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필하모닉 골든홀 방문기
코로나 후 첫 번째 유럽 여행을 처음 계획할 때만 하더라도 베를린 한 달을 상정하고 일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베를린 일정을 14박 15일로 축소하고 빈 18박 19일의 일정을 끼우게 된 것은 단 하나의 생각 때문이었다. ‘코로나 이후 처음 가는 유럽인데... 베를린만 알아보지 말고 빈도 알아보자.’
그리거 스웨덴의 노 지휘자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2024년 당시 96세)의 스케줄이 빈 필하모닉과 함께 잡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블롬슈테트의 그리그 연주를 좋아했다. (팟캐스트 <이지 클래식> 오프닝 시그널이었던 그리그 <페르귄트 ‘아침의 기분’>도 이 분 버전) 한국은 2016년에 밤베르크 교향악단이랑 처음 오셨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이번이 아니면 언제 보겠냐’ 싶어 베를린에서 빈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연세는 계속해서 드시는데 언제 또 멀고 먼 동아시아 투어를 하시겠냐는 생각이었다.
2019년 처음 영국에 방문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네덜란드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였던 베르나르트 하이팅크의 은퇴 시즌, 마지막 프롬(Prom)을 봤다. 그로부터 약 2년 뒤, 팬데믹의 끝물에 하이팅크의 타계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2018년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내한 공연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매를 할 때만 해도 내한 공연을 이끌 예정이었던 건 당시 수석 지휘자였던 마리스 얀손스. 그는 건강 문제로 시즌 스케줄을 모두 취소했고, 대신 얀손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주빈 메타가 지휘하는 것을 봤다. 이후 언제 얀손스의 연주를 경험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무렵이었던, 다음 해 11월. 그의 소천 소식이 날아들었다. 영감님들은 한국에서 보든, 해외 나와서 보든, 언제 소천하실지 모르니 ‘내가 보는 지금이 마지막이다.’ 생각해야 하니까.
그래서 무지크페라인(음악협회) 예매를 했고, 베를린에서 빈으로 이동할 항공편도, 숙소도 예약했다. 며칠 뒤에 빈 필하모닉에서 날아온 메일... 지휘자 변경 안내 공지였다. 블롬슈테트 할아버지는 이전 해에 낙상사고를 겪었는데, 이후 건강이 예전 같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이미 예매를 취소하고 계획을 돌이키기엔 많이 늦어버려서, 대타가 된 뒤셀도르프 심포니의 수석 지휘자인 애덤 피셔를 보러 빈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베를린에서 빈으로 이동한 지 4일 차. 현지시각 오후 2시에 공연이 시작되는 일정이었지만, 나는 공연 시작 한 시간 전에 숙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무지크페라인에 도착했다. 인보이스를 프린트해 온 종이를 내밀고 박스오피스에서 티켓을 픽업하고, 프로그램북도 €4.9 동전을 탈탈 털어서 샀다.
그리고 공연 시작 15분 전에 문이 열리자마자 입장해 내가 예매해 둔 자리를 찾아갔는데 관객들이 내 자리가 중앙블록 1 열이란다? 분명 예매할 때만 하더라도 내 앞에 두 열이 있는 걸 봤는데?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도 예전에 토마스 헹엘브로크+북독일 방송 교향악단(엘브 필하모닉) 내한 때 받은 초대권이 E 블록 앞에서 세 번째 줄인가 그랬는데. 그땐 중앙블록도 아니었단 말이다. 근데 내가, 빈에 와서!! 1열!! 중블이라고?! 내 가요? (대충 경악하는 이모지) 덕분에 공연 1시간 30분 정도 동안 애덤 피셔 다리 움직일 때마다 지휘자 단상 삐그덕거리는 소리며, 집중할 때 피셔 선생님께서 자기도 모르게 내는 괴성까지 싹 다 들었다. 심지어 내 앞에 앉아 있던 비올라 연주자 무슨 양말 신었는지 브랜드까지 봤...
이 날 연주를 들은 소감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그냥 ‘새로운 경험이었다.’ 고 밖에 할 말이 없을 거 같다. 연주가 시작됨과 무섭게 음악의 거대한 파도가 나를 삼켰고, 그 파도에 휩쓸려 나는 음악 안에서 한 시간 반 동안 계속해서 물아일체의 상태에 있었다고나 할까? 파도에 휩쓸려 물속에 들어가면 추운지 더운지도 잘 모르고, 수면 위가 거친 지 잔잔한 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 안에 들어가니까 ‘평가’라는 게 무의미해지더라. 예술의 전당이든 세종 문화회관이든, 내한 오는 악단들이 듣는 ‘금관이 약하다’, ‘목관이 약하다’, ‘타악기가 약하다’ 같은 평가 말이다. ‘자기네들 홈그라운드에서 내는 소리들은 확실히 다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차이가 난다고?’ 하는 생각에 다다랐다.
그렇다면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 키릴 페트렌코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정기 연주회 감상 때 보다, 빈필이 더 좋았냐?’ 고 물으면, 비교를 할 수가 없다고 대답하겠다. 베를린 필은 연주를 들으면서 정말 좋아서 눈물 줄줄 흘렸지만, 빈 필하모닉은 그럴 겨를도 없었던 거 같다.
좋다 나쁘다 평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음악이 나고 내가 음악인데 말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파도에 휩쓸릴 때나 ‘아? 이거 좀 많이 센데?’ 싶지만 물속에 빠진 후에는 모른다. 물속에서는 수면 위가 거친 지 잔잔한지 모른다는 말이다. 아마 무지크페라인이라서 이런 경험이 가능했을 거 같긴 하다. 베를린 필하모니 홀에서도 4열 정중앙에 앉아서 감상했는데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객석과 무대가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는지도 꽤 영향을 줬을 거 같고, 무대와 객석의 단차가 꽤 높아서 소리가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져내리는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처음에 입장하고 자리 때문에 당황스러웠던 건 말끔히 없어진 채로 잘 감상하고 나왔다. 내가 제주 성산에 위치한 몰입형 미디어아트 ‘빛의 벙커’를 높이 사는 이유 중 하나가 ‘작품 안에 감상자가 하나 되어 느끼는 예술’을 잘 구현했기 때문인데, 그런 느낌이랄까?
아마 프로그램 성격 자체가 달라서일 수도 있다. 베를린에서는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이었고, 빈에서는 베토벤의 <장엄 미사 D장조>였다. 내 감상법 중 하나인 음악과 작곡가 연주가에 나를 대입해 보는 방법으로 생각하면, 몰입이 더 쉬웠을 거라 생각이 든다.
이 곡은 베토벤의 후원자이자 벗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자, 루돌프 대공의 올뮈츠 대주교 취임식에서 연주할 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으나, 작업 속도가 너무 더디게 진행되어 기간이 5년까지 늦춰져 버렸다. 그리고 베토벤 최후의 대작이었던 <교향곡 9번 ‘합창’>과 함께 이 작품을 진행했다. 이 말인즉슨, 이 곡을 작곡한 당시 베토벤은 진행성 난청이 악화될 만큼 악화된 상태였다는 말이다. 베토벤은 독실한 신앙인이 아니었지만(오히려 신성모독적 발언을 하기도 해서 요주의 인물로 찍힌 적도 있음), 어쨌든 가톨릭 유아세례를 받고 장례 절차 또한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이뤄졌으니 가톨릭 신자라 해도 무방할 터...
나 또한 메니에르병 투병 20개월 내내, 심지어 완치 판정을 받은 지 4개월이 지난 그 당시에도 컨디션이 떨어지면 귀에 통증이 생기곤 했다. 베를린에서 빈으로 이동하고 나서야, 여행 내내 매일 아침 기상 직전 시달리던 귀 통증에서 해방되었는데, 그래서일까... 신에게 자비를 구하고(Kyrie), 신앙 고백(Credo)을 하고,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을 자처할 때의 깊이와 무게만 달랐지 내 감정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잠깐 들었다.
예전에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2악장 아다지오 처음 들었을 때 ‘음악에 형태가 있다면 나를 따스하게 안아주고 위로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고 얘기했었는데, 베토벤의 <장엄 미사>는... 그 시간 동안은 그 음악이라는 알 안에 들어가 있는 부화 전 병아리가 된 기분, 음악이라는 모체의 양수 안에 오롯이 고요히 자리 잡고 있는 태아가 된 기분이었다.
주저리주저리 풀어놨지만... 사실 다 필요 없는 설명이고 표현이다. 좋다는 말조차 초라하고 남루하다. 언어로 먹고사는 인간이라 이렇게 얘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언어란 참 비루한 도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언제 또 방문할 수 있을까. 다음엔 빈 필하모닉 신년 음악회를 노려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