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IR의 한 끗 차이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주서한을 읽어본 적 있는가? 주주서한을 읽고 ‘울림’을 느낀 적이 있는가? 나는 재무제표의 차가운 숫자 뒤에 숨겨진 뜨거운 진심을 버크셔에서 종종 발견한다.
읽어보면 워렌 버핏 여동생의 투자 이야기, 찰리 멍거와 그의 경영 철학, 그리고 회사를 경영하면서 실수 사례들 (어떤 건은 마치 실패한 결혼과도 같았다고 비유한다) 등 정말 가감 없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물론 당연히 중요한 분기별 실적, 수치도 서한 후반부에 다 포함돼 있다.
버크셔는 주주서한을 연례보고서의 일부로 제공하며, 주주서한 아카이브를 별도 제공한다. 이들이 상정하는 편지의 수신인은 아주 구체적이다. 주식을 로또처럼 생각하거나, 핫한 종목으로 단타하고 빠지려는 사람이 아니라 되팔 생각 없이 버크셔에 돈을 넣어두는 사람들, 마치 농장이나 임대용 건물을 사듯 저축의 개념으로 투자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분명히 명시한다.
그리고 이들을 위한 서사와 내러티브, 철학에 대한 내용을 아끼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따로 IR 팀을 두지도 않는다. 좋은 이야기든, 불편한 이야기든 낙관과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IR 담당자나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CEO의 입으로 직접 듣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주서한이 발표되고 나면 온갖 경제 유튜버, 팟캐스터들이 이 서한에 대한 그들의 생각, 코멘트를 올리기 시작한다. 나 같은 투자자 입장에서는 그런 팟캐스트를 듣는 재미가 또 있다.
이렇게 IR팀은 없지만 역설적으로 투자자들과의 소통, 즉 IR이 제일 잘 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정보의 양이 아니라, 정보의 출처와 진정성이 신뢰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물론, 버크셔의 사례는 미국 기업들 중에서도 독특하긴 하지만, 일방향 소통(PR)이 아닌, 양방향 소통(IR)의 정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임에는 분명하다.
아무래도 내 학부 전공이 경영이다 보니 프리랜서 통역사 시절 투자자 라운드테이블, 로드쇼, 스타트업 컨퍼런스 등 금융/경제 분야를 통역할 일이 많았다.
외국계 VC에게 스타트업들이 피칭하는 걸 통역할 일들이 꽤나 있었는데, 통역하는 입장에서도 한국 베이스 회사들의 접근과 타 국가 베이스 회사들의 접근이 확연히 다른 게 느껴졌다. 일단, 굉장히 숫자 위주다. 물론 수치 너무 중요하지만 그걸로만 증명하겠다는 태도는 그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한다.
쉬는 시간마다 벤처 투자자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느낀 게, 디테일이나, 너무 구체적인, 설명하기도 굉장히 까다로운 기술에 주안점을 너무 두고 얘기를 하면 그런 발표를 한 두 개 듣는 게 아닌 사람 입장에선 집중력이 떨어지고 흥미를 잃게 된다.
반면, 기억에 남는 피칭은 비디오 등 영상 매체로 회사의 개괄적인 큰 그림을 보여주고 그들이 꿈꾸는 비전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수치나 기반 기술은 딱 필요한 정도만 하고 포인트는 미래의 비전 공유에 둔 쪽이다. 수많은 기업의 피칭을 통역했지만, 놀랍게도 이런 ‘서사’를 완벽하게 갖춘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피칭 통역이 끝나고 난 후 클라이언트(외국인 벤처투자자)와 눈을 딱 마주쳤는데 둘 다 서로의 눈에서 생기가 도는 걸 파악하고 미소 지었던 게 기억이 난다.
이 경험은 비상장 기업의 피칭이었지만, 상장 기업의 IR 역시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미국 대기업 상장사들이 IR을 하는 방식을 봐도 정확히 이런 케이스다. 공식과 실적자료는 필수재로 기능하고, 신뢰 구축을 위해선 왜, 어떻게, 무엇을 하기로 선택했는지 등 서사 구축에 힘쓴다. 이 과정에서 대중 매체 노출도 잦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의 깐부치킨 회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실 이것도 외국인 투자자와의 소통을 위한 전략적 IR의 한 종류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성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우리가 우리보다 더욱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일본만 봐도 그들의 IR덱엔 브랜딩적 요소들이 자리하고 있고 그걸 보여주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은 어떨까?
한국에서 IR 베스트 프랙티스로 꼽히는 기업이 LG전자다.
먼저, 매 분기 시행하는 실적발표 자료의 경우 LG 전자는 질의응답 내용이 포함된 오디오 파일과 설명자료 파일을 국/영문 모두 제공한다.
또한 홈페이지를 통해 IR 관련 문의를 제출할 수 있는 창구(contact IR)를 마련해 둬서 제품 관련 문의, 사이트 관련 문의, 일반 문의 등 카테고리별로 분류하여 담당자와 효율적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접근은 굉장히 환영할 만하다. 왜냐하면, 아직 많은 한국 기업들이 IR 담당부서와의 소통 창구조차 마련해 놓지 않은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한 브랜딩, 서사 구축 부문은 약하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보고 소비할 만한 컨텐츠 자체가 별로 없다. PER, PBR 같은 지표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것 만으로 인간의 심리는 움직이지 않는다. 더 다양한 서사에, 접근가능한 정보가 포함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보수적인 한국사회 성격상 IR덱에는 그들이 꿈꾸는 환경과 미래에 대한 비전보다는 숫자 위주의 퍼포먼스 나열에 훨씬 더 힘을 준 장표가 가득하다.
기업의 태도뿐만 아니라, 제도적인 환경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일반적인 한국 상장사들의 IR 구조를 보면 DART 기반 국문 공시에 영문은 보조수단의 성격을 띤다. 또한 영문 DART 자체에서 번역의 불일치 가능성을 고지하며 필수가 아닌 자발적 절차이고, 법적 효력이 제한되어 있다고 명시한다.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는 이 부분이 리스크로 작용한다.
다행인 점은 정부정책의 일환으로 2028년까지 영문공시가 의무화 및 확대된다는 것이다. 코스피 전체 상장사에 대해 영문 공시를 의무화하고 공시항목도 주요국 상황, 기업 부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주요 사항 보고서 등 법정공시로 확대하는 방안이 현재 검토 중이다. 제대로 시행만 되면 IR 경쟁력 향상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한국의 상장사들도 ‘연례 주주서한(CEO letter)’을 더 전략자산으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처음부터 새로운 소통 채널을 기획하고 만드는 것도 여러 품이 드는 일이고 어쨌든 IR은 Top-down 구조가 제일 효과적이니 주주서한은 좋은 출발점이 될 거다.
앞서 언급한 LG전자의 사례는 다시 한번 참고할 만하다. 분기별 실적발표의 Q&A 내용 영문버전(혹은 통역한 내용)을 스크립트화해서 올려 두는 것은 그 자체로 소통임과 동시에 정기적으로 잘 운영하면, 시장은 불확실성 프리미엄을 낮추는 쪽으로 반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구조 상 당장의 급진적인 개선은 어렵다는 것은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코스피 5000+ 시대는 단순히 실적의 합으로 오지 않는다. 기업들이 숫자의 감옥에서 벗어나, 매력적인 스토리텔러가 될 때 비로소 ‘코리아 디스카운트’라는 긴 겨울이 끝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