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해 Apr 25. 2021

<노매드랜드>,
기억되는 것이 살아남는 것


저널리스트 제시카 브루더가 3년의 취재 후 발간한 원작을 100여 쪽 읽은 후에 동명의 영화를 보고, 다시 일주일 넘게 천천히 읽어가며 이제 270쪽쯤에 와 있다. 책이 날것의 사회고발 르포라면 영화는 보다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로드무비였는데, 사실 이런 선회는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책의 담대하고 시니컬한 어조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기기도 어려웠을 테고 그랬다면 꽤 재미없는 다큐가 되었을지도 몰라서. 영상에 맞는 톤으로 화자를 추가하고 풍광의 매력을 최대한 살려낸 감독 클로이 자오의 감각이 뛰어났다.


영화 속 가상인물인 펀은 남편의 마지막 흔적을 허물 수 없어 엠파이어 마을을 떠나지 못했고, 남편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어 언니나 데이브의 제안도 거부하고 계속 안정 없이 떠도는 삶을 선택한 사람이다. 하지만 실존하는 린다 메이를 포함한 모든 노마드들은 대다수가 경제적 절박함 때문에 그 삶을 선택했다.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즉 영화가 '차박'에 대한 지나친 낭만과 중노년의 로맨스로 빠지는 걸 피해 가면서, 동시에 노마드를 별종이나 이탈자로 타자화하지 않는 적정 지점을 찾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클로이 자오와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그 과제를 훌륭하게 해냈다.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한 인물이 첫 장면에서 숙소 리셉션에 MCD라는 성을 댈 때부터 맥도먼드의 약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름도 배우의 본명 ‘프랜시스’를 재조합한/혹은 그의 실제 애칭이 될 수 있을 법한 ‘펀’이다. 사실성을 최대한 높이고자 선택한 재치 있는 연출법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펀과 데이브를 제외한 모든 등장인물이 전문 배우가 아닌 실제 노마드, ‘하우스 리스’들이었다. 아마존 캠퍼포스의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관리직으로 등장하는 패티까지도. 엔딩크레딧을 보다가 그 사실을 깨닫고 영화가 오백 배 정도 더 좋아지는 기분이었다. 책의 주인공들 린다 메이, 스왱키 힐스, 밥 웰스 등이 실제로 '떠돌이 생활자들을 위한 랑데부'에서 만나는 풍경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해주다니.


그렇게 영화가 현실과 맞닿도록 손을 내미는 방식이 정말 훌륭했다. 비전문 배우더라도 실제 인물들을 기용한 것. 이름을 그대로 쓰고 일터와 RV도 그대로 보여준 것. 그들이 들려주는 자기 삶의 이야기를 조금의 편집도 없이 그대로 옮긴 것. 감독 클로이 자오와 프랜시스 맥도먼드, 데이빗 트라스탄 두 배우는 촬영 중 일종의 민족지를 쓰는 인류학자가 되었던 셈이다. ‘완전한 관찰자’도 아니고 ‘완전한 참여자’도 아닌 그 사이 어드메에서.


프랜시스와 데이빗은 배우지만 영화를 실제 노마드들과 촬영하며 똑같은 노동을 했고 똑같은 교육을 받고 같이 식사하며 그들에게 섞여들었을 것이다. 펀이 린다 메이와 배드랜즈 카트를 타고 돌며 엉터리 랩을 하다가 웃음이 터지거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스왱키의 머리를 잘라줄 때, 아마존 캠퍼포스 노동자였던 주인이 질환으로 실려가자 혼자 남은 개를 도무지 데려갈 수 없어 미안함에 괜히 머리만 쓰다듬어 주고 황급히 도망칠 때, 그럴 때마다 그게 연기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클로이 자오는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허물듯이 '집'과 '거주'에 대한 오래된 관념을 허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사실 균형을 잡기 굉장히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① 완전히 새로운 인물들을 상상해 '미국에 몇만 명의 노마드가 있다'는 사실을 '설정'으로만 유지하고 새로운 서사를 만들 것이냐 / ②노마드를 조망하는 완전 다큐를 보여줄 것이냐(난 사실 프란시스 출연 사실 알면서도 영화가 이 방향으로 갈 줄 알았는데) 중에서 선택하는 게 아니라, ③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아닌 '펀 맥도먼드'라는 중간 지대의 가상인물을 만듦으로써 현실과 픽션 사이 일종의 가상현실을 구축한 것. 대단한 결정이고 대단한 감독이라고 생각했다.



원작에서처럼 ‘집과 직장을 잃고 협소한 정상성의 울타리로부터 쫓겨난, 삶의 가장자리로 내몰린 불쌍한 사람들’로만 대하지 않고 노마드들의 당사자성과 일상성을 강조한단 점이 좋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내몰린 과정 역시 중요할진대 영화에선 그 부분이 충분히 다뤄지진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그래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책을 꼭 같이 읽었으면 좋겠다).펀은 경제적 빈곤만큼이나 사랑 때문에, 데이브는 경제적 빈곤만큼이나 방랑벽 때문에 떠도는 사람이고 두 주인공이 상징하는 낭만성에서 지워진 맥락들이 분명 있으니까. 나는 린다 메이와 스왱키를 비롯한 노마드들의 삶에서 <로제타>를,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미안해요 리키>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과 대척점에 서 있다고 말해도 좋을 자본의 주인들, <빅 쇼트>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주인공들이 하우스 리스 노마드들에게 어떤 논평을 던질지를 상상했다.


나는 린다의 이야기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며 주의 깊게 들었다.
그러면 사라지지 않는 몇몇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라고 쓴 제시카 브루더의 글이 "기억되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던 밥 웰스와 펀의 대화로 번역되었다고 생각하면서, 거기서 희망을 찾는다. 자칫 사막의 모래처럼 흩날릴 뻔한 이 비-정주자들의 역사, 낙관과 존엄의 역사가 지워지지 않도록 활자로 또 영상으로 박제한 제시카 브루더와 클로이 자오 두 기록자에게 존경을 보내며.




덧)

아카데미 6개 부문에 노미됐는데 혹여 작품상은 못 타더라도 감독상, 아니면 최소한 각색상이라도 꼭 받았으면 한다. 당연히 한 개 이상의 상을 받겠지만.... 번외로 적재적소에 삽입된 음악의 선율과 가사들도 너무나 좋았는데 음악상은 노미가 안 되었더라ㅎㅎ 캐롤을 부르며 운전하던 첫 장면의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기억에 오래 남는다.


덧2)

우아한 품위로는 따를 자가 없는 메릴 스트립과 글렌 클로즈도 해낼 수 없고, 시고니 위버나 린다 해밀턴의 굳건함과도 다른, 오직 프랜시스 맥도먼드만이 가능한 강인함이 있다. 5년 전 <쓰리 빌보드>에서 딸을 강간 살해로 잃고 분노하던 시골 마을의 행동주의자 밀드레드를 연기했던 프랜시스가 이젠 "난 내 인생의 너무 많은 부분을 기억하는 데에 쓴 것 같아요"라고 외는 지친 노년 여성을 연기한다. 이 전환이 무척 인상 깊었고, 사랑스러웠고, 어디에 있든 사막 너머를 보는 것 같은 그의 닳은 눈동자가 좋았다.





원작을 읽으며 남은 구절들도 옮겨본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승부가 조작된 게임에서 지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써버렸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시스템을 뚫을 방법을 찾아냈다. 그들은 전통적인 형태의 '벽과 기둥으로 된' 집을 포기함으로써 집세와 주택 융자금의 족쇄를 부숴버렸다. (...)
온라인으로, 일터에서, 전기나 수도 따위의 공공설비 없이 자급자족 캠핑을 하는 동안에, 그들이 만나면 부족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가, 동류의식이 있다. 누군가의 밴이 고장 나면 그들은 십시일반 돈을 걷는다. 그들 사이에 번져가는 느낌도 있다. 무언가 큰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 나라 전체가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고, 낡은 구조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으며, 자신들이 새로운 무언가의 진원지에 있다는 느낌이다. 한밤중에 캠프파이어를 함께 둘러싸고 있노라면 마치 유토피아를 살짝 맛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린다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상태를 갈망했다. 그는 식량, 전기, 실내 온도 조절 기능, 물을 제공하는 자립적 시스템을 갖춘 어스십이 거의 공생적 유기체처럼 기능할 거라고 추정했다. 그런 주택을 만들고 유지할 수만 있다면, 그 주택도 린다를 돌봐줄 것이었다. 그런 종류의 안정이라면 든든하게 느껴졌다. 린다도 결국 나이가 들면서 불안정한 인구 집단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 2015년, 여성들은 남성들이 1달러를 벌 때 여전히 80센트밖에 벌지 못했으며, 어린 자녀들과 연로한 부모를 돌보는 무임금 노동을 할 가능성은 남성보다 높았다. (린다는 두 아이를 길러낸 데다 1990년대 중반 공격적인 뇌종양에 걸린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나중에 입주 돌봄노동까지 했다.) 여성의 생애임금은 더 적고, 누적 저축액도 적다. 그리고 여성의 수명이 더 길기 때문에ㅡ남성보다 평균 5년 더 오래 산다ㅡ그 돈은 더 먼 미래까지 버텨줘야 한다.


"어디나 가고, 어디서나 멈추고, 세금과 집세에서 탈출한다 - 여기에 저항하기는 힘들다. 죽음 말고는 그 무엇도 한 패키지에 이렇게 많은 것을 제공해준 적이 없었다."
(...)
주류 미국인들에게 이런 종류의 단기 체류 생활은 현대판 『분노의 포도』를 떠올리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주목할 만한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한때는 '오키'라는 말로 멸시당했던, 유랑생활을 하던 더스트 볼 시대의 난민들에게, 자존감이란 한 가지 소중한 희망의 잉걸불을 꺼뜨리지 않고 살려놓는 것을 의미했다. 즉, 언젠가는 다시 '원래의 상태'가 돌아와 그들을 전통적인 주거로 되돌려놓아주고, 최소한 아주 조금이나마 안정성을 회복시켜줄 거라는 희망이었다.
그 자신이 영감을 준 많은 여행자들과 마찬가지로, 밥은 상황을 다르게 보았다. 그는 경제와 환경에 일어난 격변들이 미국의 '뉴 노멀'이 된 미래를 머릿속에 그렸다. 이런 이유로, 그는 유랑하는 삶을 미봉책으로, 사회가 안정되어 사람들이 다시 주류에 통합될 시점까지 그들이 난관을 극복하도록 도와줄 무언가로 포장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너덜너덜해진 사회질서 바깥에서 작동하거나, 심지어는 그 질서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유랑 부족을 형성하기를 염원했다.


<런던 파이낸셜 타임스>는 쿼츠사이트를 "미국에서 상당히 기괴하고 심하게 미쳐 있는 곳들 중 하나"라고 했다. 하지만 쿼츠사이트는 미국의 이상 현상이 아니다. 이토록 철저히, 캐리커처에 가까울 만큼 지극히 미국적인 도시는 찾기 힘들 것이다. (...) 쿼츠사이트는 언제나 여행자들, 아웃사이더들, 자신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가 되어왔다. 또한 '호황과 불황의 주기적인 반복'이라는 예술을 완성시키기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파이의 아내>, 왜 무지는 항상 여성형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