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VP 회고
한비야 책 시리즈를 쌓아두고 보던 언니의 영향이었는지 아니면 여행과 경험에는 절대로 돈을 아끼지 말라던 아버지의 영향이었는지는 몰라도, 어린시절부터 나는 집 없이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사는 삶을 꿈꿔왔었다. 그런 맥락에서 캠핑카는 나에게 집 대신 고민해볼 수 있는 선택지였고, 평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인생의 일부분 어느 시점에서는 캠핑카를 집삼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살고 싶다는 생각, 혹은 아마도 그렇게 살 것이라는 어렴풋한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집 대신 캠핑카에서 살겠다던 그 아이는 어느새 월세와 대출을 걱정하는 어른이 되어버렸고 지옥철에 몸을 싣고 회색빛 사무실에서 9to6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집 대신 캠핑카'라는 꿈이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이룰 하지만 아직은 아닌' 애매한 상태로 계속 내 마음 속 한켠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31번째 생일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루종일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프로덕트에서 조차도 시장 검증 없이 거대하게 기획하고 무리하게 개발하다가 고객에게 외면당하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주의하고 있는데, 나는 내 인생에서 조그마한 테스트나 검증도 없이 너무 무리하게 기획하고 터무니없이 상상하다가 나중에 크게 실망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래, 작게 시작하고, 최소한의 리소스로 검증하자.
이런 나의 생각을 지지하고 응원해주었던 짝궁님이 생일 주간을 맞이하여 시원하게 2박 3일 캠핑카 여행을 선물하겠노라고 말을 해주니, 더 용기가 생겼다.
그렇게 나는 제주도에서 3일간 집 대신 캠핑카에서 살아보는 작은 실험을 하게 되었다.
1. 생각보다 큰 차, 느린 속도, 강한 흔들림!
늘 상상 속에서만 있던 캠핑카를 렌트카 하우스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거, 훨씬 크다...! 포터 트럭 정도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앞머리만 포터 트럭이고 뒤쪽에는 생각보다 거대하고 무거운 것이 달려있었다.
차가 큰 만큼 속도도 엄청 느렸다. 바로 전 주에 아반떼를 운전했던 나는 막상 캠핑카를 직접 운전해보니 생각보다 느린 속도가 매우 답답했다.
뿐만 아니라 캠핑카에 물이 가득 차있게 되면 조금만 흔들려도 그 반동이 매우 크기 때문에 차체가 심하게 흔들려서 굉장히 위험해보였다. 그래서 보통은 캠핑카를 주행할 때는 물을 적게 채우거나 아예 비우고 운행을 하는게 보통이라고 한다.
2. 어려운 주차와 주차 공간 확보 (혼자서는 절대 못할 듯;;)
차가 큰 만큼 주차를 하는 것도 어려웠고, 캠핑카가 들어갈만한 여유로운 주차 공간을 찾는 것은 그것보다 더 어려웠다. 언젠가 혼자서 캠핑카를 끌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거 막상 해보니까 주차부터 절대로 혼자할만한 것이 아니다!
3. 오히려 제한된 자유(?)
캠핑카만 있다면 자유롭게 전 세계 어디든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갈 수 있는 곳이 제한되었다. 캠핑카에 물과 전기를 저장할 수 있지만 지속시간은 하루를 넘기기가 어렵고, 결국 샤워와 화장실, 취사와 전기이용을 해결할 수 있는 캠핑장이나 야영장을 탐색해야만 했다. 캠핑카만 있다면 제주도 어디든 돌아다니며 원하는 곳에 머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이 완전히 깨져버렸다.
4. 아늑하지만, 생각보다 불편하고 답답한 내부
캠핑카가 있다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테이블 한 켠에 노트북을 켜두고 커피 한 잔 하며 여유롭게 하루를 계획하고, 책도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캠핑카 내부에만 있자니 일단 덥고, 생각보다 내부가 답답해서 계속 문열고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보니 뭘 해도 집중이 잘 안되었고 효율도 떨어졌다.
결국 큰 덩치에 비해 생각보다 할 수 있는게 없는 친구라는 것을 알게된 나는 캠핑카를 정준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무한도전 시절 정준하의 이미지가 갑자기 겹쳐보였다)
이미 많은 실망과 고난이 있었지만, 우리는 준하의 장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며 약 72시간의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캠핑카와 함께했던 3일은 99가지가 힘들고 괴로웠지만, 자연과 가장 가까운 곳에 나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다는 그 한 가지 때문에 행복할 수 있었다.
캠핑카는 내 생각보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상, 계속 캠핑카를 고집하지는 않을 것 같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노마드에 대한 꿈을 접은 것은 아니고, 최적의 상태를 계속 고민해볼 것 같다.
이번 여행으로 인한 레슨런은 일단 아래 정도일 것 같다.
1. 캠핑카보다는 SUV에 잠자리정도만 셋팅하여 차박을 하는 것이 훨씬 좋아보인다.
2. 역시 땅에 발붙이고 있는 집은 필요할 것 같다. 따뜻한 물로 샤워와 양치를 하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마음껏 쐴 수 있는....
3. 결론적으로는 땅에 발붙이고 있는 숙소를 두고 1개월 이상의 주기를 두고 거점을 이동하는 형태가 바람직해보인다.
앞으로도 노마드 라이프를 위한 작은 실험은 계속될 것이다. 일단 캠핑카는 리스트에서 삭제완료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