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톤먼트Atonement> 조 라이트, 2007
본 게시글은 영화의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를 원작으로 조 라이트가 감독, 키이라 나이틀리(세실리아 탤리스)와 제임스 맥어보이(로비 터너), 시얼샤 로넌(브라이오니 탤리스)이 출연한 영화이다. 제80회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 음악상, 최우수 작품상, 제61회 영국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미술상, 제65회 골든 글로브상 영화 드라마 부문 최우수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문학을 소재로 한 영화로 호평받으며 한국 공중파 방송에서도 수차례 재방영되고 있다.
<어톤먼트>에 대한 비평, 연구는 대부분 '브라이오니의 속죄'를 주제로 다룬다. 이 영화는 연출 면에서도 상당한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 글에서는 영화의 미장센(연출)과 또 다른 영화 속 반전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줄거리
1935년 영국. 귀족 가문의 장녀 세실리아와 집사의 아들 로비는 헷갈리는 감정 속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그러나 로비는 장난 삼아 쓴 외설 편지를 잘못 보내는데, 그 편지를 읽은 세실리아의 동생 브라이오니는 그를 치한으로 오해한다. 그리고 그날 밤, 공교롭게도 브라이오니의 사촌 롤라는 누군가에게 강간당하고, 그 상황을 목격한 브라이오니는 형사에게 로비가 범인이라 진술한다. 그 시각 실종되었던 롤라의 쌍둥이 동생들을 찾으러 갔던 로비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포되고 만다. 의대 입학과 세실리아와의 연애를 비롯한 그의 인생 모든 게 끝나는 순간이었다.
몇 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로비는 군인, 세실리아는 간호사가 되었다. 병원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들은 덩케르크 해변 별장에서 재회를 약속하며 또다시 헤어지게 된다.
브라이오니 역시 그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대학을 포기하고 간호사가 된다. 틈틈이 소설을 쓰며 다친 군인들을 간호하는 나날을 보내다 초콜릿 사업으로 성공한 기업가 폴 마샬이 롤라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한 브라이오니는 예전 그 사건의 밤, 롤라를 강간한 범인이 폴 마샬이었음을 떠올리지만, 진실을 함구한다.
그리고 수소문하여 알아낸 세실리아의 집으로 찾아가 그날의 진실을 털어놓으며 용서를 구한다. 그러던 중 로비가 옆방에서 나와 "왜 브라이오니가 여기 있냐"라고 하며, "지금이라도 변명도, 미화도 하지 말고 진실만을 털어놓으라"며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것을 브라이오니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폴은 피해자 롤라와 결혼했고, 롤라는 남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리 없어 자연스레 폴은 면죄된 셈이었다.
그리고 영화는 갑자기 자신의 21번째 작품 <속죄 Atonement>를 인터뷰하는 노년의 브라이오니를 보여준다. 자신의 마지막 소설 <속죄>는 변명도, 미화도 없이 쓴 자전적인 소설이라 인터뷰하며, 사실 세실리아를 찾아간 적 없으며 세실리아와 로비는 재회하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독자들이 바라는 결말은 그런 암담한 진실이 아닐 것이기에 소설 속에서나마 둘이 재회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창작함으로써 자신이 그 둘에게 행복을 선사한 것이라 이야기한다.
영화 분석
세실리아와 로비의 비극은 브라이오니의 오해에서 비롯된다. "이해하지 못한 것을 보며 이해했다고 생각한" 브라이오니의 시선이 카메라 움직임과 긴박한 사운드로 표현되었다.
오랜만에 집에 오는 오빠를 맞이하기 위해 사촌들과 연극을 준비하던 브라이오니는 창가 너머 분수에서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를 목격한다. 세실리아가 옷을 벗더니 분수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브라이오니는 보면 안 될 것을 본 듯 놀라며 초조해한다.
하지만 곧이어 세실리아와 로비의 시선에서 그 사건을 다시 보여주는데, 그저 로비가 실수로 부러뜨린 꽃병 조각이 분수대에 빠져 세실리아가 성난 얼굴로 겉옷을 벗어던지고 분수에 들어가 그 조각을 찾은 것뿐이었다. 물론 이 사건은 세실리아와 로비가 서로에 대한 호감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지만 말이다.
로비는 꽃병을 망가뜨린 일에 대해 세실리아에게 사과 편지 문구를 고민하며, 사심과 장난 섞인 외설을 쓴다. 그 편지를 읽은 브라이오니는 앞서 목격한 상황과 편지 내용으로 로비를 치한으로 오해하고 만다. 브라이오니 역시 로비를 내심 짝사랑했던 터라 그 충격은 더 크게 다가온 듯하다.
그리고 서재에서 로비가 세실리아를 덮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다. 이때 브라이오니의 시점은 마치 서스펜스 장르처럼 긴장감이 고조되는 사운드와 카메라 움직임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당사자인 세실리아와 로비의 시점에서 그 일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스킨십을 나누는 로맨틱한 사건일 뿐이었다.
세실리아와 로비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헷갈려할 때,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보통 영화에서 거울에 비친 모습은 내면을 돌아보거나, 깊은 사고에 빠지는 것을 뜻한다. 기술적으로는 인물과 거울에 비친 배경을 함께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계속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서로에 대한 감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브라이오니가 간호사로 지내며 자신을 돌아보는 듯한 장면, 노년이 되어 인터뷰를 앞두고 옛날 일을 회상하는 장면에서도 거울과 창가에 비친 얼굴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담배와 초콜릿이 유독 두드러진다. 세실리아는 늘 담배를 물고 있다. 1930년대 영국 여성에게 담배란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세련된 신여성을 상징했다.
세실리아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고용인의 아들인 로비를 사랑하고, 집을 뛰쳐나와 간호사의 삶을 택하며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여성이다. 부모님이 외출 금지를 시키면 (심지어 날씨가 더워지면 헤퍼지기 마련이라는 이유였다) 순응했었던 그녀의 어머니와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 외에도 병원 식당, 기숙사 등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면에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으며, 간호사가 된 브라이오니에게 자신은 군인과 자유연애를 할 거라 이야기하는 동료 간호사 역시 담배를 물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초콜릿은 새로운 기호식품이자 유망 산업이었다. 달콤한 초콜릿은 아이들 간식으로, 알코올이 들어간 칵테일로 남녀노소 즐기던 간식이었으며 군인 장정들 역시 좋아했다. 세실리아와 브라이오니의 오빠가 데려온 친구 폴 마샬은 초콜릿을 주력으로 하는 사업가이다. 폴은 롤라에게 초콜릿을 베어 물어보라며 건네고, 강간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마음이 불안정한 롤라에게 초콜릿은 달콤한 유혹이었다.
영화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사건에는 늘 물이 등장한다. 특히 세실리아의 수중 장면을 촬영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브라이오니가 세실리아와 로비의 관계를 목격했을 때, 로비가 세실리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확인할 때, 롤라가 폴에게 강간당했을 때, 브라이오니가 로비를 짝사랑했을 때 등. 그때마다 인물들은 물에 빠지거나, 얼굴 위로 물 그림자가 드리운다. 심지어 세실리아는 지하의 수도관이 터져 익사하고, 로비는 덩케르크 해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영화에서 물은 감정의 동요를 표현하는 듯하다. 그리고 담는 용기에 따라 다변하는 성질처럼 영화 속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서양에서 '신발'은 신분, 처지를 나타낸다. 폴과 롤라의 첫 대면에서 롤라는 폴의 구두가 마음에 든다며 칭찬한다. 깨끗하고 세련된 구두는 그가 유망한 신흥 사업가임을 보여준다.
로비가 그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구두가 등장한다. 명문 의대 입학 예정인 앞날이 창창한 로비는 양복과 함께 신을 구두를 윤이 나게 닦고 있다.
몇 년 뒤, 군인이 된 로비는 세실리아와 재회한 것도 잠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리고 무리에서 낙오되어 동료 군인들과 덩케르크 해변까지 걸어가게 된다. 도중 한 동료는 "난 군화가 싫어!"라며 신고 있던 군화를 집어던지는데, 이는 마치 적군의 공격을 피하며, 자신의 군대를 만날 때까지 끊임없이 걸어가야만 하는 처지가 싫다는 듯이 들린다.
수많은 영국군이 발 묶인 덩케르크 해변에서 로비는, 어머니가 군화를 벗고 한 시름 놓으라고 위로해주는 꿈을 꾼다. 로비는 그곳에서 결국 발의 상처로 인한 패혈증으로 사망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이 덩케르크라는 지역에 고립되는 사건이 있었다. 영국이 몇 차례 선박을 보냈지만 독일군이 덩케르크 해변과 선박에 폭격을 퍼붓는 바람에 군인들은 어쩔 수 없이 그곳에 머물러야만 했다. 이 사건을 다룬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2017)가 있다.
<어톤먼트>에서도 덩케르크 고립 상황이 잘 드러난다. 수시로 쏟아지는 폭격을 견디며 구조선을 기다리던 군인들은 나름대로의 자기 위안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폭격 속에 고립된 덩케르크의 상황은 누명으로 인생이 망가진 로비의 참담한 심경과 비슷하다. 로비는 이곳의 한 폐건물에 들어가 벽에 비치는 로맨스 영화를 보며 괴로워하는데, 이때 배경으로 상영된 영화는 마르셀 까르네의 <안개낀 부두>(1938)이다. 탈영병 장이 부두에서 만난 넬리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으로, 이 영화 역시 주인공의 사랑은 실패로 끝난다. <안개낀 부두>는 로비와 세실리아가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의 복선이다.
영화 후반부에서 노인이 된 브라이오니가 성공한 소설가로 인터뷰하는 장면이 등장하며, 이 영화 속 일부 사건은 브라이오니의 소설 내용이었다는 게 밝혀진다. 성인이 된 브라이오니는 사실 세실리아를 찾아간 적이 없으며, 세실리아와 로비는 재회하지 못한 채 세실리아는 폭격을 피해 머물던 지하도의 수도관이 터져 익사하고, 로비는 패혈증으로 덩케르크에서 사망했다고 이야기한다.
세실리아의 집을 찾아간 브라이오니에게 로비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라며 다그친 사건은 모두 소설 속 허구이며, 더 나아가 폴 마샬과 롤라의 결혼도, 그 이전에 세실리아와 로비가 재회한 사건마저 허구일 수 있다(그 둘은 몇 년 만에 우연히 재회한 것치고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모습이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덩케르크에서 로비를 보살펴주던 동료 군인 역시 브라이오니가 로비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만든 허구의 인물일 것이다.
덩케르크에 고립된 군인들이 좌절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단편적인 감정 역시 속죄에 대한 브라이오니의 속내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브라이오니가 간호사로서 발을 다친 군인 환자를 옮기는 장면을 보여준 것 역시 로비가 패혈증으로 사망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장치라 생각된다.
브라이오니는 소설 속 로비의 입을 빌려 자신을 다그치고, 자신의 소설에서나마 세실리아와 로비를 재회시켜 행복하게 그림으로써 자신은 속죄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영화 속에서 브라이오니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때, 성인이 되어 (소설 속에서) 세실리아를 찾아가 로비에게 질타받으며 창가를 내다볼 때, 인터뷰를 앞두고 생각에 잠길 때 모두 무표정의 옆모습으로 그려진다.
인터뷰 전에 신경안정제를 삼키며 생각에 빠지는 모습으로 브라이오니는 스스로 속죄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브라이오니의 속죄는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영화 속에는 또 다른 시각에서 볼 만한 반전이 숨어 있다. 많은 문서에서 롤라와 폴 마샬의 관계를 훗날 결혼한 강간범과 피해자, 혹은 사건의 증폭제 정도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지인들과 영화를 다시 보며 그 둘의 관계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라이오니의 사촌 롤라는 부모님의 불륜과 이혼, 말 안 듣는 쌍둥이 동생들 때문에 감정이 예민해진 십 대 중반의 소녀이다. 감정이 불안정하며, 하루에도 몇 번이고 우울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폴 마샬은 손님방으로 향하던 중 롤라와 쌍둥이 동생을 보고, 롤라에게 바지가 마음에 든다고 말을 걸며 달콤한 초콜릿을 건넨다. 롤라 역시 폴을 처음 본 순간부터 몸을 베베 꼬거나, 저녁 식사 자리에 드레스를 입고 립스틱을 바르고 나타나는 등 그를 의식하는 듯한 모습이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브라이오니는 롤라가 낮에 쌍둥이에게 맞아 생겼다고 했던 그녀의 손목 상처를 보여주는데, 폴 마샬 역시 쌍둥이들을 떼어놓느라 자신도 상처가 생겼다고 이야기한다. 이때 당황하는 롤라의 모습과 방금 전까지 로비와 키스했던 세실리아의 입술에 상처가 났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폴과 롤라의 상처 역시 비슷한 원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종된 쌍둥이를 찾으러 모두가 부산 떨던 그날 밤, 풀숲에서 롤라를 범하던 폴 마샬은 브라이오니에게 발각되자 도망친다. 롤라는 눈물을 흘리며 브라이오니에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한다. 많은 성범죄 피해자가 자신의 잘못이 아니어도, 성범죄에 대한 기존 인식 때문에, 피해자가 된 것을 죄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롤라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브라이오니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울음을 터뜨린 것으로 보인다.
브라이오니 역시 혼란스러운 와중에 범인을 로비로 착각한 것인지, 무고한 로비에게 누명을 씌울 심산이었는지 롤라에게 로비의 짓이냐고 묻자, 롤라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이내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훗날, 폴과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한 브라이오니와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한다.
만약 롤라도 자신을 덮친 게 폴 마샬이란 걸 알고 있었다면, 저녁 식사 전에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리고 진실을 묻어버린 채 초콜릿 사업으로 성공한 폴 마샬과 결혼한 게 (브라이오니의 소설 속 허구가 아닌) 사실이라면 이 영화의 또 다른 반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롤라 역시 무고한 로비가 체포되는 걸 방관했으며, 성공한 사업가 폴과 결혼하여 부와 명예를 누리기 위해 끝까지 로비의 무죄를 입증하지 않은 셈이다.