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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하 Sep 27. 2019

프롬스가 영국인 만의 축제니?

프롬 공연 보러 갔다가 인종 차별당한 썰

“This is ENGLISH CONCERT!”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이건 영국 콘서트라니? 그것도 오늘 내 옆자리 공연 메이트로부터 이런 인종차별적 발언을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Prom 74 of 125th Proms : Beethoven Night






그 날은 9월 13일, 프롬스 125번째 시즌의 폐막 바로 전 날, 74번째 프롬인 Beethoven Night이 진행되고 있었던 로열 앨버트 홀에서 있었던 일이다. 벌써 내게는 네 번째 프롬이자 그리고 내 첫 번째 프롬스 시즌의 홀에서 보는 마지막 프롬이었다. (다음 날은 하이드 파크의 콘서트를 예매했으므로 로열 앨버트 홀에서는 마지막) 정말 간절히 바랐다. 공연도 좋고, 옆 자리 공연 메이트도 좋은 사람들이길... 


일찍 도착해서 앨버트 홀 앞에서 아쉬움에 사진을 여러 장 찍고, 첫날 지각해서 챙기지 못한 프로그램북 구입 문의도 하고, 그 날의 프로그램북 구매도 하고... 나름 아쉬움을 달래느라 혼자서 동분서주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공연 시작 30분 전에 입장했다. 내 좌석 번호는 36. 이미 내 옆자리인 35번과 34번에는 60대로 보이는 영국인 부부가 앉아 있었다. 순간 눈이 마주쳤다. 나는 생긋 웃으며 인사했다. 


“Hello.”


그리고 착석하는 내 귀에 날아와 꽂히는 34번 좌석의 할머니의 말.


“This is ENGLISH CONCERT!”


자기 남편한테 하는 말이었지만 나도 똑똑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할머니의 목소리는 컸다.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여행을 하며 영국에서 인종차별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가게나 레스토랑에서 은근한 그 시선과 비웃음... 대놓고는 아니지만 명백한 인종차별이었다.) 그렇게 대놓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고 그간 프롬에서 만난 노부부들은 다들 교양 있고 친절한 분들이었으므로. 


들어보니 이건 ENGLISH CONCERT인데 사람들(동양인들이겠지)이 이걸 어떻게 알고 오냐는 식의 발언이었다. 처음에는 무시했다. 내 첫 프롬 시즌의 사실상 마지막 공연을 저런 무식한 인종차별주의자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35번 좌석에 앉은 남편인 할아버지가 내 눈치를 엄청나게 보며 “Tonight is Beethoven, he is famous...!” 라며 자기 아내를 말리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누그러뜨리기로 했다. 


문제는 공연이 시작되고, 첫 번째 곡인 헨델의 <왕궁의 불꽃놀이> 연주가 끝나고 나서였다. 할머니가 곡이 끝나기가 무섭게 박수를 치며 “This is ENGLISH CONCERT!”라는 거다. 진짜 순간 뚜껑이 확 열렸다. 지금은 아니지만 20대 때만 하더라도 친구들 사이에서 클레임의 여왕이라 불릴 만큼 한 쌈닭 하던 나였는데... 내 마지막 프롬에서 이 할머니가 내 머리 뚜껑을 차 날려주시네...? 남은 1부 프로그램이었던 바흐의 <판타지아와 푸가 C단조>를 연주하는 9분 내내 이를 벅벅 갈며, 이 더러운 인종 차별주의자가 인터미션 시간 동안 또 개소리를 하면 논리적으로 반박하면서 만석인 객석에  ‘이 할머니가 나한테 인종차별적 발언했다.’라고 크게 외쳐서 망신을 줘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다.



생각해보니 할 수 있는 말이 너무 많았다. 


프롬스가 English Concert라서, English들만 즐기는 공연이어야 한다는 논리라면 스코티시 오케스트라나 웨일스 오케스트라가 프롬에 와서 연주하면 안 되는 거다. British Concert라고 했으면 말이 달라졌겠지만 그 할머니는 자기 남편한테 (나 들으라고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English Concert라고 했으니까. 그리고 이번 시즌에 상하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초청됐던데 그럼 걔네는 왜 초청해서 부른 거냐? 잉글리시 콘서트라며?


그리고 English own이라면 바흐, 바그너, 베토벤 같은 독일 작곡가 음악은 연주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며... 엘가나 브리튼, 헨델만 연주해야 하는 것 아니냐... 아, 헨델은 독일 사람이잖아? 너네 잉글리시가 그토록 사랑하는 헨델 알고 보면 독일에서 귀화해 온 독일인 아니냐며... 그것도 자기 주인이었던 하노버 공이 영국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영국에 눌러앉아 남은 거 아니냐며... 그러고 보니 하노버 공이 영국 왕위(조지 1세)에 올라서 지금까지 이르렀잖아? 웁스, 너네 왕 독일인? (진짜 못됐다 나 ㅋㅋㅋㅋ)


오늘 공연 주제가 ‘베토벤의 밤’인데, 당신은 베토벤 즐길 자격 없는 사람이네. 베토벤은 그 시대에 계급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고, 그 시대에 전 지구 상의 인류와 생명체의 평화와 사랑을 노래했던 사람인데, 당신 같은 Racist가 자기 음악 즐긴다는 걸 알면 천국에서 슬퍼하기보다 화를 냈을 거다. 아니 화를 내는 게 아니라 극대노 했겠지. 베토벤을 비롯한 모든 음악가들이 당신네들 유러피안만 들으라고 음악을 작곡했다니? 음악이 당신네들만 향유해야 할 Heritage야? 그리고 당신네 영국 교육 시스템에서는 Humanity 같은 거 안 가르치나 보네? 이 Uneducated lady야. 


꼴 보아하니 브렉시트도 좋다고 찬성 투표했을 거 같은데,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영국의 국제적 기업들 본사 다 EU의 다른 국가로 옮기고, 그렇게 돼서 영국 젊은이들 일자리 없어져서 미래가 암담해졌는데, 자식들과 손주들 세대 목 조른지도 모르고 좋지? 파운드화 지금 예전에 비해서 얼마나 똥값 됐는지 아냐며... 절반 정도로 떨어졌는데 앞으로 더 떨어져도 당신들은 좋아하겠지. English only니까. 아 English Only를 원하셔서 스코틀랜드도 독립할 수 있게 만들어주려는 큰 그림? 사실 나 같은 여행자들이 와서 돈 쓰고 가면 고맙다고 해야 할 상황인데 그런 걸 모르니까 그런 인종차별적인 발언도 서슴없이 하겠지. 


English Concert에 동양인들이 어떻게 알고 왔냐고? 당신처럼 무식하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하고 뭐든 열심히 배우는 사람들이라서 다 예매하고 온답니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당신네 같지 않아서 말이지. 그렇게 동양인들이 싫으면 웨스트민스터 국회 앞에 가서 동양인 입국 금지 시위라도 하지 그래? 물론 관광산업에 동양인들이 꽤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 요구가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모든 말들을 자연스레 영어로 생각해 낼 수 있었던 나 자신도 놀라웠지만, 순간 유학이나 어학연수 한 번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도록 교육시켜주신 (대한민국 영어 사교육 만셉니다) 부모님께도 감사했고, 영어로 토론했을 때 지지 않도록 스파르타식으로 혹독하게 훈련시켜준 과거의 내 선생님들... Benjamin, Joel, Christina, Kevin... 정말 고마웠다... ^-^; 


남은 1부 내내 정말 이를 부득부득 갈며, 그 할머니가 인터미션 때도 인종차별을 하면 당하지만 말고 맞받아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내 옆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계속 내 눈치를 보며 (내가 반대편의 37번 아저씨랑 영어로 얘기하는 걸 들어서 내가 영어 할 줄 안다는 걸 인지해서인지) 자제를 시켜서 그런지, 할머니는 인터미션 시간 동안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2부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연주가 끝나기 무섭게 홀을 빠져나갔기 때문에 (그래... 나 같은 동양인과 단 1초도 더 같이 있기 싫었겠지^-^) 충돌할 일이 없었다. (덕분에 그분들은 앙코르곡을 놓치셨어요. 흥! 꼬시다...!)





사실 이렇게 대놓고 인종차별을 당한 건 20일간의 여행 중 이날 딱 한 번뿐이었다. 물론 은근한 인종차별은 다음 날 하이드 파크 콘서트에서도 겪었고, 떠나는 날 아이스크림 집에서도 당했지만 그런 사람들이 극히(?) 일부라는 것을 알아서 크게 마음을 쓰지 않기로 했다. 


공연이 끝나고, 그날 공연의 여운이 남아서, 그리고 내 첫 번째 프롬 시즌의 마지막 공연이라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아 카메라를 들고 홀을 떠나지 못한 채 어정거리고 있자 스태프로 보이는 할머니가 왜 안 나가고 있냐고 눈빛으로 물으시길래, 솔직하게 ‘내 첫 번째 프롬 시즌, RAH에서 보는 마지막 공연이라 아쉬워서, 그리고 공연이 너무 좋아 공연의 여운 때문에 쉽사리 발길이 안 떨어진다.’고 대답하자 스윗하게 웃으시며 ‘사진 찍어줄까?’ 하고 물어보시기도 했고... 두 번째 프롬이었던 바그너의 밤 공연 때 만난 공연 메이트였던 60대 노부부는 너무나 젠틀하고 스윗하셔서 이것저것 물어보시고 즐거운 대화를 나눴으므로... 또 여러모로 도움 준 친절한 영국인들이 많았으므로 이렇게 글을 작성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좋은 것만 기억에 남기기로 한다.


어쨌든 첫 번째 영국 여행, 첫 번째 프롬스 시즌은 무사히 마무리! 불쾌한 경험을 제외하면 많이 좋았다.


사실 독일어권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도 캣 콜링도 당해봤고, 심지어 플러팅도 당해봤는데, 여전히 그곳들이 그립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영국에 대한 기억도 좋게 남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다시 또 이런 더러운 인종차별을 대놓고 당한다면 꼭 그때는 논리적으로 반박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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