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해 Mar 10. 2021

<러브레터>와 <라스트 레터>, 이와이 슌지의 퇴보

성숙한 치유에서 가냘픈 애도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이와이 슌지와 ‘가냘픈 로맨티시즘’


모두가 좋아하는 영화가 영 내 취향이 아닐 때가 있다. <라라랜드>, <캐롤>, <이프 온리>, <어바웃 타임> 같은 영화들. 배경과 인물과 연출법의 디테일한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보아 로맨스/멜로드라마라는 하나의 범주로 묶이는 영화들과의 불화를 몇 번 겪고 나자, 이젠 오롯이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로맨스 장르엔 거리감을 느끼게 됐다. 가끔 더럭 겁이 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이 다 좋다고 말했는데 나는 또 별로면 어떡하지. 다들 인생 영화로 꼽는 영화가 내겐 아무 감흥도 주지 못하면 어쩌지, 하고.


한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일본 로맨스 영화를 뽑으라면 아마도 <러브레터>(1995)가 가뿐히 1위를 차지하지 않을까. 겨울이 되면 꼭 <러브레터>를 봐야만 한다고 부르짖는 어른들을 몇 년이고 봐 왔지만 그간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던 건, 앞서 말했듯 내가 로맨스로(만) 분류되는 영화를 전혀 즐기지 않기 때문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특유의 ‘가냘픈 로맨티시즘’(by 박경리 선생님)을 자랑하는 일본 로맨스 영화가 한 번도 내 흥미를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십 대 문학소녀 시절 다자이 오사무에 말 그대로 환장했던 사람으로서 이제 와 정사(情死)니 허무주의니 하는 그 감성에 선을 긋는 게 민망하지만, 박경리 선생님의 통찰에 깊이 공감한 이상 예전처럼 거슬림 없이 즐기는 건 무리였다.


박경리: 김 선생! 일본을 긍정적으로 볼려면 반드시 실패헙니다!
일본은 야만입니다. 본질적으로 야만입니다. 일본의 역사는 칼의 역사일 뿐입니다. 칼싸움의 계속일 뿐입니다. 뼛속 깊이 야만입니다.

도올: 아니, 그래도 일본에서는 이미 나라 헤이안 시대 때부터 여성적이고, 심미적인 예술성이 퍽 깊게 발달하지 않았습니까? 노리나가가 말하는 '모노노아와레' 같은.

박경리: 아~ 그 와카(和歌)나 하이쿠(俳句)에서 말하는 사비니 와비니 하는 따위의 정적인 감상주의를 말하시는군요. 그래 그런 건 좀 있어요. 그리구 그런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순수하지요. 그러나 그건 일종의 가냘픈 로맨티시즘이에요. 선이 너무 가늡니다. 너무 미약한 일본 역사의 선이지요. 일본 문명의 최고봉은 기껏해야 로맨티시즘입니다.

박경리: 스사노오노미코토(素淺鳴尊, 天照大神[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의 남동생)의 이야기가 말해 주듯이 일본의 역사는 처음부터 정벌과 죽임입니다. 사랑을 몰라요. 본질적으로는 야만스런 문화입니다. 그래서 문학작품에서도 일본인들은 사랑을 할 줄 몰라요. 맨 정사뿐입니다. 치정(癡情)뿐이지요. 그들은 본질적으로 야만스럽기 때문에 원리적 인식이 없어요. 이론적 인식이 지독하게 빈곤하지요. 그리고 사랑은 못하면서 사랑을 갈망만 하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디 문인(文人)의 자살을 찬양합디까? 걔들은 맨 자살을 찬양합니다. 아쿠타가와(茶川龍之介, 1892~1927), 미시마(三島由紀夫, 1925~1970), 카와바다(川端康成, 1899~1972) 모두 자살해 죽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극한점인 로맨티시즘을 극복 못할 때는 죽는 겁니다. 센티멘탈리즘의 선이 너무 가냘퍼서 출구가 없는 겁니다. 걔들에겐 호랑이도 없구, 용도 다 뱀으로 변합니다. 난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일본 작품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런데 내 연령의, 내 주변의 사람들조차 일본을 너무도 모릅니다. 어린아이들은 말할 것두 없구요. 일본은 정말 야만입니다. 걔들한테는 우리나라와 같은 민족주의도 없어요. 걔들이 야마토다마시이(大和魂) 운운하는 국수주의류 민족주의도 모두 메이지(明治)가 억지로 날조한 것입니다. 일본은 문명을 가장한 야만국(civilized savages)이지요.

- 김용옥, 『도올세설』,「굼발이와 칼재비」 중


사실 내가 완주한 이와이 슌지 영화는 <립반윙클의 신부>뿐이니, 겨우 한 편을 보고 이와이 슌지의 세계관에는 패배주의적 유보뿐이며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생기도 직시도 없다고 말하는 건 너무 가혹하고 공정하지 못한 평일지도 모른다. 일본의 영화인으로서는 드물게도 ‘친일’적인 사고방식과 거리가 멀고, 한일문제에 있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자기 나라를 향해 공언하기도 했으니, 저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박경리 선생의 비평을 이와이 슌지에게 적용하는 일 자체가 굉장히 억울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립반윙클의 신부>가 내보인 물먹은 듯한 색감, 나사 빠진 채로 살아가는 인물들, 그들의 정적이고 힘없고 가느다랗고 곧 끊어질 숨결과 움직임, 이별과 자살에 대한 기묘한 찬미 같은 것들이 줄곧 연상시킨 건 ‘가냘픈 로맨티시즘’이란 어구뿐이었다.


그렇게 정이 가질 않아서 접어뒀던 이와이 슌지의 <라스트 레터>를 보기로 마음먹은 건, 순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터 기탁 님의 콜라보 포스터를 굿즈로 증정하기 때문이었다. 또 배경이 여름인 것 같아서. 일단 일본의 영상들이 여름을 담아내는 방식은 부정할 수 없이 독보적으로 아름다우니까.

기탁 님의 일러스트! (LP형 포스터)

영화와는 무관한 이유 때문이긴 하지만 이왕 보기로 한 거, 영화가 <러브레터>의 후속작 격이라는데 그럼 전신이 된 전작도 보고 가야지 싶었다. 싫어할 땐 싫어하더라도 좀 더 알고 싫어해야 작품 입장에서도 억울하지 않지 않나.


그렇게 벼락치기 공부하듯 감상한 <러브레터>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척 마음에 들었다. <윤희에게>가 왜 <러브레터>의 오마주 같다는 건지 수긍했고, 그게 <윤희에게>를 위한 대단한 찬사로 느껴질 만큼. 오래도록 사랑받아 마땅한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채 지나간/끝까지 내 것이 아니었던 사랑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차오르는 이야기는 제법 단단하고 생기 있었다. 무엇보다 어린 후지이 이츠키들의 불만스럽고 당차고 혼란스러운 표정에서 사람 냄새가 나서 좋았다. 처음에는 화자이자 주인공이었다가 극이 진행되며 차츰 끄트머리로 밀려나는 히로코에게도, 배려로 포장해 빠르게 물러서는 포기의 허무한 정서 대신 성숙한 안녕만이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라스트 레터>에서 내가 확인한 건 구시대적이고 평면적이고 ‘가냘픈 로맨티시즘’으로의 회귀, 혹은 후퇴였다. 아니면 ‘당사자 의사에의 고려 없는 마구잡이 대상화’를 발견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라스트 레터>의 모든 인물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동기가 되는 인물은 이미 죽어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미사키다. 그런데 그 모든 인물들이 놀라우리만큼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행동하고 자기 기억에만 의존해 죽은 자를 읽어낸다. 그게 이기적이라 싫다거나 그래선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자신이 죽은 미사키를 위해 / 미사키를 추억하기 위해 편지를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인물들의 착각은 확실히 기만적인 데가 있었다. 그걸 제대로 내보여주지 않고 어쨌든 아름다운 추억이고 사랑이었다는 식으로 계속 포장하려는 듯한 이와이 슌지의 태도에서, 어딘가 바람구멍이 뻥뻥 뚫린 듯한 결핍과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랑을 갈망할 뿐인’ 정신적 빈곤을 감지했다.



2. 편지를 받는 이는 보낸 이를 사랑한 적 없다


<러브레터>에는 “죽은 사람은 빨리 잊힌다니까”라는 후지이 이츠키(여)의 엄마의 웃음 섞인 한탄이 등장한다. 이츠키의 아빠가 감기가 악화되어 폐렴으로 실려갔다 명운을 달리한 것도, 그 죽음이 언제였는지도 영 기억하질 못하는 이츠키의 고모부를 은근하게 탓하며 서글퍼하는 대사다. 이츠키(여)의 아빠는 물론이고 2년 전 죽은 후지이 이츠키(남)까지 동시에 가리키는 이 대사는 한 사람의 죽음 이후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삶과 추억과 충격적인 사인(死因)까지, 수시로 뒤틀리고 오인되고 잘못 기록되기 일쑤라는 진실을 암시한다. 발언권을 잃은 망자는 그를 알던 다른 인간들 각자의 사정에 의해 왜곡되고 잊히기가 얼마나 쉬운가.


쿄시로에겐 슬픈 진단이겠지만, (아유미가 위로하듯 말해준 대로) 쿄시로의 편지는 미사키의 보물이 아니었을 거다. “너는 그 여자에게 아무것도 아니었고, 우리가 오히려 네게 선물을 준 거야. 차였기 때문에 그 소설을 쓸 수 있었으니까”라던 아토 요이치의 잔인한 말이 가장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만약 쿄시로의 편지가 정말로 미사키에게 보물이었고, 미사키가 정말로 쿄시로의 다정함을 다시 원했다면 자살 전까지 25년의 세월이 있었는데 단 한 번이라도 연락했겠지. 미사키가 정말로 쿄시로를 한순간이라도 사랑했었다면 둘이 언제든 다시 함께 할 수 있었을 테다. 45세가 많은 나이도 아니고, 재회나 재결합이 흠 잡힐 일도 아니고, 미사키는 쿄시로가 자길 열렬히 그리워하는 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 미사키는 그저 쿄시로를 그 정도로 아끼고 사랑하진 않았던 거다. 설명 없이 떠났던 게 미안해서, 이제 와 연락하는 게 실례라서, 남의 애까지 딸린 처지가 민폐라서, 너무 늦어버려서… 같은 상식선의 변명은 죄다 핑계에 불과하다. 그저 쿄시로가 미사키에게 아토 요이치의 1/100만큼이라도 ‘강렬한’ 감정을 선물하지는 못한 거다. 미사키에게 쿄시로는 기분 좋고 산뜻한 추억일 수는 있어도, 함께 하지 못하면 죽을 것 같은 애착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게 진실이다.

(오히려 쿄시로를 그렇게 강렬한 사랑의 기억으로 남긴 건 여동생 유리였다. 그래서 내게 이 영화의 진짜 여주인공은 토모 유리다.)


주변인들은 입을 모아 미사키가 ‘도망치듯’ 아토 요이치와 결혼했다고 증언했다. 과연 그녀가 도망쳐야만 했던 이유는 뭐였고, 도망쳐온 곳은 어디였을까. 난 쿄시로의 답 없는 숭배와 성녀화가 미사키의 ‘도망’치고 싶은 욕구에 기여하지는 않았을까 감히 의심해본다. 쿄시로는 미사키에게 영문도 모르고 차여 아토와 결혼하는 걸 바라보다가 비통해하며 소설에 미사키를 영원히 박제한 사람이다. 그가 글을 쓰기로 결정한 것도 미사키의 칭찬 때문이고, 그의 유일한 책의 소재가 되어준 것도 미사키다. 쿄시로의 미숙한 성년기 전부가 미사키와의 맞닥뜨림에서 출발한 셈이다. 심지어 소설의 제목부터 미사키의 이름에서 따왔다. 미사키는 그와의 역사를 부정할 수도 없고, 주변인들은 아무 단서 없이도 그게 둘의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작가의 뮤즈가 되는 것, 남성의 이데아적 첫사랑이 되는 것. 이 중첩이 현실에서는 사실 얼마나 숨 막히고 지겨운 일인지. 쿄시로는 분명 선량한 순정파지만, 그런 사람들이 한 발 삐끗하면 쉬이 제 감정에 매몰되어 집요하고 ‘악의 없는’ 덫이 되기도 한다는 걸 다들 알지 않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바로 그 일관된 애정 때문에 미사키가 쿄시로에게서 도망쳐서 아토를 택한 이유를 무척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미사키가 쿄시로에게서, 유리에게서, 그리고 쿄시로와 가족들이 상징하는 안온하고 평탄한 삶에서 멀어져 아토라는 위험으로 선뜻 건너갈 만큼 위태롭고 용기 있고 대책 없고 냉담하고 ‘원래’ 어딘가 고장 난 사람이지 않았을까(원래 모범생들이 제일 차분하게 돌아있다...) 하는 상상의 단서까지 쿄시로의 한없는 순정에서 얻었다.


쿄시로는 유리에게 “미사키와 대학 진학 후 사귀었다”고 털어놓지만, 영화에서 쿄시로와 미사키가 실제로 연애를 했다는 대학생 시절은 단 한 번도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과연 연애를 진짜로 하긴 한 걸까, 쿄시로가 뭔가 거하게 착각했던 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플래시백 장면에도 온통 미사키, 쿄시로, 유리 세 사람의 고등학교 시절 풍경만 등장한다. 대학생 때 둘의 연애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이와이 슌지는 고집스러우리만큼 숨겨놓곤 알려주지 않는다.

이런 연출 방식은 결국 한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둘이 감정을 ‘나눈’ 연애는 중요하지 않고, 오직 미사키를 사랑한 쿄시로의 일방적 감정만이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다뤄지고 있다는 점. 그걸 전시하는 게 영화의 목적이라는 점. 쿄시로가 아무것도 모르고 잠도 못 자고 그녀만을 생각했던 고등학교 시절만이 아름답고, 회상할 가치가 있고, 실제로 회상되고 있다. 맹목적 열정을 부어 먼 곳의 그녀를 원하던 때의 기억. 그때의 자아. 그때의 감정, 상상, 아픔.


그게 결국 무슨 의미겠는가. 쿄시로는 대학 시절에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미사키나 자신을 버리고 떠난 이후의 미사키가 어떤 사람인지, 첫사랑을 가르쳐주었던 고등학생 때와는 어떻게 다르게 자라고 있었는지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혹은 쿄시로가 그런 미사키를 알아갈 기회를 어이없이 박탈당해서 더 맹렬히 과거에 매달린다손 쳐도, (연애하던 때도 아닌) 고등학생 미사키의 모습만을 덧그리는 건 좀 트라우마틱한 집착으로 보인다. 이건 답 없는 성녀화에 가깝다.


너무나 애어른 같은 아유미 역시 쿄시로의 그런 욕망이 투영된 캐릭터다. 아유미는 쿄시로가 반평생을 한 맺혀했던 지점이 어딘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의 상처를 어루만져 단번에 꿰매어내는 (어린/여성) 캐릭터다. 아유미도 엄마를 잃었지만, 그 애가 엄마를 생각하며 슬픔을 딛고 서는 과정들은 소요카가 짝사랑하는 동급생을 이야기하는 장면만큼의 임팩트도 갖지 못한다. 아유미는 자기 자신을 위해 혹은 엄마인 미사키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다. 오로지 쿄시로의 치유만을 위해 존재하는 미사키의 복제품이자 대체물이다.


유리와 아유미, 쿄시로가 편지를 나누며 잡힐 듯 말 듯 귀여운 추격전을 벌이는 초중반의 매력에 비해 쿄시로가 아유미와 마주 앉아 눈물을 흘리는 클라이맥스가 와닿지 않았던 건 그래서였다. 감독의 의도대로라면 가장 감동적이었어야 할 그 씬은 가장 지루하고 환멸 나는 씬이 되어버렸다. 미사키는 죽어서도 자길 고등학교 시절의 그 모범적인 미소녀로 간직하며 숭배하는 저 남작가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예상이 주는 암담함, 관객을 따돌리고 저들끼리 북받쳐 오열하는 인물들이 선사하는 익숙한 지겨움. 쿄시로와 아유미의 상호 위로는 이유도 모르고 버려진 자신들을 위할 뿐. 미사키의 진의는 그들에게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3. 산 자만을 위한 애도, 산 자를 위해야만 하는 애도


아유미는 엄마의 사인을 왜 병사로 속여 말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어린애다. 그 애는 어른들의 허위와 기만에 한창 분노하고 있었으므로, 자기 엄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 엄마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사랑한 어른의 존재와 그 증거인 책에 분명 위로받았을 것이다. 쿄시로 역시 일생의 사랑을 꼭 빼닮은 어린 여자가 자기 엄마의 보물은 당신의 편지였다고 말해주는 것에서 구원받는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죽은 자의 자매가 했던 말이 얹힌다. “언니가 선배랑 결혼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이제 쿄시로에게 미사키를 자기 이데아 속 여신, 첫사랑, 영혼의 짝으로 설정해 영원히 아름답게 간직할 모든 근거와 자격이 갖춰진다. 이렇게 해서 거의 영혼결혼식에 준하는 수준의 미화와 승화가 일어나고, 아유미와 쿄시로의 공조는 죽은 자가 야기하는 공허를 한편에 미뤄두고 기묘한 유사 부녀 관계를 성립시킨다.


이 처절한 애도의 과정을 비난하고자 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미사키의 ‘배신’을 소화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을 쿄시로와 아유미의 절박함을 이해할 수 있다. <러브레터>에서 역시 이미 죽어 사라지고 스크린에 현재의 모습으론 절대 등장하지 않는 자를 중심축 삼아 산 인물들이 그 주위만 뱅뱅 돌던 것을 생각하면 낯선 서사 구조도 아니다. 다만 <러브레터>에서 이츠키와 히로코가 죽은 이츠키를 회고하며 기억을 재조립하는 과정이 서글픈 치유와 성장으로 이어졌던 것과 달리 <라스트 레터>의 애도는 지극히 산 자 본위의 애도, 죽은 자의 삶과 무관해도 별문제가 없는 애도로 느껴졌다. 원래 애도라는 것의 본질이 오롯이 산 자만을 위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러브레터>에서는 죽은 이츠키의 중학생 시절에 상당한 시간을 들여 그의 내면까지 묘사했던 이와이 슌지였기에 기대가 컸는데, <라스트 레터>에서 죽은 미사키를 그저 '속을 알 수 없는 미인'으로 얼핏 얼핏 등장하게 만든 퇴보는 정말 아쉬웠다.



그래서 결국 ‘라스트 레터’는 누가 누구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인가. 미사키가 아유미에게, 유리가 쿄시로에게, 아유미가 쿄시로에게, 쿄시로가 미사키에게, 인물들이 끊임없이 편지를 썼으니 모두 답이 다를 것 같다. 내가 (그나마) 가장 궁금했고 간직하고 싶었던 편지는 아유미의 애도의 마지막 단계를 차지할 엄마 미사키의 편지도, 미사키에게 몇 번이나 소설 초고를 보낸 쿄시로의 절절한 편지도 아니었다. 25년 전 다른 누구도 아닌 친언니에게 밀려 실패했던 풋풋한 첫사랑에게 건넨 ‘선배를 좋아해요’만 겨우 쓴 고등학생 유리의 편지, 25년 후 기꺼이 죽은 언니 흉내까지 내가며 옛사랑도 다치지 않게 하고 제 마음도 위로하려던 40대 유리의 편지였다. 어쩌면 그렇게 솔직하게 자기 욕심에 투철했던 유리의 편지만이, 환상도 오독도 없이 미사키 그대로를 애도할 창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슬픔을 삼키는 쿄시로와 아유미의 처연한 얼굴이나, 딸에게 유언으로 겨우 고등학교 졸업사를 남길 정도로 냉담하고 신비했던 미사키의 알 수 없는 인생보다도 언제나 천방지축이던 유리와 그 딸 소요카가 가진 발랄한 직시의 눈빛이 훨씬 더 마음에 남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미나리>와 <페어웰>, 이민 2세대의 나긋한 복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