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울지 못하는 사람이 된 이유
2025년 5월 10일 토요일 오후. 그날은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질까 싶어 씻고 곱게 화장을 하고, 나들이 차림으로 차려입은 후 양재천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집 근처인 영동 1 교부터, 도곡동 쪽으로 걷고 있는데... 갑자기 울컥,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근처에 설치된 벤치가 보이길래 털썩 주저앉아서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모르겠다. 그냥... 모든 것이 다 서러웠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엉엉 울었다.
비유를 하자면, 영화 <어벤저스 2: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스칼렛 위치 완다 막시모프가, 쌍둥이 퀵 실버 피에트로 막시모프의 죽음을 감지한 후 자신의 붉은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주변에 있던 울트론들을 한 번에 파괴시키는 장면 비슷할 정도로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다. 얼마나 울고 있었을까... 맞은편 밀미리다리(매봉역 근처 도보교) 멀리서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향해 급히 뛰어왔다. 그리고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나를 품에 안았다.
“괜찮아요. 다 지나갈 거야... 울고 싶으면 울어요.”
그녀의 품에서 얼마나 울었을까. 한참을 울고 나서야 이성을 겨우 챙기고, 그녀의 품에서 내 얼굴을 떼어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그녀도 내 머리를 자기 품에서 떼어놓으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 또한 울고 있었다.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눈물이 볼을 타고 그녀의 턱에서 내 정수리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전날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가 메니에르 병을 치료하고 있는 한의원. 운영 시스템상, 한 시간 한 타임당 하나의 침 방에 여러 사람(최근엔 최소 20명)이 좌식 의자에 둘러앉아 치료를 받는다. 3주 만의 진료였는데, ‘그간 별일 없었냐’는 문진에, 할머니 사별로 장례를 치르느라 힘들었고, 장례기간 내내 장례의 중심에 있느라 제대로 울지 못해서인지 이따금씩 감정 조절이 안 돼서 눈물이 터져 나온다는 얘기를 했다. 그러자 내 한의사 왈... “그럼 여기서 눈물이 나오면 울어요.” 내가 “여기서 울면 안 되죠. 눈물 터지면 그냥 우는 정도가 아니라 통곡인데요?” 했더니 통곡해도 괜찮으니 이 침방 안에서는 울어도 된다고 했다.
경혈에 침을 맞아서인가, 이내 곧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집에서처럼 엉엉 울 수는 없으니, 소리 죽여 끅끅 울어댔다. 그러자 한의사가 말했다. “인하님, 그렇게 흐느껴 울어서는 안 돼요, 더 크게 울어야 해요.”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어떻게 엉엉 울 수 있을까. 심지어 다른 환자들이 이렇게 얘기하는데. “저 아가씨 우니까, 나도 눈물이 나려고 해...”, “원장님, 저 아가씨 그만 울라고 하면 안 돼요? 저 아가씨 울고 있으니까 내 마음이 그래... 침 맞고 있는데...(치료 효과가 없을 거 같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잘 우는 아이였다. 아기는 말을 못 하니 의사표현을 울음으로 하는 게 당연지사인데, 집에 계시던 어른들은 내 울음소리가 나는 것 자체를 싫어하셨던 것 같다. 내가 울면, 할아버지는 울음소리가 시작되기 무섭게 할머니를 찾았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한여름에도 이불장에서 숨 막히는 솜이불을 꺼내 나를 덮어줬다. 내가 울면 할아버지와 아빠가 화를 내고, 그러면 할머니가 그 화를 다 받아내야 하니까. 어릴 때는 할아버지나 아빠 몰래 울라고 할머니가 나를 배려해 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동학대다. 경상도 사투리로, 애가 울기 여사지... 애 우는 걸 어른 기분 맞춘다고 숨기고, 애 머리 위로 숨 막히도록 무거운 솜이불을 덮는 게 맞나? 아주 어릴 때부터 감정을 숨겨야만 살아남는다는 조기교육, 가스라이팅의 역사가 이때부터 시작된 셈이다.
내가 얼마나 잘 우는 아이였냐면, 보육시설에 보내지고 나서도 특별대우를 받을 정도였다. 워낙 작고 말랐고, 그래서 다른 아이들한테 치이면서 잘 우니, 미술학원(지금으로 치면 어린이집 개념) 원장님이 나를 끼고돌았다. 소풍을 가더라도 나는 늘 원장선생님 손을 붙잡고 행렬의 맨 끝에 따라갔다. 그 이후 유아원,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 작고 마르고 보호본능 자극하는 여자애가 자꾸 울어대니, 짓궂은 아이들부터 같은 반 남자애들 중 한둘은 꼭 내 보호자를 자처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자기들도 어린인데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건지...)
하지만 서서히 나이를 먹으면서, 내 눈물이 타인에게는 ‘귀찮음’ 혹은 ‘불편함’ 임을 알게 되었다. 혹은 ‘약점’ 일 수도 있다는 걸 너무 잘 알았다. 사춘기가 되고, 2차 성징이 오면서 몸이 달라지니까 주변 시선들이 수상한 ‘욕망의 번들거림’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또래 남학생들부터, 남녀 가릴 거 없이 어른들까지. 그래서 울기를 주저하기 시작했다. 안 울어도 성희롱적 발언들과 터치들을 감내해야 했는데, 내가 눈물을 흘리면 그걸 약점과 핑계 삼아서 나한테 어떤 짓을 할 건지 너무나 자명해 보였으므로.
강해 보여야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타인 앞에서 우는 건... 내 생존과 존엄에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그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었으니까.
잘 울었던 아이, 잘 우는 만큼 세상 만물에 민감하고 섬세하게 반응했던 아이.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그 섬세함이 생존과 존엄의 약점이 되면서 그 모든 걸 갈아내고 참아내야만 살 수 있었기에, 나는 내 안의 감정을 꾹꾹 눌러 담고 30년 넘게 살았고, 그 결과로 마음의 병을 얻었다. 우울증, 공황장애, 메니에르병... 모두 내 안의 감정과 화가 내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서 온 병들이니까. 2011년부터 이어진 네 번의 공황발작 중 가장 최근인 2025년 5월 12일에서 14일... 특히 14일 90분 공황발작에 의한 실신까지... 이미 내 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한계에 부딪힌 셈이다.
내 한의사가 진단한 메니에르병과 공황발작의 진짜 병증. 간화병폐(간화범폐(肝火犯肺)라고도 함). 간의 화기가 폐를 말리고 다른 장기로 침범하는 것. 간은 해독을 하는 기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지금 나는 그간 억눌러온 감정들이, 내 육신의 간이 수용할 수 있는 총량을 넘어선 상태다. 간화가 귀를 거쳐(메니에르) 뇌로 도달(공황발작+실신)했다. 이렇게 계속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 · 뇌졸중, 최선의 경우 깔끔한 사망이지만, 최악의 경우는 식물인간이 될 수 있는 상황.
(그래서 나는 미국 UCLA 임상 정신과 교수 주디스 올로프(Judith Orloff)의 저서 『나는 초민감자입니다(원제: The Empath’s Survival Guide)』에 나온 솔루션은 반쪽짜리라 생각한다. 내가 그 책을 알게 된 2021년부터 지금 2025년까지 거기 나온 솔루션을 얼마나 열심히 따라 살았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잘 울지 못하겠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가 울면, 좋아할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내 영혼과 심장이 부서져서 우는데, 친구를 자처한 년이 거기에 악담을 퍼부으며 나를 더 파괴하려 했던 경험도 있고, 그 때문에 삶의 의지를 찾지 못하며 방황할 때 접근해서 나를 기망한 남자도 있었고... 어디 무인도 가서 혼자 살면 모를까. 내가 감정을 내비치면, 나를 물어뜯으려 하는 승냥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 때문에.
적절한 타협점을 찾긴 해야겠지만, 어렵다. 많이. 죽으면 제일 편하고 간단한데, 살려고 타협점을 찾으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