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엘 찰텐, 라구나 또레 가는 길
내가 꿈꾸는 나라..!!
만년설과 빙하에 덮인 산하.. 이곳은 남미 아르헨티나 지역의 파타고니아 엘 찰텐의 라구나 또레의 피츠로이 산군이다. 어느 날 하니와 나는 마음먹고 라구나 또레를 다녀오고 싶었다. 우리가 묵고 있었던 숙소로부터 그다지 먼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초행길의 답사는 적지 않은 인내를 요구했다. 당시 라구나 또레로 가는 오솔길에는 우기(가을)가 찾아들며 떨기나무와 고목이 알록달록 물들기 시작했다. 때 하나 묻지 않은 청정지역.. 이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천국을 경험하게 된다.
서기 2021년 11월 7일 정오경,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남미 파타고니아의 명소 라구나 또레(Laguna torre)의 여행 사진첩을 열어놓고 김회에 젖어드는 것이다. 지난 여정 끄트머리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발길을 옮기고 있는 이곳은 까마득히 오래전 바닷속이었다. 장차 만나게 될 그 산중에는 온통 화석의 무덤이었다. 맑은 물이 졸졸거리며 흐르는 작은 골짜기의 납작한 돌을 들출 때마다 화석이 발견되었으며 암모나이트 화석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그곳은 바람의 땅이었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은 당장이라도 사람을 날려버릴 태세였다.
서기 2021년 까치설날 아침에 사진첩을 열어놓고 보니 당시의 기억이 오롯이 사진에 묻어나는 것이다. 이날 라구나 또레로 가는 길에 빗방울이 후드득거렸다.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가끔씩 굵은 빗방울이 라구나 또레의 먹구름으로부터 날아다니는 것이다. 이날 우리는 우비가 없었으므로 즈음이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목적지를 코 앞에 두고 되물릴 수 없어서 하니와 나는 진군을 계속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한 순간이었다. 물론 무탈하게 숙소로 돌아왔지만 고맙게도 숙소 가까운 곳에 도착했을 때 보슬비가 내렸을 뿐이다. 비록 옷은 젖었지만 숙소에서 말리는 그만 아닌가.
까치설날 아침에 바람의 땅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과 시간.. 둘 다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면서 다녀온 여행지의 기억을 통해 우리가 무사한 이유 등을 생각하며.. 이 또한 보이지 않는 조상님의 음덕에 힘입은 게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결과는 반드시 어떤 과정을 거치게 마련인데 무작정 떠난 여행지에서 숙소를 구한 일은 물론, 엘 찰텐 곳곳을 누비며 다닐 때에도 무탈한 것에 대해서도 누군가의 보살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라구나 또레로 이어지는 숲길 곁에는 나목들이 춤을 추고 있었는데 바람이 할퀴고 간 자리가 선명했다. 바람이 얼마나 성깔지게 할퀴었는지.. 어떤 나무들은 그들이 잘 갖추어 입은 옷 대부분이 뜯겨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바람이 그린 풍경화였으며 걸작품이었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절대 그저 되는 법이 없다. 한 점의 미술 작품을 그릴 때 쏟는 열정은 아무것도 아닌 셈이랄까..
그 산중에는 신의 그림자가 가득했다. 신의 그림자는 바람과 시간처럼 형체가 없다. 다만, 당신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아름다운 형체로 남기고 있을 뿐이다. 하니와 나는 그 전람회장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들이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다시 우리 설날을 코 앞에 두고 있는 것이다. 돌아보면 기적 같은 일들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 삶에 음덕을 끼친 이웃과 조상님께 감사드리는 아침이다.
세월 참 빠르다. 서기 2021년 2월 까치설날에 만났던 라구나 또레 가는 길의 여행 사진첩을 11월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코로나를 피해 한국에 가 있던 하니가 금년 8월 11일에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는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줄 고도이다. 이곳에 그녀의 그림 선생님 루이지(Luigi Lanotte)가 살고 있으며, 그녀는 일주일에 세 번씩 그림 수업을 하고 있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가 피렌체서 살 때 우연히 루이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루이지의 화풍에 매료되었다. 그동안 유화와 수채화를 그려왔던 그녀에게 루이지는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빛의 마술사 램브란트(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를 좋아하는 루이지의 화풍은 초기에는 극사실주의적인 요소가 강했다. 그러나 현재 당신의 화풍은 그만의 독특한 붓질이 가해지면서 매우 환상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작품을 그리고 있다.
그의 작품을 곁에서 보고 있노라면 달인의 경지 이상의 창조적인 작품이 거의 매일 세상에 등장하고 있다.
점과 점이 이어져 선이 되고 선과 선이 다시 이어지면서 면을 만들고.. 그가 창조해낸 면들은 다시 공간으로 거듭나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녀와 함께 라구나 또레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안개비가 흩날렸다.
언제부터인가 나목으로 변한 나뭇가지에는 이끼들이 안개비의 작은 방울을 머금고 있다.
건기를 지나는 동안 잎사귀를 내놓은 나무들은 먼 길을 떠날 차비를 하고 있다.
그들도 한 때는 이 산중의 주인이었지.. 바람의 땅..
저 멀리 태초로부터 이어진 빙하가 흐르는 곳. 그 아래 라구나 또레(Laguna Torre)가 있다. 라구나란 (큰) 호수보다 작은 웅덩이란 뜻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라구나 또레는 호수나 다름없었다. 오래전 빙하기와 간빙기 등을 거치면서 빙하가 만들어낸 작은 호수이자 빙하가 흐르면서 거대한 둑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라구나 또레로 가는 길에서 만난 만년설을 머리에 인 산군들의 모습은 조물주가 빚어놓은 거대한 탑(Torre)의 모습이다. 동태평양의 습한 공기가 피츠로이(Fita roy) 산군을 지나면서 구름으로 바뀌고 구름은 다시 눈이 되어 빙하를 만드는 곳.
서기 2021년 11월 7일 일요일 저녁나절(현지시각)에 열어본 파타고니아 사진첩 속에는 맑고 고우며 향기로운 풍경들이 가득 하다.
한 때 우리는 이곳에 머리를 뉘고 싶었다.
때 하나 묻지 않은 청정지역.. 그곳에 머리를 뉘면 신의 그림자를 이불 삼아 영면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나라를 가슴에 품고 싶었다. 그래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가 죽으면 이곳에 묻어달라"라고 했었지..
그 소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림 수업이 바를레타에서 이어지고 있고 우리는 잠시 파타고니아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때 등장한 조물주의 또 다른 작품.. 그곳이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돌로미티였다. 그리고 이틀 전 그녀가 말했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기록은 언제쯤 완성될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땅.. 사진첩을 열어보니 맑고 고우며 향기로운 나라의 풍경이 빼곡하다. 저 멀리 라구나 또레로 흐르는 빙하가 느낌표를 연출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나라.. <계속>
il Nostro viaggio in Sudamerica_LAGUNA TORRE PATAGONIA ARGENTINA
il 07 Novembre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