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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Apr 28. 2021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무지에 충실했던 소년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 지라

- 마태복음 27장 3-5절 




지난달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을 봤었다. 아론 소킨의 화려하고 똑똑한 연출, 거센 급류처럼 몰아쳐오던 대사의 양과 질, 에디 레드메인과 사샤 바론 코헨의 케미 좋은 호연, "시카고 전체에 피가 흐르게 하자"는 말의 의미를 두고 대립하던 씬 혹은 반전 시위대와 무장경찰이 맞붙기 직전 씬의 대단한 긴장감. 그런 강렬한 임팩트로 이뤄진 영화 와중에 무엇보다 내 눈과 귀를 잡아끌었던 건 바비 실과 흑표당의 묵직한 존재감이었다.


바비 실은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폭력 시위'를 주동했다는 가짜 혐의로 기소된 시카고 7인에도 끼지 못한 그 유명한 흑인 운동가. 발언권 자체를 빼앗겨 톰 헤이든이나 애비 호프먼처럼 패기 넘치게 소리 지를 기회조차 없었던, 그로써 60년대 미국에서 '자유'와 '평등'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허울뿐인 관념이었는지 몸으로 증명해낸 인물이다. 개처럼 재갈이 물려진 채로도 호프먼 판사를 노려보던 바비 실의 형형한 눈빛만큼, 그의 뒤편에 앉아 있던 젊은 흑표당원의 분노 서린 얼굴이 기억에 남았다.


그게 프레드 햄프턴이었다. 변호사가 없는 바비 실을 위해 반론할 만한 내용을 그에게 계속 속삭여주던 흑표당의 젊은 브레인. 젊다 못해 어리고 앳되고, 숨길 수 없는 총기聰氣를 담은 얼굴. "4시간입니다. 바비 실이 시카고에 머무른 시간 말이에요. 4시간이라고요."라고 내지른 재판 중의 혈기.


그런데 사실 프레드의 존재감은 법정 씬에서보다도, 그가 영화에서 비극적으로 퇴장한 후 바비 실이 던진 한 마디에 의해 제대로 각인된다. 영화의 중반부, 프레드가 지난밤 경찰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고 바비 실을 접견하러 간 두 백인 - 윌리엄 컨슬러 변호사와 톰 헤이든 -의 침통한 얼굴에 대고 바비 실은 일갈한다.



프레드는 처형당한 거야.
(Fred was executed.)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대사였다. 왜 처형이 아니겠는가. 바비의 말대로 프레드는 어깨에 총을 맞아 항거 불능의 상태에서 일방적 총격에 당했는데. 바비 실은 빌리 홀리데이의 '이상한 열매'를 연상시키는 대사를 읊으며 인종 우월주의와 백인들을 저주하고 프레드를 애도한다.


"너희 7명은 아버지가 다 비슷하지? 다 거기서 거기일 거야. '머리 잘라라, 남자 좋아하지 마라, 정부, 미국, 나를 공경해라.' 너희는 그런 아버지를 엿 먹이는 게 인생의 목표지? 그게 나무에 목매달려 죽는 삶과는 다르다는 걸 알지? … 첫 발은 어깨에 맞았어. 어깨에 총을 맞으면 방아쇠를 당길 수 없지. 총을 들 수조차 없고. 두 번째 발은 머리에 맞았어. 프레드는 처형당한 거야."


유희처럼 '흑인 사냥'을 마친 후 나무에 매단 시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파티를 벌인 1930년대 미국 남부 백인들.

Southern trees bear a strange fruit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리네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

잎과 뿌리에 피가 맺히고

Black bodies swingin' in the Southern breeze

남부의 바람에 검은 몸뚱이는 흔들리네

Strange fruit hangin' from the poplar trees

포플러 나무에 열린 이상한 열매


Pastoral scene of the gallant South

용맹한 남부의 평화로운 풍경

The bulgin' eyes and the twisted mouth

툭 튀어나온 눈, 뒤틀린 입가

Scent of magnolias sweet and fresh

달고 산뜻한 목련 향기 사이

Then the sudden smell of burnin' flesh

문득 살 태우는 냄새가 나네


Here is a fruit for the crows to pluck,

까마귀가 쪼고

For the rain to gather, for the wind to suck,

빗물이 고이고 바람이 흔들고

For the sun to rot, for the tree to drop

태양이 썩히고 나무가 떨어뜨리는

Here is a strange and bitter crop

이상하고 슬픈 열매가 여기 있네


- Billie Holiday, Strange Fruit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그렇게 처형당한 프레드 햄프턴이 생전에 어떻게 '블랙 메시아'로 완성되었는지 그 짧고 불타는 시간을 담은 영화다. 그러니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를 먼저 본 관객으로서 나는 그가 맞이한 비극적 결말을 이미 아는 상태로 관람하는 게 당연할진대,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두 인물이 동일 인물이라고 연결하지 못했다. 영화 후반부에야 번뜩, 아 설마 그 법정의 '어린 프레드'가 이 '체어맨 프레드'였던 건가? 그 프레드 역시 일리노이에 기반을 둔 흑표당이었는데 그게 같은 사람인 거구나! 하고 뒤늦게 깨달았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에서 다니엘 칼루야가 그려낸 프레드는 이미 너무 완성형인 거물이었던 반면,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에서는 이런 프레드의 정치적 사상적 영향력을 다뤄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탓하고 싶다. (실제로 몇몇 기사에서 아론 소킨이 프레드 햄프턴을 'cameo, caricature, footnote'로 끼워 넣고, 그를 '불쌍하고 반항적인' 흑인으로 캐릭터화해 최소한의 설명만 제공하면서도, 흑인 인권 운동의 서사를 충분히 언급하지 않았다는 비판에서 빠져나갔다고 썼다.)


스물한 살에 살해당해 생을 마감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여유롭고 단단하고 용기 있었던 블랙 메시아. 타고난 운동가, 능숙한 연설가, 지지 않는 끈기의 협상가. 출소 후 복귀 연설을 하던 때의 흡인력도 물론 놀라웠지만, 그 이전에 시카고 골목을 떠돌며 흑인 갱단 크라운, 푸에르토리코 갱, 백인 빈민까지 아우르는 연대체를 만든 그의 구상과 설득력이 더 대단하다고 느꼈다. 적과 적이 아닌 사람을 정확하게 분별할 줄 아는 판단력, 자신에게 적대적이던 생면부지의 타인도 단숨에 설득시키는 논리력, 상대의 약한 구석을 귀신같이 파고들어 신뢰를 얻는 인간적 매력까지. 그런 재능은 분명 드물고 귀한 것이니 영웅의 서사에 걸맞은 비극적 종말이 예고될 때도 그가 초인적인 성숙함으로 고통을 감내할 때도 그저 압도된 채 따라갈 수밖에 없다.


프레드와 흑표당원들이 무장한 크라운과 대면하는 장면에서의 촘촘한 긴장감, 크라운 보스가 프레드의 패기와 입담을 인정하며 총을 쥐여주고 동료로 대하기 시작할 때의 카타르시스, 푸에르토리코 출신 갱 단원의 장례에 추모하러 간 프레드가 화면 속으로 척척 걸어들어올 때 느낀 기묘한 벅참. 영화 내내 그런 감정들을 충실히 맛보던 나 역시 인종주의와 자본주의의 긴밀한 공모에 대항해 '흑인 좌파 사회주의'를 주창한 그의 사상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러니 이 영화는 프레드 햄프턴의 전기 영화인 동시에, 아주 훌륭한 프로파간다 영화인 셈이다. (그리고 난 원래 좀 빨간맛이라 이런 영화 정말정말 좋아한다...) 다니엘 칼루야의 미친 연기력이 있었기에 이 육중하고 신뢰 가는 캐릭터가 한층 더 생기 있게 완성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이 그에게 간 것은 너무 당연하고 합당하고 시의적절한 결과였다.




그런데 프레드 햄프턴과 다니엘 칼루야만큼 주목받아야 하는 인물들이 또 있다.

러키스 스탠필드의 빌 오닐과 제시 플레먼스의 로이 미첼 요원이다.


프레드 햄프턴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천부적인 운동가였지만 그보다 겨우 한 살 어렸던 빌 오닐도 프레드 못지않은 '난 놈'이었다. 흑표당 전원을 속이고 보안대위 자리까지 꿰찰 만큼 연기력이 특출났단 점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자신의 안위와 자기가 받을 돈을 최우선에 두었다는 점 때문이다. 프레드 햄프턴이 믿고 따르는 정의가 소수자 인권 상승을 통한 평등과 자유의 실현이고, 로이 미첼이 따르는 정의가 사회의 평화와 안보라면, 빌 오닐의 정의는 그야말로 '나 자신'뿐이다. 그는 이념에 잘 선동되고 쉽게 감동받고 쉽게 물들고 남을 쉽게 동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인물이다. 그 우선순위를 지키기 위해 자기 발로 뛰어든 위험에서 걸어 나오지 않는 역설적인 용기를 가졌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용기. 공포에 의한 동력이더라도 일하기를 멈추지는 않는 기묘한 끈기와 실행력.


누군가는 그가 비겁한 배신자일 뿐이고, 영화 전체가 빌 오닐의 변명을 도왔다며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가 부화뇌동하는 배신자라기보단 '나 자신의 안위'라는 정의에 가장 충실히 복무한 개인주의자에 가깝다고 평하고 싶다. 혁명의 시대에, 완전히 상관없는 타인조차 피 끓게 하는 연설 앞에, 존경하고 사랑하는 리더와 동료들 옆에 서서, 최전선에서 몸으로 뛰면서도 눈 딱 감고 '모두의 정의'를 무시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 무시는 보통의 각오만 갖고는 될 일이 아니다. 그에게도 남다른 배포와 고집이 있었다. 고뇌하지 않기로 택하는 배포와 고집, 자기 인종의 고통을 더 알아보려 하지 않는 배포와 고집 말이다.

흑표당 당사를 지키려는 필사의 총격전에서 주디와 화이트를 남겨두고 혼자 빠져나간 장면에선 나 역시 울컥 화가 났지만, 시간이 더 흐른 후 기어이 프레드에게 수면제를 탄 술잔을 건네 그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일조할 때는 그에게 화도 나지 않았다. 그는 그냥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이다. 유대감과 동류의식보다 앞서는 짐승 같은 생존의 본능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 어쩌면 빌 오닐은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 중 이 시대에 가장 잘 적응할 사람일지도 모른다.



FBI에 섭외되어 스파이 노릇을 제안받았을 때 빌 오닐이 겨우 17세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를 조금 더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시대가 시대라지만, 아무리 미국의 소수 인종 청소년이 세상 풍파를 이르게 마주하고 철이 빨리 든다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 어리고 불안한 나이 아닌가. 그래서 '그 당시 흑인들에겐 믿고 따를만한 롤모델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로이 미첼을 롤모델 삼게 됐다'라는 빌 오닐의 말에 나도 충분히 동감할 수 있었다. 아무리 로이가 빌에게 자기 인종을 배신하라고 요구했다 한들, 로이는 분명 빌에게 친절했고 그를 진심으로 존중했다. 아마 빌에게 그런 존중을 보여준 어른/백인은 난생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로이의 존중은 기만이나 유인책으로 느껴지진 않았다(혹은 내가 빌 오닐보다도 더 나이브한 어린애든가).


로이는 체제에 복무하고, 체제가 자신에게 가르치고 요구하는 바를 진리처럼 믿지만, 그럼에도 근본은 선한 자다. 때때로 어리숙해 보일 정도로 느릿하고 정중한 태도에서, 최대한 적은 사람이 다치게 하려는 게 자기 목적이라던 대사에서 그의 개인적 선의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런 정의롭고 순진한 면모를 알기 때문에 미첼의 상사들도 미첼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의심했던 것일 테다.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에서 톰 헤이든의 최종 변론에 끝내 경의를 표한 정부 편의 검사 리처드 슐츠(조셉 고든 래빗)가 떠오르는 인물이기도 하다. 만약 로이 미첼이 '그때 이렇게 착한 백인도 있었답니다~'하는 백인들의 자기변명을 교묘히 대변하는 인물이었다면 절대 정이 가지 않았을 테지만, 이건 흑인 감독 샤카 킹의 영화였으니.


물론 'kkk와 흑표당은 (폭력을 수단화한다는 점과 그 폭력의 정도에 있어) 결국 같다'는 로이의 진단은 틀렸다. 얻어맞던 약자가 이제 겨우 결집해서 무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걸 강자의 유구한 폭력과 비교해선 안 된단 건 자명한 진리다. 하지만 폭력과 살상을 최대한 줄여보고자 하는 로이의 평화주의적 의도는 진심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만약 백인이 아니었다면, FBI가 아니었다면, 혹은 이 시대에 태어난 백인이었다면 '어떤 정의'의 편에 섰을지도 너무 명백해서 슬펐다. 2020년의 로이 미첼은 Black lives matter 시위에 함께 하는 시민이거나 조지 플로이드를 살해한 경관을 자비 없이 수사하는 검사였을지도 모른다. 빌 오닐이 프레드 햄프턴이라는 리더에게 이끌린 것과 마찬가지로 로이에게도 역시 인격적으로 이끌렸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느꼈다. 그를 '아버지처럼' 따르게 된 이유가 분명 있었을 거라고.



그래서 내게 이 영화 최고의 씬을 딱 하나 골라보라면 출소한 프레드가 그를 기다리던 민중들 앞에 나서 화려하게 복귀하는 연설 씬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는 그 씬을 최고의 씬으로 고르겠지만. 나는 당당하고 완벽한 영웅적 면모를 보인 프레드나, 그의 말속 숨겨진 죽음에의 각오를 홀로 알아챈 데브라의 눈물보다 빌과 로이의 시선 교차에서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 순간 빌은 두 명의 '아버지'를 속이는 동시에 속이지 않고 있다. 빌은 프레드 햄프턴의 연설에 진심으로 감화되었으나 여전히 언제든 그를 해칠 수 있고, 로이 미첼의 감시에 분노했으나 여전히 그를 동경하며 따르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빌이 로이에게 분노한 것은 자길 감시하러 왔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감시가 필요할 만큼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다는 배신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눈에서 읽히는 것은 눈앞의 백인 요원을 철저히 속여 꺾어보겠다는 투지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버려질지도 모른다고 직감한 '아들'의 불안과 반발심이다. 러닝타임 내내 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택한 빌의 후회와 혼란만을 표현하던 러키스 스탠필드의 울멍이는 두 눈이, 엄청난 공격력을 지닌 투견의 눈으로 바뀌는 단 한순간이다.




단점도 있고 완벽하지 않은 영화였음은 분명하다. 인물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빌 오닐 내면의 사상적 고뇌가 (그런 게 정말 있었다면)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지적에도 일면 동의한다. 프레드가 로이 미첼만큼의 인격적 복잡성도 부여받지 못하고 그저 불도저 같은 영웅으로만 묘사되었다는 불만에도 공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좋은 영화였다. 우선 그 시대 그 나라의 정치사회적 지형을 전혀 모르던 관객에게도 서사의 모든 줄기가 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고, 그 서사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관객에게 혁명적 아드레날린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다.



영화의 막을 내리는 건 실존 인물 빌 오닐의 1989년 인터뷰 푸티지다. 첩자인 게 밝혀진 후 증인 보호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시카고를 벗어났다가 1984년 다시 은밀히 돌아왔다던 빌 오닐. 그는 "나도 혁명의 일원이었어요. 방구석에서 떠들기만 했던 겁쟁이들과는 다르다고요. 나도 그 현장에 있었고, 그 운동의 일부였소.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라고 억울하다는 듯 토해낸다. "나도 예수를 따르긴 따랐다"라는 지극히 유다적인 항변. 유다처럼 그에게서도 한 치의 자기의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적어도 그 인터뷰 영상 속 표정과 말투만 봐서는 그래 보였다. 하지만 빌 오닐은 그 인터뷰가 첫 방영되던 날 1990년 1월 저녁 차도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한다. 예수를 팔아넘긴 후 보상금도 마다하고 목을 매어 자살한 유다처럼.


프레드 사후 21년의 세월 동안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을까. 최초이자 최후의 변론이었던 그 인터뷰 이후 방영 일자까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결국 자살을 택했을까. 로이 미첼을 처음 만났던 날 "마틴 루서 킹이 죽었을 때 화가 났나? 말콤 X 때는?"이란 질문에 "잘 모르겠어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라고 답했던 그 고집 센 무지의 소년은, 자기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혁명을 거치며 정말 단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 없었을까. 그려놓은 듯한 영웅이고 구원자였던 프레드보다 변절자, 배신자, 밀고자였던 빌 오닐에게 묻고 싶은 게 더 많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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