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함께

캐나다 단풍나무를 통해 본 인생의 사계절

나무의 순환, 인간의 일생

by 김유인

10월의 토론토와 퀘벡
10월 초에 한국에서 친구가 방문했다.
한국 추석의 긴 휴일을 이용해서 캐나다 단풍을 보기 위한 여행이었다.
빨간 단풍은 메이플이라고 불리며 국기에 까지 그려질 정도로 캐나다를 대표하고 있다.

캐나다 동부의 토론토, 몬트리올, 퀘벡은 단풍으로 유명한 곳이다.
흐린 날씨, 빨간 단풍나무 아래에서 가을을 물씬 느낄 수 있는 여행을 기대하며 출발했지만,
단풍이 많이 들지 않아서 좀 실망했다.
하지만 나이아가라 폭포의 거대함과 웅장함 그리고 천지를 흔드는 물소리는 그 실망을 덮을 만큼 강렬하고 매력적이었다.

캐나다 역시 이상기온으로 인해 10월 초의 토론토와 몬트리올의 날씨가 29도를 웃돌았다.
우리는 반팔이나 얇은 옷차림으로 다니면서 이 더위를 어리둥절해했다.
아마도 그래서 그곳은 단풍이 들 틈이 없었나 보다.
이제 세계는 이상 기온을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할 때인가 보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밴쿠버로 돌아오니까 온도가 12도 정도로 떨어지고 흐리고 비가 왔다.
전형적인 밴쿠버의 가을 날씨가 됐다.
며칠 가을 날씨를 맛보고 친구는 한국으로 돌아갔다.

다시 일주일 정도가 흐른 오늘 아침, 병원에 약속이 있어 운전하고 가던 중 길 양쪽에 가로수들이 고운 붉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기대치 않은 단풍을 발견하고 마음이 설렜다.
한국으로 돌아간 친구에게 사진을 찍어 보내고 싶을 만큼 예쁜 단풍이었다.

내가 밴쿠버에 살기 시작한 20여 년 전에는 단풍나무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누렇게 변해서 떨어지곤 했다.
하지만 날씨 변화와 수종 변화로 요즘은 단풍나무가 꽤 보인다.
일교차가 더 심해진 덕분에 요즘은 고운 단풍을 볼 수 있다.
그래도 단풍의 제일은 한국의 단풍인 설악산, 내장산등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남산의 단풍 역시 도심 속에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단풍이라고 생각한다.

초봄
아직 영하와 영상의 날씨가 오갈 때, 바싹 마른 나뭇가지에서는 어느새 새순이 나와 있다.
나무는 한겨울 동안 나뭇가지가 찢길 것 같이 매서운 북풍에도 마치 칼을 갈듯이 서있었다.
따스하게 부는 봄바람과 찬란한 햇볕이 쬐는 여름을 생각하며...
나무는 얼마나 공들여 새 순을 지켜냈을까?
마치 농부가 겨울에 아무리 굶어도 이듬해 봄에 새롭게 뿌릴 씨앗을 지켜 내듯이...
부모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자식을 지켜내듯이...

그렇게 감춰왔던 여리고 보드라운 새순이 살며시 부끄럽게 고개를 내밀 때, 새 생명에 경이감이 넘치는 시선을 보낸다.
하지만 그렇게 솟아나는 꽃봉오리는 아직 추운 새벽과 밤을 이겨내기엔 너무 버거워 보여서 마음이 아프다.
그 새순에서 나오는 꽃봉오리들이 추위에 떠는 게 너무 안타까워 밤에는 이불이라도 갖다가 덮어 주고 싶다.
갓 태어난 아기를 찬 바람에 내놓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새로 태어나는 새 순이나 봉우리를 쳐다봤다.
그렇게 막 봉오리가 피어난 목련은 길 양쪽에 서서 나에게 소리를 지른다.

"와~~. 나 살아 있었어요!
나 이렇게 다시 나와서 인사드려요.! " 하고.

마치 아기가 엄마 자궁에서 막 나와 " 으앙" 하고 소리 지르는 것처럼.
그렇게 연약한 아기를 지키고 싶은 심정으로, 봄의 나무는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


봄과 그리고 젊음의 계절
그런 시절이 지나서 4월에서 5월이 되면,
따스한 햇살아래 물이 오른 나무는 정말 말간, 정말 연한 아직 초록이라 하기 어려운 연두색의 잎사귀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 색은 얼마나 여리고 예쁜지...
슬슬 물이 올라 더 이상 추위 걱정 없는 나무와 잎들을 보는 것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 나무 아래 햇살은 얼마나 따뜻한지...
"거봐 내가 말했지? 시간이 지나면 좋은 시절이 온다고...! "라고 나무가 말하는 것처럼.
이제 막 걸음마를 끝낸 아기가 웃으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듯, 나무는 세상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다.
" 더 이상의 겨울은 없다고...!"


여름 그 싱싱함
그렇게 6월, 아직 한낮의 열기는 견딜만하고 나무의 줄기는 젊음으로 가득하다.
그 나뭇잎은 풍부한 초록과 싱싱함으로 무장한 채, 겁날 것 없는 세상을 향해 도전장을 내민다.
그 초록을 느끼고 싶어 나무를 안아본다.
몇 해 전만 해도 내 품 안에 안겼던 나무가 이제는 안을 수 없다.
선명한 나무껍질과 한참 물이 오른 나무의 싱그러운 냄새도 맡으며 나무를 즐겨 본다.
한참 신체 건강한 근육질의 20대 청년처럼 나무는 내 앞에서 있다.
세상 무서울 것 없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거 같던 나의 20대를 다시 떠 올린다.

가을 그리고 순환
어느새 10월이 되고, 11월이 되면 나무의 잎은 빨강, 노랑으로 색을 바꿔 입는다.
풍성했던 그 잎들을 색을 바꾸며 화려했던 전설을 뒤로하고, 그것들을 끊어내며 다음을 준비한다.
마지막 잔치를 화려하고, 또 황홀하게 마무리하며 잎들을 끊어내는 고통을 감내한다.
떨어진 잎들이 땅에 떨어져 흙과 함께 비료가 되어 다음 해에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 순환인가?

인간의 노년은 이처럼 완벽하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마지막까지 인간이길 바라지만, 그렇지만 너무 연약해서 풍요로운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인간의 노년은 비록 육체적인 연약함과 고통을 동반하지만, 그 세월이 응축한 지혜와 경험 이야말로 다음 세대를 위한 정신적인 양분일 것이다. 나뭇잎이 흙으로 돌아가듯, 우리의 시간과 이야기는 사랑하는 이들의 삶 속에 스며들어 새로운 생명을 돕는다,
통증 없이 평화로운 마무리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누군가를 위한 아름다운 순환의 일부일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 본다.

슬프지만 멀지 않은 그 시간을, 나무처럼 풍요롭게 내려놓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