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결박, 영혼의 해방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은 어떤 것일까?
시간이라는 개념 없이 멈춰 버린 순간들은 어떤 느낌일까?
그 극한의 시간을, 나는 90분 동안 움직일 수 없는 MRI 기계 속에서 경험했다.
모든 것이 멈춰있어야만 하는 그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동은 '기억 놀이'였다.
나를 구원한 기억 놀이
작년부터 건강에 이상이 생겨 MRI까지 촬영하게 되었다.
처음 MRI 찍을 때는 의사에게 요청해서 Ativan이라는 안정제를 처방받았다.
폐쇄 공포증이 있어서 닫힌 공간에 있는 건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병원에 도착해서 Ativan을 복용하고, 귀마개로 귀를 막은 채 검사를 시작했다.
내가 눕자 의료진은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는 주의를 주었다.
혹시 모를 움직임에 대비해 침대에 몸을 고정시켰다.
30분 정도 걸릴 거라고 말하며, 손에 비상벨을 쥐어 주고 불편하면 누르라고 했다.
내 몸이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눈앞엔 작은 화면이 보였는데, 높은 산을 헬리콥터로 내려다보는 영상이 나왔다.
그 장면과 어울리는 명상 음악이 흘러나왔다.
MRI 검사에 갑갑한 마음을 잊게 하려고 준비한 것 같았다.
Ativan을 복용한 효과로 몸이 나른하고 기분이 좋은 상태였는데, 하늘에서 산을 내려다보는 영상까지 더해져 나는 자유롭게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마침 검사 이틀 전에 한국에서 온 친구와 Rocky Mountains에 다녀왔기 때문에 그 영상을 보고 더욱 반가웠다.
'나도 저런 곳에 갔다 왔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MRI 특유의 소리는 여전히 들려왔다.
"따다닥. 딱 딱 딱 따닥따닥 " 같은 돌 깨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른하고 기분이 줗아서 방해된다는 생각은 안 했다.
한 30분 정도 지나니 검사가 끝났는데 아쉬운 생각까지 들었다.
의사가 전해 준 절망적인 소식
이틀 후 의사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받으면서 가슴이 두근 댔다.
보통 결과가 좋으면 한 달 이후에 연락이 오기 때문이다.
의사는 뇌에서 몸으로 전달하는 신경이 손상이 되어 있다고 했다.
뇌에서 보낸 신호가 다리나 손에 전달이 안돼 걷다가 넘어질 뻔하고, 손에 든 물건을 떨어뜨린다고...
한국에서는 다소 희귀한 신경 질환이다.
예상하던 결과였지만 눈물이 나왔다.
암이나 다른 병도 놀라고 무섭겠지만, 내가 걸린 병 역시 절망적이었다.
주변에 이런 환자들을 종종 보았는데 결국 온몸이 마비가 되는 병이었다.
단순히 내가 피곤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뇌 분야 전문의를 소개받아 만났고, 전문의는 또 다른 두 번의 MRI 검사를 요구했다.
세 달 정도 지난 후 두 번째 MRI 촬영을 하는 날이 되었다.
그때는 병원이 바뀌었지만,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어서 크게 긴장하지 않고 병원으로 갔다.
Ativan을 복용하고 옷을 갈아입고 준비하는데, 의료진의 설명이 총 한 시간 반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이번에도 절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당부를 했다.
지난번에도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때 팔이 저려서 손가락만 살짝 움직인 경험이 있었다.
혹시나 손가락 정도는 움직여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그것조차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 힘들면 손에 쥔 벨을 누르라고 했다.
하지만 벨을 누르고 기계를 멈추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눈앞에 모니터도 없었다.
갑자기 아득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스마트폰이나 책도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게다가 온몸이 결박되어 움직일 수조차 없는데 말이다.
20여 년 전부터 스마트폰 없이 5분도 지내본 적도 없었다.
모니터도 없는 그 공간에서 돌 깨는 소리와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를 들으며, 몸도 결박 당한채 90분을 지내야 했다.
과연 90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멈춰 있는 공간 속에서 말이다.
시작할 때 나를 눕힌 침대 빈 공간에 베개 같은 걸 집어넣어서 몸을 고정시켰다.
지난번보다 더 심하게 결박을 하고, 팔도 각목 같은 걸로 단단히 고정을 시켰다.
드디어 내 몸이 기계 속으로 들어가고, '삐이익~ 드르륵, 딱딱딱' 하는 소리가 시작 됐다.
'이 막막한 시간을 난 뭘 할 수 있을까?'
그때 갑자기 생각이 났다. '내가 생각하는 최초의 기억은 뭐지?'
그렇게 나는 최초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나의 엉뚱한 첫 번째 기억
나의 첫 번째 기억은 엉뚱하게도 내가 방 천장에서 떨어지면서 아침에 일어난 장면이다.
그렇게 일어나서 부엌으로 가니 엄마가 음식을 하고 계셨다.
엄마는 방에서 나온 나를 안아 주셨고, 엄마한테는 맛있는 된장찌개 냄새가 났었다.
늦잠에서 깨어난 나는 그렇게 하루를 시작한 것 같다.
아마도 그 기억은 네 살 정도라고 생각한다.
내 의식은 다음 기억으로 옮겨갔다.
언니들이 내 팔을 양쪽에서 잡아당겼는데 팔이 빠졌었다.
어린 시절 나는 팔이 잘 빠져서, 엄마는 나를 데리고 접골원에 자주 가시다가
나중에는 팔을 직접 맞춰 주셨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런 아이들이 꽤 많았었다.
팔이 저려오는 고통 속에서, 나는 다시 온전히 맞춰지고 회복되었던 어린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 시련도 결국 지나갈 고통일 뿐이라고 다짐하며...
그다음 기억은 단편적으로 떠 오르는 기억인데, 장독대에 올라가서 불꽃놀이를 봤었다.
그 시절 우리 집은 꽤 고지대였었고 장독대면 집에서 제일 높은 곳이라서 거기에 올라가서 봤나 보다. 그냥 기억의 한 자락이다.
다시 기계음이 들린다. "삐이익~. 딱 따다닥. 따아악~".
나를 현실로 불러들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애써 나를 기억에 세계로 보낸다.
엄마 품속의 유일한 안식처.
나는 밤에 잠이 안 오는데, 엄마가 자자고 해서 엄마옆에 누워서 눈을 감았다.
좀 있다가 눈을 떠보니 내가 모르는 길에 내복을 입은 채로 서 있었다.
내복 속으로 찬바람이 들어오고,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내가 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눈을 뜨니, 나는 안전한 엄마의 품에 있었다.
이 숨 막히는 통 속에서, 나는 그 안전했던 최초의 기억을 부여잡고 결박당한 몸의 고통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이 기억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기억은 자꾸 왔다 갔다 한다.
어떤 기억이 떠오르면 그 기억으로 인해 다른 기억이 떠오른다.
분명 시작할 때는 시간순이었는데 말이다.
그 사이 내 몸을 둘러싸고 있는 통은 왔다 갔다 하면서 계속 촬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뇌와 척추가 신경이 서로 잘 전달되는지 보기 위해 척추까지 촬영하고 있었다.
소리 또한 변함없이 불규칙하게 들려온다. " 딱 딱 따악~, 따 따따 딱 따닥~"
일요일 오후의 아버지와의 산책
난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고 또 다른 기억을 해냈다.
수유리로 이사 가기 전 우리는 돈암동에서 살았었다.
내가 태어난 곳도 돈암동이다.
아버진 젊은 시절부터 신문 보는 걸 좋아하셨고, 거기서 인상적인 기사는 스크랩을
하시곤 해서 집에는 그런 스크랩책만 여러 권이 있었다.
그래서 항상 두 개 이상의 신문을 구독하셨다.
신문이 휴간하는 일요일 오후면 아버지는 우리 세 자매를 데리고 큰길로 나가서 구독하지 않는 다른 신문을 사 오셨다.
신문을 사신 후 우리를 데리고 태극당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주셨다.
아이스크림은 차가운 놋쇠 그릇에 담아서 나왔었다.
우리 세 자매는 둥지에 새끼들처럼 아버지가 사 주신 아이스크림을 조잘대며 먹었다.
다 먹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께서는 언니들을 길에 남기고 숨어버리는 장난을 하셨다.
주로 한 명을 남겨두고 숨어서, 홀로 남겨진 언니가 당황해서 아버지를 찾으며 울음이 터지면
'짠'하고 나타나는 놀이였었다.
이 막막한 통속에서 그 시절의 아버지의 유머와 따뜻함이 만들어 낸 그 순간, 그 아이스크림을 먹던 우리 세 자매의 모습이,
나를 견디게 해 주었다.
낯선 곳에서 엄마와 맛본 가락국수와 떫은 감
나는 더 이상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의식을 안 하기로 했다.
내가 조바심을 내도 어차피 그들은 나를 계속 검사를 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조바심은 내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팔이 저려왔다.
손가락도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지만, 나는 마주 잡은 손으로 조심스럽게 천천히 손끝만 만져주었다.
그렇게 돈암동의 시간이 끝나고 수유리의 시간이 오고 있었다.
아마 여섯 살쯤 되었던 거 같다.
어느 날 엄마는 나와 버스를 타고 어떤 집으로 갔다.
작은 마당이 있고, 파란 지붕이 있는 양옥집이었다.
거기서 엄마는 방마다 치수를 재기도 하고 청소도 했다.
며칠 후 돈암동 살던 이웃들과 인사를 하고, 이삿짐을 싸서 엄마가 청소하던 집으로 이사를 왔다.
이사 온 집에서 언니들은 학교를 가고, 아직 학교에 안 다니던 나는 동네 아이들과 친해져서 놀았다.
주변엔 개천이 흘렀다.
그 시절 개천은 깨끗한 물이 흘러서 여름이면 애들은 수영을 했었다.
그렇게 그 동네에 적응이 되었고,
어느 날, 엄마는 나를 데리고 외갓집인 공주에 데리고 가셨다.
서울역 건너편 쪽에서 고속버스를 탔는데 버스 타기 전 가락국수를 사주셨었다.
지금은 가락국수라는 게 없는데 찾아보니 우동을 우리말로 순화한 말이다.
통통한 면발과, 적당히 짭조름하면서도 살짝 달콤하고 따뜻했던 국물맛은 집에서도 먹어보지 못한 맛이었다.
그걸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오랫동안 났고, 그 맛은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공주로 가서 외갓집에 갔었다.
큰 기와집이었고, 외할머니와 외삼촌 그리고 다른 가족들이 많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 외할머니 께서 단 감을 주셨는데 그게 너무 떫었던 기억이 난다.
그 유년 시절의 기억이 '감'하면 진저리 치게 만들어서, 최근에서야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 인가 자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 사이 아버지가 두 언니랑 지냈는데 아버지께서 만든 토스트가 맛있었다고 언니들이 자랑했다. 그 맛이 오랫동안 궁금했지만 먹어보진 못했었다.
왜냐하면 그 시절 아버지들은 절대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라 어릴 때는 한 번도 아버지께서 부엌에 들어간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나의 삶.
낯설었던 수유리와 떫은맛의 감을 다시 먹기 시작했듯이, 나는 지금의 이병과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갈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갑자기 통 안의 스피커에서 내가 괜찮은지 물어봤다.
괜찮다고 하니까 검사가 다 끝났다고 하면서 내 몸이 통 속에서 나왔다.
마치 90년의 긴 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내가 할 수 있던 기억을 모두 한건 아니다.
기억놀이는 내가 통속에 있다는 걸 잊기 위한 수단이었고, 덕분에 잊은 줄 알았던 기억들이 생각이 났다.
만약에 그 기억놀이를 생각 못 했었으면 90분을 견딜 수 있었을까?
아마도 벨을 눌렀을지도 몰랐다.
영원 같은 90분은 나의 몸은 결박하고 있었지만, 생각까지는 막지 못했다.
끝나고 나서 기분은 아주 좋았었다.
그리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다행히 척추 쪽에서는 이상이 발견이 안 됐고, 요즘에는 더 이상 증상이 없는 상태다.
인간은 어떠한 상태도 의지로 견딜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그 안에서의 사소한 움직임의 소중함, 그리고 내 의지의 강인함을 배웠다.
병 자체 보다 병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싸우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을 견디는 힘은 결국 내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