 너무 먼 곳. 그러나 내 할머니(원류)가 있는 곳. 내 할머니가 소녀 병사로 참전해 지켜냈다며 자랑스러워하는 나라, 기합을 넣어 열심히 운동해가며 친구와 동생과 이웃들과 잔잔히 살아가는 나라. 미워하기 쉽지 않아서 더 밉고 어렵고 묻어두고 싶은 곳. 아이삭과 사뭇 다른 룰루의 ‘고향’ 혹은 ‘뿌리’는 그런 막연한 애증의 형태를 띤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엔 두 감독의 영화 중 무엇이 더 ‘나았다’거나 두 영화의 어떤 부분이 어째서 별로였다는 평을 덧붙이고 싶지 않다. 이민 2세대 아시안 감독들이 삶을 통해 구축해온 경계인적 정체성, 혼란과 거리감을 가감 없이 풀어놓은 영화. 그 당사자성 그 자체가 영화를 구성하는 전부이자 존재 목적인데 내가 어떤 말을 더할 수 있을까 고민되기 때문이다. <미나리>의 다소 과한 낭만성과 <페어웰>의 너무도 노골적이고 평면적인 이분법이 군데군데 거슬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그게 그들이 관찰하고 경험해온 삶이라면, 자기 가족의 면면을 압축해 보여주고 싶은 최선의 방식이었다면 어쩌겠는가. 두 편 모두 충분히 보편적이고 충분히 다정했다. 그거면 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두 영화 모두 버릴 대사가 단 한 줄도 없었단 점을 높이 사고 싶다. 가족영화/희극으로서의 기능에 굉장히 충실한 영화들이라 만족스러웠다. 우리 집은 딱히 보수적이지도 않고 가족의 도리에 집착하는 집안이 아니었는데도 다 어디선가 들어본 말들이라 우스웠다. 어쩌면 그렇게 익숙하고 친근하고 지겨운 정서만 등장하는지.


“너도 이젠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해야지”, “쟤는 우리 집안사람 같지가 않게 사근사근하지 않네”, “너 누가 어른한테 그렇게 말하래”, “회초리 가져와”, “손 똑바로 들어”, “누가 우리 손주 아프게 했어”, “중국에선 그렇지 않아”, “다른 나라에 살아도 어디까지나 우리는 중국인이야”, “한국인은 똑똑하게 머리를 쓰는 거야”, “우리 딸 다 컸네, 엄마 걱정도 할 줄 알고” 등등…(아아. 더 쓰다간 왠지 ptsd 올 것 같다.) 아이다움, 여자다움, 한국인다움, 중국인다움, 손녀다움 아빠다움 엄마다움… 국가적, 민족적, 성적, 가족주의적 정체성의 전형을 강제하는 말들과, 자기가 내뱉는 말의 전제를 한치도 의심할 생각 없는 어르신들 특유의 사유의 부족. 분명 평소 엄청나게 싫어하는 모습인데, 어쨌든 (적어도 <페어웰>은) 그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의도의 코미디 영화로서 작정하고 대사 쓴 걸 유념한 채로 봤더니 인물과 대사들이 정답고 귀엽게 다가왔다. 영화관에선 사람들과 함께 계속 킬킬댔다.


<미나리>에서 가장 따뜻하고 우스운 건 물론 할머니 순자와 손자 데이빗의 대화들이지만, 완벽한 알파 메일 가부장이 되고 싶었던 시도가 매번 좌절당해 초조해하는 아빠 제이콥의 대사들도 인상 깊다. 스스로도 설득하지 못했으면서 부러 더 자신 있게 “다 우리 가족을 위해서야”라고 주워섬기는 제이콥, 일이 잘 안 풀린다 싶으면 대번에 버럭 목소리를 높이고 고압적으로 명령하는 제이콥의 모습엔 그 시절 한국 아빠들의 (그리고 사실 지금까지도 유구한...) 버릇이 겹쳐져, 나름대로 블랙 코미디 같은 재미를 준다. 순자와 이웃집 폴이 있으면 모니카의 표정이 대번에 사르르 풀리고 행복해 보이는데, 그건 뒤집어 말하면 자기 능력으로는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지킬 수 없다는 뜻이니 그의 속이 얼마나 바짝바짝 탔을까.

덧붙이자면 스티븐 연의 한국말이 너무 일취월장해서 정말 놀랐다. <옥자>에서 “내 이름은 구, 순범이야!”했던 그 어눌한 말투는 다 어디로 갔는지...!ㅋㅋㅋㅋ 한국말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 잘할 수 있게 됐다 치더라도, 마더텅 영어를 싹 지워내고 콩글리시 발음을 그렇게 능숙하게 해낸 연기력에 정말로 박수쳐 주고 싶었다.


한예리와 스티븐 연의 부부 연기, 특히 둘의 관계가 가파르게 위기로 치달을 때인 병원-잡화점 옥상 씬에서의 연기도 압도적이었다. 울음을 참거나, 눈물을 단번에 훔쳐내거나, 치미는 분노를 소화하는 한예리 배우의 얼굴을 심장 떨어지는 기분으로 관찰하면서 새삼 대단한 배우구나 생각했다. 씨네21 이다혜 기자가 쓴 모니카 단평도 무척 공감되었고.


이다혜 기자 인스타그램


이민자 가정의 이야기가 주로 아들, 또 자라서 누군가의 남편이 된 아들에 의해 그려져왔단 점을 생각하면 할머니 순자 – 엄마 모니카 – 큰딸 앤 3대의 여성서사를 제법 고르게 담아낸 <미나리>의 세심함은 ‘진일보’란 수식을 붙여도 좋을 듯하다. 특히 감독의 페르소나가 데이빗인 걸 생각하면, 누나 앤이 배경으로 밀려나지 않고 프레임 한 귀퉁이에서 계속 불퉁한 존재감을 자랑하도록 한 연출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갈수록 태산이네”를 중얼대던 앤의 시니컬한 성격과, 아들과 남편에겐 하지 못할 “다 엄마가 잘못해서 그래”란 속엣말을 딸에겐 참지 못하고 건네며 장녀의 운명을 부여하고 말던 모니카-앤 모녀의 관계를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다.


<미나리>에 비한다면 다소 단순하고 작위적인 구석도 없지 않지만, <페어웰>의 대사들도 마찬가지로 높은 밀도의 현실성을 자랑한다. 동아시아의 가족이란 건 역시 다 그 모양 그 꼴이구나 생각하며 피식피식 웃게 만든다. 나이나이는 물론이고, 일본에 오래 살았지만 여전히 중국적/동양적인 사고방식을 ‘지켜야’ 한다고 믿어서 빌리에게 ‘중국 가족은 그렇지 않다’고 계속 호통치던 삼촌 하이빈의 임팩트도 무척 강했다. 자기 아들의 가짜 결혼식 무대에서 어머니를 부르짖으며 오열하는 집안의 큰 어르신 남성이라니... 너무나 토종의 감성 같은데, 신기하게 거슬리지 않고 이해되는 인물을 연기한 건 모두 배우 장영보의 노련함 덕분일 테다.

번외로 가족이 모두 모인 씬마다 내가 주인공 빌리보다 더 신경 썼던 단 하나의 인물은 하오하오의 예비 신부 아이코였다. 둘이 만난 지 3개월 된 건 거짓말이 아니지 않나? 대체 어떻게 남자친구 할머니의 임종이 가까웠다는 이유만으로, 생판 모르는 나라의 대가족 사이에 껴서 예비 며느리 노릇을 하며 그 모질고 말 안 통하는 시간을 다 견딘 걸까ㅋㅋㅋㅋ 하오하오를 정말 많이 사랑하든가 정말 너무 착하든가 둘 다일 텐데 아무튼 신기한 인물이었다. 이게 룰루 왕 감독 가족의 ‘actual lie’에 기반한 플롯이라고 했으니 사촌이 계획보다 이르게 거짓 결혼식을 했단 것도 아마 실화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현실의 아이코는 너무 좋은 사람이야...




박평식 평론가는 <페어웰>을 두고 “필멸의 존재에게도 충만한 순간이”라는 한줄평을 남겼다. 아시안-이민자-경계인 정체성에 집중하는 대신 ‘할머니’를 구심점으로 한 가족들의 소란하고 따스한 관계를 더 염두에 둔 듯한 이 문구를 그대로 <미나리>에도 가져갈 수 있을 것 같다. 순자와 나이나이는 늙고 병들었고 지친 할머니들이다. 슬프지만 부정할 수는 없다. 언젠가는 할머니들도, 모니카와 제이콥도, 하이빈과 하이옌과 지안과 위핑도 돌아가실 테지만. 감독들이 애정을 담아 간직하고픈 윗세대의 모습은 죽음으로부터 한참 먼 순간의 희망과 낙관이었다는 점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나이나이와 이별하며 한참이나 포옹한 팔을 풀지 못하던 빌리의 표정과, 생애 처음으로 전력질주해 순자를 막아서던 데이빗의 의젓한 등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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