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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Apr 12. 2021

<프라미싱 영 우먼>,
피해자의 윤리학과 판타지적 복수

나를 불태우지 않고는 극복 불가한 고통이 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7년 전 의대를 중퇴하고 카페에서 일하는 '카산드라'는 매일 밤 클럽에 출석한다. 그는 만취해 몸을 가누기도 힘든 체하다가, '친절한' 남성이 자신에게 접근해 합의되지 않은 성관계를 시도하려고 할 때 다시 취하지 않은 모습으로 돌아와 남성을 혼란에 빠뜨린다. 이 위험한 연극은 7년 전 죽은 그의 친구 '니나'를 위한 그 나름의 애도다. 만취해 '알 먼로'를 비롯한 남자 동기들에게 강간당한 니나는 결국 의대를 자퇴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살했고, 어릴 때부터 친했던 단짝을 잃은 캐시는 니나를 대신해 남자들을 단죄하려 한 것이다.


어느 날 캐시의 카페에 의대 동기였던 라이언이 찾아오면서 캐시는 과거의 악몽과 다시 직접 마주한다. 라이언은 니나를 강간했던 알 먼로와도 아는 사이지만, 분명 친절하고 착하고 남다른 남성이고 캐시에게 아주 순수하고 예의 바르게 호감을 표한다. 캐시는 그에게 자꾸만 다른 기대를 걸게 된다. 그러나 이미 알 먼로의 이름을 다시 들어버린 이상 캐시의 괴로움은 되살아났고, 본격적인 복수극은 시작될 수밖에 없다.






배우 출신 제작자 에메랄드 펜넬의 능란한 연출과 각본, 캐리 멀리건의 화려한 독주, 찰떡같이 어울리는 OST 등등 이미 영화를 본 사람들이 좋아하고 칭찬하던 여러 포인트에도 물론 공감하지만 난 무엇보다 지극한 현실성에 제일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캐리 멀리건의 캐시는 말하고 행동할 때만큼 말하고 행동하지 않을(더 정확히는 ‘못할’) 때도 가공할 흡인력을 가지는 드문 캐릭터다. 캐시는 차마 어떤 반응이 나오지 않을 만큼 지쳤을 때, 자길 둘러싼 현실의 폭력성에 압도되었을 때 내보이는 침묵으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움직일 때의 캐시가 관객에게 극도의 카타르시스를 선물한다면, 움직이지 못할 때 – 차 핸들에 머리를 기대고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때, 들판을 걷다가 나무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무너질 때 –의 캐시는 관객을 극 속으로 단번에 데려와 자기 자리에 앉히는 데 성공한다. 그 순간 그가 나고 내가 그다. 캐시가 그 순간들에 느끼고 있었을 무저갱 같은 허탈함. 주변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먹먹한 마음. 한밤의 피로감. 거울 속 나를 볼 때의 낯선 서러움. 온몸을 얻어맞은 것 같은 무력감.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초조함.  얼른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지겨움. 어떻게 끝을 내야 좋을지 몰라 그저 살아갈 뿐인 무목적성. 이미 나도 너무 잘 아는 것들. 설사 그것을 모르던 사람이더라도 캐리 멀리건의 표정, 몸, 움직임을 눈으로 좇다 보면 현실에 짓눌려 꼼짝하지 못하고 압화가 되어 가는 사람-여성-피해자의 기분을 추체험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결국 캐시는 7년 동안 니나의 복수를 한 게 아니라 니나 그 자체가 되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니나라고 과연 가해자들이 아닌 자기 자신을 죽이는 선택을 정말 ‘원해서’ 했을까.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 때문에 죽기 전까지는 니나도 수천수만 번이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아주 구체적이고 계획적인 복수를. 캐시는 니나를 위해 행동한 게 아니라, 니나를 자신에게 빙의시킨 것에 가깝다. 니나가 누굴 가장 미워하는지, 무슨 말 때문에 화가 났고 어떻게 어느 만큼 미워하는지, 어떤 식으로 벌을 내리고 싶은지, 어떤 말을 들으면 용서할 수 있는지 너무나 잘 이해하는 상태로 그의 대리인이 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단죄가 과연 옳은 것인가는 나중의 문제다.



실제로 성·폭력 피해자들이 가해자보다도 2차 가해자에게 더 큰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잦은 이유는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 편을 들리라고, 정의로운 선택을 하리라고, 가해자를 내치고 탓하고 사회적으로 고립시켜 주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주지 않는 제3자가 가해자보다 더 미워질 때도 많다. 수없이 실망하고 증오하면서 차차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대체로 지나치게 단순하고, 자기에게 불행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것을 모르고 살아도 된다고 대체로 믿고, 그 ‘모르기로 결정함’이 악의보다 더한 흉터를 남기기도 한단 것도 모르고 산다는걸. 자신의 일이 아닌 이상, 자신의 일이 되기 전까지, 누구도 제대로 나의 피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보다 먼저 이해할 의지가 없다.


매디슨을 블랙아웃 상태로 만들어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불안에 떨게 만들고, 학장에게 자기 딸이 강간당하고 있을 거라는 가상의 공포를 심는 일로서 니나(캐시)가 이루고 싶었을 목표 역시 그것이다. 자신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 니나를 알아주고, 니나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혹은 왜 하지 않았는지 모든 선택에 대해 자기 선택처럼 이해하게 만드는 것. 자기 자신을 이해시키고, 그들이 자신을 이해하는 게 자신에게 중요한 일이란 걸 이해시키고, 그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있단 것을 자기가 앎으로써 나아지는 것. 불가능한 과제로 보였던 그 일을 캐시가 니나를 위해 해내고 만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성 캐릭터를 사용한 방식이 상당히 폭력적이었다는 지적에는 나도 일면 동의하지만(그 때문에 5점 못 주고 4.5점 줬지만...), 슬프게도 많은 경우 여성 역시 친밀하지 않은 여성의 피해 진술을 부정하고 친밀한 관계의 남성을 감싸느라, 아니면 자기 편견을 벗지 못해, 쉬이 2차 가해를 저지르는 것도 사실이다. 니나에게 그들을 이해시킬 방법은 그것뿐이었음을 생각하면, 그리고 결국 실제로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캐시가 (늘 그랬듯) 경고에 그치는 정도로 마무리했단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용서 가능하다. 아마도 매디슨과 학장은 몇 달 혹은 몇 주, 심하면 며칠만 지나도 그때의 감정을 잊어버리고 안온한 일상으로 돌아가서 다시 무지하기를 택하겠지만. 그때 그 순간만이라도 그들을 이해시킨 것만으로 캐시는 만족한다. 착하게도. 그것이 피해자들이 그나마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지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 지점에서 만족해야 자신들도 편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린 변호사를 용서한 것 역시 ‘편해지고 싶은’ 니나-캐시의 욕구의 발로였을 거다. 그린 변호사는 라이언도 학장도 기억하지 못한 니나의 이름을 유일하게 기억했던 가해자다. 과거엔 가해자 측에서 니나를 집요하게 괴롭혀 결국 고소 취하까지 이끌어낸 인물이지만, 그가 ‘기억해요. 니나? 성까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이름은 기억 나오’라고 괴로워하며 말했을 때 캐시의 표정은 이미 무너져 있다. 그는 니나를 비롯한 피해자들을 기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죄책감에 잠도 못 이루고 환상까지 보고 있다. 캐시-니나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괴로움이 어떤 것인지 이해하는 그를 용서하기로 선택한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건 그토록 작은 죄책감만으로도 가능한 일인데.



그러나 아무리 니나를 대리한다 한들 캐시의 복수는 완벽하게 합당할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니나를 대리하려 하는 캐시의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니나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캐시가 죽기 직전까지의 니나를 잘못 이해한 구석이 있어서 때문이 아니라, 그때 죽은 니나가 만약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내렸을지 모르는 상태로 선택했기 때문에. 캐시는 니나 그 자체지만, 그 ‘니나’는 7년 전 죽기 전의 니나다. 만약 지금 니나가 살아있었다면 모든 걸 그저 묻어두고 나아가기로 결정했을지, 용서하지 못하고 여전히 괴로워하면서도 차차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을지, 기적적으로 용서했을지, 아무도 – 캐시마저도 -모른다. 캐시의 선택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소망과 원망이 니나의 원념을 압도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이건 피해자들의 윤리학을 다루는 영화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합당한가, 도무지 가해자의 사죄와 죄책감을 이끌어낼 방법이 없는 경우 피해자가 그에게 동일한 피해를 입힘으로써 자신을 이해하게 만드는 선택이 윤리적으로 옳은가, 피해자가 부재할 시 그가 지정한/그의 의사를 100%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그를 대리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다루는 윤리학.




돌아다니며 몇몇 리뷰를 봤는데 누군가는 이 영화의 결말부에서 니나를 강간했던 알이 결국 캐시마저 죽일 때 베개로 눌러 질식시키는 씬이 필요 이상으로 길게 이어졌다며, 여성의 죽음을 자극적으로 다루는 ‘관음적 시선’이 불편했다고 썼다. 그런데 난 그 부분에서 제작진의 관음적 태도가 드러났단 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내게 그 질식사 씬은 일종의 영화적 전환으로 읽혔다. 이 작품이 남감독의 영화였다면 나도 치를 떨며 관음적 카메라를 비판했겠지만, 이건 성차별로는 탑티어라 할 수 있는 영화계에서 볼장 다 보며 살아남은 배우 에메랄드 펜넬과 캐리 멀리건의 영화다. 그 여자들이 일부러 ‘관음적’이고 섹슈얼한 구도를 채택하고 과하게 시간을 들여 캐시의 퇴장을 (남자 좋으라고/남성적 시선을 경계하지 못하고) 그렇게 그려냈을 리 없다. 오히려 캐시의 끔찍한 죽음은 내겐 일종의 정치적 선언으로 보였다.


영화가 그 씬 이전까지는 죽음으로도 나눠놓을 수 없던 캐시와 니나의 우정을 다뤄왔다면, 여성들이 화면에서 ‘제거’당한 그때부터는 캐시-니나의 완벽한 대응항인 알 먼로와 조의 남성연대가 전개된다. 캐시의 죽음을 길고 잔인하게 묘사하는 건(물론 보기 힘들었지만) 이제 이전까지의 판타지적 쾌감 – 캐시가 그토록 많은 남자들을 강간 직전의 순간 농락하곤 단 한 번의 직접적 피해도 입지 않은 것, 남자들이 화내거나 목 조르거나 소리 지르며 다시 강간을 시도하지 않고 사이코패스적 면모에 겁먹어서 캐시를 그냥 집 밖으로 내보내준 것 자체가 이 영화 최대의 판타지고 낙관이다 –을 모두 버리겠다는 뜻이다. 이건 영화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겠다’는 선언이다. 말하자면 막을 나눈 거다. 복수하러 온 피해자 여성을 기어이 좌절시키는 가해자 남성에게 다소 긴 퍼포먼스를 부여해, 장르를 한순간에 판타지에서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전환한다. 여자의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반란, 꿈같은 반란은 정말 발칙하고 비현실적인 꿈 정도로 끝나버리고 실패한다.


이제 조와 알이 인류 역사만큼 오래된 남자들의 의리를 보여주고 서로의 공범이 된다. ‘네겐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잘못도 없고, 이 여자는 숨기면 끝’이라고 알의 눈을 바라보며 달래는 조와 그런 조의 말을 따라하는 알의 시선은 너무 절절하고 친밀하고 익숙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역시 남자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남자밖에 없다니까. 이 호모소셜적 우애는 남자들은 그게 왜 웃긴지 이해 못 할 게 뻔한 블랙코미디였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니나-캐시의 여성연대와 뿌리부터 다른 남성연대의 무근본성이 드러난다. 친구를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고 죽음을 용기 있게 맞이한 여자들과 달리, 먼저 시신 은폐를 제안하며 알을 도운 조는 막상 경찰이 알을 잡으러 오자 (멀리 가지 못할 걸 자기도 알면서) 알을 버리고 본능적으로 도망부터 쳤다는 점이다. 이 얼마나 얕고 우습고 하찮은 뒷모습인가. 결국 조의 자신만만한 태도는 알에 대한 의리와 우애보다도 '스트리퍼 창녀 하나 죽이는 것 갖곤 절대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의대 출신 남자인 너희는 안전하다고 믿게 만든 사회의 가르침에서 온 것이었으니까.



또 (아니나 다를까 발견한) ‘남자를 갱생 불가한 존재로 그렸다’는 불만도 있었다. 나는 일단 제작진이 ‘남자는 갱생 불가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던 의도가 어느 정도 맞다고 생각하고, 그 내용도 옳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거기에 백 퍼센트 동의한다. 남자 입장에선 그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쳐도, 그렇게 남자를 ‘평면적으로’(ㅋㅋ) 순수악처럼 그려놔서 기분이 나빴더라도, 왜 여자들이 그만큼이나 남자를 일차원적이고 평면적이고 균일한 집단으로 보게 됐는지를 먼저 성찰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에메랄드 펜넬과 캐리 멀리건이 왜 이 남자들을 이만큼이나 못 믿게 되었을까? 왜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이런 ‘일방적이고 악의적인’ 시선에 공감하고 있을까? 왜 남성 일반에게 신뢰를 잃은 걸까? ‘착한 남자’마저 언제나 잠재적 가해자로 바라볼 수밖에 없을 만큼 궁지에 몰린 여자들의 위기감은 어디서 온 걸까? 불편한 남자들이 그런 걸 먼저 생각해 보면 좋겠다. 남자를 갱생 불가한 악인으로 그려서 영화의 복잡성과 개연성에 흠이 된다고 평가부터 날리기보단.



남을 해치지 못해 나를 해치는 것 말고는 제정신을 유지할 방법을 몰라 막막할 때가 있다. 누군가의 혀를 자르고 손가락을 불에 태우고 싶을 때가 있다. 그가 그렇게 아끼고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실은 어떤 사람인지 모두 말해버리고, 그가 쌓아온 모든 걸 무너뜨리고, 재기 불가능하게 만들고 싶을 때가 있다. 그가 내게 그런 것처럼 온 정신과 의지와 건강과 관계들을 박살 내고 싶을 때가 있다. 정말로 진심으로 그러고 싶어서, 그럴 수 없는 게 분해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깬다. 그럼에도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은 건 그들과 똑같은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남의 인생을 그 정도로 망쳐놓고 아무 죄책감 없이 사는 그런 인간이 될 자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서. 전도유망한 젊은 남자들은 이런 여자들의 포기와 배려를 먹고 안전하게 자라면서도 자기가 누구의 대단한 선의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전도유망한 젊은 여자들이 자신의 도덕, 자기의 신념, 자신의 선을 놓지 않기 위해 분투하면서 반성 없는 가해자를 용서하려다가 죽어가는 동안.


그래서 나는 그런 도덕도 신념도 선도 버리고 새로운 규율을 세웠던 캐시를 이해한다. 버티지 못해 가버린 니나도 이해하고, 니나를 보내지 못해 스스로를 도구로 만들어서라도 남자를 벌하는 덫이 되고 싶었을 캐시의 심정도 이해한다. 끝없는 악의와 비이성적인 선택들을 모두 이해한다. 이성을 가질 여유가 없는 사람들을 안전한 저 위에서 바라보며 이렇다 저렇다 평가만 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 무지하게 살 수 있는 선택지를 여전히 잃지 않은 사람들이 부럽다. 나도 정말이지 그러고 싶었다. 캐시도 그러고 싶었을 것이다.



덧) 솔직히 말하면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먹먹한 기분으로 리뷰를 찾아보면서 조마조마했다. 자의식 강한 남자들이 더 열심히 떠들기 마련인 영화 커뮤니티나 블로그 리뷰 등에서 이 영화와 인물과 그에 담긴 여성들의 시선이 너무 과격하다거나, 비이성적이라거나, 평면적이라거나, 일방적이라거나 하는 (그야말로 비이성적인) 비하가 많이 보일까봐. 물론 그런 리뷰도 있긴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대부분의 남성들이 캐시에게 공감하고 요즘 시대에 꼭 나왔어야 할 영화라고 말하고 있었다. ‘피해자들의 심정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 영화라며 감사해하는 평까지 봤다. 그 정도면 이 영화는 이미 99퍼의 성공을 거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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