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시리즈>
몇 년 동안 활동하는 독서 모임에서 <아무튼 시리즈>를 모임책으로 선정했다. 시리즈 중 관심 있는 책을 읽고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데 누가 어떤 책을 골랐는지, 왜 그 책을 골랐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꽤나 재미있을 것 같은 선정이었다.
찾아보니 이 시리즈는 2017년 <아무튼, 피트니스>를 시작으로 최근 <아무튼, 테니스>까지 70권이 넘는 책이 출판되었다.
집 근처 도서관에 가 보니 아무튼 시리즈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사람들에게 꽤나 인기 있는 시리즈인가 보다. 현재까지 출판된 책 목록을 보니 생각보다 다양한 제목들이 있었다. <아무튼, 서재>, <아무튼, 친구>, <아무튼, 미드>와 같이 뭔가 내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제목, 장강명의 <아무튼, 현수동>, 김초엽의 <아무튼, SF게임>, 천선란의 <아무튼, 디지몬> 등 이름만 들면 알만한 작가들도 이 시리즈에 참여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제목만으로는 어떤 내용의 책일지 전혀 예상되지 않는 책들도 있었다. <아무튼, 양말>, <아무튼, 당근마켓>, <아무튼, 잠> 같은 제목이 그랬다.
나는 나와 가장 친숙한 주제의 책부터 골랐다. <아무튼, 술>, <아무튼, 술집>, <아무튼, 클래식>. 내가 잘 아는 얘기라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재미있게 읽었다. 완전히 나를 내려놓고 마시지 못하는 나는 술과 관련된 걸쭉하면서도 황당한, 때로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에피소드들을 풀어놓는 작가들이 부럽기도 했다. 세 권을 다 읽고 이제 다른 책을 골라야 했는데, 이 책 저 책 기웃거리기만 하고 선뜻 고르질 못했다. 그냥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골라서 읽다가 영 아니면 그냥 덮으면 그만이었는데, 왜 그렇게 망설였을까. 그리고 나는 왜 내가 전혀 모르는 새로운 책이 아닌 이미 내가 잘 알고 익숙한 책을 먼저 골랐을까.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나는 무엇에 빠져 살고 있는가. 오랜 시간 나를 사로잡고, 내 삶에 기쁨과 슬픔을 함께 주는 그런 것, 남들이 뭐라 해도 꿋꿋하게 마음속에 품고 있는 덕질이라고 할만한 것이 나에게 있나? "별 거 아니긴 한데..."라고 말하며 그냥 너무 좋아서 오래도록 좋아했던 것들을 살그머니 꺼내어 보여주는, 수줍지만 좋아하는 감정을 숨길 수 없어 자꾸만 말이 많아지는 그런 사람들의 작은 기쁨들을 난 보고 싶지 않았다. 질투했다. 그래서 그 어떤 책도 고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기쁨에 순수하게 맞장구쳐 줄 자신이 없어서.
비겁하고 속 좁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기가 갖고 있는 못한 것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열등감을 느끼는 법이다. 막상 읽어보면 별 거 없을 수도 있다. 남사스럽지 않게 보이려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을 수도 있고, 내보이기 민망하여 수줍게 맛보기만 조금 드러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보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내밀한 비밀 하나를 내보여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게 뭔가. 난 그런 사람들과 순수하게 마음을 열고 마주 앉기를 스스로 거부했다.
책 모임에서 얻을 수 있는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평소에 읽지 않을 책을 함께 골라 읽는 것. 같은 책을 읽은 사람들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것. 각자 아무튼 시리즈를 읽고 만난 날, 우리는 자신이 어떤 책을 골랐는지부터 이야기했다. 나와는 정반대의 감상을 내놓은 멤버도 있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책은 오히려 읽기 지겨웠고, 전혀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으니 새롭고 재미있었다고. 내 안에 들어 있는 또 다른 모습,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발견했다. 어쩌면 내 마음속 가장 무거운 질문을 건드렸는지도 모르겠다.
삶이 바뀌길 원한다면 이제까지 해 보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해봐야 한다고 한다. 매일 반복되고 익숙한 것들에 둘러싸여 나를 사로잡을 만한 무엇인가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40년 넘게 못 찾았으면 여기서는 못 찾는 거다. 그렇다면 내가 몰랐던 세계에 들어가 봐야 한다. 발이라도 담가 봐야 한다. 70 여 개의 덕후들이 나에게 맛 보여주려고 기다리고 있지 않나. 다시 도서관으로 가서 아무튼 시리즈 코너 앞에 서 보자. 아무튼, 읽어보자. 내가 한 번도 관심두지 않았던, 그래서 전혀 모르는, 이전에는 전혀 알고 싶지도 않았던 그런 책을 골라서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