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안데스여 잘 있느냐
우리네 삶에 연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월 참 빠르다. 우리는 그때 길 위에 있었지.. 꿈같은 일이었다. 모든 것 다 팽개치고 1년 동안 파타고니아 여행을 하고 싶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호주 시드니까지 직항으로 그리고 다시 뉴질랜드의 오클랜드로.. 다시 남미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로 부지런히 날았다. 그런 다음 다시 남반구의 봄을 찾아 급히 산티아고에서 뿌에르또 몬뜨까지.. 그 먼길을 거의 쉬지 않고 다녔다. 미쳤어.. 다시금 생각해 봐도 미친 짓이었다. 우리는 길 위에 있었자. 안 청춘의 배낭여행.. 그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우리는 마침내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은 아르헨티나 엘 찰텐(EL CHALTEN)의 피츠 로이(MONTE FITZ ROY)를 만났다. 피츠로이 산군을 만난 이유는 다시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덧 17년이 다가오고 있다.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었던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는 죽음을 떠올렸던 아름다운 장소였다. 언제인가 맞이하게 될 먼 길을 피츠로이 산군으로 정한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가 죽으면 이곳에 뼈를 뿌려달라"라고 말했던 여행지.. 바람의 땅은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큰 울림을 만들고 있었다.
파타고니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깔레따 또르뗄(CALETA TORTEL).. 코크랑에서 먼짓길을 따라 이 세상 끝까지 가 볼 것이라며 갈 데까지 간 곳. 그곳은 한 때 빙하가 덮여있었던 피오르드(fjord).. 리오 코크랑(RIO COCHRANE) 강 하류와 바다가 맞닿은 곳. 그 바닷가에 바람이 불고 있었다.
파타고니아 일주 여행을 마치고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우리는 마음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두 번째 만난 피츠로이는 물론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한 파타고니아를 정리 해야 했다. 그대로 한국에 돌아가면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했다. 서울 강남 한복판을 배화하거나 친구들을 만나는 일.. 평생 해 왔던 일을 다시 반복해야 할 게 분명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우리는 산티아고로 돌아오자마자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칠레에 살면서 파타고니아 곳곳을 다시 여행하고 싶었다. 그래서 경로를 통해 장기체류허가증을 받아내고 어설픈 살림집을 산티아고에 얻었다. 하루하루가 꿈같은 일의 연속이었다. 그때 만난 소일거리가 산행이었으며 파타고니아 여행 중에 줄곧 우리를 따라다닌 안데스가 손짓을 했다. 그곳은 산티아고 시내 중심에서 30분이면 갈 수 있는 안데스 자락이었다.
그곳에 세로 뽀쵸코(CERRO POCHOCO, 1882m)라는 산이 있었다. 세로 뽀쵸코.. 멀리서 볼 때 웅장한 느낌을 받은 안데스가 곁을 내어준 몇 안 되는 산이라고나 할까.. 산티아고 시민들이 자주 찾는 이곳은 우리로 말하자면 '동네 뒷산'인 셈이다. 그런데 동네 뒷산으로 막상 올라가 보니 카메라가 얼마나 거추장스러웠는지 모를 정도였다. 바디와 줌렌즈와 보조 렌즈와 도시락까지 챙기니 배낭이 묵직했다.
산기슭에서 고도를 높이자마자 건기를 버티고 선 커다란 선인장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언제 비가 왔는지도 모를 오솔길은 더 마를 곳도 없어 보였다. 발 걸음을 떼자마자 작은 돌멩이들이 발바닥 밑을 굴러다녔다.
고도를 좀 더 올리자 우리나라 동네 뒷산에서 만날 수 없는 수목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건기의 안데스 풍경이자 만추에 접어든 안데스의 민낯이 오솔길 옆에서 도열하고 있는 것이다. 선인장이 숲을 이루고 있는 산중에서 떨기나무들이 옷을 갈아입고 먼 길을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대도시에서 가까운 동네 뒷산(?)이 화장을 고치고 돌아서면서 나의 뷰파인더를 빤히 들여다보았지. 나도 안데스의 요정들을 빤히 들여다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니가 방금 이 길을 먼저 지나쳤다.
파타고니아 여행을 통해 익숙했던 장면들은 온 데 간데없고 우기를 기다리는 수목들.. 우리는 하필이면 등산을 피해야 할 시기에 산을 오른 것이다. 대체로 이곳은 연중 건조한 지역(1월~3월)이어서 애를 먹은 것이다. 겨울과 이른 봄이 제철이었지만 초행길에 그런 정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만난 숲의 요정들.. 많이도 야윈 얼굴이었다.
그리고 더 마를 것도 없어 보이던 숲이 마른 잎에 물감을 칠하고 있었다.
조물주는 어디를 가나 신의 그림자인 아름다움을 내놓는 법이다. 흔치 않은 색감..
발밑에 작은 돌멩이들이 구르며 미끄덩 거려도 포토그래퍼의 본능은 어쩔 수 없다. 산행과 더불어 반드시 챙겨 와야 할 기록들이 차곡차곡 하나둘씩 쌓이며 세로 뽀쵸코를 만끽하게 되는 것이다.
청춘은 가고 안청춘이 시작된 것일까.. 파타고니아의 붉은 꽃(fiori rossi al parco nazionale nella Patagonia) 조차 빛을 잃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장기를 잃은 민낯에도 신의 그림자가 어른 거린다. 고도를 점점 더 높이자 발아래 계곡이 까마득하다.
서기 2021년 12월 2일 저녁나절(현지시각), 우리가 살고 있는 이탈리아 남부 뿔리아 주 바를레타에서 파타고니아 여행 사진첩을 열어보고 있다. 그곳에는 우리가 다녀온 여정들이 빼곡히 기록되어있었다. 여행 정보 몇 가지만 챙겨 떠났던 곳. 다시금 뒤를 돌아보니 10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엊그제 일 같다.
사는 일은 연습이 없다. 늘 실전이다. 되물릴 수도 없다. 전진 기어만 있고 후진 기어가 없는 타임머신이다.
꽤나 긴 시간을 보내 놓고 복기를 해 보니 아쉬운 점들이 수두룩했다.
이런 걸 후회라고 하나.. 반성이라고 해야 하나.. 당시에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 것 같아도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걸.." 혹은 "그땐 왜 그랬지.."싶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친다.
그러나 다 부질없는 생각들.. 눈 덮인 안데스는 말이 없고 우리의 흔적만 사진첩에 남아있다.
고도를 점점 더 높이는 동안 우리가 전혀 몰랐던 세상이 발아래로 펼쳐지고 안데스의 메마른 숲이 다가선다.
저만치 앞서가는 사람을 줌으로 확대해 보니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이다.
초행길의 안데스 쎄로 뽀쵸코.. 황량한 그 산에 우기가 찾아오면 확 달라진 풍경이 우리를 맞이했을 것. 하지만 우리의 헛헛한 마음을 달래줄 풍경은 사진첩 속에 오롯이 남아서 손짓을 한다.
다시 한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쎄로 뽀쵸코 정상에 다시 서 보고 싶다.
파타고니아 여행을 마치고 다시 먼 길을 떠나고 싶을 때 우리를 품어준 메마른 산..
그 산은 또 얼마나 사람들이 그리웠을까.. 내 사랑 우리 사랑 안데스여 잘 지내고 있느냐..?!
il Nostro viaggio in Sudamerica_Cerro Pochoco, Santiago CILE
Il Primo Dicembre 2021, La Disfida di Barletta in Pug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