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앞서서 나를 대표하는 것
너무도 익숙한 말, 말머리.
말머리는 콘텐츠 작성자가 보여주고자 하는 내용의 카테고리를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한 단어다. 한 번에 알아차리기 힘든 [미술] [영화] [음악]과 같은 것들이 그 예다. 말머리는 주로 말의 머리, 즉 제목의 맨 앞에서 에서 주 제목을 함축하고 [ ] 대괄호 사이에 위치하여 나름의 존재감을 확보한다.
물론 추상적인 예술 계열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말머리는 유용하게 사용된다. 업무상으로 메일을 보낼 때 작성자는 말머리를 통해 무언가를 [공유]하거나, 일정을 [안내]하고, 궁금한 내용을 [문의]한다. 공포스러운 콘텐츠는 [공포]라고 말머리를 달아 느닷없는 귀신의 출현에 깜놀할 불상사를 방지한다.
이 패턴에 익숙하게 된 사용자는 벽돌 같은 말머리를 맹신하기 때문에, 작은 벽돌이 만들어 낼 큰 건축물을 예상하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말머리 만으로 어떠한 내용을 기대하고, 자신과 맞지 않을 것 같으면 미리 차단한다. 이처럼 말머리는 수많은 사용자와 작성자 사이에 만들어진 약속이기 때문에 누구도 대괄호 안에서 거짓말을 쳐서는 안 된다. 객관성을 유지해야 하므로 70%의 사용자들만 공유할 법한 비밀번호 486 같은 아리까리함이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알아두어야 할 것은, 말머리는 내용을 보좌하기 위한 객관적인 축약에 불과하다. 말머리는 절대 내용을 이길 수 없다.
사실 말머리는 비단 글과 메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말머리는 일반 시민들의 문화 안에 깊게 들어섰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빈번하게 등장하고, TV 프로그램에서는 자막이란 요소로 필수 불가결하게 사용된다. 주절주절 이야기하기보다는 '이 것'의 표현이 더 깔끔하므로 주로 자극적이고 짧은 이야기에 사용된다. 소개팅을 주선해야 하는 시간에, '이 사람은 공부를 굉장히 잘 했고' 가 아닌 [서울대] 홍길동으로 한 사람의 제목을 결정짓고 만다. 사실 말머리와 내용은 같은 관계를 가져야 하는데, 말머리가 내용을 강조해 버리는 부작용 아닌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부작용이 난무하는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소속이라는 카테고리는 말머리로서 강한 힘을 발휘한다. 같은 맥락으로 나는 최근 이슈된 프로그램인 '프로듀스 101'에서 말머리의 힘을 발견했다.
처음에 프로듀스 101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했을 때, 나는 AKB스러운 저 프로그램이 과연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다. 프로그램의 포맷이 너무 불편했고 수드라 계층 배울 때나 썼던 피라미드형 사회구조를 브랜드 아이덴티티에까지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상은 101명의 어린 친구들이었고 소미 빼고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전혀 익숙하지 않은 수많은 연습생이 떼로 등장하여 방긋 웃는데, 내가 국민 프로듀서의 신분으로 얼떨결에 갑질 하고 있는 것 같아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논란 속 프로듀스 101은 결국 최근 가장 핫한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모두가 일본 짝퉁 아니냐고 비난의 목소리를 던졌지만, 현재 많은 시청자들의 마음속엔 으뜸이 연습생이 '픽미'하며 투표를 독려한다. 괴기스럽기까지 했던 이 경쟁 프로그램을 시청자들의 마음속에 soft- landing 하게 이어준 교집합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프로그램에서 101명의 연습생을 첫 등장시킬 때 제작진은 연습생들을 기획사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하였다. 인물의 매력을 보여주기에 앞서, 대중들에게 익숙한 JYP를 등장시켰다. 같은 연습생들끼리 '와 대형 기획사' 하며 놀라는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기획사의 자존심이 달린 그룹전 같은 개인전을 기획한 것이다. 그들은 [기획사]라는 말머리를 씀으로써, 열심히 키워 온 소중한 연습생들을 대중에게 드러내게 했다. 결과적으로 그 방법은 성공했다. 연기자 기획사로 인식되고 있던 판타지오는 알짜 연습생을 많이 보유한 기획사로 대두되었고 주가가 상승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듀스에서 연습생들을 언급할 때 판타지오 최유정, MBK 정채연 등 인물보다 앞서, 인물의 소속을 보여준다. 처음 장기자랑 때도 기획사 별로 공연을 진행했다. 덕분에 아이돌이 있었나? 싶던 기획사들은 시청자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게 되었다.
투표를 할 때도 [말머리] 빨은 적용되었다. 초기 투표 방법은 11표를 뽑아야 했다. 아직까지 모든 연습생들을 품지 않은 시청자들은 자신의 으뜸이 연습생이 속한 기획사의 연습생을 덩달아 뽑았다. 그래도 같은 기획사 안에 있으면 서로 친할 거고 그래야 결과가 더 좋겠지 싶어 기획사 투표가 많이 반영됐다고 한다.
프로듀스로만 예를 들었지만, 말머리의 힘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초기에는 사람들 간의 데이터를 분류하는 정리법 중 하나였지만, '할 건 많고 시간은 없는' 시기인 요즘에는 말머리가 콘텐츠 선택의 기로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요즘에 말머리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앞서 이야기했듯 최대한 객관적으로 내용을 축약해야 한다는 점은 변함없지만, 주객전도의 상황은 경계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