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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Apr 18. 2021

<스파이의 아내>, 왜 무지는 항상 여성형인가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첫 시대극, 아오이 유우 주연, 전쟁 가해국으로서의 역사를 피하지 않고 직시했다는 세간의 평.

그 세 가지만으로 충분히 보고 싶어지는 영화였다. 시간이 계속 맞질 않아 안달하다가 겨우 봤는데, 아뿔싸 기대가 너무 컸나. '남들 다 좋아하는데 나만 못 좋아하는 잘 만든 영화 리스트'에 +1 된 느낌이었다.



초반부까진 나도 영화의 톤과 인물들의 고전미가 다 마음에 들었다. 블루레이로 소장하고 싶은 드문 영화라는 좋은 예감을 받기까지 했다. 그런데 갈등이 고조되기 시작하면서 대사량이 늘어나니 당황스러워졌다.


조악한 뮤지컬이나 연극 같은 화면이 우선 거슬렸다. 내가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적게 봐서 그의 작풍이 원래 이런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원래 인물들이 이렇게 인형극처럼 삐걱대며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감독이던가? 정말로 뮤지컬 보는 줄 알았다(근데 이제 노래마저 안 나오는...). 뮤지컬을 폄하하려는 게 절대 아니다. 연극이나 뮤지컬에서 통용되는 법칙과 영화에서 통용되는 법칙이 사뭇 다르다는 뜻이다. 이 영화는 일부러 과장된 움직임, 동선, 대사와 시선 처리를 통해 연극의 느낌을 내는 듯했다. 어쩌면 일본 고전 영화의 화풍을 따라가려는 노력이었을지도. 오즈 야스지로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서 봤던 여배우들의 아름답고 큰 동작, 과장된 말투가 얼핏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인간이 어쩔 수 없이 형식에 큰 영향을 받는데, 너무나 높은 해상도의 컬러 영화에서 그 연극적이고 고전적인 말투가 좋은/어울리는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연극적인 것만 문제가 아니라 ‘조악한’ 연극인 게 더 문제였다. 굳이 2021년에 나와야 하나 싶은 클리셰적 연출과 너무너무 뻔한 미장센을 차용한 장면들 –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는 사토코의 악몽, 사토코와 타이지의 재회 때 카메라를 불안한 듯 응시하다 눈을 내리 까는 하녀, 물 위에 떠오른 여자의 시신, 사토코가 필름으로 ‘계몽’된 후 커튼을 활짝 열자 방의 암흑을 몰아내고 쏘아지는 환한 빛, 공습이 찾아오자 가장 먼저 진동하는 물잔과 수저통 등- 은 형식적으로도 미적으로도 내용 면에서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이 무의미한 장면들에 그토록 힘을 주고 찍어서 대체 뭘 건져내려고 한 걸까. 일본 고전 영화의 향수를 좇는 외국 평단의 상을 노렸나?



더 당황했던 건 모르는 자(사토코)와 아는 자(유사쿠, 후미오)의 대비가 너무도 극명한데, 아는 자들이 모르는 자를 무시하고 배제하는 방식이 여성 억압과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만주에 갔다가 일본 관동군의 만행과 참사를 목격하고 온 유사쿠와 후미오는 먼저 진실을 깨우치고, 전쟁을 멈추기 위해 조국을 지게 하려고 내부고발을 준비한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사토코는 남편을 말리려고 노력하고 진실을 알려달라고 계속해서 요구하지만, 유사쿠와 후미오 둘 다 절대 그를 만족시킬만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둘이서 약속했나 싶을 정도로 똑같이 돌아오는 대답은 ‘사실을 알려줄 수 없다’ ‘알면 이렇게 살 수는 없을 것’ 그리고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라는 분노.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모른다. 아니 니들이 안 알려줬고 지금도 안 알려주고 있잖아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무것도 모르길 바랐기 때문에 만주에 데려가지 않았고, 아무것도 모르길 바랐기 때문에 고베로 돌아온 후에도 즉각 말해주지 않았으면서. 사토코가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하고 안전하게 유사쿠만을 사랑하며 귀여운 아내의 본분을 다하길 바란 건 유사쿠인데, 그러니까 더 세게 말하면 사토코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귀여운 백치로 만들어서 현실로부터 담을 쌓게 한 건 유사쿠인데, 왜 그 담을 자력으로 벗어나 사실을 알아보려던 사토코가 후미오에게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라는 노성을 들어야 하는가. 그 뒤에 이어지는 “외삼촌이 외숙모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얼마나 애쓰는데”라는 말은 더 가관이다. 사토코가 그런 방향의 노력을 원하는지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으면서.



유사쿠는 분명 뛰어난 사업가고 자상한 남편이다. 그런 그가 돈의 흐름과 쓰임새를 결정하고 그림을 그리듯이, 가정에 대해서도 그린 상이 있을 테다. 그가 영화를 연출하는 취미를 가졌고 사토코가 줄곧 그의 영화놀이에 주연 배우로 출연한 것 역시 상징적인 요소다. 극 중에선 둘이 만나고 결혼하는 과정이 삭제되어 관객이 유추할 수밖에 없지만 (원작 드라마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유사쿠가 먼저 그의 구미에 맞는 사토코를 고르고 사토코가 그에게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혹 그게 아니더라도 결혼 생활 중 두 부부가 그려내는 건 완전한 주종 관계의 드라마다. 사토코에게 여러 제약을 걸고 그걸 잘 지키면 다정히 사랑을 말하고 못 지키면 냉담해지는 유사쿠의 모습. ‘가정의 천사’라는 오래된 호칭도 좋지만, 좀 더 신랄한 조롱인 ‘애완 아내’라는 수식을 자꾸 붙여주고 싶었다.


사토코는 유사쿠의 이상적 가정에 잘 부합하는 어리고 예쁜 아내고, 애교가 많고, 순수하고, 유사쿠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그를 사랑해 주지만, 유사쿠가 ‘동지’로 여길 만한 지성이나 현실 판단력은 없(었)다. 물론 알고 보니 사토코는 그렇지 않았다 해도 어쨌든 유사쿠는 그렇게 판단한다. 그래서 세상을 전쟁으로부터 구원하려는 유사쿠와 후미오, 그리고 사건의 핵심 증인이자 군의관의 내연녀이기 때문에 조력자가 되기를 ‘허락’ 받은 히로코의 연대에서 사토코는 철저히 배척당한다. 사토코는 의심하고 정공법으로 돌진하고 수를 쓰지만, 사토코의 알고자 하는 의지가 유사쿠의 모르게 하려는 의지를 이기지는 못한다. 이건 사랑해서 지켜주는 게 아니라, 정보의 독점 / 중책에서의 소수자 배제로 읽어야 한다.


그래서 계속 이런 물음이 남았다. 왜 무지(無知)는 항상 여성을 통해서만 구현되는가. 히스테리를 비롯한 부정적 어감의 단어들이 보통 그렇듯이, 무지(ignorance) 역시 그 뿌리를 여성형 라틴어 명사 ignorantia에 두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성은 식자고 여성은 무식자가 되어왔다. 남성은 인도자고 여성은 (가장 운이 좋을 때에 한해서) 그의 자비에 힘입어 계몽되는 후발주자다. 사토코도 마찬가지다. 그는 누군가의 아내이기 때문에 앎으로부터 제외당했고 알려는 의지조차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됐다. 그가 아내이기 때문에 몰라야 하고 모르는 것이 더 낫다고 대신 판단해 준 남성들이, 그의 알려는 용기를 무의식 중에 두려워하고 자기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그를 모르는 자의 자리에 계속 남겨두려고 애쓴다. 그가 단독자로서 가치를 갖는 존재가 아니라 남성의 아내라는 부차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등하다고 믿기 때문에, 끝까지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그를 올려놓기를 거부한다.


<테넷>을 비롯한 영화들, 그 영화들을 만들기까지 무수하게 쌓아올려진 남자 영웅들의 서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오직 자기만 세상을 구하거나 망하게 할 수 있고 자기만 선택받았고 자기만 모험할 수 있다고 믿는 남자들. 유사쿠의 “운명이 날 선택한 거야”란 말이 우습고 김이 샜던 이유다. 결국 또 그 소리구나. 당신 전에도 후에도 엄청나게 많은 남자들이 다 그런 착각을 했어. 근데 아무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고, 성공하더라도 남을(주로 자기 주변의 선량한 여자들을) 착취하고 짓밟으면서 성공했고, 그게 자기 능력이고 운이라고 굳게 믿었어. 너 같은 타입은 정말정말정말 흔하게 발견되는 자의식 과잉에 과대망상이야. 너는 아무것도 아냐. 너만 스스로가 선택받았다고 착각했던 게 아냐.


사토코라고 모르고 싶었겠는가. 그는 알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질문한 사람인데, 그런 그에게 요구된 것이 ‘그냥 입 다물기’ ‘남편을 믿어주기’ ‘캐묻지 말기’ 이 세 가지 지침뿐이었는데 어쩌겠느냐고. 유사쿠에게서 사토코에게로 건네지는 무시와 비하와 배제의 제스처들. 그는 끊임없이 사토코의 기를 죽이고 입을 다물게 만든다. 알려주지도 않으면서, 알기를 바라도 남편을 통하지 않으면 정보를 얻을 수 없는 환경인 걸 알면서. 사토코는 무지한 어린애고 자기는 국가에도 복무하지 않는 코스모폴리탄 지식인이라며 선을 긋는 모습이 너무 못되고 졸렬해 보였다.


그는 사토코에게 “날 믿을지 믿지 않을지 선택해”라고 묻지만 사실 남편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시대에, 더군다나 남편을 여전히 소녀다운 열렬한 애착으로 품으려는 사토코에게 믿는 것 외의 선택지는 없다. 그래서 사토코도 그때만은 “그건 비겁해요”라고 반기를 들지만 그뿐. 완전히 믿을 수 없으면서도, 믿어야 살 수 있다. 유사쿠를 비롯한 남자들에겐 이게 조국의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사토코에게는 조국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적용되는 말이다. 어쩌면 스파이의 ‘아내’라는 제목부터가 이 패착을 예고하고 있었는지도. 끝까지 서사의 곁다리로만 존재할 수 있었던, ‘누구의 무엇’이 아니라 ‘누구 그 자체’가 되지 못한 사토코의 운명을 너무 정확하게 드러낸 제목이라 씁쓸했다.


‘시대’극이니까 시대를 고려하자는 반발이 또 들려올까? 아니면 시대극에 억지로 PC 뿌리지 말라거나? 내가 시대를 고려해서 봐줄 수 있는 건, 나이 차 많은 남편으로서 유사쿠가 사토코에게 고압적인 반말투를 쓰고 사토코는 아기 같으면서도 깍듯한 존대를 구사하는 것, 유사쿠가 사토코에게 거의 가스라이팅처럼 자신을 믿을 것을 종용하는데도 사토코가 그를 경제적·감정적인 이유 양면에서 다 미워하지 못하고 떠나지 못하는 것 딱 이렇게까지다. 그 외에 사토코를 (심지어 후미오까지) 무식자 취급하는 것, 사토코가 알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유사쿠가 그를 아는 자 반열에 끼워주지 않은 것, 히로코라는 여자가 사토코에게 성애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응항으로 제시되는 것, 그녀마저 군의관의 내연녀였기 때문에 사실에 접근할 수 있었단 점까지. 모든 요소가 날 설득하지 못했고 오히려 극에서 심정적으로 멀어지게 만든다.



많은 부분에서 <마틴 에덴>과 비교되는 영화였다. 그때 나는 그 정치적이고 우아한 영화의 모든 면이 너무 좋았지만, 노동 계급인 마틴이 귀족 영애인 연인 엘레나를 대하는 태도가 고압적이거나 교조적이라서 불편했다는 평을 간혹 들었는데. 그때 여러 이유를 들며 동의하지 않았던 내가 이번엔 왜 이렇게 몰입이 불가할 정도로 불편함을 느꼈을까. 아마 인물 설정부터 제작진의 태도가 엇나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틴 에덴>의 마틴은 가난이 무엇인지, 계급의 고층에 있는 사람들이 하류의 삶에서 놓치고 있는 게 무엇인지 보여주려 한 자인 반면 엘레나는 그 가난을 보지 않고 알지 않기를 원한 자다. 엘레나는 ‘앎’을 거부함으로써 행복과 평안을 영위하려 한 사람이다. 마틴의 '보여줌'이 일순간 폭력적이었을 수는 있으나 엘레나에겐 그전에도 후에도 수없이 많은 기회가 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계급성을 포기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사토코는 다르다. 사토코는 이미 아는 자인 남편을 따라 아는 자가 되고 싶어 했으나, 지극히 남성 영웅 중심적인 그 세계에서 내쫓기고 만다. 끝까지 그녀의 ‘앎’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에 의해서. 사토코도 처음엔 엘레나처럼, 아니 엘레나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대의와 고통 어린 직시보다 눈앞에 있는 당장의 행복을 바랐지만 그는 결국 각성했다. 관동군 만행을 고발하는 필름을 보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진 사토코는 남편의 큰 꿈을 따라 자기도 꿈을 꾸게 됐는데, 남편이란 사람이 하는 짓이라곤 끝까지 그녀를 대업에서 ‘배제해서 지키는’ 쓸데없는 배려뿐.


유사쿠는 그걸 지극한 사랑에 의한 보호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 선택에서 사토코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무시당한다. 차라리 유사쿠가 사토코의 필름을 바꿔치기하고 밀항을 신고한 이유가 사토코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한 번 자신과 후미오를 배신했던 사토코의 의중을 100% 신뢰하진 않아서, 아니면 유사쿠를 지키기 위해 후미오를 팔아넘긴 사토코의 의도를 이해는 하지만 배신감을 지울 수 없고 아내를 달리 보게 되어서, 혹은 사토코의 광기 어린 집착이 두렵고 지겨워서, 사실은 진짜로 히로코를 사랑하게 됐고 사토코를 버리고 싶어서였다고 이해하면 영화가 한층 더 쫀쫀해지고 이해가 간다. 유사쿠가 사토코를 ‘사랑해서’ 지켜주고 싶었다고 이해하면 남는 건 분노밖에 없다. 사토코는 그에게 끝까지 완벽한 가정이라는 천 피스 조각 퍼즐 안의 가장 예쁘고 여리고 어린 조각이었고, 그가 총 연출한 영화 속 완벽한 배우였을 뿐,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받지는 못했다는 뜻이니까.




그래서 이 영화에 4점 이상을 주고 정말 좋은 영화라고 감격한 모든 관객에게도 묻고 싶다. 정말정말 궁금하다. 대체 어디에 이입한 건가? 대체 어디에서 이 영화의 사상적, 서정적 훌륭함을 찾아냈나? 설마 그 조악하고 뜬금없이 짝이 없는 관동군 푸티지 삽입만 갖고도 ‘영화의 만듦새와 무관하게’ 자기고발적 의미를 갖는다고 고평가 해주는 건 아니겠지. 진짜 그렇다면 제일 최악이다. 일본에서 이 정도의 고발과 자성이 여태껏 없었던 것도 아니고...ㅠ(내 생각엔 그 사람들 다 <마틴 에덴> 보면 <스파이의 아내>가 얼마나 졸작인지 단번에 깨달을 것 같다)



난 좋은 서스펜스 추리극을 기대하고 간 건데 웬 사랑에 죽고 사는 여주인공과 영웅놀이하는 가부장 남편의 자의식만 실컷 보고 왔다. 추리 어디 갔냐고요ㅠ 그녀의 성공한 각성 그러나 실패한 성장과, 바닷가에서 힘없이 스러지는 결말에서 또 발견한 유미주의적 체념의 정서만 보고 와서 영 실망스러웠다. 차라리 "일본은 패하고, 전쟁은 끝나겠지요. 아주 훌륭합니다."라는 사토코의 독백으로 끝났다면 그나마, 정말 그나마 조금 덜 전형적이었을 것 같다. 그때 아오이 유우의 독백 처리는 좋았는데.


아니면 차라리 더한 파격을 시도했다면. 아오이 유우의 얼핏 얼핏 광기가 서리는 눈, 조카 후미오를 사지로 밀어 넣고서도 만족스럽다는 듯 “당신에겐 이제 나밖에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토코라는 여자에게서 어떤 희망을 봤는데 나는. 사실 사토코라는 인물은, 조국이고 전쟁이고 정의고 나발이고 아무리 큰일을 말하고 생각하게 되더라도 끝까지 그 무엇도 유사쿠에 대한 집착만큼은 못 넘어섰다는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오로지 사랑이라는 동력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사랑을 위해 나라를 버릴 수도 있었던 극도의 낭만.


그래서 나는 아주 다른 플롯을 영화 보는 중에도 끝난 후에도 내내 상상했다. 정의를 말하며 조국을 고발하겠다는 유사쿠의 큰 꿈에 찬물을 끼얹는 사토코를. 총연출을 자처하며 자기를 배우의 자리에만 두려는 남편과 맞부딪히고, 그를 속이고 배신하고 미국 망명을 끝까지 집요하게 방해해서, 결국 거꾸러뜨려 자기 품 안에만 있게 하려는 아내의 욕망이 성공하는 것을. 그리하여 그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영화의 의기양양한 감독이 되는 플롯을. 사토코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의 제목이라면 ‘행복의 나라’ 정도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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