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럽에 환상이 없는데 왜 그런 고까운 시선으로 봐?
언젠가 친구 중 하나인 A가 내게 진지하게 물은 적이 있다. “넌 왜 매번 유럽으로만 여행 가?” 질문을 받고 나서 생각해보니 딱히 그 이유를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시간과 돈이 허락되면 그저 ‘자연스레’ 유럽을 찾았을 뿐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특히나 유럽에 환상이 있어서 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친구의 물음에는 ‘너도 유럽 환상 종자니?’라는 이야기가 내포된 것 같이 느껴졌다.
번아웃에 시달리다가 엄마에게 등 떠밀려 첫 여행을 떠나기 전만 하더라도 나는 여행에 아주 무관심했다. 기본적으로 내 부모님은 여행을 좋아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여행이라고 해봐야 다른 지역 친척 집 방문 혹은 당일치기 교외 여행이나 다녀올까. 조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도 여행 경험이 적은 이유 중의 하나였다. 어쨌든 부모님 입장에서는 연세 많은 어른이 두 분(증조할머니 살아계실 때는 세 분)이나 집에 계시니 아이들을 데리고 멀리 여행을 가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을 거다. 그래서인지 나와 내 동생 모두 환경변화에 꽤 예민한 편이었다. 나는 어딘가 장소를 이동하게 되면 그곳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걱정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었고, 동생은 도착해서도 한참 동안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곤 했었다.
남들이 대학교 방학을 맞아 어학연수니 배낭여행인지를 떠날 때는 굳이 나갈 필요성을 못 느꼈다. 아버지의 강력한 요구로 한때 미국 유학 준비랍시고 영어 공부를 깔짝거린 적이 있긴 하지만 유학을 하러 가고 싶다는 생각은 먼지 한 톨만큼도 한 적이 없었다. 가족들이랑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사는 것도 싫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먼 친척 집에 얹혀사는 것도 싫었다. 솔직히 타국 생활이 무섭다는 감정이 더 많이 들었다. 그런 데다가 유학을 하러 가기 위해 쳐야 하는 시험공부가 너무너무 싫었다. 그래서 유학은 그냥 아빠의 바람으로 고이 접어 날렸다. 좋지도 않은 국내 대학을 졸업했고, 취업했다가 퇴사를 했다가 어찌어찌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첫 번째 유럽 여행 이후 내가 바뀌었다. 여행을 좋아하게 됐고, 적어도 1년에 한 번은 떠나고 싶어졌다. 어쩌면 처음 떠난 곳이 한국과 비교했을 때 크게 다르지 않은 유럽 도시들이라서 내 태도가 변한 건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유럽 도시들은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으니까. (만약 첫 여행이 미국이나 호주 같은 대자연을 끼고 있는 여행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첫 여행이 내게 가져다준 자신감은 생각보다 굉장했다. 패키지여행이었기 때문에 가이드를 보며 자신감을 얻었다. 나도 영어를 원어민처럼 유창하에게는 못하지만, 가이드가 하는 영어보다 내 영어가 나았다. 그리고 여행을 다니면서 보니 여행용 영어는 아주 어려운 어휘나 표현을 사용하지 않아도 됐다. 최저가 찾는 건 방송국에 근무하기 전부터 내 주특기였다. 그러니 자유여행을 계획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란 판단이 들었고, 첫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음 여행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여행사 안 끼고 혼자서 떠나는 여행으로.
그렇게 두 번째 떠난 여행에서 나는 이전 패키지여행에서 아쉬웠던 지역을 중심으로 여행을 떠났다. 마음의 고향 같은 오스트리아, 체코 두 국가를 중심으로, 그리고 같이 여행을 가게 된 친구가 그토록 원했던 이탈리아 북부지방을 끼웠다. 중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와 크로아티아 자그레브도 끼워 5개 국가를 23일간 여행했다. 비행기를 환승한 국가인 핀란드까지 끼우면 21박 23일 동안 6개국을 돌아다닌 셈이다. 분명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이때 여행을 통해 내 여행 스타일을 확실히 알았고, 유럽이 편하게 느껴진다는 것도 알았다. 바로 다음 해는 일이 바쁘고 일정이 나지 않아 유럽엘 가지 못했지만, 해가 바뀌자마자 비행기 티켓을 끊어 BBC Proms를 보기 위해 19박 21일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여행을 다녀왔다. (코로나 때문에 올해도 못 가게 생겼고... 2년에 한 번씩 가는 거냐...)
내가 여행지로 유럽 국가를 선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차를 빌려서 직접 운전하지 않아도 철도가 잘 놓여 있어서 기차 타고 도시 간 이동이 편하다는 게 큰 매리트다. 개인적으로 필요할 땐 차를 운전하지만 운전하는 것 자체를 즐기진 않기 때문에 편하다. 미국이나 호주 같은 대륙으로 가게 되면 차를 운전해야 제대로 된 자유여행을 즐길 수 있지 않겠나. 특히 로드트립이라면……. 둘째로 박물관, 미술관, 유적, 공연들이 많은 것도 유럽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기본적으로 유럽 어딜 가도 예술이 흘러넘친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없어도 건축물과 도시 전체가 예술품이어서 예술 분야에 대한 갈증이 충족된다. 퀄리티 좋은 공연이 넘쳐나는데 값도 싸다. 영국 같은 경우엔 국가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이면 대부분 무료입장이다. 체코의 체스키크룸로프나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 같은 경우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이다. 가만히 앉아 노을 지는 도시만 봐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지친 마음이 힐링 되는 것이 느껴진다. 세 번째로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이유가 있다. ‘암묵적 세계 공용어인 영어 안 되는 데가 어디 있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영어 안 통하는 데 많다. 가까운 국가인 중국과 일본이 그렇고, 동남아 국가 중에서도 영어 안 통하는 국가들 있다. 유럽 국가 중에서도 시골 골짜기로 들어가면 영어 안 통한다. 러시아에서도 영어 안 통해 애먹은 친구들 본 적 있다. 그래도 같은 라틴어 뿌리에서 나온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들이라면 영어가 대충은 통한다. 내 영어가 완벽하지 않듯, 그들의 영어도 완벽하지 않지만, 핵심 단어 몇 단어로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내가 유럽 여행을 선호하는 건 유럽이 ‘볼 거 보고 쉴 수 있는 편한 곳’이라서다. 서양 고전 음악과 예술을 대중들에게 소개하는 일을 하는 특성상 꼭 필요한 인풋 작업을 휴식과 동시에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내 마음이 편하다. 전생이 있다면 전생에 그쪽 대륙에서 살지 않았을까 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떠올리면 뭉클하고 그리운 마음이 들 정도니…….
나라고 왜 유럽 말고도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없을까. 사촌 형제들이 어학연수 다녀온 캐나다도 다 보고프고, 숱한 미드와 영화에 나왔던 미국의 뉴욕과 LA도, 사촌 여동생이 이민 가 사는 호주와 뉴질랜드도……. 어릴 적부터 동경해 왔던 4대 문명 발상지인 이집트와 인도, 메소포타미아 지역, 마추픽추가 있는 페루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아직 나 스스로 부족함을 잘 알기에 내 일과 연관된 많은 것들이 있는 곳을 더 드나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갈 때마다 더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볼 때마다 좋은 것들로 가득한 곳들을 먼저 돌아보고 나면, 그땐 나머지 여행지들을 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