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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Jun 08. 2021

<몬스터>, 죄인은 내리지 않았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너희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요한복음 8:7


아마도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일 것이다. 빈곤한 가정의 첫째 딸로 태어나 8살부터 아버지의 질 나쁜 친구에게 강간당하고, 학대당하다 고아가 되고, 동생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13살 때부터 몸을 팔다가 그 동생들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나고, 그 후 내내 길거리의 창녀로 살다가 자신을 제대로 봐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인 셸비를 만나 함께 도피하며 성 구매자들을 연쇄 살인한 리(에일린 워노스)의 인생을 지켜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구절이기도. 못 배웠지만 지능적이고 영악하고 담대했던 사람인 리가 성경을 알았다면 분명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구절을 활용했을 테다.


<원더우먼> 감독 패티 젠킨스와 샤를리즈 테론의 합작인  영화가 실존 인물 에일린 워노스의 행적을 부분부분 미화하긴 했어도, 제작자와 주인공의 문제의식만큼은 모두 같은 지점을 향했던 듯하다. 아니 사실 '같은 지점을 향했다' 정도가 아니라,  영화 전체가 에일린이  말하지 못했거나 그녀 삶에 부재했던(허용되지 않았던) 선의와 신념과 명분을 뒤늦게나마 되찾아주기 위한 패티 젠킨스의 구상이나 다름없다고 말해야겠지.


실존 인물 에일린은 어찌 보면 '타고난 악인', 선천적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언론이 떠든 대로 즐겁게 살인하는 괴물까지는 아니었더라도 도덕을 관할하는 뇌의 어느 부분이 고장 나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구치소에서 태연하고 과시적인 태도로 살인 과정과 동기를 모험담처럼 줄줄 읊었다거나, 법정에서도 욕설을 퍼부으며 기죽지 않는 오만함을 보였다던 비화를 알게 되면 영화가 끝난 후 남았던 먹먹한 연민조차 휘발되는 기분이다. 리를 진심으로 도우려던 나이 든 피해자나 결국 죽이지 않고 무료로 봉사해 준 말더듬이 성 구매자처럼 선량하고 운 없는 사람들에겐 내심 미안해할 줄 알던 모습이 아니라, 죄 없는 식당 매니저를 상스럽게 조롱하고 폭행하던 모습이 실제의 에일린에 더 가깝지 않았을까 의심하게 될 정도다.


하지만 패티 젠킨스는 '에일린 워노스'의 전기 영화를 만들기보단 '길 위의 여자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에일린의 서사를 빌려 쓰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던 듯하다. 즉 실존 인물 에일린 워노스보다도, 여전히 미국 경제의 큰 부분을 이루는 창녀들, 가족도 없는 무주택자들, 알코올 중독 노숙자들, 생계를 위해 존엄을 포기하고 허세와 포악함만을 무기 삼아 살아가는 극빈층을 이야기하기 위해 그들의 대표 격인 '에일린'을 데려온 것이다.

nature or nurture의 오래된 토론을 굳이 끌어올 필요도 없을 만큼 명백하게 환경이 만들고 망치고 부숴버린 리의 인격과 삶. 실존 인물 에일린이 어렴풋이 떠올렸지만 배움이 짧아 차마 언어로 정립하지 못했던 억울함들, 정식으로 진단받았으나 법정에서의 참작 요건이 되기에는 부족했던 수준의 성격 장애, 연인도 겁먹고 달아날 만큼 지독했던 성정 등을 패티 젠킨스가 매끄러운 서사로 이어 붙여준다. 그리고 이에 생명력을 더하는 건 물론 샤를리즈 테론의 명연기다. 두 여자의 이어 붙이기, 메꾸기, 들어내기를 통해 '에일린'은 길 위로 내몰린 하류층 여성의 보통명사로 재창조된다. 그리고 물론 그녀에겐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강간 피해 아동에서 '자발적' 창녀로, 흔한 잡범 노숙자에서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마로 끝 간 데 없이 내몰린 리를 두고 누가 '나라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따위를 뱉을 수 있을까. 보통의 사람들은 한 번도 겪기 힘들 추락을 리는 매일매일 겪고 있었다. 최초의 추락은 물론이고 그 후의 '선택' 역시 그녀 탓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선명하게 아는 사람은 그녀 자신뿐. 매춘도 폭음도 살인도 모두 그녀의 선택이었다고 쉽게 진단하곤 돌아서는 사람들의 죄의 무게를, 리만은 끈질기게 곱씹고 있었을 것이다.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 고통이 그 종류나 깊이와 무관하게 가장 고통스럽다.




얼핏 <델마와 루이스>를 떠올리게도 하는 고발적/범죄/여성 영화로서도 훌륭했지만, 리와 셸비의 레즈비언 관계 역시 내가 지금껏 본 퀴어 서사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좋았다. '사랑과 자신감'을 애타게 갈구했을 뿐인 리가 살인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그 전능감을 맛보다가, 결국 그 무엇도 자신에게 (합법적인 경로로) 허락될 수는 없었다는 사실에 굴복하는 순간까지 독백 한 줄 한 줄이 쓰라리다.


제일 극적으로 미화된 줄 알았던 결말의 통화가 실은 가장 사실에 가까웠단 것도 놀라웠다. 실존했던 에일린 워노스는 4년 동안 함께 도피했던 여자친구 타이리아 무어(극 중 셸비)만큼은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 같아 더 짠했다. 극 중에서 리와 셸비가 그랬듯 타이리아 역시 에일린이 어디서 종종 큰돈을 가져오는지 다 알면서도 무책임하게 방기하다가 에일린이 구속된 후에는 그녀를 배신하고 아무것도 몰랐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에일린 역시 타이리아에게 '너는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증언해서 지켜줄게'라고 약속하곤, 그 약속을 지키고 홀로 처형당했다. '보통의' 남들이 들일 수 있는 마음과 정성 이상의 것을 다해 투신한 사랑.


번외로 둘의 이별 씬은 내가 지금껏  영화  가장 슬픈 연인들의 이별이었다. 5 30 경부터 셸비가 버스에 타고 리와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리는 손을 흔드는 셸비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지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인  울음을 참는다. 마지막으로 보는 애인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눈물 흘리는  이별의 흔한 문법이었다면, 차마 그러지도 못하고 바닥을 향해 수그러드는 리의 어깨와 일그러지는 표정은 낯설어서  저리다. 리라는 사람이 세상과 사람에 대해 견지하는 태도와 그가 받아온 상처가  슬픈 어깨로 압축된 듯한 느낌.



아주 오래전에 이상희와 류아벨 주연의 <연애담>을 보면서, 또 <캐롤>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을 보면서 레즈비언들에게는 결국 (사랑을 나눌) 공간의 부재가 사랑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된다는 얘기를 쓴 적이 있다. 특히 <연애담>은 명백하게 '방 한 칸이 없어 더 지속되지 못한 연애'를 다룬 영화였고. 셸비를 잠시 돌봐주었던 아주머니가 "나중에는 집 한 칸 있는 게 소원이 될 수도 있어"라고 말한 것만큼은 뛰어난 통찰이었다. 평생 그 집 한 칸이 없어 길 위를 떠돌며 성 구매자 남성들의 차 시트에서만 몸을 뉠 수 있던 리도, 곱게 자라 "사람 사는 아파트 같은" 집 한 칸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셸비도 그 집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해 절절맸으니까. 둘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도 그들에게 짧은 안식이 되었던 시골의 낡은 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 한 번 등장한다.


직장도 집도 구하지 못한 리에게 별도의 승인 절차 없이 허용된 유일한 공간은 남성 소유의 차였는데, 그 차의 임시 동승자 - 창녀 -였던 그녀가 차의 소유주 -성 구매자 -들을 처단하고 차를 뺏음으로써 기동력과 자신감을 갖추게 된다는 부분도 암시적이다. 언제나 '차가 고장 났는데 어디까지만 태워다 달라'라는 거짓말로 남자들에게 접근하고, 셸비와 처음 만났을 때도 트럭이 고장 난 운전사인 것처럼 둘러댔던 리는 연이은 강도살해로 점점 나은 차를 갖게 된다. 드라이브나 이사에도 그 차들을 이용하면서 셸비가 바라는 더 나은 삶을 줄 수 있게 되니, 차 - 움직이는 재산 -은 리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조건이자 전복적 성성의 상징이었을지도.


하지만 결국 그녀의 차는 사고로 반파되고, 알고 보니 리는 차가 아니라 놀이동산의 '몬스터'로 불리는 관람차에 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중에 멈출 수도 내릴 수도 없고, 겉에서 보기엔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안에선 멀미가 날 뿐인 '몬스터'. 참 뻔하게도 악행을 거듭할수록 자신을 제어할 수 없고 도망을 그만둘 수도 없는 처지를 리만 너무 늦게 깨닫는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멋있는 자동차의 질주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관람차에서의 풍경보다, 멀미가 나면 땅바닥에 바싹 붙어있기만 해도 좋다고 말해주고 손을 잡아 내리도록 도와줄 사람이었을 텐데.


실존 인물 에일린은 처형 선고에 항소하지 않을 의지를 밝히며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거고, 지금 날 살려둔다 해도 나는 살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 내면에는 증오만 끓어오른다. 나는 사는 동안 너무 많이 평가받았고,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데에 질려있다. … 나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나는 정상이다. 나는 진심으로 인간의 삶을 증오하고, 언제고 다시 살인을 저지를 인간이다."





우연찮게 들었는데도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어. 아마 13살이었을 거야, 애를 낳아 입양시켰을 때가 그 무렵이었으니까. 다니던 중학교에 유명 밴드의 드럼 연주자가 와서 조회시간에 성공에 관한 얘기를 해줬어. (…) 꼭 필요한 얘기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배울 자세가 되어 있었지.

- (에일린) 모르시겠지만 전 평생 사람을 다루는 일을 했어요. 사람도 잘 다루고 서류 정리도 잘해요.

그의 조언을 난 열심히 챙겨들었고 그래서 지금껏 기억하고 있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사랑과 자신감이라고... 그것들만 있으면 못 할 게 없다고.

- (면접관) 우선 경력 무, 학력 무, 학위 무, 게다가 이력서도 없이 법률가가 되시겠다? 비서도 대학은 졸업해야죠. 대부분 이쪽 전공이고요. 솔직히 말해 제 입장에서는 조금 기분 나쁜데요? (…) 내가 충고 하나 해줘요? 즐거웠던 바닷가 파티가 끝났다고 해서 남이 평생을 바쳐 일구어낸 걸 거저먹으려고 하면 안 되죠.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사랑과 자신감? 말이야 좋지.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아. 그래도 열세 살에는 진실을 아는 것보다 거짓말이 먹히는 법.


- 그날 마지막 손님을 죽였어. 그놈한테 강간당하고 맞아죽을 뻔했어. 근데도 널 잃고 싶지 않았어.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어. 내가 널 바람 맞혔다고 오해하고 살아가겠다 싶었어. 그 약속을 지키려고 내가 얼마나 애썼는지도 모르고... 죽고 싶지 않았어, 왜냐면 네가 어쩌면 날 사랑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죽여야 했어. 쏴 죽였다고. 총으로 쏴 죽였어.


- (셸비) 우리 이사해?

- (에일린) 응. 내 애인을 이런 데 모실 순 없지.

- (셸비) 사람 사는 아파트 같은 곳으로?

- (에일린) 그래, 좋아?

- (셸비) 응. 행복해.

- (에일린) 그래. 나도 알아. 자기랑 약속했잖아.

진심이었어. 나한테 상처를 준 건 항상 그렇게 선량한 존재들이었어. 상상도 못할 끔찍한 것들은 오히려 대하기가 쉬워. 겪어보기 전까진 결코 알 수 없어.


- (에일린) 네가 생각하는 거랑 달라. 넌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몰라. 하지만 난 널 알아. 난 안 해 본 일이 없어. 네가 모르길 바랄 뿐이지만... 사람들이 선량하고 친절하다고 믿는 게... 그게 이치에 맞겠지. 그치? 난 너의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

- (셸비) 이런 얘긴 듣고 싶지 않아.

- (에일린) 나도 알아. 그래도 들어야 해.

- (셸비) 자기랑 나랑 아무리 달라도 살인을 정당화할 순 없어.

- (에일린) 누가 그래? 난 선한 사람이야. 하늘에 부끄럽지 않아. 네가 곱게 자란 건 알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고. ‘살인하지 말라’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아. 난 매일 그걸 겪고 살아가거든. 하나님 뜻이라는 게 대체 뭔데? 사람들은 매일 같이 서로를 죽여대지. 뭘 위해? 정치! 종교! 그리곤 영웅 대접받아! 아니, 내가 해선 안 될 일들은 많지만 살인은 아냐. 여자 강간하고 돌아다니는 새끼들 족치는 것도 말야. (…) 자긴 날 알잖아. 내가 달리 그랬겠어? 난 나쁘지 않아. 좋은 사람이야, 그렇지? 그러니 그 일은 잊도록 해. 그게 인생이야. 어차피 사람들은 매일매일 나가떨어져. 하지만 우린 아냐, 알았어?



- (아주머니) 결국... 레즈비언으로 살기로 선택했구나.

- (셸비) 아뇨, 그건 선택이 아니라 원래의 내 모습이에요. 이젠 그냥 받아들여요.

- (아주머니) 너야 그 여자에게 푹 빠져있겠지만... 널 책임지고 말고의 문제가 아냐. 그 여자가 그리 망가진 건 다 이유가 있어. 태어나는 건 선택의 여지가 없단 얘긴데.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나쁜 선택을 하고 그 대가를 치른단다. 거리의 노숙자를 보렴. 너도 레즈비언으로 살기를 택했잖아. 그녀처럼 인생을 쉽게 살다 보면...

- (셸비) 아뇨, 그녀는 너무 힘들게 살아왔어요.

- (아주머니) 세상에, 얘야. 아무리 힘들어도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 가정환경 나쁘면 다 창녀, 마약중독자 되게? (…) 세상을 거스르려고만 하지 마. 세상일이 다 사랑으로 해결되지는 않아. 집 한 칸 있는 게 소원이 될 수도 있어. 그러기 위해 남자와 살아야 해도. 그건 네 선택이야.

- (셸비) 네, 제 선택은 이거예요.


빅터 본, 그의 이름이야. 아빠 친구. 대단한 친구지. 나중에 그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하느님이 그의 악행을 보고 벌하신 것 같아서. 그게 그렇게 좋았어. 나쁜 짓을 하면 언젠가 벌을 받는다는 걸 알았지. 죗값을 받게 돼 있어.



- (톰 아저씨) 넌 지금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어. 그것도 네가 어쩔 수 없는 일로 말야. 저들은 절대 알 리가 없지. 지금도, 과거에도, 앞으로도 절대 그런 상황에 처할 리도 없고.

- (에일린) 맞아요, 그놈의 상황! … 난 선택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어요.

- (톰 아저씨) 그랬겠지. 하지만 살아야 해.


- (에일린) 내가 터미널까지 같이 가서 버스 표도 끊어준댔지? (…) 언제든지... 진작에... 너에게 말했어야 하는데. 우리 계획 말야. 망친 것 같다고 말이야. 난 알고 있었어, 내가 다 망쳐버렸다는 거. 너라면... 너라면... 날 도와줄 수 있을 거야. 너라면 날 용서할 수 있으니까. 나도 날 용서할 수 있을지, 내가 저지른 모든 걸... 모르겠어. 내게 돌아와, 언제든지.

- (셸비) 그럴게.

- (에일린) 다 지나간 일이야, 전부 잊어버려... 네가 돌아오면 우리 멀리멀리 떠나도록 하자.

이제 가야지.

받아둬.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같이 쓰자.



시련 뒤엔 기쁨이 있고, 신념은 산도 움직인다. 사랑은 모든 길로 통하며,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이 있는 법.

말이야 참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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