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이동 산이 품은 나의 젊은 시절
영우는 나의 중학교 동창이다.
고등학교는 다른 학교로 배정받았지만 꾸준히 연락해서 20대 중반까지 나의 친구 목록에 1번을 차지하던 친구다.
우리는 그 시기에 많은 것을 같이했다. 난 나의 느낌을 바로 표현하는 편이었고, 영우는 주로 들어주고 조언을 해주는 언니 같은 느낌의 친구였었다.
영우 어머니는 친구들이 가면 먹을 것도 잘 주시고 편안하게 해 주셔서 영우의 집은 항상 사랑방 같이 친구들이 자주 들리던 곳이었다.
영우의 집은 수유역 앞에 있었고 우리 집은 역에서 15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영우의 집에 들러 놀다가는 일이 많았었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내려서 나와보니 비가 오고 있었고 난 우산이 없었다. 비가 와서 공중전화에 줄이 길었지만, 기다려서 전화를 했다. 마침 영우가 전화를 받았고, 기꺼이 역까지 나를 데리러 왔었다. 그녀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영우가 챙겨준 우산을 들고 집에 왔었다.
영우 집은 나에겐 집으로 가는 징검다리 같았다. 친구 부모님도 나를 딸처럼 챙겨 주셨다.
영우와 나 둘 다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보통은 영우집에서 책 보고, 음악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영우와는 음악이나 책 읽는 취향이 비슷해서 음반이나 책을 서로 빌려주곤 했었다.
그 방에서 페루 전통음악을 들으며 안데스 문명의 신비를 이야기하곤 했다. 언젠가 페루에 같이 가자고도 했다. 그리고 그 당시 유행하던 송골매, 산울림, 이문세 음악도 듣고 숙제도 같이하고, 특히 영우는 그림을 잘 그려서 내 숙제를 도와주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 일요일 아침, 우리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우이동 산에 가기로 했다.
산이 가까운지라 남들처럼 등산복에 등산화를 챙겨 신지 않고 동네 뒷산 가는 분위기로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갔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내려서 산 위로 천천히 올라가며 여름 녹음을 즐겼다.
산 정상 까진 안 가고, 중간에서 물 한잔 마시고 내려오면서 아카데미 하우스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내려가기로 했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그쪽으로 가는 샛길을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가는데 조그만 문이 보였다. 나는 빨리 가고 싶어서 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가려는 순간, 문 안쪽엔 식탁으로 문을 막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침 뷔페가 진행 중이었고 하마터면 그 식탁으로 돌진해서 식탁을 엎을 뻔했다. 거기다가 그 앞에 서서 음식을 접시에 놓으려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뒤따라 오던 친구도 깜짝 놀라고, 나는 얼른 문을 닫고 오던 길을 빠르게 되돌아 나와서 건물에서 멀어졌을 때 친구와 나는 그 자리에서 자지러지게 웃고 말았다.
영우가 " 너 하마터면 식탁 엎을 뻔했어" 하고 나는 얼굴이 빨개져서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우리를 알아볼까 봐...
우리는 걸어서 버스 정류장 쪽으로 가는데 아카데미 하우스 입구 쪽에 '구름의 집'이란 팻말이 보여서 문득 궁금해졌다.
"여긴 어딜까?"
우거진 나무 사이에 오솔길이 위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길 끝에 다다르자 마치 우주선 같은 모양의 지붕이 나왔다. 그곳으로 들어갔더니 사방이 창문으로 둘러싸고 있는 양식당이 나왔다. 웨이터 분이 우리를 보자 문을 열고 들어 오라고 환영을 해 주었다. 우리 차림이 운동복이라 들어가기가 좀 미안했는데, 직원 분들이 흔쾌히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사방이 창문으로 트여있고, 높게 올라온 건물이 우리를 구름 속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고, 초록이 우거진 숲과 파란 하늘, 뭉개 구름까지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져있었다. 그때는 흔하지 않던 원두커피 향이 가득한 곳에서 우리는 기분 좋게 아침 산행을 마무리할 수 있았다.
그 후에도 우리는 가끔 그곳을 갔었다. 그중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날이 있다.
아침부터 눈이 펑펑 내리던 날이었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난 구름의 집이 궁금해졌다. 영우한테 전화를 해 빨리 오라고 했다. 아직 마을버스가 운행 중이었고, 버스에서 내려서 눈 쌓인 오솔길을 걸어 올라갔었다.
다행히 올라가는 길은 말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눈이 온 관계로 그곳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고 그 창밖의 풍경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었다
창문 밖은 온통 회색과 흰색의 세상이 펼쳐지고 있어서, 움직이는 수묵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하늘에서 춤을 추며 내려오는 눈과 소나무와 잣나무가지에 쌓인 눈을 바라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돼 있는 것처럼 말없이 바깥풍경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아 있다가, 갑자기 집에 갈 걱정이 되었다. 서둘러 그곳을 나와 마을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린 관계로 버스가 운행 중단 되었고, 길엔 차도 안 다니고 있었다.
눈은 계속 오고 밖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차로 20분 만에 올라온 거리를 우리는 세 시간 넘게 걸으면서 얘기했다.
그 시절 고민 하던 졸업 후의 진로와 친구, 가족...
혼자였으면 힘들었을 길이었다. 하지만 영우가 있어서 걸어왔었고, 중간에 미끄러져 넘어지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왔지만, 그곳의 풍경과 친구와 보낸 시간을 생각하면 후회는 없었다. 그리고 아직도 눈 오는 날이면 그곳의 커피 향과 바깥의 수묵화 같았던 풍경이 생각난다.
이제는 연락이 끊겼지만, 그 시절 나와 가장 오래 함께 해준 그 친구의 기억은 선명하다.
몇 년 전 한국에 갔을 때 예전 살던 동네를 다시 찾았다.
우이동 산은 나에게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라 가보고 싶어서 거기까지 올라가 봤다.
아카데미 하우스도 보고 싶고, 무엇 보다도 구름의 집에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곳은 직장 폐쇄 조치로 입구부터 바리 케이트로 막혀 있어서 못 들어가 봤다.
영우와 내가 다니던 길들도 다 못 들어가게 돼 있어서 섭섭했다.
무엇 보다도 구름의 집에서 다시 한번 밖을 내다보며 차 한 잔 하고 싶었었는데... 안타까웠었다. 하지만 그 시절 나와 친구가 다니던 그 길들 과 구름의 집은 마음 깊숙 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