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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Apr 15. 2021

<더 파더>, 고목의 위엄이 스러지듯이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치매 노인이 겪는 대표적 증상 중 하나가 남들이 날 해치려 한다는 피해망상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 피해망상의 피해자, 즉 일방적 피해망상 속의 가해자는 흔히 지척에 있는 가족들이 된다. 가장 흔한 것은 자식/배우자가 내 재산을 노리고 날 처리하려 한다는 망상. 그 다음으로는 이유도 없이 날 물리적·언어적으로 괴롭힌다는 망상. 그리고 날 제외한 가족들이 모두 똘똘 뭉쳐 날 배척한다는 망상. 그런 망상을 호소하는 치매 환자가 정말 흔하다고 한다. 모든 정신병의 초기 증상과 동일하게.


​왜 인간은 실존적 위기의 끝자락까지 가면 꼭 남이 자신을 어떻게 하고 있다고/할 것이라고 그토록 확신하는 걸까.

대부분의 경우 사실 그건 착각이고 사람들은 벼랑 끝에 매달린 약자에게 거의 관심이 없는데도.

늙고 지치고 병든 자신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탈취의 대상이 될 수 있을 정도로는 소중하고 귀하고 관심이 가는 사람이라는 착각 때문일까? 부족한 상황판단력에 반비례하게 커지는 자의식 탓일까? 그런 것만이 인간 자신을 인간답게 하는 모든 조건 - 지성과 지식과 인지능력 -을 모두 잃고 나면 남는 최후의 본능일까?​​



기억이 파편이 되는 걸 넘어 이리저리 순서를 바꿔 재구성되고, 눈치 채지 못할 만큼 교묘하게 허구를 섞는 건 앤서니의 망상도 마찬가지다. 앤서니의 머릿속에서는 앤의 전 파트너인 제임스, 파리에 사는 현 애인 폴, 치매 노인 요양원의 남자 간호사 빌이 마구 뒤섞인다. 제임스의 얼굴, 폴의 직업과 거주지, 빌의 얼굴, 그들 모두의 언행, 그들이 앤과 맺는 관계들. 여러 요소가 레고처럼 파츠를 끼워 맞추며 새로운 인물과 서사를 창조한다. 폴이 누군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앤서니는 그가 착한 딸 앤을 물들이고 자신을 떠나도록 부추기는 '질 나쁜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앤소니가 재구성한 기억에서 '폴'은 앤소니의 집에 무단 침입한 이방인이었다가, "언제까지 여기 머물면서 여러 사람 힘들게 할 생각이세요?"라고 묻는 비정한 사위였다가, 앤서니를 끝까지 돌보려는 앤을 몰아붙이더니 급기야는 앤서니의 뺨을 때리기까지 하는 무도한 악인이다.


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앤서니는 새 간병인 로라를 보자마자 둘째 딸 루시와 똑 닮았다고 반가워하지만, 결말로 갈수록 과연 로라라는 간병인이 실존했을지조차 불분명해진다. 첫째 딸 앤, 간병인 로라, 쫓겨난 간병인 안젤라, 요양원의 여자 간호사 캐서린까지 그를 돌보는 여자들의 얼굴과 말과 특성이 조각을 갈아 끼우듯 정신없이 재배치된다.


​하지만 관객은 이 기억의 편린 중 어느 것이 어느 만큼 진실인지, 어느 조각이 다른 것에 선행하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중요한 대사와 행동들이 유사성을 띠고 반복되기는 하지만 행위의 주체와 디테일이 매번 달라지는 만큼 기억의 신뢰도도 낮아진다. 그전에 우선, 이게 정말 '기억'이기는 할까. 처음에는 순행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고 생각했다가, 결말에 가서야 사실 앞의 모든 장면이 앤서니의 엉망진창 플래시백이었다고 깨닫게 될 만큼 관객을 혼란 속에 위치시키는 연출 탓에, 더더욱 그게 실제 기억이라는 점을 확신할 수 없다.


관객이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앤서니가 그 정도로 폴을 미워했다는 것뿐. 어쩌면 얼굴조차 모르고 한 번도 본 적 없을지도 모르는 폴을. 그의 곁에 단 하나 남은 가족인, 그러니까 사실은 속으로 깊게 의지하고 있었던 첫째 딸 앤마저 뺏어간 그 남자를 앤서니가 어떻게든 악인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는 것만을 깨닫는다.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치매 노인의 제멋대로인 기억, 그것이 전해주는 인생무상의 슬픔만큼 무겁게 다가온 건 장녀에게 지워지는 부양의 부담이었다. K-장녀라는 밈이 스테레오타입화 될 정도로 한국의 장녀는 일종의 상(像)으로서 규격화되어 있다. 제법 균질한 룰이 각 가정의 첫 딸들에 적용된다.(외동, 막내, 가운데 둘째, 자매 등등이 종종 비슷한 스테레오타입 안으로 구겨 넣어지듯이.) 왜 그런 말이 있지 않나. 아들 가진 부모는 버스 타고 딸 가진 부모는 비행기 탄다고. 혹은 큰딸은 살림 밑천이라고. 혹은 '그래도' 딸은 꼭 있어야 한다고. 가볍게 말해지는 말들이 전제한 것은 딸 -특히 장녀- 만큼은 '감정적으로도' 부모에게 끝까지 헌신하리라는 굳은 믿음이다. 아들은 제 가정이 있으니 제외되고, 보다 어린 자식들은 자유롭게 살아야 해서 제외되는 돌봄의 의무에서 장녀는 항상 마지막 순서까지 남겨진다. 앤처럼 미혼의 중년일 경우, 프리랜서처럼 정해진 시간에 일해야 하는 직장이 없을 경우 더더욱 굴레가 무겁다. 영국이래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과연 앤서니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둘째 딸 루시가 살아 있었다면 언니 앤만큼 헌신적으로 아버지를 돌봤을까? 나는 절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루시는 아마 하던 대로 전 세계를 여행하고 아버지에게 종종 전화로 안부를 묻는 것에 그쳤을 확률이 높다. 죄책감은 있었겠지만 언니의 존재로 인한 안심이 더 컸을 테다. 어쩌면 아버지의 질환 자체를 눈치 채지 못했을 확률도 높다. 그러나 앤은 알고, 앤소니는 알지 못하는(혹은 애써 무시하는) 그 사실이 부녀의 관계 속에서 얼마나 잔인한 칼날이 되어 왔나.


​앤서니는 앤을 한 번도 제대로 인정해준 적 없다. 그리고 앤은 아마도 그 사실 때문에 더욱 그를 잘 돌보는 데에 집착한다. '제 엄마를 닮아서' '재미없고, 딱딱하고, 둔하고' '머리가 좋지는 않은' '그래서 영 정이 안 가는' 딸로서 소개되는데도 앤은 그 모든 폭언을 익숙하다는 듯 감내한다. "내 집을 갖기 위해 날 쫓아내려는 걸 다 안다"는 얼토당토않은 음해로 남 앞에서 수모를 줘도 앤은 모든 걸 이해하고 아버지를 품는다. 장녀 특유의 도덕과 인정 욕구와 애정결핍이 고르게 일조했을 그 굳건한 헌신이 하나도 답답하지 않고, 너무 이해되고, 그럼에도 억울하고 서러웠다. 앤이 결국 앤서니를 두고 떠나는 데 성공한 게 얼마나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을지도 계속 생각했다. 그건 지친 딸의 포기가 아니라, 분리를 통한 성장을 도모한 현명함으로 읽어내야 한다. 진작에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 일.



​영화를 보며 감정의 파고가 서서히 높아졌는데, 딱 세 번 격랑에 휩쓸렸단 기분으로 주르륵 울었다. 첫 번째는 앤서니가 "이건 내 플랫이고, 여기서 날 쫓아낼 순 없을 거야!"라고 진노해 소리 지르던 때. 두 번째는 빌의 얼굴을 한 '폴'에게서 따귀를 맞는 수모를 겪고 완전히 무너져 몸을 말고 우는 앤서니를 앤이 발견했을 때. 세 번째는 물론 결말의 오열. "내 잎들이 다 져버리는 것만 같아. 엄마가 여기 왔으면 좋겠어, 날 보러 오시면 좋겠어…"라며 아이처럼 우는 노인... 내게도 언젠가 올 노화와 기억의 상실이 두렵고 괴롭고, 무엇보다 사무치게 슬펐다.


​​이른 아침 영화를 보고 나왔더니 완연한 봄의 주말이었다. 공원에는 완벽한 날씨를 맞아 쏟아져 나온 가족들로 가득했고 엄마 아빠와 아이들만큼 노인들도 많았다. 벤치에 둘러앉아 장기나 바둑을 두는 노인들. 자전거를 타거나 비닐봉지를 들고 나물을 뜯는 노인들. 손 잡고 걷는 노부부들. 손주의 신발끈을 무릎 꿇고 앉아 묶어주는 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밟혔다. 우리 할아버지도 저렇게 내 신발끈을 묶어주던 때가 있었는데 하면서.


​평생 누구에게도 굽혀본 적 없었다는 할아버지는 첫 손녀인 내게만은 등을 굽혀서 덥석 덥석 업어주셨다. 아빠와 고모들이 다 놀랄 정도로 나에게만은 다정하셨고, 내가 급하다면 헐레벌떡 뛰어 오시고 내가 무서워하면 벌도 맨손으로 잡아 죽이고 내가 보고 싶다고 전화로 투정하면 껄껄 웃으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본 어른 중 가장 똑똑하고 위엄 있고 재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할아버지가 이젠 꼭 앤서니의 병증 초기 증상처럼 모든 걸 자주 깜빡깜빡한다. 아직까지는 바로 어제 일, 몇 주 전의 일을 잊는 데 불과하지만 가족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다.


언젠가 할아버지는 나를 잊게 될까? 내가 누구인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게 될까? 영화 후에 한동안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더 많은 게 지워지기 전에 대화를 더 많이 하고 싶다는 생각도.


​누군가를 잃는 것. 누군가와 함께 했던 기억을 그는 모두 잃고 나만 갖고 있는 것. <더 파더>는 그런 스러짐에 관한 슬프고 고요한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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