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과 빈에서 레지테아터 오페라를 보다
2024년 5월 초부터 6월 초까지 베를린 14박 15일, 빈 18박 19일 총 32박 34일 일정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다녀왔다. 주목적은 서양 고전 음악의 수도인 두 도시에서 연주 감상, 클래식 음악 기행, 그리고 독일 영주권자와 결혼해 베를린에 신접살림을 차린 친구 방문. 두 가지 목적으로...
베를린에서는 현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감독인 키릴 페트렌코가 이끄는 5월 정기연주회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다니엘 바렌보임이 그해 초까지 이끌던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감상, 빈에서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애덤 피셔(원래는 96세의 스웨덴 지휘자인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였는데...)가 연주하는 베토벤의 <장엄 미사>, 빈 슈타츠오퍼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빈 소년 합창단이 미사곡을 불러주는 호프부르크 카펠에서 모차르트 <짧은 미사 F장조>를 감상했다. 모든 연주들 다 좋았지만, 그 여행에서 본 오페라들이 이야기할 거리들이 많아 오페라 이야기를 꺼내본다.
베를린 슈타츠오퍼(Berlin StaatsOper Unter den Linden)에서 본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 그리고 빈 슈타츠오퍼(Wiener StaatsOper)에서 본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모두 다 현대식 재해석을 거친 새로운 오페라인 건 우연일까. 나는 날짜와 장소, 그리고 작품 제목만 보고 예매했는데 말이다.
현대 오페라의 레지테아터(Regiethearter) 연출. 독일어로 ‘연출가 극장’이라는 뜻으로 원작의 시대와 배경 등의 설정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연출가 해석 중심의 무대를 얘기하는 용어다. 이는 오페라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연극 등 여러 가지 극장에 올리는 모든 장르의 공연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할 테다. 19세기 궁정이 배경이었던 작품은 20세기 뉴욕 뒷골목 배경으로 바뀌고, 그에 따라 등장인물들의 복식 또한 완전히 달라지곤 한다. 현대식 재해석은 ‘작품에 대한 몰입’을 방해할 수도 있지만, 재해석 자체가 훌륭하고 관객에게 인상적인 감동을 준다면 ‘훌륭한 재해석‘ 이나 ‘혁신’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극으로 바꾸면 제작비가 훨씬 덜 든다. 고전 오페라 의상이랑 세트 제작비가 장난이 아니거든...)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겠지만 한쪽(베를린)은 너무나 바람직한 재해석이었고, 한쪽(빈)은 호불호가 아주 세게 갈릴 파격 그 자체(나라면 지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재해석이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는 에스파냐의 귀족 조반니가 수많은 여성들을 유혹하다가, 안나의 아버지인 기사장을 살해하고, 결국 악마(기사장의 모습으로 나타남)가 나타나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간다는 내용으로, 총 2막으로 구성돼 있다.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뱅상 위게(Vincent Huguet) 연출작 <돈 조반니>는 극의 배경을 현대로 옮기고 극 중 인물들의 설정도 바꿨다. 조반니를 사진작가로 만들어 여자들을 유혹하기 좋게 설정했고, 안나의 아버지였던 기사장 설정을 저승의 판관으로 바꿔 혈연관계를 지웠다. 조반니가 안나의 아버지 기사장을 죽이는 장면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안나가 조반니를 쫓는 동기도 바뀌었다. 원작에서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라서 쫓는다는 사적 복수에서, ‘자신의 삶을 유린한 악에 대한 응징과 도덕적 질서의 회복’이라는 보편적이고 주체적인 심판으로 격상시켰다. 그 덕에 권선징악의 메시지가 개인적인 것에서 더 확장된 셈이다.
2막에서 엘비라(조반니에게 버림받은 옛 여자)에게 독일 연방 전 수상인 앙겔라 메르켈의 코스튬을 입히고 메르켈 특유의 제스처(양손을 마름모꼴로 모으는 ‘메르켈 다이아몬드’)도 취하게 했다. 조반니를 회개시키고 도덕적인 길로 가야 한다고 하는 엘비라에게서 메르켈을 보게 함으로써, 메르켈로 대표되는 유럽 연방의 마지막 도덕적 기준과 질서와, 그런 엘비라를 비웃는 조반니에게서 현시대 붕괴하는 유럽의 사회 질서와 도덕적 해이(더 나아가 네오나치즘이 득세하고 있는 현실도 살짝...)에 대한 대립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설정을 바꾸면서 조반니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는 여성 캐릭터 안나와 엘비라를 능동적인 인물로 바꾸고, 조반니에 대한 응징을 통해 현시대에 태동하려 하는 혼란과 무질서를 대중이 바로잡는 모습에서 일종의 무혈혁명까지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푸치니의 <투란도트>는 내가 이야기로도 좋아했고(그래서 2차 창작물도 엄청나게 찾아봤고), 소재 자체도 좋아했으며, 내 푸치니 최애 오페라는 아니지만 한·중·일 3국인 이라면 가장 대중적인 오페라라 할 수 있지 않나 싶다. 남자 주인공인 칼라프(Calaf)의 아리아 ‘아무도 잠들지 말라(Nessun Dorma; ‘공주는 잠 못 이루고’라는 제목으로 더 널리 알려진)’는 팝페라 오디션 프로그램 등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는 데다, 브리튼즈 갓 탤런트에서 폴 포츠를 세계적인 스타덤에 올려놓은 곡이기도 하니 말이다.
푸치니의 <투란도트>는 화려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베르디의 <나부코>나 바그너의 반지 서클도 화려하지만, 그와는 또 다른 동양적인 화려함. 중국을 배경으로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의 딸 투란도트가 여주인공이고, 우연히 그녀를 보고 반해 청혼하는 망국의 왕자 칼라프. 투란도트가 내는 세 가지 수수께끼를 풀고 그녀와 결혼하느냐, 아니면 죽느냐 갈림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기에 배경이며 등장하는 합창파트며 웅장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빈에서 본 클라우스 구트(Claus Guth) 연출의 <투란도트>는 커다란 문이 달린 하얀 방에서 시작한다. 배경 모두가 화려는커녕 심플하기 그지없다. 투란도트의 심리와 트라우마를 반영한 세트와 복식이라는 걸 이내 눈치챘지만 1차적으로 당황했다. 병실에서 사용할 법한 철제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하얀 방은 마치 병동이나 정신병동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고, 무대의 벽에는 투란도트의 내면 자아 상태(혹은 추가 후술할 로우링 공주의 환영)로 보이는 영상들이 프로젝터로 벽면에 투사됐다. 투란도트의 구불구불하고 치렁치렁한 흰머리부터, 흰 드레스까지... 그녀의 순결과 처녀성을 상징하는 모습, 가면을 쓰고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구체관절 인형처럼 보이는 투란도트의 시녀들은, 몸은 이미 성인 여성이지만 마음으로는 성장을 거부하는 그녀를 상징하는 소품으로 보였다. 자신이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결혼해야 하고, 그러면 자신의 순수와 순결, 고결함을 잃게 된다고 여기는 강박 같아 보였다. 일종의 피터팬 증후군 같은 느낌.
투란도트의 이 강박은, 구혼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 정답을 맞히지 못하면 잔혹하게 구혼자들을 죽여버리는 이유와 연결하면 추정할 수 있다. 2막의 아리아 ‘이 궁궐 안에서(In questa reggia)’의 가사에 이유가 나온다. 수천 년 전, 투란도트의 조상이었던 로우링(Lo-u-Ling) 공주가 타타르족의 침략을 받아 이민족들에게 욕보이고 비참하게 살해당했다는 이야기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로우링 공주의 순결함과 한을 계승했다고 여기기 때문에, 구혼자들을 죽임으로써 그녀의 복수를 남자들에게 한다는 논리인 것이다.
연출자인 구트의 의도는 잘 알겠으나, 세트와 소품 모두 다 내가 보기엔 표현 수위가 과도했다. 투란도트에 청혼했다 죽어 나간 인물들의 수급이 자주 등장하고, 그 수급을 넣은 일종의 관을 합창단의 의자로 사용하고... 나와 같은 오페라 박스에서 본 관객들도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는데. ‘So cruel…’ 할 정도였으니까.
투란도트의 시녀들도 가면을 쓴 인형 같은 모습으로 투란도트 캐릭터의 ‘정신적 미성숙’과 ‘트라우마’를 표현했지만, 사람을 소품처럼 사용하여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연출가의 의도는 알겠으나, 이렇게까지 불친절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상연시간 내내 들었다.
개인적으로 <투란도트>는 푸치니가 타계할 때까지 완성해 둔 3막의 시녀 ‘류’의 자결 씬에서 끝냈어야 했다고 본다. 초연 때 토스카니니가 그 부분에서 “푸치니 선생은 여기까지 만드신 후 타계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며 지휘봉을 내려놨듯. 류가 죽은 후 투란도트가 갑작스레 칼라프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식을 한다는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버겁다. 대부분의 오페라도, 뮤지컬도 그렇지만 급조된 결말에 감동이 팍 식어버린다. 하지만 그런 원작과 달리, 구트의 재해석본에서는 결말이 달라졌다. 칼라프와의 입맞춤이 끝나자마자, 투란도트가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해 버린 것이다. 강요된 성인식(결혼)에 대한 최종적인 거부의 표현이라고는 이해했지만, 그 또한 예상치 못해 많이 당황스러웠다.
연주의 훌륭함이나 배우의 연기에 평가를 하기에 앞서, 이런 재창작이 성공적이지 못할 때는 작품의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공부할 때, 많이 나오는 용어 중 하나인 ‘익숙한 낯설게 하기’가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그냥 낯설게 하는 데만 성공한 셈이랄까. <투란도트>에서 관객들이 기대한 것은 하나도 충족해 주지 못하면서 파격적이기만 한 것이다. 베를린의 <돈 조반니>가 고전을 현대적 윤리로 재해석해 공감을 이끌어냈다면, 빈의 <투란도트>는 고전을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체하여 관객을 소외시킨 셈이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작품의 메시지(Context)를 해치지 않는 선이라면 재창작은 계속해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본질을 해친다면?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본질이라 정의해야 하는 것일까? 스토리와 멜로디, 가사만 지킨다면 본질을 지키는 것일까? 여전히 어렵다.
후기를 작성하기 전에 레지테아터에 대한 자료조사를 좀 하면서 보니 미국의 오페라극장은 아직도 전통적인 오페라를 고수한다고 한다. 심지어 ‘유로-트레쉬(유럽 쓰레기)’라고 힐난하기까지 한단다. (담엔 뉴욕에 가서 메트 오페라를 봐야 하나?)
사족... 그렇게 공연을 보러 다녔는데, 브라보(Bravo)와 브라바(Brava)와 브라비(Bravi)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관객들은 빈에서 처음 봤다. 런던에서도, 베를린에서도 아니었던 거 같은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