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해 May 31. 2021

<리틀 조>,
보태니컬 가스라이팅 우화


1. 이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영화를 다시 써보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1-1. 먼저 영화가 애초에 사람의 시점이 아니라 꽃의 시점에서 쓰였다고 상상해본다. 자기가 만들어낸 꽃의 정신 지배에 반항하는 앨리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 신품종 식물 '리틀 조'의 시작을 담은 역사서라고.


리틀 조는 어느 날 발생했다. 유능한 육종가이자 이혼한 싱글맘인 앨리스가 그들을 창조했다. 하지만 앨리스는 '향기를 맡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기능의 최대 효율을 위해 리틀 조에게서 생식 능력을 제거했고, 그의 설계에 한 치 오류도 없었기 때문에 꽃들은 '자연스럽게' 번식할 수 없다. 그들은 인간의 정신을 숙주 삼아 리틀 조를 섬기고 아끼게 하는 것으로 개체 수를 늘려간다.

종종 인간의 저항이 있지만 향기를 맡게 해 신경계를 마비시키는 것으로 간단히 제압 가능하다. 자신을 키우며 교감하고 정들게 하는 (그렇다고 인간이 믿게 하는) 것이 리틀 조의 무기가 된다. 인간은 리틀 조를 안전하게 키운다는 하나의 목적을 가진 거대한 유기체가 되어가고, 벨라와 앨리스처럼 꽃을 해치려 하는 자들은 다른 인간의 손을 빌려 감금/살해/폭행함으로써 굴복시킨다.

결국 조물주인 앨리스, 리틀 조의 탄생에 책임을 지고 자기 실수를 보정하려던 앨리스마저 꽃의 보호자가 된다.


전체 서사에서 리틀 조가 관찰자적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 많은 장면이 달리 보인다. 예를 들면 영화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조용한 생육실의 풍경. 꽃들은 한 마디 대사도 없고 꽃을 피우는 것 외의 움직임도 없지만, 부산하게 움직이는 인간보다 훨씬 더한 위압감을 뿜어낸다. 오프닝 숏의 하늘 시점에서의 쇼트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재난 영화에서 조물주가 지상의 파국을 관조하는 듯한 카메라 시점이 펼쳐진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카메라 혹은 극 중 CCTV는 꽃을 서사와 공간의 주인으로 두고 인간을 부수적 존재로, 피동적 피사체로 처리하는 장치다.

앞에 쓰인 '' 자리에 어떤 이념이나 윤리나 종교를 넣어도 어색하지 않다. '' 지키고 '' 부정하는 자들을 죄책감 없이 처단하는 것이 최고의 정언명령이 되는 세계. 조의 친구 셀마는 앨리스에게 꽃향기를 맡고 '일원' 되기를 권유하며 소름 끼치게 상냥하게 말한다. "죽는 거랑 똑같죠. 죽는  인식하진 않잖아요?"  사고의 멈춤, 집단에의 소속감, 유별나지 않고 모나지 않은 행동, 비판 없는 복종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전체주의와 세뇌된/되어가는 인민에 대한 훌륭한 우화로도   있다.




1-2. 아니면 앨리스의 아들 조의 입장을 상상해볼 수도 있다. 영화를 보면서 가장 놓치기 쉬운 점은 바로 조가 지극히 평범한 사춘기 남자아이라는 사실이다. 벨라의 수상한 음모론을, 꽃의 화학 작용을, 그것에 가장 먼저 전염된 아들과 크리스를 차례차례 의심하는 앨리스가 주인공이기에 관객은 하나의 가능성을 아예 덮어둘 소지가 크다. 바로 '조에게는 문제가 없다'는 가능성.


앨리스는 그다지 '좋은 엄마'는 아니다. '객관적으로'라는 말을 붙이기는 싫지만, 아무튼 앨리스의 양육 방식이 세상이 정해둔 '좋은 엄마'의 개념적 합의점에 한참 못 미치는 건 분명하다. 사랑하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나 일이 너무 바빠서 충분한 시간을 같이 보내지는 못하는 엄마. 연구실에 가서야 만날 수 있고, 집에서도 제한된 시간만 대화하고 교감할 수 있는 엄마. 헌신적이지 않고 자식 때문에 자기 일을 손해 보지 않으려 하고 감정보다 이성적 규율이 앞서는 그런 엄마.

반면 이혼해 산속에 혼자 사는 아빠의 집에서 조는 마음껏 낚시를 하고 풀밭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아빠의 집은 엄마의 집보다 규제와 감시가 훨씬 덜한 공간이다(현실의 양육이 실제로 흔히 그러하듯이). 조가 엄마를 벗어나 아빠와 함께 살고 싶어 하는 건, 아니 한 번쯤 살아보고 싶어 하는 건 비난받을 일도 아니고 희한한 사례도 아니다.


하지만 앨리스만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앨리스는 훌륭한 직업인이지만 동시에 훌륭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고, 그 압박이 부당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제대로 떨쳐내지 못한다. 식물의 엄마로서 그는 이미 더할 나위 없는 프로페셔널이지만 인간의 엄마로서는 낙제점을 받을까 늘 불안해한다. 이 사회에서 좋은 엄마가 되기에 실패하는 것은 때로 애초에 엄마가 되기를 포기하는 것보다도 더 가혹하게 다뤄진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 잘 알고, 그 낙인을 피하는 과제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아들 조가 혼자 있는 시간이 무척 긴 것을 알면서도 계속 자신과 살기를 종용한다. 그리고 변해 버린 아들의 모습을 리틀 조의 세뇌에 당했기 때문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래야만 자신을 벗어나려는, 성장해가는, 그로써 자신을 실패한 엄마로 만들려는 아들을 '치료가 필요한 감염자'로 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건 조 입장에서는 엄마가 자신을 겨누는 끔찍한 가스라이팅일 수도 있다.


말했다시피 앨리스는 차가운 머리+차가운 심장 유형의 엄마고 조에게 좀체 애정 어린 손짓이나 칭찬을 건네진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조가 개미 또는 리틀 조를 키우게 시킨다. 아들이 뭔가를 돌봄으로써 자신과 같은 양육자의 고충을 이해하게 되길 바라는 무의식 중의 욕구가 발현된 것은 아닐까. 즉 앨리스는 자식을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할 여유가 없어, 대신 자식이 자길 이해해 주길 바라는 부모다.

하지만 개미 키우기는 조가 리틀 조를 키우는 일에 푹 빠지게 되고 셀마와 만나기 시작하면서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개미들이 모두 죽어있는 걸 발견한 앨리스는 놀라서 묻는다. "네 개미 어떻게 된 거니?" 조는 무정하고 산뜻한 투로 답한다. "내가 다 돌볼 순 없잖아." 앨리스가 일과 가정을 '다 돌볼 순 없다'는 사실을 아들의 입으로 확인받는 순간이다. 앨리스가 직시하길 피해온 진실.


앨리스가 주기적으로 찾는 상담사(린제이 던컨)의 정신분석 결과는 이런 추정을 뒷받침한다.

"환자는 아들과의 유대 관계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잠재의식적 바람을 억누르고 있음."

그게 진실이라면, 앨리스는 엄마-직장인으로서 받는 가혹하고 고요한 요구들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꽃의 수상한 화학 작용을 탓하며 아들을 놓아버린 사람이다. 만약 그게 확대해석이고 바이러스가 실존한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래도 어쨌든 꽃이 부추기고 끄집어낸 앨리스 내면의 '진정한 행복'은 '돌보고 사랑해야 할 아들에게서 벗어나는 것'이란 뜻이므로 같은 해석으로 귀결된다. 그러니까 결국 앨리스는 자기 자신만을 돌볼 수 있고 그러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해석.

그런데 사실 누가 그렇지 않단 말인가. 워킹맘 앨리스의 이런 선택을 비겁함이나 이기심으로 간단히 뭉개버려선 안 된다. 어쩌면 앨리스는 리틀 조의 숙주가 되길 거부하는 소수자가 아니라 리틀 조를 통해 모성이라는 마지막 굴레에서 벗어난 신인류의 여성일지도.




1-3. 리틀 조 시점의 / 조 시점의 상상들은 수수께끼 같았던 결말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의 발로다. 결말에서 앨리스는 리틀 조를 지키는 '일원'이 되면서 친밀한 관계의 사람들보다 자신과 자신의 일을 더 사랑하는 진짜 자아를 찾은 것일까? 아니면 조를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 또는 조가 떠나게 하기 위해 자신도 꽃의 연기에 당한 척 연기하는 건가? 정말로 꽃향기에 오래 노출되어 감정이 마비된 건가? 리틀 조가 뿜어내는 바이러스가 정말로 있었을까? 어쩌면 모든 게 앨리스의 환각적 상상은 아니었을까?

모든 서사가 앨리스의 망상이었다는 데까지 멀리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너 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지"라고 앨리스가 아들에게 건네는 말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부정하는 건 잘못이죠"라고 상담사가 앨리스에게 건네는 말이 가리키는 바는 분명하니까. 앨리스의 '진짜 모습'의 일부는 분명 아들을 사랑하지만 다른 일부는 자기 발목을 잡는 양육의 의무가 없어지기를 바랐다. 일로 성공하고 싶은 마음과, 비정한 엄마가 될 수 없다는 도의적 가책이 앨리스의 내면에 공존했다. 그러니까 꽃향기에 실제로 세뇌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그게 앨리스에게 어떤 방향으로 영향을 줬는지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런 것이 되어야 한다: 앨리스가 아들을 사랑하는 진짜 자신의 일부를 애써 부정하고 합법적으로 포기하기 위해 향기를 일부러 들이마신/척한 건 아닐까? 앨리스 쪽에서 리틀 조를 '이용'한 건 아닐까? 뭐가 그(라는 여성)를 그렇게 자포자기하도록 만들었을까?






2. 전체주의적 믿음이 전염병처럼 퍼지는 과정, 일하는 엄마에게 주어지는 이중 요구와의 투쟁. 영화를 보며 둘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든 연결고리가 되는 것은 끈질긴 가스라이팅이다.


"벨라의 공상에 당신이 전염됐던 게 더 큰일이죠."

"당신에겐 좀 버거웠던 거 같아요."

"최근에 감정 기복이 좀 심했잖아요. ... 날 한 번만 믿어봐요."


'감염'된 동료들이 벨라와 앨리스에게 건네는 말들은 가스라이팅의 교과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파시즘적 체제 하에 동조하지 않는 자를 편집증적 약자로 몰아가거나 반대로 편집증적 약자를 변절자 취급하는 유화된 세뇌의 방식과도 같다. 또 마지막까지 감염과 가스라이팅에 저항한 단 두 사람인 벨라, 앨리스가 유일하게 '진짜 자식이 있었던' 여자들이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지켜야 할 게 있었으므로 옥시토닌이 제공하는 편리한 행복에 속지 않으려 한 그 힘까지 '모성'으로 퉁쳐서 불러도 되는 걸까.


감염시키려는 크리스와 감염된 척 연기하는 벨라의 심리전이 내겐 가장 완결성 높은 스릴러였다. 그 부분을 가장 숨죽이고 봤다.

벨라는 진정한 교감을 나눈 유일한 존재인 반려견 벨로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하루 만에 안락사를 시킨다. '내가 알던 상대가 아니라면 그건 진정한 그가 아니다'라는 잔혹하고 고집 있는 사랑의 방식은 앨리스의 것과 무척 닮아있고 또 무척 다르다. 앨리스 역시 "내 아들은 저렇지 않아요"라고 몇 차례고 호소하지만, 결론적으로 앨리스의 일에 대한 욕망은 친밀함에 대한 욕망을 압도했다. 앨리스는 자신에게 혼란을 야기하는 존재인 아들을 치워버리길 택했지만, 그건 벨라의 '제거'와는 조금 결이 다르다.

벨라는 이미 한 번 번아웃을 겪었던 앨리스 윗세대의 여성이고 앨리스보다 더 불안한 자아를 갖고 있다(고 평가된다). 앨리스가 아들-일 사이에서 방황하는 교착 상태에 놓인 것과 달리 벨라는 이미 한 번 자살을 시도했었고, 그 공허를 벨로라는 조각으로 단단히 메꾸고 있는 사람이다. 조는 앨리스의 외부에 있지만 벨로는 이미 벨라의 내부를 이루는 구성물이다. 벨로를 잃은 벨라를 벨라라고 할 수는 없다. 벨로를 안락사시키면서 벨라는 이미 자기 일부를 영원히 잃었음을 알았고, 아마 자기 자신에게 닥쳐올 비극적 죽음도 어느 정도 예견했으리라. 그래서 벨로를 안락사시킨 벨라의 선택은 어쩌면 조를 아빠에게 보낸 앨리스의 선택보다 훨씬 더 의지적이고 비장한 주체성의 표현으로 다가왔다.





3. 다른 그 무엇보다 색감과 빛을 잘 쓴 영화였다. '잘' 썼다기보단 간명하게, 구별이 잘 되게 쓴 것에 불과하긴 하지만. 하지만 그걸 빼면 연출상의 별다른 특징은 남지 않는 영화기도 했다.

청회색과 민트색의 식물 연구소, 연구소 카페테리아의 이상하리만치 알록달록한 파스텔톤 케이크들, 따스한 노란 벽과 청록색·주황색 오너먼트가 많은 앨리스네 집, 따뜻한 톤의 초록색과 원색의 꽃무늬가 도배된 상담사의 방 등등. 등장인물들 역시 시종일관 강렬한 원색의 옷을 입는다. 계속해서 빨강/분홍/자주와 파랑/초록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아들 조가 교복 밑에 다소 어울리지 않고 튀는 새빨간 운동화를 신은 것으로 오프닝을 열고, 동료 크리스는 계속 흰 셔츠나 하늘색 셔츠를 입는 것처럼.

하지만 색감에 따른 어떤 상징이 있을까 유심히 관찰하며 봐도, 딱히 '적색·황색=인간다움 혹은 감염되지 않음 / 청색=인간답지 않음, 감염된 상태, 무정함'이라는 도식으로 수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주인공 앨리스가 계속 번갈아가며 분홍색 옷, 짙푸른 옷, 그다음 노란색 옷, 다시 초록색 옷, 나중엔 급기야 보색으로 이뤄진 줄무늬 옷을 입고 나왔다. 앨리스의 패션이 앨리스의 심리 혹은 감염/비감염 상태와 연관 있는 상징색을 담으려는 것인지, 앨리스가 색감이 상징하는 정서의 생태계에서 일종의 '조화' 또는 혼란, 교란을 뜻하는 인물인지가 더 궁금했지만... 색감의 대비는 그냥 대비일 뿐 딱히 은유는 없었던 것으로. 하긴 겨우 그런 상징물이었다면 너무 눈에 보이는 심심한 영화가 되었을 것 같다.


여러 상징세계의 부재가 영화를 한층 흥미롭게, 그러나 한층 더 빈약하게 만든다. 말하자면 전반적으로 맥거핀만 많고 변죽만 울리다 끝나는 영화. 근데 그 변죽을 너무 잘 울리는 바람에 끝까지 집중력을 떨어뜨릴 수는 없는 영화.

누군가는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떠오른다고 말했고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소재나 서사의 긴장감과 매혹도에 비해 그 서사를 끌고 가는 연출적 힘의 부족함이 좀 보여서 아쉽기도 했다. 동양 민속풍의 ost가 기기묘묘한 분위기에 긴장감을 더해서 좋다는 평도 많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는 불호였다... 부조리극 잘 만들기 쉽지 않구나... 어쨌든 송곳니-랍스터-킬링 디어를 지나며 점점 더 원숙해진 란티모스처럼 오스트리아의 젊은 여감독 예시카 하우스너의 다음 작품은 더 깊어지고 흥미진진해지면 좋겠다. 다음번에도 sf였으면...


+ 이 영화로 2019년 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에밀리 비첨의 눈동자 연기가 인상 깊었다. 그리고 벤 휘쇼는 정말이지 이런 수상한 씹새끼 연기가 천직이구나...



매거진의 이전글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무지에 충실했던 소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